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와 관련된 남의 글/펌글

[번역]The London Riots – On Consumerism coming Home to Roost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영국 폭동 사태 관련 글 "The London Riots – On Consumerism coming Home to Roost"을 번역했습니다.

영어 원문 :
http://www.social-europe.eu/2011/08/the-london-riots-on-consumerism-coming-home-to-roost/

런던 폭동 : 소비자주의의 자업자득이다!
2011년 8월 9일 지그문트 바우만

이 폭동은 배고픈 자들에 의한 폭동도, 빵을 달라는 폭동도 아니다. 이 폭동은 어딘가 모자르고, 자격을 박탈당한 소비자들의 폭등이다.

혁명은 사회적 불평등의 주요 산물이 아니다. 그러나 지뢰밭들이 있다. 지뢰밭들은 무작위로 산재해 있는 폭발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 중 가운데 일부가, 언젠가 폭발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것이 폭발할지, 언제 폭발할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특정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혁명에서, 그것들을 찾아내고 제 시간에 뇌관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다. 비록 지뢰밭 유형의 폭발이 아니라도 해도 말이다. 특정한 부대의 군인들에 의해 배치된 지뢰밭의 경우, 당신은 다른 부대의 다른 군인들을 보내 지뢰를 파내고 그것들을 해체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나이든 군인의 지혜를 상기한다면,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병은 오로지 한 번만 실수할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배치된 지뢰밭의 경우, 그런 해결책(비록 기만적이기는 하지만)이 먹혀들지가 않는다. 지뢰를 설치하고 그것들을 파내는 것은 낡은 지뢰에 새로운 지뢰가 첨가되는 것을 멈출 수도 없고, 그것들을 밟는 것을 피할 수도 않는, 같은 부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지뢰를 배치하는 것과 그 폭발물에 의해 희생되는 것은 일괄적인 과정이다.

이미 500년 전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가 말했듯이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구별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시대마다, 사람들이 소유하고, 소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 격렬하게 갈구하고 가장 격렬하게 분개하는 대상들은 다르다. 2세기 전 유럽만 해도, 유럽과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는 몇 십 년 전만 해도, 아니 지금도, 독재국가에서는, 부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에서는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의 투쟁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대상이 빵이나 쌀이다. 신의 가호로 인해, 과학, 기술과 합리적인 정치적 방편들 덕분에 이것들은 이제 더 이상 투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오래된 구분(유산자-무산자)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꽤 많이, 욕구의 대상들은(그것이 없을 때 사람들이 가장 격렬하게 분노하는) 오늘날 많아졌고 다양해졌다. 그것들을 소유하려는 유혹은 물론, 그것들의 숫자 자체도도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가지지 못한 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은 물론 가지지 못함에 의해 촉발되는 분노, 모욕감, 악의, 원한도 증대하고 있다. 상점을 약탈하고 그것들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모두 같은 충동에서 유래하며, 같은 열망을 충족시킨다.

지금 우리는 모두 소비자이다. 소비자의 권리와 의무에 따라, 소비자가 우선이고 가장 중요하다. 9.11 이후 조지 부시가 미국인들에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정상으로 돌아가자”고 요청했을 때, 그 요청에 제일 부합하는 단어는 “상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쇼핑이 얼마나 활발한가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새롭고 향상된 상품으로의 대체를 위해 하나의 소비재를 얼마나 용이하게 처리하는 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누구의 인생이 얼마나 성공했느냐는 경쟁에서 각자의 사회적 지위와 점수를 측정하는 주된 지표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상점을 삶의 고통이나 질병을 치료하거나 적어도 완화시켜주는 약들로 가득 차 있는, 약국으로 대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상점과 쇼핑은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하고 진실 되게, 종말론적인 차원을 획득한다. George Ritzer가 밝혔듯이 슈퍼마켓은 우리의 신전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쇼핑 리스트는 우리의 성무일도서이고, 쇼핑몰을 거니는 것은 성지순례이다. 가장 열광적인 감정이라는 장소에 더 매력적인 한 가지를 들여놓기 위해 충동들을 구매하고 소유물들을 처리하는 것은 더 이상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 소비자의 향락의 충만함은 삶의 충만함을 의미한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쇼핑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무산자라 할 수 있는 모자란 소비자defective consumers들에게, 쇼핑하지 않는 것은 삶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나의 삶이 보잘 것 없고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거슬리고 곪아터진 오명이다. 단지 쾌락이 부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존엄도 부재한다. 삶의 의미도 없다. 궁극적으로, 주변의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을 존중할 어떠한 근거도, 인간성의 근거도 없다.

슈퍼마켓은 신도들의 예배를 위한 신전이다. 소비자들의 교회에 대해 알아차리고 그들로부터 추방당한 파문자들에게, 소비자들의 교회는 망명자들의 땅에 서 있는 적들의 전초 기지이다. 그들은 비슷한 믿음으로부터(파문자들의 믿음) 다른 이들을 보호해줄 상품들의 출입을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곽을 엄중히 감시한다. 조지 부시가 동의했듯이, 그들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강철의 쇠창살, 블라인드, CCTV, 입구와 안에 숨겨진 보안 요원은 오로지 전장에서, 계속되는 적대적인 상황에서 더해진 것들이다. 그들은 무장한 채로 매일 매일, 본래의 빈곤과 적은 부, 인간성, 모욕감을 상기시키는 우리 내부의 적을 철저히 감시한다. 그들의 거만함에, 가까이 하기 어려운 오만함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그 감시자들은 소리칠 것이다 : 네가 감히? 어디 한 번 해봐! 그런데 너흰 무얼 하려는 거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