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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정언명령 요약정리

 


정언명령 (02 쉽게 읽는 칸트)

저자
랄프 루드비히 지음
출판사
이학사 | 1999-02-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등 의 저작으로비판 철학의 체계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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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정언명령으로 나아감

순수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비판으로 나아가는 길을 소개한다.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적 변증론으로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칸트는 이성이 자신을 전개한 결과 모순과 불착, 추락에 직면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성이 증명하진 못했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념들이 있는데, 그 중 윤리학을 위해 중요한 것이 바로 자유이다. 칸트는 현상세계를 지배하는 자연 인과율 말고, 자연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윤리적 당위이며, 명령이 이 당위를 표현한다. 자연의 인과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동시에 그것과 다른 무엇이 있는데, 이것은 행위가 자율적으로 시작되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며 자유이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은 자연 인과율이 아니지만, 그 일은 일어났다!) 그 실재성과 가능성이 증명될 순 없으나 사유가능하며, 자유와 자연은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2부 도덕의 최상원리로 나아감

1. 실천이성의 연구 계획

순수이성비판이 순수한 인식능력에만 관계하는 데 반해 실천이성비판의 관심사는 이성에 의거하여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의지는 대상(행위)을 산출하는, 즉 우리의 행위를 원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경험과 무관하게 이성에 의거하여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도덕형이상학이다.(<->실천적 인간학) 인간의 의지는 그 본성대로 경험에 의해 규정되는 것 외에 자유의 이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 구속성을 지닌 도덕 법칙은 절대적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 순수한 이성에 의해 근거 지워져야 하지 경험이나 본성, 여건에 의해 근거 지워져서는 안된다. 실천규칙이 아니라 도덕성의 최상 원리. 이 최상 원리에 대한 연구는 정언 명령으로 귀착되었고 이렇게 나아가는 길 위에 선의지와 의무라는 두 가지 정거장이 있다.

2. 첫 번째 정거장: 선의지

이 세계는 물론 세계 밖 어디에서도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선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다.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선의지 외에 아무것도 없다. (농담, 용기, 결단력, 끈기, 권력, 재산, 명예 모두 경우에 따라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선의지는 오직 의욕 자체에 근거해서만 선하다. 그것이 무엇을 성취하고 실현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며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 쓸모가 있기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의욕 자체만으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3. 두 번째 정거장: 의무

선의지는 오직 의무에 의거해서만 규정될 때 진실로 선하다. 칸트는 명백하게 의무에 위반되는 행위, 다른 성향에 이끌려 하게 된 행위에 관심이 없다. 그는 의무에 의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합의무적, 그리고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를 구별한다. 한 상인이 상품 가격을 정직하게 정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것은 합의무적이지만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는 아닐 수 있다. 그 상인은 자식의 이익을 위해 정직한 가격을 정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의지는 그가 초래한 결과에 근거하여 선한 것이 아니다.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실현되어야하는 의도가 아니라 행위를 규정하는 준칙에 근거하며 고로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는 행위 대상의 현실성이 아니라 행위의 원천인 의지의 원리에만 의존되어 있다. 즉 행위의 준칙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 칸트는 준칙을 ‘의지의 원리’, ‘행위의 주관적 원리’ 등으로 정의하지만 칸트 연구자들의 정의를 종합해 볼 때 준칙은 계획된 행위 방식이며 개별적 실현보다 더 많은 것의 요구를 수반한다. 그러나 준칙에 의거하여 하나의 행위를 했다고 할 때 나의 행위는 아직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가 아니다. 행위의 토대에 있는 나의 준칙이 정언 명령의 심사를 받은 경우에만 나의 행위는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이다.

이러한 정언 명령에 이르기에 앞서 칸트는 의무에 관한 또 하나의 개념, 법칙에 대한 외경심에 대해 규정한다. 의무는 법칙에 대한 외경심에서 유래하는 행위의 필연성이다. 여기서 법칙이란 도덕/ 실천/ 윤리 법칙이며 가상적 세계, 감각 세계의 피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이런 법칙에 대해 외경심을 가져야하며 이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외경심은 감정의 영역이 아닌가?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도덕 법칙에 대한 외경심은 행위의 결과로 받아들여진 좋은 감정과 달리 행위에 선행하며 이성 자체에 의해 산출되는 감정이다.

