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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2030잠금해제

닥치고 투표? 닥치고 정치?

뿌리가 튼튼해야 예쁜 꽃이 핀다

MB 심판론만 되풀이하기 전에

해고자 해법 등 ‘미래’를 제시하라


4·11 총선이 끝났다. 총선을 앞두고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유명 인사들의 이색 공약이 눈길을 끌었다. 투표율이 70%가 넘으면 미니스커트를 입겠다는 대권 주자, 망사 스타킹을 신겠다는 진보지식인, 머리를 밀겠다는 소설가가 있었다. 투표일에는 각종 ‘투표 인증샷’이 인터넷을 가득 채웠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민주시민이라면 꼭 투표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면서 말이다. 이런 주장을 굳이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라면, 그 ‘뿌리’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서울시립대의 총학생회가 총선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부재자 투표 신청을 받았다. 투표권자 6000여명 중 2593명이 부재자 투표 신청을 했다. 이는 지난 선거에 비해 월등하게 늘어난 수치다. <한겨레>는 기사와 사설을 통해 반값 등록금의 여파로 시립대 학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이 부재자 투표 신청의 증가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와 <뉴스타파>도 총학생회장을 인터뷰하며 이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시립대 학생 중 한명인 나는 이런 현상을 무작정 좋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총학이 부재자 투표 신청을 받으면서 학생 자치의 상징인 학생총회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총학은 부재자 투표 신청을 받는 데 전력을 다했지만, 학생총회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학생총회 홍보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학생총회 홍보 포스터에는 총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가까스로 총회가 개회되었지만 총회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이 잇따랐고, 총학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명했다.


총학생회는 학교 전체를 부재자 투표 신청하자는 이야기로 도배할 정도로 부재자 투표에는 온 힘을 다했으면서 학생총회에는 무심했다. 4·11 총선이라는 거대한 판에 신경 쓸 여력은 있었으면서 ‘학교 내 정치’에는 무심했던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학내 정치에 제대로 참여할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이 부재자 투표 신청 좀 했다고 ‘정치 참여 의사가 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에 신경 쓰느라 그 뿌리를 무시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꽃은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예쁜 꽃이 피어날 수 있으며, 뿌리가 썩으면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금방 죽어 버린다. 그 뿌리란 소외받고 착취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선거라는 4년 주기 행사에 묻히지 않은 채 샘솟는 사회다. 야권연대는 다양한 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할 생각은 안 하고, 정책과 새로운 미래를 제기할 생각은 안 하고 선거를 한낱 엠비심판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치인들은 자신을 뽑아달라며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움직인 건 그들의 입뿐이다. 말로는 비정규직을 없애겠다고 떠들어댔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장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쌍용차 노동자가 죽음을 선택해도, 재능교육의 해고 노동자들이 1500일을 넘게 싸늘한 거리에 앉아 있어도 이들의 죽음과 삶은 선거 쟁점이 되지 못한다.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일단 엠비정부를 심판하고 총선에서 다수당을 차지하면 다 해주겠다고 말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우리들에게 과거에 대한 심판만을 이야기하던 그들은 결국 집권당한테 또 한 번 기회를 주고 말았다.


닥치고 투표? 닥치고 정치? 투표로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자는 주장은 이명박 정부 때든 그 전이든 상관없이 늘 힘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장해버렸다. 가치는 없고 심판만 남았다. ‘닥치고 투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떠드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뿌리를 잊지 말자.


<한겨레>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