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와 관련된 남의 글/펌글

[번역]노르웨이사태에 대한 지젝의 commentary

최근 노르웨이 참사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언론 기고글 두 개의 번역문입니다. 첫 번째 글은 다른 분이 번역한 걸 퍼온 것이고, 두 번째는 가디언지 기고글은 제가 번역했습니다.

원어 링크 : http://www.abc.net.au/religion/articles/2011/07/26/3030861.htm(7월 26일)

슬라보예 지젝 - 반 이민주의 정치 :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주의

최근의 사건- 예를 든다면 집시의 프랑스로부터의 추방, 독일에서의 국수주의와 반이민주의의 부흥, 노르웨이에서의 학살-은 서부 및 동부유럽에서의 장기에 걸친 정치 공간의 재배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유권자의 다수를 대표하는 두 개의 주요정당- (기독신민당, 자유보수당, 인민당과 같은) 중도우파 정당과 (사민당, 사회당과 같은 ) 중도 좌파정당이 주도권을 쥐고 (생태주의당, 공산당과 같은) 군소 정당이 소수 유권자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동유럽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최근의 선거 결과는 다른 양극화의 출현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예를 든다면 낙태, 게이의 권리, 종교적 그리고 인종적인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문화 주제와 더불어 글로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하나의 압도적인 거대정당이 존재한다. 이의 반대편에는 점점 강력해지고 있는 반이민주의 포퓰리스트 정당이 있으며 주변부에 공개적으로 신파시스트 집단을 거느린다. 이러한 것의 가장 좋은 예는 폴란드이다. 폴란드는 과거 공산주의의 소멸 이후 주요 정당은 수상인 도널드 터스크의 “반 이데올로기적인” 중도 자유당과 카진스키 형제의 보수 기독교 법과 정의당이다.

비슷한 경향이 우리가 목격한 바와 같이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헝가리에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핵심에 다가갈 것인가??

복지국가로 유지된 수십년 동안의 희망 이후, 재정 삭감은 일시적인 것으로 판매되었고 사물들은 곧 정상화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유지될 때, 우리는 위기, 혹은 긴급 경제상황이 영원한, (복지를 축소하고, 건강과 교육 서비스를 감축하고, 직업을 더욱 비정규화하는) 모든 종류의 내핍 수단을 사용하는 새로운 시대로 입장하게 된다. 위기는 생활 방식이 되고 있다.

1990년대 공산정권의 몰락 이후 우리는 국가 권력의 실행의 주된 형식이 탈정치화된 전문가 행정과 이해관계의 조정이 되는 새로운 시대로 입장했다.

열정을 이러한 종류의 정치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포를 통해서다. 이민자에 대한 공포, 범죄에 대한 공포, 신 없는 성적 타락에 대한 공포, (높은 세율과 통제라는 부담을 가지는) 과도한 국가에 대한 공포, 생태적 파국에 대한 공포, 그리고 성 희롱에 대한 공포 말이다(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은 공포의 정치의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형식이다).

이러한 정치는 항상 편집증적인 군중에 대한 조종에 의지한다- 공포에 질린 남녀에 대한 공포스러운 결집 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새천년의 첫 10면에서 가장 큰 사건이 반이민주의 정치가 주류에 편입되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주변부의 극우 정당과 연결한 탯줄을 끊어버렸던 순간이 되었다.

자신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에서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는 주요 정당들은 이민자들이 그들을 맞이하는 나라를 정의하는 문화적 가치에 적응하여야 하는 손님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이제 수용한다. “여기는 우리나라다. 사랑하거나 아니면 떠나라”가 메시지인 것이다.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인종주의에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본다면 그들의 다문화주의적인 관용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이민에 반대하고 다른 사람들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유지하는 자들과 얼마나 공통점을 가지는지 알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타자, 좋습니다. 나는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만의 공간을 너무 침범해서는 안됩니다. 그 순간, 그들은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나는 약자에 대한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끄러운 랩뮤직을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심적인 인권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불편해지지 않을not to be harasseed 권리”, 즉 타자에 대하여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권리이다. 실행이 저지되어야 할 인명살상을 계획한 테러리스트는 법의 지배로부터 면제된 텅 빈 공간인 관타나모에 소속된다. 그리고 근본주의 이념을 가진 자들은 그가 증오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침묵하여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나의 평화를 방해하는 유해한 주체들이다.