칸트는 도덕의 최상 원리를 찾는 데 있어 경험을 계속 거부하려 한다. 선천적 이성 개념만이 윤리학의 근거 지움을 위해 허용되어야한다. 그리고 하나의 인식이 선천적 인식이라 불리기 위한 필요조건인 보편적 타당성과 필연적 타당성은 행위의 선천성 역시 결정한다. 칸트는 정언 명령이 인간 행위의 선천성을 규정하는 이 두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4. 이성의 강요: 정언 명령과의 첫 만남

자연 세계와 가상 세계는 모두 인간의 고향이다. 그리고 가상 세계에서만 자유와 도덕성이 가능하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만 이성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스스로 하나의 법칙을, 하나의 원리를 정립할 수 있다. (인간은 다이어트 가능) 자연 법칙에 복종하려면 이성이 필요 없지만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 이처럼 이성에 의해 필연적 행위로 인정된 행위가 선택되는 경우 이것을 의지, 실천 이성이라 한다.

그러나 이성이 행위를 전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로운 자의에 빠져 쾌락을 선택한다. 이런 이유로 의지는 이성의 근거들에 의하여 강제되어야만 한다. 의지를 강제하는 것은 하나의 지시이며, 지시를 정식화시킨 것이 명령이다. 칸트는 이 명령을 가언, 정언으로 구별한다,

가언적이란 앞서 전제함을 의미한다. 가언 명령은 하나의 행위가 다른 어떤 가능적 내지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타당한 명령이 아니다. 정언 명령은 그 행위에 의해 달성 되어야 하는 다른 어떤 의도를 명령의 전제로 가지지 않는다. 이런 명령을 도덕성의 명령이라 부른다. 두 명령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의지의 강제 개념이다. 칸트의 실천 법칙에서, 정언 명령은 행위의 질료가 아니라 행위의 형식에 관여한다. 그래서 칸트의 윤리학은 형식(주의)윤리학이라 불린다. 그는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정언 명령을 다섯 개의 공식으로 제시한다. 그 중 제 1공식이 바로 다음과 같다. “네가 그에 따라서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마치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정언 명령에 대해 논하는 중간 부분에 칸트는 다시 도덕법칙이 사례나 경험을 통해 밝혀질 수 없음을 반복한다. 왜냐면 우리는 원인을 경험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녹고 있는 버터를 보고 그 원인인 태양의 빛을 알 수 없다.

5. 쉬어 가는 곳 : 보편화 방법에 관하여

싱어의 보편화에 대해 살펴본다. 싱어에 의하면 보편화 방식은 아무런 제한 없이 타당성을 가진다. 이 방식은 윤리학의 유일한 원리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모든 사람이 A를 할 때 끔찍하다면 누구도 A를 해선 안된다. 싱어는 더 나아가 보편화의 조건을 발견하려 한다. 즉 모든 썩은 치아는 “신경이 제거되어 있지 않는 조건 하에서” 통증을 야기한다. 이 보편화 원리는 인과 명제에만 적용되며 서술적 명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날개가 부러지면 비행기는 언제나 추락한다.”는 가능하지만, “한 책상이 1.3M이다”는 보편화가 되지 않는다. 도덕적 명제 역시 인과 명제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 그럼 어떤 행위들에 보편화 원리가 적용될 수 있을까? 즉 도덕적 행위의 징표는, 도덕 기준은 무엇인가?

1) 보편화 진행 절차는 행위 방식과 관련하여 치환 가능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건축가가 되고자 한다.”, “어느 누구도 건축가가 되려 하지 않는다.” 모두 그 귀결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도둑질해선 안된다.”와 “모든 사람이 도둑질한다.”의 귀결은 일치하지 않기에 “너는 도둑질해서는 안된다.”는 참된 도덕적 명제이다. 2) 보편화 방식은 반복될 수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17시에 밥을 먹으러 가면 끔찍하다. 그러나 이는 16시에도, 15시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어느 누구도 어느 시간에도 식사하러 가서는 안된다. 보편화 진행 절차의 구체적 적용이 각각 반복될 수 있다면 그러한 적용은 동시에 치환 가능하다.

