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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모험, 공동생활전선(3)

자음과 모음 2011년 봄호에 실린 공동생활전선 연재 마지막 글을 옮겨놓습니다.

담론적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모험, 공동생활전선(3)

공동생활전선

1. 공동생활전선의 출범식

2010년 9월 25일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에서 공동생활전선 출범식을 가졌다. 모임의 구성원들은 그동안 공동생활전선을 기획해왔던 과정을 담은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함께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공동생활전선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을 초대했다. 출범식을 준비하게 된 이유는 출범식을 통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생활전선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나갈 것이며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떠한지 듣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2. 학습과 생활의 공간: 공동생활의 현실

(1) 생활의 문제

공동생활전선의 구성원 중 세 명은 8월 말, 제기동 시장 주변의 작은 자취방에 둥지를 틀었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55만 원짜리 방이었다.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부엌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약간 눅눅한 냄새가 난다는 점만 빼면 남학생 세 명이 살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각자 20만원씩 내서 60만원을 만들어 월세와 공과금을 충당하기로 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월세를 내고 남은 돈 5만 원으로는 공과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서울이란 도시에서 20만 원 이하를 지불하며 생활하기란 녹록찮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공동생활에 앞서 우리는 여름 방학 동안 무더위와 싸우며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쳤기 때문에 나름대로 결의와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시작은 단출했다. 각자 집에서 밥솥, 탁자, 물 주전자, 선풍기를 가져왔고 마침 군대 가는 친구의 가구를 기부 받아 살림살이에 들어갈 비용을 줄이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20여 년 넘게 가족과 같이 살다가 다른 사람과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군대 생활을 제외하면 거주하기로 한 세 명 모두 자취의 경험도 없는 초짜들이었다. 살림에 대한 관심도 요령도 없는 남학생들 셋이 모여 과연 잘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게다가 공간을 처음 확립하면서 회의를 통해 논의했던 공간의 목적을 상기할 때 우리는 주거 실험을 하는 다른 모임들의 공동생활과 다른 생활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우리는 우리 공간을 하나의 학습 공간으로써 꾸밀 필요가 있었다. 각자 서로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각자의 지적 관심사와 생활이 함께 유지되는 삶. 그런 삶의 모델을 기획하기로 한 것이 아니었는가. 엄밀히 말해 이 공간의 보증금은 열 명의 공동생활 구성원들이 모두 같이 모은 것이므로 모두가 공간의 주인이었다. 거주자 세 명은 공과금 및 집세를 내지만 원칙적으로 모두에게 이 집의 이용권이 있었다. 여러 형태의 주거 실험이 있었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순수하게 학생들의 힘으로 시도되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구성원들은 주거지에 대한 논의와 함께 현재 형편상 같이 거주하지 않는 일부 구성원들의 경우도 점진적으로 공간 확장을 통해 생활 공동체를 지향할 수 있는 방안 등을 토론하곤 했다.

공동생활은 생각보다 고려할 것이 많았고 할 일 역시 많았다. 학사 일정이 시작되고 거주자 중 한 명은 학교를 다니고 나머지 두 명은 학교 산하 기관에서 전일제 근로장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당장 집세와 생활비를 벌고 다음 학기에 필요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하루 시간의 3분의 1 이상을 아르바이트와 학교 수업에, 남은 시간은 고려대학교 생활도서관 운영과 공동 세미나를 하면서 점차 공동 공간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되었다.

생활을 시작하기 전, 공동생활전선 구성원들은 공동체 세미나를 통해 공동생활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여러 주거 실험을 하고 있는 단체를 찾았다. 방문했던 공동생활 단체 중에서 ‘빈집’의 지음님은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 말을 남겼다. 정말 살림을 잘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혹은 거주자들이 모두 남자들이라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보통 남자 아이들의 자취방’처럼 변해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2) 눈치와 호혜의 살림살이