오늘날의 시장에서 우리들은 유해 요소가 제거된 일련의 상품을 발견한다.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 없는 크림, 알콜 없는 맥주 등등. 그리고 목록은 계속된다. 섹스 없는 가상 섹스는 어떤가? 사상자 없는 전쟁이라는 -물론 우리 측 이야기다- 콜린 파웰의 교전 원칙은 전쟁 없는 전쟁 아닌가? 전문가들의 행정 기술이라는 우리시대의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정치 없는 정치 아닌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의 관용적인 자유 다문화주의를 타자성이 박탈된 타자-카페인 없는 타자-대한 경험로 이끈다.

이러한 중화의 메커니즘은 1938년에 로버트 브라지야크Robert Brasillach가 가장 잘 정식화했다. 그는 프랑스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는데 자기 자신이 “온건한” 반유대주의자라고 생각했으며 합리적인 반유대주의의 공식을 고안했다.

“우리들은 영화를 보면서 절반은 유대인인 찰리 채플린에 갈채를 보낼수 있으며 완전한 유대인인 예후디 메뉴인에 대해서도 갈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학살의 실행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예측이 불가능한 본능적 반유대주의 행동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합리적인 반유대주의를 고안해 내는 것임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민자들의 위협”을 다루는 우리들의 정부의 방식과 유사하지 않는가? 그들은 직접적인 포퓰리스트 인종주의를 “비합리적”이고 우리의 민주주의적 기준에 수용될 수 없다고 것으로 정당하게 거부한 후, 인종주의적 방어수단을 “합리적으로” 지지한다.

혹은 오늘날의 브라지야크로서 그들중 일부인 사민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들은 아프리카계 스포츠맨, 동유럽계 스포츠맨, 아시아 의사, 인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에게 갈채를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학살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항상 예측불가능하고 폭력적인 반이민주의 방어수단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합리적인 반이민주의 방어를 고안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웃의 독성에 대한 중화라는 이러한 환상은 직접적인 야만주의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주의로의 명확한 여정을 암시한다. 그것은 자신으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인 사랑으로부터 야만적인 타자와 맞선 우리 부족에 대한 이교도적 특혜로의 퇴행을 드러낸다. 그것은 비록 기독교적 가치에 대한 방어로서 은폐되어 있긴 하지만 그자체가 기독교적 전통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인 것이다. (끝)

원어 링크 :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11/aug/08/anders-behring-breivik-pim-fortuyn (8월 8일)

브레이빅이 타켓을 설정한 불쾌한vile 논리
브레이빅 이전에 그와 비슷한 Pim Fortuyn는 우익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올바름 사이에서 교차점을 구현했다.

슬라보예 지젝, 가디언지 기고문.

브레이빅은 노르웨이에서 70명 이상의 사람을 죽였다. 우리는 브레이빅의 살인 행위에 대한 반응뿐만 아니라 그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정당화를 통해 무언가를 사유할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 70명 이상을 죽인 기독교인 “맑시스트 사냥꾼”의 성명서는 절대 미친놈의 횡설수설이 아니다. 이것은 반이민주의 포퓰리즘의 부흥이라는, 암시적인 토대에 기여하는 “유럽의 위기”의 결과적인 폭로이다. 성명서 내용 사이의 심각한 불일치는 반이민주의 포퓰리즘의 내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징후라 할 수 있다.

그의 성명서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브레이빅이 그의 적들을 구성한 방식이다. 그는 세 가지 요소인 맑시즘, 다문화주의, 이슬람을 조합하는 데, 사실 이 각각은 다른 정치적 영역에 속해 있는 것들이다. ‘맑스주의’적 ‘급진좌파’,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 상호 배타적인 다른 요소들을 단 하나의 적의 책임으로 돌리는 과거 파시스트들의 습관이(“볼셰비키-재벌-유대인의 음모”) 브레이빅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귀환했다.