칸트는 싱어와 달리 행위나 행위의 귀결이 아니라 준칙, 의도된 행위 방식을 해부한다. 또한 보편화 가능한 행위의 조건들을 찾지도 않는다. 그는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철회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정언적으로 타당한 도덕 법칙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제3부 정언명령

1. 제1공식

앞에서 말한 정언명령의 제1공식을 적용해보자. 예컨대 내가 은행에서 돈을 훔친다고 해보자. 이 행위가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십계명 때문이 아니다. 나는 도둑질 금지의 근거를 타율적 규정이 아니라 나의 이성 안에서 찾아내야한다. 첫 번째로 준칙을 정식화한다. 삶을 쾌락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경우 나는 언제나 은행에서 돈을 훔친다. 두 번째로 이 준칙을 보편법칙으로 생각해보자. 이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은행에 있는 내 돈을 훔쳐 가도 좋다는 사실 또한 원해야 한다. 다른 예로 무임승차를 생각해보자. 다만 주의할 것은 이 준칙을 일반화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무임승차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방식의 일반화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차비를 지불할 수도 있다.”는 결과에 도달해야한다.

2. 제2공식

정언명령의 제2공식은 다음과 같다. “마치 너의 행위 준칙이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하듯이 그렇게 행위 하라.” 칸트는 이 제2공식의 묘사를 위하여 네 가지 예를 사용한다. 이 네 가지 예는 아래와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


완전한 의무


자살


약속


불완전 의무


자기 계발


타인을 도움


여기서 완전 의무란 내가 한 준칙의 일반화를 모순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또 의욕할 수 없는 경우이며 불완전 의무는 내가 한 준칙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는 없지만 모순 없이 의욕할 수 없는 경우이다.

3. 칸트가 제시한 예들

자살의 예를 보자. 자살을 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배반되는 것인가? 그의 준칙은 “만일 내 생명의 연장이 쾌적함을 약속하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가져올 위험이 더 많다면, 나는 차라리 생명을 단축해 버리겠다. 그것이 나의 자기애의 원리에 적합하다.”이다. 이 자기애의 원리가 자연의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감정에 의해 생명이 파괴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그러한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며 자연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행위나 행위의 귀결이 아니다. 즉 “만일 모든 사람이 자살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가 아니다. 정언 명령에서 수행되어야 할 사유 실험은 준칙에만 관계한다. 즉 문제는 “어떤 하나의 준칙이 과연 자연 질서의 법칙과 유사한 그와 같은 법칙이 될 수 있는가?”이다. 자기애의 준칙을 자연 법칙으로 간주하고 보편화시킬 경우 이 준칙은 좋은 시절에는 삶의 유지로 나쁜 시절에는 삶의 파괴로 귀착된다. 하나의 동일한 자기애의 근거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온다. 그리하여 이것은 자기모순이다.

약속의 예를 보자. 나는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하고자 한다. 이 때 나의 행위 준칙은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빌리는 경우, 내가 돈을 갚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갚겠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돈을 빌리겠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옳은가? 이 법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면 약속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약속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도 불가능해진다. 고로 이 준칙은 아무런 타당성도 갖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위 준칙이 실제 보편화되는 경우 초래될 귀결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지속적 거짓말의 논리적 귀결은 아무런 의사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 공동체의 출현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류는 이것이 오류라 말한다. 거짓 약속의 귀결에 관한 인식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즉 경험이 거짓 약속의 도덕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데, 칸트는 명백히 경험을 거부했다. 고로 거짓 약속의 예가 가지는 도덕적 중요성은 거짓 약속의 토대에 놓여 있는 의지의 보편화 가능성에서 찾아야 한다. 빚을 갚지 않음이라는 행위가 자연 법칙의 필연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가 중요하다. 약속은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의무를 지우는 행위인데, 거짓 약속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우지 않는 행위로, 이것이 자연 법칙이 되면 “자기 자신에게 의무를 지우는 행위 중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에게 의무를 지우는 행위와 결합될 수 없다.”라는 명제가 도출되며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예에서 문제되는 것은 의욕 될 수 없는 것이란 개념이다. 즉 준칙이 보편화되어 자연 법칙으로 간주되는 경우 그와 함께 등장하는 사유 및 의욕의 모순이다. 자기 계발의 예의 경우를 보자. 나는 교육을 받으면 유용한 사람이 될 재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인생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이 때 준칙은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데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겠다.”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렇게 될 경우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이 모두 발현되기를 원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필연적이다. 왜냐면 능력이란 어떤 것이든 가능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능력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생활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욕구할 수는 없다. 이런 칸트의 언급에 대해 한 연구가는 “자기 계발 등한시의 원칙”이라 말했다. 나는 나의 의지의 충분한 실현을 기꺼이 단념한다. 즉 의욕 하지 않는 의지인데, 이는 자기모순이다. 또 한 연구가는 “자기 계발 포기의 준칙”이라 부른다. 의욕 하는 존재는 이성에 의거해서만 의욕 할 수 있고, 내가 내 능력의 계발 포기를 이성에 의거하여 의욕 한다면 나는 이성 존재자로서의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나의 소질은 계발되지 않을 경우 그것이 내 소질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다. 소질을 계발함으로써 도달하는 최종 상태와 계발하지 않기를 원하는 준칙이 보편화됨으로써 초래될 최종 상태는 정확히 모순된다. 즉 나의 자연 소질을 계발함, 그리고 계발하지 않음을 동시에 의욕함, 이러한 내용을 갖는 자연 법칙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다.

