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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맹산(盲山)에서 현산(現山)으로, 맹정(盲井)에서 현정(現井)으로

 


블라인드 마운틴 (2011)

Blind Mountain 
7.7
감독
이양
출연
황로
정보
드라마 | 중국 | 102 분 | 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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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체제를 건설할 때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 정책 사이의 조화와 혼합을 추구한다. 신자유주의가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신자유주의만 밀어붙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으며, 복지국가가 아무리 대안으로 떠올라도 복지국가적인 이념과 정책만을 하나부터 열까지 밀어붙이는 나라 역시 어디에도 없다. 이는 우리가 두 가지 가치 각각의 장점이 하나의 체제 안에서 동시에 살아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이념과 복지국가 정책을 혼합하면서 자유 경쟁의 효율성과 사회적 재분배의 형평성이 동시에 발현되길 원한다.


하지만 두 가지의 혼합이, 각각의 장점이 살아나는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단점이 살아나는 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흔히 과거의 관습이나 풍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이념과 가치가 유입되었을 때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 한국의 회사원들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의 회사원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유교적인 사내 문화에 얽매이는 동시에, 엄청난 경쟁이라는 서구식 기업관에도 얽매여 있다.


원래 사회주의 국가였다가 자본주의적 가치들과 서구식 이념을 수용한 중국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중국 사회의 병폐들은 유교적 전통, 사회주의 의 관습, 자본주의 가치관 이 세 가지가 얽히고 얽혀서 발생한다. 리양 감독의 영화 <맹산>과 <맹정>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 <맹산>은 대학생 바이 수에메이가 농촌으로 팔려나가는 이야기이다. 수에메이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서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려다가 한 농촌의 농부 후앙 데구이 집으로 팔려가고 만다. 대학생이 비싼 돈을 들여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서 쉽게 돈을 버는 일에 빠져드는 일은 한국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대학생을 노린 다단계가 횡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농촌에서 이런 식으로 여자 대학생을 인신매매하여 집안의 대를 잇는 이유는 여성들이 도시로 빠져 나가 농촌 남성들이 결혼을 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납치만 안 했지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농촌 총각들은 결혼할 여성이 없어서 동남아시아에서 배우자를 구한다.


이렇게 대학생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여기저기 돈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현상, 농촌에 여자가 없어서 납치를 하지 않으면 배우자를 구할 수 없는 현실은 급격한 개혁개방과 자본주의 도입의 폐해라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선부론’을 내세웠다. 일단 먼저 누군가 부자가 되고, 그 부를 나중에 나누자는 것이다. 이 ‘선부’에서 소외된 이들은 가난과 실업에 시달려야 했다. 대학생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국가가 일자리를 정해주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농촌 사내들이 결혼할 여성이 없다는 현실 역시 농촌을 혁명의 근거지로 생각했던, 인민공사를 추진했던 마오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실업률 28%, ‘실질적’ 실업인구 1억 7천만 명. 이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대학생마저 일자리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 기술직이나 단순 노동 밖에 할 줄 모르는 이들은 더더욱 일자리를 찾기 힘들 것이다. 영화 <맹정>에서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16세 소년 펭밍에게 다른 어른들은 “10일을 기다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맹정>의 주인공 송진밍과 탕 챠오양이 젊은이들을 속여 죽일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송진밍, 탕 챠오양, 펭밍이 취직한 광산의 사장은 “일하기 싫으면 말아. 일할 사람은 많아.”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정말 ‘일할 사람’은 많다.


자본주의와 개혁개방의 또 다른 병폐는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이다. <맹산>에서는 인신매매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농촌 마을의 모두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맹정>에서도 송진밍과 탕 챠오양은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이를 광산 사고로 위장해 광산 사장에게 보상금을 받는다. 광산 사장 역시 사람이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라곤 얼마에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것뿐이다. 사람 목숨이 3만 위안으로 거래된다.


유교적 가치들은 이러한 중국 사회의 병폐와 병리현상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맹산>에 등장하는 농촌 마을 사람들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인신매매를 서슴지 않는다. 납치당한 여대생들은 애 낳는 기계과 일 하는 도구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다. <맹정>에서 송진밍이 살인을 저지르는 명분은 ‘자식 교육’이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그는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관습은 이 병리현상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병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강력한 공권력과 국가의 개입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관습들은 이러한 해결방식을 가로막고 있다. 단순히 관료들이 뇌물을 받고 뒤를 봐주는 부패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경찰력과 행정력은 마치 옛날 중국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 전역을 통제하지 못하며, 작은 행정 단위의 마을이나 촌락에는 공권력의 힘보다 촌장의 힘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 촌장이 당의 지지를 받으며 촌락을 좌지우지하던 사회주의 시절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유교적 관습의 영향이기도 하다. 영화 <귀주 이야기>가 잘 묘사했듯이 법 같은 공식적 절차가 아니라 촌장의 중재, 당사자들의 합의 같은 인치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맹산>에서 수에메이를 구출 하러 온 공안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오히려 마을 주민들은 수에메이를 데려가려는 공안에게 몰려 가 물리력을 행사하고, 공안들은 마을 촌장의 도움을 요청한다. 마을 촌장이 물러서라고 하자 마을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집단으로 공권력에 저항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2011년 11월 16일에는 밀수 담배를 수색하려는 공안 단속 대원들을 폭력배들이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고, 11월 말에는 인민법원의 결정에 불복한 이들이 법관을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맹정>에서도 광산 사장들은 사람이 죽자 이 사건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사자들을 따로 불러 협상을 진행한다. 사장은 돈을 더 요구하자 칼까지 들이대며 3만 위안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소송 같은 공식적 절차가 아니라 당사자들 간의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소송만능주의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엄청난 병리현상이 드러나지 않은 채 공공연하게 발생하는 중국의 경우 이런 인치(人治)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공식적으로, 공공의 영역에서 ‘사회적으로’ 해결될 수 없게 만든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에서 유교적 전통, 자본주의 가치관, 사회주의의 관습의 안 좋은 점들이 얽히면서 막대한 병리현상이 발생하고, 더 나아가 이 병리현상이 정당화되는 동시에 병리현상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병리현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인간성의 상실’이다. 중국인들은 남이 곤경에 처해 있어도 잘 나서지 않으며 따라서 중국인 모두가 이 병리현상의 공범이다. <맹산>에 등장하는 모든 농촌주민은 공범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모두 공범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영화 <맹산>과 <맹정>의 제목에 모두 맹(盲: Blind)자가 들어간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수에메이의 탈출을 농촌 주민 모두가 필사적으로 막았던 이유, 광산의 사장들이 외부로 광부들의 죽음이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춰진 산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 감춰진 광산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중국의 병리현상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