심지어 더 암시적인 것은 브레이빅이 급진적인 우파 이데올로기의 카드들을 뒤섞으면서 스스로를 설계하는 방법이다. 브레이빅은 기독교의 교리를 신봉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그는 불가지론자이다. 기독교는 그에게 단지 이슬람에 반대하기 위한 문화적 구조물일 뿐이다. 그는 반여성주의자이며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인” 사회를 선호하며, 낙태를 지지하고 스스로를 동성애에 호의적인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선구자는 네덜란드의 우익 포퓰리스트 정치인이었던 Pim Fortuyn이다. 그는 그가 전체 유권자의 5분의 1의 지지를 얻을 것으로 예상되던 선거가 있기 2주전에 죽었다. 그는 역설적인 인물이었다. 우익 포퓰리스트였지만 그는 대부분의 사안들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고자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내세우는 견해 또한 그러했다. 그는 많은 이민자들과 좋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던, 타고난 아이러니의 감각을 선보이던 동성애자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훌륭한 관용을 갖춘 자유주의자였다.

그가 구현한 것은 우익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교차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우익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적 관용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는 오류에 불과하며, 우리가 그것들을 동전의 양면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의 산 증인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인종주의자가 내세우는 여타의 주장들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인종주의자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브레이빅은 나치즘의 요소와 히틀러에 대한 증오를 결합한다. 그가 자신의 성명서에서 영웅이라고 평가한 인물 중 한 명은 노르웨이 반 나치 저항군의 지도자였던 Maz Manus였다. 브레이빅은 반 이슬람주의자 씩이나 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증오는 무슬림의 ‘위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그가 정반대로 이스라엘이 이슬람의 팽창을 막는 첫 번째 방어지점이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에 호의적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 신전이 다시 건축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유대인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의 선언문을 보자 :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다면 서구 유럽에 유대인 문제란 없다. 서구 유럽에는 유대인이 오직 1백만 명밖에 없으며, 이 1백만 명 중 80만 명은 프랑스와 영국에 살고 있다. 반대로 6백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 미국은 상당한 유대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는 시오니스트-나치라는 궁극적인 모순에 도달했다. -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핵심은 브레이빅의 테러에 대해 ‘유럽의 권리’라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관점이 제공해준다. 이런 관점의 모토는 그의 살인적인 행위를 비난하면서, 그가 “진정한 문제에 대한 정당히 우려”를 표명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유럽의 주류 정치는 이슬람화와 다문화주의에 의한 유럽의 쇠퇴를 막는데 실패했다.”거나, 예루살렘의 포스트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노르웨이와 다른 유럽의 이민자 통합을 위한 정책을 진지하게 재평가하는 기회로 오슬로의 비극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사설을 실은 신문은 이후에 이에 대해 사과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는 “이 테러 행위는 이스라엘 정책을 재평가하는 데 기여해야한다.”와 같은, 팔레스타인들의 테러에 대한 비슷한 해석을 아직까지 듣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은 이러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 : 다문화적인 이스라엘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시오니스트 우파들의 ‘이러한 계약’pact에 대한 대가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압박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기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에게 반대하기 위해 이용되었던 이전의 논쟁이 반동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 이 계약에 내포된 거래는 다음과 같다: “만일 너희가 우리의 땅 한복판에서 팔레스타인들을 관용하지 않을 우리의 권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너희의 땅 한복판에 있는 다른 문화들을 향한 너희들의 불관용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거래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지난 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은 최초의 “다문화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유대인들에게 가장 문제는 다른 문화들이 지배적인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문화를 손상되지 않는 채 보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새로운 이성이 바로 그것들을 강요하는 시대에 들어선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유럽이 자신들의 ‘민주적 개방성’이 사실은 ‘배제’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역설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로베스피에르가 오래전에 말했듯이 자유의 적을 위한 자유는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원리적으로,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이 지점에서 이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어야만 한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에 브레이빅이 자신의 목표를 선택한 몹시 불쾌한 논리가 있다. 그는 외국인들을 공격하지 않고, 유입되는 외국인들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적인 그의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을 공격했다. 문제는 외국인들이 아니라 우리 유럽의 정체성이다.