가사 노동은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과 비슷하다. 눈이 쌓이면 비질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이불을 펴면 개야 하고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빨래를 하면 널고 개야 한다. 문제는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는 것이다. 귀찮아서 혹은 깜빡하고 일을 미뤄버리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거리가 불어나버린다. 세 명이 같이 산다는 것은 세 배 이상의 효율로 살림을 처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 배 이상의 살림거리가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 같이 가사 노동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신기하게도 이 아수라장에서 감정 다툼이나 신경전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살림이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서 임계점에 다다르기 전 누군가 알아서 치웠고 가끔 공간에서 전체 세미나가 있을 경우, 자연스럽게 대청소가 이루어졌다. 샴푸가 떨어지면 누군가 샴푸를 사왔고, 반찬이 떨어지면 집에서 반찬을 가져왔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의 살림살이는 시장 경제보다는 선물 경제에 가까웠던 셈이다. 돈이나 일이 정확하게 분담되어 이루어지는 식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호혜를 베푸는 것, 그것만으로 여기까지 살림이 굴러온 셈이다. 이건 각자 내가 얼마나 이 공동체에 기여했는지를 계산하는 방식이 되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따져보면 지금까지 있었던 주거 실험 가운데 가장 주먹구구식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규칙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하지 않을 만큼 각자가 적당히 헌신적이었고 게임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영악하지 않았다. 각자 좀 더 예민하거나 신경을 쓰는 분야가 있었고 그것 덕분에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의 분업이 일어났다. 누군가는 청소를, 누군가는 빨래를, 누군가는 밥하기를……. 하지만 이런 식의 생활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쓰레기가 집 구석구석을 채우게 되었고 그걸 보다 못한 한 거주자가 커다란 비닐봉지를 가져와서 거기에 쓰레기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가끔 결의를 통해 청소를 하긴 했지만 G20 반대 투쟁, 혹은 중간-기말 고사가 있는 시기가 되면 바로 살림은 엉망이 되었다. 거대한 쓰레기 더미, 음식물 쓰레기에서 나는 악취……. 우리는 학교 쓰레기통에 두어 번 쓰레기를 투기하면서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나마 공간이 유지 되는 것은 토요일마다 주거하지 못하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 세미나를 한다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은 기본적인 청소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이것은 그냥 수많은 대학생들이 하고 있는 ‘자취’보다 못 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공동생활전선이 그 이름값을 다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살림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먹고 마시면서 생기는 쓰레기들을 한번 치울 때마다 계획을 세워야 하고 결의를 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학습과 투쟁 이상으로 공동생활전선이 해결해야 할 생활의 문제다. 매일 아침 같이 일어나 밥을 먹고 같은 시간 귀가해서 얼굴을 보는 것, 그리고 규칙적으로 같이 학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공동생활을 통해 유발된 문제들은 가정에서 가사 노동에 대해 얼마나 자립하지 못하고 의존적으로 생활하고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같이 살기로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에 대한 계획은 사흘을 넘어 지켜진 적이 없었다. 살림 때문에 지금까지 두 번 회의를 했고 잠깐 정상적인 생활이 돌아온 것 같았지만 결국은 이 생활공간은 잠시 잠을 자기 위한 숙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현재 공동생활을 하면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정리하면 결국 가장 중요한 점은 살림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이렇게 집에서 나와서 사는 이유 자체도 20대들에게 대안적 모델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었는가? 구성원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룸메이트끼리 사는 것보다 못한 생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요즘 거주자들은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거주자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같이 보낼 수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나은 상황일 것이다. 물론 각자 사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밤새 공부해야 할 일이 있고 나가야 할 투쟁장이 있으며 꼭 끝내야 할 작업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들 각각의 일정 때문에 밥하는 데 문제가 생기고 쓰레기 비우는 데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단 한 명이 집에 남아 있더라도 냉장고에서 알아서 반찬을 꺼내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준비는 늘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자유롭게 활동해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살림의 문제는 최소화하고 자동화해야 했다.

몇 차례의 회의 끝에, 간단한 규칙이 정해졌다. 재활용할 수 있는 쓰레기와 할 수 없는 쓰레기를 나눈다. 재활용할 수 있는 쓰레기는 대청소하는 날 다 같이 분리수거를 한다. 음식과 빨래는 당번제로 운영하고, 살림살이를 위한 최소한의 도구는 돈을 조금씩 더 내서 보충하기로 했다. 간단하고 상식적인 결론이지만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지금 우리의 생활은 느슨하고 여유롭다. 경동시장에서 싸게 구입한 4000원짜리 박하차를 마시며 각자 읽은 책의 구절과 머릿속에서 열심히 구상한 생각을 교환한다. ‘개드립’ 같았던 아이디어는 서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살을 붙여나가다 한 편의 글로 완성된다. 이런 공동생활의 모습은 군내 인트라넷 시절 구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그때 우리는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같은 시각에 운동하며 같은 책을 읽는 일종의 ‘훈련소’를 구상했다. 지금의 공동생활전선은 그때의 구상과는 많이 달라져버렸지만 구성원 각자의 공간과 생활을 존중한다는 점, 그리고 지속 가능한 실천이 되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의 실험은 다른 방식으로도 확장될 여지가 보인다. 우리들의 주거 공간은 좌파 활동가들의 숙소가 되어주기도 했다. 빈집처럼 모두에게 열린 공간은 아니었지만, 투쟁 전선에서 인연이 닿는 사람들에게 가끔 잠자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런 저런 네트워크를 통해 자립음악생산자 활동가, 두리반 활동가, 진보정당 활동가, 학생운동가 등이 공간을 거쳐 갔다. 그들은 밤새 술을 기울이며 정세를 토론하다 잠을 잤고 밥을 먹었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 우리와 같은 실험을 하는 집단들이 여럿 생겨난다면 좌파 활동가들의 활동 반경을 크게 넓혀줄 수 있지 않을까?

