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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터널’에는 있었지만 ‘세월호’에 없었던 한 가지

‘터널’에는 있었지만 ‘세월호’에 없었던 한 가지

[리뷰] 구조요청에 ‘응답’하며 생명을 살려낸 영화 터널, 우리 앞에 놓인 세월호는 어떤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한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은 예술가들에게도 고민을 던지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그런 사건 중 하나다. 세월호 이후 탄생한 수많은 재난영화는 세월호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터널’은 대놓고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영화다. 자동차를 타고 집에 가다 터널이 무너지면서 터널 밑에 깔리는 주인공 이정수(하정우 역)는 우연히 세월호에 탔다가 바다에 빠져버린 304명의 희생자들을 연상시킨다. 

많은 장면에서 터널은 세월호를 소환한다. 구조차량이 주차할 장소까지 들어와 버린 방송국 차량과 피해자 가족과 정치인을 향해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들, 사고 현장에 나타나 사진을 찍는 정치인들의 모습까지 이 영화는 데자뷰처럼 세월호를 보여준다.  

▲ 영화 터널 속 이정수(하정우 역). 터널 스틸컷.
‘터널’의 붕괴사고도 기본적 수칙을 지키지 않은 데서 발생했다. 영화 속 건설사 관계자는 “대한민국에서 FM대로 지어지는 건물이 어딨나”라고 말한다. 세월호에도 그대로 적용된 법칙이다. 안전수칙은 무시됐고 그 자리를 ‘관행’이 차지했다. 

구조에 반드시 필요한 제설차는 도시의 눈을 치우느라 도착하지 못하고, 열악한 구조환경 속에서 한 구조대원이 사망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현장과 사망한 민간인 잠수사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구조대원이 사망하자 터널에 갇힌 피해자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 역)이 “너 때문에 죽었다”고 비난받는 모습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정수의 가족들에게도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는 여론의 무관심이 가해자로 작동한다. 구조작업 중단을 결정한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처럼 세현도 “국민들이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는 말에 구조작업을 중단하는 데 동의한다. 언론은 진실을 파헤치는 대신 패널들을 불러다놓고 ‘이정수가 살아있을지’ 잡담에 가까운 토론을 벌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한 인물은 김영자 국민안전처 장관(김해숙 역)이다.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김 장관은 피해자 정수의 가족과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다 죽어가던 정수가 구출되어 나올 때도 사진을 찍어야한다며 호송을 늦춘다. 구조작업으로 인해 다른 터널 공사가 늦춰지고 갈등이 발생하자 “잘 협의해라”는 막연한 지시만 내린다. 참사 발생 7시간 만에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데 발견하기 힘드냐”는 질문을 던지던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 영화 터널 속 김영자 장관(김해숙 역). 예고편 갈무리.
세월호와 터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이다. 세월호와 터널에는 기레기(기자+쓰레기), 사진만 찍으려는 정치인, 무책임한 장관, 가해자 취급을 받는 피해자 가족들이 등장하지만 세월호 희생자들과 달리 터널의 주인공 이정수는 35일 만에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결말의 차이는 세월호엔 없었던 인물, ‘터널’의 119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역)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김대경은 무책임한 이들이 넘쳐나던 터널에서 거의 유일하게 책임지는 사람이다. 김대경 대장은 구조가 늦어질 때마다 책임을 미루는 대신 “정말 죄송하다”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 “물이 떨어지면 오줌을 마셔라”고 말하고 난 뒤 미안한 마음에 자신도 오줌을 마신다. “나도 안 해본 걸 남에게 시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공감능력은 인간성을 끝까지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다.

김대경이 상징하는 것은 ‘응답’이다. 이 응답이 세월호와 터널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구조를 그만하라는 상황에서 김대경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버리면 미안하잖아”라며 홀로 터널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이정수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계속 누르고 있던 자동차 크락션 소리를 잡아냈다.

▲ 영화 터널 속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역). 터널 스틸컷.
영화 터널에서 ‘응답’을 상징하는 또 다른 요소는 고립된 이정수가 유일하게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클래식 방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조현장에 나타난 수많은 카메라 대신 이 클래식 방송이 정수와 그 가족들에게는 진짜 언론이었다. 클래식 방송은 구조현장에 나타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극적 장면을 쫓아다닌 기자들과 달리 매일 조용히 정수를 위로하기 위한 음악을 틀었고 정수의 아내 세현을 출연시켜 그의 목소리를 방송했다. 이 클래식 방송은 고립된 이정수에게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터널의 해피엔딩 이후 다시 세월호를 생각한다. 진상규명을 위해 만든 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선체인양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사를 끝마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유가족 유경근씨는 18일 특조위 조사 기간 보장을 요구하며 무제한 단식에 돌입했다. 한국사회는 이들에게 응답하고 있을까? 김대경 구조대장은 경제도 어려우니 구조를 멈추고 터널 공사를 해야 한다는 한 전문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깜빡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