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거 글/한겨레 2030잠금해제

우리 앞에 놓인 두 개의 문

영화 <두 개의 문>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한 지 13일 만에 2만명이 넘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았고, 유명 인사들과 정치인들이 잇따라 영화를 관람하면서 용산참사가 다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라는 무거운 사회·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사회고발 다큐다. 이런 유의 다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사건을 공론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 분노의 화살은 ‘악덕하고 나쁜’ 놈들에게 날아간다. 우리는 <도가니>를 보고 파렴치한 장애인학교 교사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부러진 화살>을 보며 비상식적이고 권위적인 판사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 분노의 화살은 구조와 시스템까지 도달해야 한다. <도가니>는 사학개혁 논의로, <부러진 화살>은 사법개혁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의 문>은 우리에게 용산참사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안한다. 영화에는 용산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동안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의 눈으로 용산참사를 바라본다. 영화는 철거민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것처럼, 상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경찰 개개인 역시 국가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영화는 재개발을 포함한 국가폭력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안한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국가의 폭력은 도처에서 힘없는 이들을 억누르고 있다. 재개발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환경과 평화를 지키려는 민중들의 투쟁 현장에서 국가는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피해자들의 광범위한 연대다. 그런데 <두 개의 문>이 제안한 대로 경찰 개개인도 국가폭력의 피해자라면, 결국 그들과도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경찰노동조합’을 하나의 대안으로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과 미국에는 이미 경찰노조가 있으며, 유럽(파업권을 인정하지 않는 영국 제외)과 미국의 경찰들은 노동 3권을 보장받고 있다.

 

<두 개의 문>은 경찰청장 취임을 앞둔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치적을 위해 무리하게 경찰을 투입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경찰들은 늘 열악한 근무조건과 성과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 상부의 무리하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으려면 경찰에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조 설립의 근거를 단순히 ‘경찰이라는 이익집단의 이권’으로만 설명하면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치안 유지와 국민의 편익’이라는 더 큰 이권에 묻혀버릴 것이다. ‘교사들이 무슨 파업이냐’고 비난을 받던 전교조는 ‘참교육’이라는 보편적인 대의를 내걸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학생들의 수업권’이라는 이권을 넘어서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경찰노조 역시 경찰 자신들의 이권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대의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물론 경찰노조가 그 자체만으로 사회에 엄청나고 대단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체행동권을 보장받는다 해도 실제로 행사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무리한 진압을 지시하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를 통해 원주민과 경찰관 모두를 희생시킨 용산참사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연대의 힘이 아닐까? 우리 앞에 ‘두 개의 문’이 있다. 함께 살 것인가, 아니면 함께 죽을 것인가.

 

<한겨레>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