또한 5개월가량 집을 나와 생활을 하면서 점차 안암동과 제기동을 학생의 눈 대신 거주자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일단 이곳은 서울에서 얼마 안 되는 미개발 지역이다. 바로 이 경제적 조건이 공동생활전선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보증금 500만원이라는 돈으로 서울에서 방 두 칸짜리 집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그 외의 조건도 좋았다. 집에서 3분 거리에 제기시장이 있다.80년대 분위기의 시장과 술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긴 하지만 간단한 식료품과 반찬, 일상적으로 사용할 용품들을 구입할 수 있고 재활용 센터도 있어서 살림잡기들을 중고가에 살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걸어서 15분이면 경동시장과 청량리 청과물시장에 갈 수 있다. 집에서 통학하고 학교 주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술을 먹는 통학생의 입장이었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우리에겐 아직 지역 운동과 연대할 계획이나 계기는 없다. 그러나 기존의 대학생과 학교 주변 주민의 관계가 좋게 말해서 하숙인-하숙집 주인, 구매자-판매자에 불과했다면 학생-거주자로서 새로운 형식의 운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처럼 공동생활은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3. 담론 개입을 위한 학습: 어떤 형식의 세미나인가

담론 개입을 위한 학습으로 택했던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선집 읽기 세미나는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충분히 밀도 있는 학습이 되지 못한다는 의견을 수렴하여 마르크스 저작에 대해 충분한 학식을 갖고 있는 단체에 합의한 세미나로 변경되었다. 공동생활전선은 이견이 있을 때마다 회의를 열어 구성원들의 민주적인 의견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왔다. 언제나 쉽게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대립이 첨예해지기도 했고 의견 수정이 이루어져 논의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세미나를 다른 단체와 함께 하게 된 이후 학습의 효율성 면에서는 기대했던 만큼 충족되었다. 공동생활전선 구성원들은 함께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독일 이데올로기」,「공산당 선언」,「임금 노동과 자본」,「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고타 강령 초안 비판」,「공상에서 과학으로」,「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경제학-철학 수고」를 읽었다. 이 문헌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정파를 막론하고 대체로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들이다. 선집 읽기 세미나 기간이 무한정 길어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원문이 지나치게 긴 경우 모여서 강독할 때는 부분적으로 발췌를 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구성원들의 참여도는 매우 높았다고 생각한다. 구성원들 중에는 다른 곳에서 별도로 『자본론』 읽기 세미나를 병행한 경우도 있었다.

공동생활전선이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어떠한 정치 단체와도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당 기간 동안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문헌들을 읽었다는 것이 어떤 사람의 눈에는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마르크스인가?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마르크스를 읽지 않는가? 해방의 정치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마르크스를 우회할 수는 없다는 것이 공동생활전선 구성원들의 판단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전혀 읽지 않고도, 마르크스를 기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시각에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마르크스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부터 여러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미나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마르크스의 통찰력과 뛰어난 문학성에 놀라면서도,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거나 중요한 부분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등등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절의 다른 문헌들이 보여주는 한계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오히려 오늘날에도 전혀 퇴색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핵심’은 마르크스가 어떤 문제에 접근하고 개입하는 방식 그 자체였다.

흔히 사람들은 마르크스적 비판을 ‘어떤 대상이 자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실은 사회적 관계에 매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과정으로 여긴다. 이렇게 말하면 마르크스는 평범한 계몽주의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비판은 좀 더 나아간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어떤 사회적 조건하에서 본래 사회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것이 마치 자립적인 것처럼 보이는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린다. 이런 진정한 ‘비판’이야말로 모든 시대적 조건을 넘어서서 영원히 보편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이념’이다. 이것이 공동생활전선 구성원들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선집 세미나를 통해 얻게 된 학습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미나가 외부 단체와 함께하는 것이었던 만큼 몇몇 구성원은 공동생활전선의 주체적인 활동이 축소되는 것 같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 문제를 기점으로 공동생활전선은 중간 회의를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여름 방학 때와 가을 학기가 시작된 이후의 일정이 달라졌기 때문에 여러 모로 논의할 것들이 많아진 까닭이기도 했다.

