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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2030잠금해제

통진당 사태의 본질은?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고 모인 지 8개월도 지나지 않아, 통합진보당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혁신파’가 지난 통합진보당 의원총회에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제명하는 데 실패하면서, 통합진보당은 해체 직전으로 치닫고 있다. 당원들의 탈당이 줄을 잇고, 혁신파는 공공연하게 탈당 및 재창당을 언급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가리지 않고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의 종북주의를 안줏거리 씹듯 씹어대고 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태를 그냥 ‘종북’으로 정리하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진짜 문제는 종북주의라는 신념이 아니라, 그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을 장악하려는 태도이다. 구당권파는 당직 및 공직을 차지하기 위해 위장전입이나 투표 조작 같은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위반했다.

 

지난 2008년 구당권파와 구당권파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은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이어졌다. 그때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던 당원들은 당권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때문에 탈당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당권파가 종북주의를 ‘패권적’으로 밀어붙이는 데 신물을 느낀 비당권파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것이 민주노동당 분당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통합진보당이 창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통합진보당의 탄생을 축하했다. 진보적인 정치인들과 정치평론가들은 통합진보당이 우왕좌왕하는 민주당을 진보정치로 이끌 동력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엠비(MB) 심판이라는 대의를 주도할 통합의 정당이 탄생했다고 기뻐했다. 그들의 기대가 산산이 박살난 지금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종북’이라고, 진보를 망쳤다고 비판한다. 국민의 뜻과 엠비 심판이라는 대의를 내세워 통합을 부추기던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이 제3자가 되어 통합진보당을 비판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지금 통합진보당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책임을 느껴야 할 ‘당사자’이다. 엠비 심판을 위해 통합을 주장하던 이들은 구당권파가 ‘그런 사람들’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 아니, 말은 똑바로 하자. 그런 사람들인 줄 모른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인지 아닌지 알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비례대표 경선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직후, 통합진보당 게시판은 ‘엔엘/피디’(NL/PD)에 대해, 구당권파의 실체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참여당계 당원들의 글로 가득 찼다. 본인들이 통합할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이루어진 통합이었다.

 

통합진보당은 능력은 안 되지만 권력은 잡고 싶은 정치세력들이 뭉쳐서 만든 선거용 정당이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자신들의 가치와 이념에 근거해 뭉친 정당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선거용 정당이다. 엠비 심판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들의 공통적인 가치와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이 급하게 만든 정당이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대의를 위해 본인들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묻지마 통합’이 가져온 비극이다.

 

구당권파는 종북주의라는 이념을 밀어붙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묻지마 통합을 외쳤던 이들은 엠비 심판과 정권 교체를 위해 가치와 이념을 저버렸다. 통합진보당을 ‘까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번 사태의 당사자이다. ‘진보세력’이 쉽게 통합진보당을 깔 수 없는 이유다.

 

 

<한겨레>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