비록 지금 진행되고 있는 유럽연합의 위기가 경제와 금융 위기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이것은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정치적인 위기이다. 2년 전 유럽 연합 헌법에 관한 국민투표의 실패는 투표자들이 유럽연합을 사람들을 결집할 수 있는 어떠한 비전도 갖추고 있지 않은, 단지 기술적인 경제 연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시그널이다. 유럽연합에 대한 최근의 저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는 반 이민주의 뿐이었다.

최근 동유럽의 탈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의 호모포비아의 분출은 우리에게 사고의 중지를 선사한다. 2011년 초 이스탄불의 게이 퍼레이드에서는 수천 명이 어떤 폭력이나 소란 없이 평화롭게 행진했다. 똑같은 시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진행된 게이 퍼레이드에서, 경찰은 수천 명의 폭력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잔인한 공격으로부터 참가자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터키인들이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유럽의 유산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 그래서 유럽이 터키인들의 유입을 차단할 때, 우리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동일한 규칙을 동유럽 국가들한테도 적용하는 것이 어떤가?

반유대주의는 다른 형태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호모포비아의 연장선에 있다. 이스라엘은 이런 점에서 재앙적인 실수를 했다. it decided to downplay, if not completely ignore, the "old" (traditional European) antisemitism, focusing instead on the "new" and allegedly "progressive" antisemitism masked as the critique of the Zionist politics of the state of Israel.(이 부분은 말끔하게 번역이 안 되서 원문으로 남겨두었습니다 ㅠㅠ) 이러한 입장에서, Bernard Henri-Lévy는 최근 21세기의 반유대주의는 진보적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테제로 인해 우리는 ‘반자본주의를 혼동하게 만드는 반유대주의’라는 고전적인 맑스주의자들의 해석에 다시 주목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대신, 분노는 이 체제를 부패하게 만든 특정한 인종집단에게 책임을 묻는 것에 주력한다.) 레비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따르면, 오늘날의 반자본주의는 반유대주의라는 형태로 위장하고 있다.

고전적인 반유대주의를 공격하는 이들의, 소리 없는 그러나 그럼에도 효과적인 퇴장은 고전적인 반유대주의가 전 유럽에 돌아오는 그 순간 벌어질 일이다. 헝가리부터 라트비아에 이르는 탈 공산주의 동유럽 국가들에서 특히 그러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심지어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 일은 미국에서의 벌어지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시오니즘 사이의 괴상한 조합이다.

이러한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이 괴상한 조합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변화해서가 아니다. ‘시오니즘’ 스스로가 역설적이게도 유대인을 증오하는, 반유대주의의 몇 몇 논리들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는 유대인을 그들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의 계획을 의심하는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이라는 적을 구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오니스트들의 ‘적’으로 구성된다. 그는 위험하다 왜냐면 그는 우리 사이에서 살고 있으나, ‘진정한 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미국의 급진적인 우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폭스 뉴스와 이스라엘 팽창주의의 견고한 지지자들은 가장 대중적인 사회자 글렌 벡을 강등시켜야만 한다. 최근 그의 언급은 명백하게 반유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하는 데 반대하는 표준적인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다른 모든 국가들처럼 이스라엘도 비판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반유대주의적 목표를 위한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악용한다.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좌파적인 비판을 거부할 때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주장에 대해서는 2008년 7월 Viennese daily Die Presse에 나온 환상적인 만평이 묘사했다. 이 만평에는 완고한 나치처럼 보이는 두 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등장한다. 그들 중 한 명이 손에 신문을 쥔 채로 그의 친구에게 말한다. “여기서 너는 다시 어떻게 완전하게 정당화된 반유대주의가 이스라엘에 대한 천박한 비평을 위해 악용되는지 볼 수 있어!” 이들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동맹자들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