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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미국 신용등급 강등의 충격 : 신용평가사에는 신용이 없다!

현대 자본주의가 운영되는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장치 중 하나는 ‘신용’이다. 자본주의에서 교환은 화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화폐만으로는 대규모 거래나 자본의 축적과 성장이 힘들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신용이다. 자연인 혹은 법인들은(채권을 발행하는 국가도) 상대방이 일정기간 후 상환 또는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인정함으로써 물건이나 돈을 빌려주거나 지불을 연기하는데, 이것을 신용이라 한다. 이러한 신용을 통해 자연인이나 법인들은 지금은 돈이 없어도 자금을 빌려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상업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 시대 이 신용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금융자본주의의 시대라 부를 수 있는 지금도 이 신용은 막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신용을 기반으로 엄청난 파생상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수천 조의 돈이 시장에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어떤 자연인이나 법인, 더 나아가 국가의 신용은 누가 평가하고 결정하는가? 많은 기관들이 신용 평가 혹은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주목해야 할 이들은 신용평가사이다. 많은 신용평가사들 중 특히 세계 3대신용평가사라 불리는 S&P(Standard & Poors), 무디스, 피치가 세계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과 국가의 신용등급을 발표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저승사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행사해왔다. 이들이 매번 발표하는 신용등급이란 한마디로 돈을 빌리려는 국가나 기업에 대한 ‘재무 성적표’이다. 즉 채무를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환 지연 혹은 부분 상환에 따라 손실 규모가 얼마나 될지 측정해 등급별로 표시하는 예측 지표이다. 채권을 사는 투자자들은 투자의 안전성을 가늠하는 정보로 이를 활용한다. 신용평가사들에 따르면, 그들은 이러한 등급 설정을 통해, 안전한 투자처에는 자금 유입을 장려해 사업을 확장시키고 부실한 곳에는 자금 유입을 막아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기능을 담당해왔다(고 한다).

이 저승사자 중 한 명이 최근 파격적인(?) 신용등급 강등을 발표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한 곳인 S&P가 70년 동안 최고 신용등급인 트리플 A(AAA)를 유지해온 미국의 신용등급을 AA+로 한 단계 강등하고(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의 하락을 뜻한다) 2년 내 AA로 추가 하향할 수도 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S&P는 몇 차례 미국에게 신용등급 강등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해왔다. 발단은 미국의 부채한도액이다. 모든 국가에게는 자국 내의 기준에 따른 ‘부채한도액’이 있다. 미국의 부채한도액은 14조 3000억 달러이다. 미국의 부채가 이 한도액을 넘어서면 미국은 공식적으로 디폴트(국가 부도) 상태에 빠지게 된다.(8월 2일이 그 시한이었다.) 따라서 미국 정치권에서는 이 부채한도액을 인상하려고 노력해왔는데, 공화당과 오바마가 내세운 한도액이 서로 달라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S&P는 부채한도 인상을 가지고 계속 정치권이 분열한다면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고, 공화당과 오바마가 부채한도액 인상에 합의했음에도 신용등급 강등을 발표했다. 미국이 내세운 부채한도액과 장기 재정적자 감축 계획(부채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하락함에 따라 상징적이고, 그리고 실제적인 ‘충격’이 있었다. 몇 몇 언론들은 미국의 위기니 몰락이니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신용등급 강등을 위기로 판단하는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미국은 높은 신용등급을 유지한 대가로 국채를 마음껏 발행하여 재정 적자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미국 국채’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매입하니 재정이 적자 상태여도 금방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국채의 이자율이 낮아도 많은 이들이 미국의 신용도 때문에 미국 국채를 구입했다. 하지만 신용 등급이 강등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투자자들은 위험성이 높다고 판정받은 미국 국채를 덜 사려 할 것이고, 재정 적자에 처한 미국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채 발행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국채를 팔기 위해서는 국채의 이자율을 높여야한다. 이 경우 국채와 연동되어 있는 주택 대부 금리, 자동차 융자 금리 등이 한꺼번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러한 금리인상은 자연스레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미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더욱이 이미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등급이 떨어진 미국 국채를 팔아버린다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 신용등급 강등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1)