회의의 주된 논의 사항은 ‘주체적인 활동을 위한 공동 세미나’였다. 서브 세미나로 진행되고 있던 자본론 읽기 세미나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일정이 마무리되고 있었고, 그동안 공동 세미나로 진행하고 있던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선집 읽기 세미나는 외부 간사를 두고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구성원들 간에 의견을 주고받을 프로그램이 너무 적었다. 이에 대해 다시 공동 세미나로 할 수 있는 다른 형식을 모색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회의에서 합의된 문제의식이었다. 장시간 논의가 이뤄지고 난 뒤 결정된 세미나는 서로 각기 다른 전공 분야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공통의 목적인 ‘좌파적인 의제’ 안에서 각자의 전공 지식을 서로 교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살롱’의 형식이었다. 세미나의 시간이 토요일 오전으로 수렴되면서 이 공동 세미나는 ‘토요살롱’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처음 토요살롱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만 해도 공동생활전선 구성원들 대부분은 이 형식이 과연 공동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세미나가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구성원들마다 각자 학습을 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시작해보지 않은 세미나의 형식에 회의를 느끼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 때 고려대학교에서 열렸던 20대 정치 주체성 세미나 혹은 정치철학 세미나의 뒤풀이에서 오고 간 얘기들이 은연 중 구성원들의 고민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풀이에서 오고 간 얘기 중 한 단락에서 학문의 분과에 관한 고민들이 있었는데, 아카데미 안에서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학문의 분과들이 각자 폐쇄되어 있고 그 때문에 학생들 간의 지적 교류에 큰 제약이 있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공동생활전선의 구성원들이 처음에 세미나를 시작했을 때 장시간의 회의에 거쳐 합의에 도달한 것은 서로 공부하고 싶은 좌파적 주제들이나 학자들은 달랐지만 ‘다른 분과적 가지치기를 제거한’, ‘심플한’ 마르크스를 읽고자 한다는 의식이었다. 때문에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첫 번째 공동의 세미나를 결정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엥겔스 세미나를 마치게 된 시점에서 이 문제는 다시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이런 부분을 고민하고 있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카데미 분과의 폐쇄성과 다르게 분과 간의 교류를 해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각자의 학과 지식이 다양하고 서로 관심 분야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이 공동생활전선의 공통된 특성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4. 주체적인 담론 생산과 담론에 대한 의견 대립

첫 번째 토요살롱이 시작된 날, 발제문을 준비해온 멤버들은 8명 전원이었다. 시간 배분이나 다른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고 발표를 시작했기 때문에 하루를 꼬박 열띤 토론을 하고도 4명의 발제문밖에 시간 안에 다룰 수가 없었다. 서로 각자 어떤 문제를 쟁점으로 갖고 올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예상외의 주제들에 흥미를 느꼈고, 그만큼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때 다루었던 주제들을 열거해보자면 G20 반대 투쟁에 관한 국제 관계학-경제적 관점,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리, G20 반대 투쟁을 대하는 진보 진영의 문제점, 음악 저작권과 공영화의 문제(앞의 논의와 저작권의 법적-투쟁 영역과의 연관성), 과학 혁명과 근대 학문의 분화 과정에 대한 비판 의식, 행동경제학을 바라보는 좌파적 시점, 존 그레이와 유물론의 근접성과 차이점 비판 등으로 다양했다.

이에 대한 주요 내용들을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다음과 같다. G20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진보 진영의 대응은 느슨했고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으며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환한 비판이 부족했다는 것, 현재 저작권은 심지어 좌파 진영에서조차 당연하게 ‘소유권’의 영역으로 쉽게 수용되고 있지만 실상 이는 예술 생산자에 대한 보수로서 이야기 될 성격의 문제가 아니며, 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해관계와 저작권의 관계를 예술 생산자의 정당한 보수 문제로 보려는 이념이 확산되어 있다는 것, 과학 혁명 이후 인문주의와 과학주의 사이의 분화가 마치 당연한 분화처럼 여겨지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은폐된 역사적 사실을 되짚어볼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