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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노무현 정신'이라는 텅 빈 기표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진보대연합’ 논의가 활발하다. 진보대연합 국면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진보세력’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혹은 진보세력이 공유하는 ‘상징’은 무엇인가? 복지국가. 반MB. 반한나라당. 민주주의, 진보. 그들은 이런 이름을 내세워 연대를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 외에 진보세력의 연합에는 또 다른 상징이 있다. “하나의 유령이 진보세력을 배회하고 있다.” 바로 노무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노무현 정신’이다.

2009년 5월 23일. 한 전직 대통령의 죽음. 그것의 파장은 그저 그를 애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정치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였다. 노무현은 컴퓨터에 남긴 유서에서 ‘그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했으나, 노무현의 죽음에 분노하고 그의 죽음을 추모하던 많은 이들은 ‘누군가를 원망’했다. 그 누군가란 바로 이명박과 한나라당이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 심판이라는 대의를 위해 야권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야권연대’나 ‘진보대연합’ 논의는 실제로 노무현의 죽음 이후 기폭제처럼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떠올랐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세력, 시민사회 단체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명박 정부 집권 초기부터 “현 정권이 들어선 이래 한국의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불만들은 촛불집회 때 대규모 대중운동의 성격을 띠며 분출했다. 촛불 때 등장한 독재타도라는 구호나 촛불집회를 독재에 항거한 87항쟁과 비교하는 진보언론, 지식인들의 태도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비판은 공영방송 장악으로 대표되는 언론 통제, 미네르바 체포로 대표되는 표현의 자유 침해 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노무현의 죽음은 이러한 비판의 기폭제 역할을 한 동시에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고 정권교체를 이뤄내기 위해 야권과 시민사회가 뭉쳐야 한다는 주장이 활발해지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민주당,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은 단결하여 검찰의 무리한 (노무현 비리 의혹) 수사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 이 책임을 밝히기 위한 특검 도입을 주장했다. 또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미디어 법의 국회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뭉치기도 했다. 신문사의 방송 겸업을 허용하는 종합편성채널 도입으로 대표되는 미디어 법에 대해 야권과 시민사회단체들은 미디어법이 통과되면 조중동의 방송 장악으로 언론과 여론의 독점이 이루어져 민주주의가 퇴보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처럼 노무현은 죽음 이후 ‘민주주의’와 ‘진보’의 상징이 되었고, 민주주의 가치에 동의하고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세력을 뭉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퇴임 이후 노무현의 한국정치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다는 책『진보의 미래』는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노무현의 민주주의와 국가에 대한 고민에 답하기 위해 ‘진보’지식인들이 뭉쳐『노무현이 꿈꾼 나라』(부제: 대한민국 지식인들, 노무현의 질문에 답하다)라는 책도 발간했다.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 업적을 유지, 계승, 발전시켜 그 뜻이 국가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도록 하겠다는 목적으로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도 만들어졌다. 노무현의 정책과 신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진중권, 홍세화 같은 지식인들마저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이라는 책 등을 통해 노무현의 가치와 노무현 정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 진보세력의 연대에 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연대에서 친노 인사들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정권 교체 이후 ‘폐족 취급’을 받고, 노무현 일가의 비리 의혹으로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던 친노 인사들은 노무현의 죽음 이후 가장 화려하게 부활했다. 안희정, 이광재, 이해찬, 한명숙, 김두관 등 친노 인사들의 영향력과 역할이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가장 큰 반사이익을 얻은 정치인은 유시민이었다. 그는 민주당 외곽에서 ‘국민참여당’이라는 정당을 만들며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진보대연합을 추진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노무현 정신’을 논한다. ‘노무현 정신’이라는 말은 현 정권,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같은 보수 세력을 ‘기득권’, ‘정의롭지 못한 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는 탁월한 프레임이다. 그렇다, 지금 누가 노무현 정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불의에 맞서, 기득권에 맞서 사회 정의를 세우겠다는 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데, ‘상식과 원칙’이 적용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데, 이런 가치들을 누가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이 한국사회의 ‘진보’를 꿈꾸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무나 언급하는 ‘이름’은 결국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지금 노무현 정신이라는 기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만,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있다. 온갖 좋은 것들을 다 노무현 정신이라고 떠벌리는 일들이 벌어진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누군가 노무현의 과오를 지적한다. “노무현은 노동자를 탄압했는데, 노동자들이 노무현을 계승하는 이들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 그러면 노무현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노동자가 제대로 대우받는 사회, 그것은 바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나의 이 이야기가 코미디 같은가? 그러나 이 코미디는 실제로 벌어졌다. 바로 어제, 7월 14일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의 대담집 <미래의 진보>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두 사람의 모두 발언 이후, 한 참석자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노무현과 전태일은 만날 수 있을까요?” 노무현 자신도『진보의 미래』에서 일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노무현 정부의 ‘노동 탄압’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중현 선생이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질문을 받고 대 여섯명을 꼽았는데, 그 중 누가 제일 잘 치냐는 질문에 다 잘 치는데 향기가 다르다고 말했다”면서 “이처럼 노무현 대통령과 전태일 열사는 훌륭하시지만 조금 향기가 다를 뿐이다. 전태일과 노무현 정신이 어울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아니, 유시민의 궤변과는 정반대로 노무현 정신이 ‘전태일’과 ‘감히’ 어울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끔찍하게’ 많다. 지금 2011년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 서 있는 바로 그 크레인 위에서 2003년 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주익이다. 그가 스스로 목을 메달아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노동자가 그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곽재규다. 2003년 노무현의 시대에 죽어간 노동자는 또 있다. 자본과 국가의 노동자에 대한 총 공세, 손배가압류1)에 시달리던 한 노동자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고 세상을 떠났다. 배달호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죽음에, 지금 진보진영이 그렇게 계승하고자 하는 ‘노무현의 시대’는 어떻게 화답했는가. 2003년 노동자 투쟁이 진행되던 때, 김진숙과 김주익의 고문변호사였던,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라고 말했던, 그 노무현은 “대통령 못 해 먹겠다.”고 화답했다. “분신으로 말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화답했다. 손배가압류로 화답했다. 비정규직법 개정으로 화답했다. 한미 FTA로 화답했다. 구속과 수감, 피 튀기는 시위 진압으로 화답했다.