그러나 나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세상에, 아직도 S&P 같은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이 객관적인 지표로 작용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실제로 영향을 받다니! 나에겐 다름 아닌 이것이 충격이었다.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 평가는 얼마나 객관적이고, 또 정확한 것일까? 과연 신용평가사들에게 엄청나게 역동적인 변수들을 통해 결정되는 기업이나 국가의 ‘신용’상태를 평가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것일까? 바꾸어 말하자면, 남들의 신용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는 신용평가사는 과연 ‘신용’할만한 이들일까? 폴 크루그먼이 최근 칼럼에서 언급한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신용할 수 없는 자들인지가 드러난다. S&P는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바로 그 달에도 리먼 브라더스의 신용등급을 A로 유지했다. 시장성이 없고 투자가치가 없는 기업이, 즉 신용이 없는 기업이 시장에서 바로 퇴출당하듯이, S&P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 때 회사 문을 닫았어야 했다. S&P의 신용등급은 아무 객관성이 없는 지표로 전락했어야 했다.

리먼 브라더스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S&P를 비롯한 신용평가사들은 2008년 금융위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엉터리 신용평가로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그들은 검찰 수사와 청문회에 불려 다녀야했다. 신용 평가사들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 참여 했을 때 공개된 신용평가사 회사 직원들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그 거래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등급을 매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부자가 돼서 은퇴할 때까지 이것이 무너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06년과 2007년 신용평가사들이 최고 등급 판정을 내린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모기지) 상품 가운데 90% 이상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크본드(쓰레기 채권. 투자 위험성이 지나치게 높은 채권)로 판명되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1년 분식회계(회계장부 조작)가 밝혀져 거대 에너지기업 엔론이 파산한 사건이 있었다. 무디스와 S&P는 엔론이 파산하기 나흘 전 그들에게 ‘투자적격 등급’을 매겼다. 채무불이행까지 이르렀던 캘리포니아의 전기. 가스. 수도기업인 캘리포니아 유틸리티스는 채무불이행 2주 전까지 A-등급을 받았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1997년 11월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국가부도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에게 ‘투자 적격’에 해당하는 A등급을 안겨주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이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자 한 번에 6~12등급까지 강등시키면서 한국이 더욱 빚을 갚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엉터리 신용평가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졌듯이, 국가와 기업들은 높은 신용등급을 받기 위해 신용평가사에 엄청난 로비를 한다. 신용평가사들이 어떻게 신용등급을 매기느냐에 따라 국가와 기업의 경제에 엄청난 득이 될 수도, 엄청난 타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표가 나올 리가 없다.

즉 신용평가사들은 별로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지표를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고, 그 결과 많은 투자자들과 기업, 국가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이 권력을 이용해 국가와 기업을 협박하기까지 하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신용평가사들이다. 2008년 잘못된 신용평가로 금융위기가 터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 염치가 없는 건지 낯짝이 두꺼운 건지 이제 와서 미국의 신용등급이 어쩌구 떠들어댄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신용평가사들은 신용 없는 국가와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면서 자본주의의 수호자 행세를 해왔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해서, 신용 없는 신용평가사들도 전부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자본가들과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합리적인 체제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자본주의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금융시장에서 돈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신용’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힘과 권력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신용평가사라는 권력에 의해서 말이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보여준 충격은 바로 이것이다.

각주

1) 이러한 예측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국 신용등급 강등 이후 오히려 미국 국채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양지선, ““S&P, 네가 틀렸어”… 신용등급 강등 이후 美 국채 가격·인기 되레 올라“, 국민일보, 2011.8.17.) 어쩌면 폴 크루그먼이 뉴욕 타임즈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s&p의 신용등급 평가는 객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실제 경제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참고자료

권웅, “신용평가사에 끌려 다니는 오바마”, 시사인 제 202호, 2011.8.4.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30)
박형숙, “신용평가사 ‘빅3’ 너희를 평가해주마”, 시사인 제60호, 2008.11.5.(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4)
이승선, "미국이 처한 위기는 디폴트가 아니라 신뢰 상실", 프레시안, 2011.07.28.(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728153642&section=05)
이승선, “美 신용등급 초유의 강등 사태…'트리플 A'에서 'AA+'로”, 프레시안, 2011.08.06.(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806140447)
H, “미국의 정부부채와 신용등급”(http://socialandmaterial.net/?p=1181)
Paul Krugman, "Credibility, Chutzpah and Debt", The New York Times, 2011.8.7.(http://www.nytimes.com/2011/08/08/opinion/credibility-chutzpah-and-debt.html?_r=3&src=ISMR_HP_LO_MST_FB)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