타인을 도움의 예를 보자. 나는 풍족하지만 다른 빈곤한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 법칙이 보편화되었을 경우, 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동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스스로 박탈하므로 그것을 원하는 의지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때 나의 준칙은 “나는 곤경에 처한 어느 누구도 돕지 않겠다.”인데, 나는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 어느 누구도 돕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를 돕는 것을 의욕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의 해석은 돕고자 하는 행위가 도움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이는 피아노 연주를 위해 연습해야한다는 가언 명령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이것과 칸트의 예가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자.

첫 번째는 목적 개념에 관계한다. 행위 할 수 있음이란 목적을 추구할 수 있음이므로 행위 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은 목적 정립의 가능성을 갖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목적과 원칙적으로 목적을 정할 수 있음의 가능성은 서로 다른 특성이다. 두 번째는 목적의 필연성, 보편성 즉 선천성이다. 인간이라면 피아노를 잘 칠 필요는 없으나 인간이라면 행위 할 수 있고 목적을 정할 수 있어야한다. 세 번째는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연관된다. “내가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한다.”는 명제에 어디에도 피아노 연주의 필연성을 선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으로부터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개념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이 네 가지 예에서, 준칙들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실만이 드러난다. 어떤 행위가 올바른 혹은 도덕적 행위인지는 어느 예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도덕 법칙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도덕 법칙에 의한 심성의 변화들은 결코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기인한다. 도덕적으로 참된 것은 법칙에 대한 외경심과 연관되지만, 이것은 인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증명할 수 없다.

4. 제3공식

의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가 밝혀졌다. 의무는 행위의 실천적-무제약적 필연성이다. 의무는 이성적 인간에게 반드시 타당해야한다. 칸트는 그 다음으로 정언 명령의 또 다른 정식화를 위해 목적과 수단 개념을 동원한다.

피아노 연주를 위해 연습한다, 라는 가언 명령에서 피아노 연주는 질료적(어떤 동기에 근거하고 있는 실천적 원리들. 반대는 형식적) 목적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관적 목적이며 행위자의 특정한 종류의 욕구 능력과의 관련 속에서만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상대적 목적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목적 그 자체라 할 수 없으며 인간만이 목적 자체이다. 다른 목적들 일반을 자신의 목적으로 정립할 수 있음, 즉 행위 할 수 있음의 이유로인간만이 목적 자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제3공식이 등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목적 그 자체.”이다.

이 공식을 앞의 네 가지 사례에 적용해보자. 자살의 경우 견딜 만한 상태를 삶의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수단으로 인격을 이용하는 것이다. 거짓 약속의 경우 돈을 빌리기 위해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자기 계발의 경우 인간의 소질들의 계발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비로소 가능케 한다. 자기 소질을 계발하지 않는 것은 인류의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 그 자체의 발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타인을 돕지 않는 경우 타인이 스스로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행동 할 수 있기 위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베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내가 목적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4. 제4공식과 제5공식

제4, 5공식에서는 자기 입법과 의지의 자율 개념이 등장한다. 이성적 의지는 이익, 혹은 매력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도덕적 행위는 이성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 보편적 입법 의지의 이념에 이해서만 규정되어야한다. 그리하여 의지는 자기 입법자의 모습을 띤다. 결론적으로 도덕성은 모든 행위의 입법에 대한 관계에서 성립한다. 이를 표현하는 제4공식은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해야 한다.”이다. 제1공식 중에 강요와 강제는 자신의 의지에서 유래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입법은 5공식에도 표현된다. 제5공식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준칙들에 의거하여 자신이 언제나 목적들을 보편적 왕국의 한 입법자일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해야한다.”이다. 여기서 목적의 왕국 개념이 등장한다. 칸트에게서 왕국이란 상이한 이성적 존재자들이 공통된 법칙들에 의해서 서로 체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적의 왕국이란 이성적 존재자들의 공동체, 어느 누구도 타인을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목적이라는 존엄성을 가지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칸트의 도덕적 이상이다.