지금 살아서 투쟁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을 빌려보자.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김주익과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전용철, 홍덕표,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노무현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놀아 울었던 죽음들이다. 노무현이 벼랑 끝에 내몰리기 이전, 수 없이 많이 벼랑 끝에 내몰렸던 죽음들이다.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전태일과 노무현 정신이 어울리지 말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가?

혹자들은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그렇게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자본의 노동 탄압을 방조했을 지라도, ‘노무현 정신’은 아직 유효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사람 사는 세상, 상식과 원칙, 불의에 맞서 권력에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하는 그 ‘정신’은 유효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3당 합당에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노무현의 그 정신, 그것은 아직 유효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렇다. 좋은 말들이다. 우리는 권력에 맞서 권력을 쟁취해야 하며.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상식과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도대체 왜, 그 좋은 말들에 하필 ‘노무현’의 이름이 붙어야 하는가? 그것도, 노무현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은 영역들에서까지, 노무현의 이름이 붙은 ‘정신’이 그 해법으로 떠돌아 다녀야 하는가? 전태일이 노무현 정신과 만날 수 있다는 궤변은,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의 시대, 상식과 원칙이 있었다. 그 상식이란 ‘시장은 권력에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선진형 개방통상국가‘(이를 위한 한미FTA)라는 상식이 있었다. 그 상식에 반대하는 이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원칙도 있었다. 노동자가 시위하면 강력하게 진압하고,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에게 손배가압류라는 신종 무기를 투입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노무현은 불의와도 싸웠다. 그에게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은 ‘불의’ 그 자체였다. 노동자의 쟁의와 투쟁은 국가와 민족경제를 생각하지 않는, ‘땅 투기보다 심한 지대추구’ 행위였다. 그에게 상식과 원칙이란, 사람 사는 세상이란, 정의란 그런 것이었다.

지금 진보세력들은 진보대통합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묶어줄 온갖 기표와 상징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노무현 정신은 그것들 중 하나이다. 모두가 노무현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떤’ 정신이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이 집권 시절 무슨 일들을 했는지는 망각되고 그의 정신만 남는다. 그리하여 노무현 정신은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어느 정도로 만병통치냐면, 노무현의 과오와 실책까지도 ‘노무현 정신’을 ‘더 잘 추구하면’ 극복 가능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렇게, 노무현 정신은 누구나 언급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텅 빈 기표가 되었다.

각주
1) 손배 가압류란 손해 배상 청구 소송 및 재산가압류의 줄임말로, 사용자가 노동자의 파업으로 인해 입은 손해를 배상해 달라고 제기하는 민사 소송이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이며, 그 소송 과정에서 재산가압류라는 행정 집행이 이뤄진다. 가압류된 재산은 재판 결과에 따라 노동자에게 귀속되거나 사용자에게 귀속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가와 기업은 노동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보다 손배가압류를 더 선호하기 시작했다.(한윤형, 『안티조선운동사』, 텍스트, 2010, 320p.)

참고자료

김진숙,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 빨간 쉼표, 2009.06.30.(http://bsnodong.tistory.com/30)
“노 대통령, 넥타이 풀고 현장 나온 최초, 최고의 변호사”,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홈페이지
(http://www.knowhow.or.kr/bongha_inform/view.php?start=0&pri_no=999545354&mode=&total=874&search_target=&search_word=)
송경동, “아!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노무현.”, 레디앙, 2011.03.20(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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