5. 자율과 자유 : 정언 명령의 궁극적 근거

칸트의 도덕철학을 3층 건물에 비유해보면, 1층은 단적으로 선한 것, 2층은 정언 명령, 3층은 의지의 자율이다. 자율은 고대 희랍어 autos(자기 자신)와 nomos(법칙, 법칙성)에서 유래한다. 즉 내가 나 자신의 행위를 규정하는 경우 나는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자율이란 자기 입법, 자기규정이다. 의지의 자율은 칸트 철학의 거대한 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관련되어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란 대상이 우리의 인식 주위를 회전한다는 생각이다. 오성은 감각적 인상들에게 법칙을 부여하며 우리는 감각적 인상들 속에서 오성의 법칙들을 발견한다. 실천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성은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며 입법자로서 이성 존재자를 규제하는 도덕 규칙들을 제정한다. 자신이 정한 법칙에 스스로 복종할 수 있다! 도덕의 최상 원리는 정언 명령에 부합하는 것이며, 정언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바로 나는 자유롭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도덕적 행위의 전제는 내가 나의 의지를 스스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구조의 의지를 살펴보기 위해 질료와 형식 개념을 살펴야 한다. 욕구 능력의 질료란 우리가 실현하기를 욕구하는 대상이다. 욕구의 질료로 돈을 택함은, 내가 부를 욕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돈을 가능한 한 증대시키길 의욕 한다.”는 이 준칙은 이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된 법칙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실천적 법칙을 제공할 수 없다.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며, 필연적으로 규정할 수도(사랑에 빠지면 돈이 안 중요할 수도) 보편적으로 규정할 수도(돈 안 받고 시술하는 의사)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결론에 따르면 의지의 모든 질료는 경험적이며 질료에 의한 규정은 타율성의 원리이다. 돈 말고 행복 추구 역시 모든 성향과 욕망의 충족을 의미하기에 내용적-질료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다.

질료가 아닌 형식이 비로소 법칙 수립을 가능하게 만든다. 위탁품의 횡령이라는 칸트의 예를 보자. 여기서 위탁증서, 위탁인의 죽음, 내 재산의 증식 등은 모두 경험적 사건들이며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반면에 형식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이 준칙이 일반화될 경우 위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편적 법칙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이성 활동의 성과이며 하나의 반성이다. 반성의 형식적 구조는 결코 자연의 인과 관계로부터 유래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자유 의지로부터만 유래하며.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인간만이 자신의 법칙을 위한 형식을 창출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인과적 자연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도덕성과 윤리성의 원천은 자유이다. 여기서 자유란 두 가지인데, 1) 소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는 질료적 의지 규정에 대한 거부이다. “거짓 약속을 안한다.”라고 했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음은 내가 자유롭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2)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란 하나의 형식적 법칙을 창출하는 가능성이다. 이 형식적 법칙을 기준으로 나의 준칙을 평가한다.

제4부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장에서는 더 발전된 칸트의 도덕 철학에 대해 논의한다. 순수 이성의 영역과 직관 세계 영역 사이의 하나의 관계인 “전형”을 이야기한다. 감각 세계의 자연 법칙성을 기준으로 삼아 행위 준칙의 형식적 구조를 측정한다. 그러나 측정의 결과와 실천 법칙 자체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또 칸트에게서 행복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덕 법칙의 명령을 윤리적 심성의 너머까지 확장하는 법철학의 과제에 대해 다루며 <윤리학>에 등장하는 정언 명령 개념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제5부 되돌아보기 : 칸트 윤리학의 요점(4가지 단계)

1) 사유에만 존재하는 비가시적 세계의 증명될 수 없는 자유의 이념. 여기서도 법칙이 있다. 2) 가시적 세계를 초월하는 이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며 경험은 개입해선 안된다. 3)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자체이며 행위는 그것이 의무라는 이유만으로 행해졌을 때만 선하다. 그 행위가 도덕 법칙에 대한 외경심에서 유래할 때만 도덕적으로 선하다. 4) 내 행위의 준칙을 특정한 합법칙성에 복종시킨다면 나는 도덕 법칙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합법칙성의 공식은 정언 명령이다. 내가 이런 법칙을 제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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