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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가라타니 고진과 피에르 클라스트르

 


세계사의 구조

저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출판사
도서출판 b | 2012-12-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세계의 혁명을 제시한 가라타니 고진의 미래전망「가라타니 고진」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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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시사회, 국가없는 사회

가라타니 고진은 <자연과 인간>에서 지구온난화론이 음모론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들은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가라타니 고진이 지구온난화론을 음모론이라 주장하면서 무엇과 맞서려고 하는 가 라는 문제다. 가라타니는 화석연료가 지구를 뜨겁게 만든다는 과학적 근거를 통해 원자력 발전을 주장하는 이들과 맞서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상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가가 어떤 담론과 맞서려 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도 마찬가지다. 클라스트르가 대적하고 있는 담론은 서양 중심주의와 진화론적 역사관이다. 그의 인류학은 서양 중심주의와 진화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원시사회가 미개하며 문명화된 서양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논리, 원시사회와 부족국가가 서양식 근대국가로 ‘발전’했다는 진화주의를 부정한다.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다. 이는 서양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회다. 서양 정치사상에 따르면 정치의 본질이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사회적 분업과 권력관계이다. 하지만 원시사회는 그렇지 않다. 원시사회를 고찰한 16세기 유럽인들은 “족장이 부족에 대해 어떤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누구도 명령하지 않고 누구도 복종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신앙도 법도 왕도 없는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우두머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동맹을 관리하고, 전쟁을 수행한다.

그러나 동맹과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우두머리가 아니라 사회다. 우두머리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공공적인‘ 의지를 대표한다. 또한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수행할 수단(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지도자라 부르는 자들이 모든 권력을 결여하고 있고, 족장제도가 정치권력 행사의 외부에서 구성된다.” 족장에게 위세는 있으나 권력은 없다. 그의 의견은 전체로서의 사회의 관점을 표현해주는 한에서만 청취된다. 그가 권력을 발휘하거나 공공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려 들 때 그는 추방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클라스트르는 남아메리카의 야노마미족을 사례로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클라스트르가 야노마미족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렸을 때 야노마미족에게 납치당한 백인 여성 엘레나 발레로 때문이다. 발레로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추장 푸쉬에는 권력을 유지하고 넓히기 위해 전쟁을 계속 벌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혼자 싸우다 죽었다. 이처럼 원시사회의 부족원들은 권력자의 의지에 의한 전쟁을 부정한다.

한 마디로 원시사회는 나누어지지 않는 사회, ‘전체로서의’ 사회다. 이에 대해 우두머리의 권력에 맞서는 이들은 원시사회의 '개인들'이 아니냐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시사회의 구성원들은 단순히 개인으로서 우두머리의 권력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두머리에게는 자신이 행한 일들을 부족원들 앞에서 모두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부족원들은 우두머리의 말이 장황하거나 별로 영양가 없을 경우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의 규칙이다. 개인성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작동한 사후에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원시사회를 탐구함으로써 국가의 기원, 더 나아가 ‘국가 소멸의 가능조건’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2. 원시사회, 경제를 거부하는 사회

원시사회가 정치적인 측면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어떨까? 클라스트르는 멜라네시아를 연구한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의 입을 빌려 ‘원시경제’에 대해 설명한다. 고전적인 경제인류학은 원시경제를 생존경제라 표현한다. 원시인들은 빈곤하며, 따라서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린스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원시인들은 하루에 3~5시간 밖에 노동하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생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는 풍요로운 사회다.

살린스는 원시사회를 ‘가구적 생산양식’이라 부른다. 원시사회의 부족들은 더 열심히 노동해서 잉여를 생산하고 이를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노동하는데에는 언제나 강제가 필요한데, 원시사회에는 강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량자원이 충분히 모이면 그들은 사냥과 채집을 중단한다. 최소한의 필요는 충족시키려 하지만 잉여의 형성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 이 최소한의 필요가 늘 충족될 수 없기에 그들도 다른 공동체와 ‘교환’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 호혜성의 원리(의무)를 따른다. 이는 ‘생활필수품이 생산에 부합하는 반(反)잉여의 원리다. 그들의 생산은 목표를 달성하면 멈춘다. 원시사회에는 구조적으로 ’경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적 장에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제적인 것‘이 없다.

“가구적 생산양식이란 소비의 생산(필요충족)으로 기능하지만 교환의 생산(잉여를 상업화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것)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원시사회는 경제를 거부하는 사회다.” “원시사회는 모두가 겪는 빈곤을 받아들이지만 몇몇 사람들의 축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시사회에서 재화를 분배하는 권한은 우두머리에게 있다. 하지만 우두머리가 재화를 분배한다는 이유로 ‘계급’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살린스는 멜라네이사의 빅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를 밝혀냈다. 빅맨(우두머리)은 재화를 분배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남들보다 훨씬 많이 일하고 이를 통해 재화를 마련해 부족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준다. 사회가 권력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클라스트르는 살린스의 분석에 대해 ‘권력’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클라스트르는 빅맨이 가지고 있는 건 권력이 아니라 위세라고 말한다. 사회는 족장(빅맨)에게 위세를 부여하고, 족장은 그 대가로 사회에게 착취당한다는 것이다.

3. 민족학자가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스트르는 위의 가구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맑시즘을 비판한다. 정확히는 맑스주의의 경제결정주의를 비판한다. 맑스주의는 생산력에 집중하며,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원시사회를 보면 경제는 사회, 의례, 종교적 생활에서 분리될 수 없다. “민족학자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원시사회를 사고할 수 없다.” 

 클라스트르는 같은 논리에서 ‘경제인류학’이라 불리는 조류를 비판한다. (그가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경제인류학자는 모리스 고들리에와 클로드 메이야수다.) 그들은 원시사회를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 불평등에 대해 구조화된 사회에 덧씌우려 한다. 고들리에는 오스트리아 원시 부족을 연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족관계는 그 자체가 생산관계이기도 하고, 경제구조를 구성한다.” 즉 고들리에는 생산관계, 생산력, 생산력 발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틀을 원시사회에 집어넣으려 한다. 맑스주의자와 경제인류학자들 눈에 원시사회는 전(前) 자본주의 사회일 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클라스트르를 인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으로 세계사를 다시 구성한다.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부구조라 불렀던 부분이 작동함으로써 발생하는 세계사의 변화를 고찰한다. 예컨대 유목민 사회와 수렵사회와 정주혁명이 일어난 뒤의 농업사회는 분명 경제적인 생활조건이 다르다. 그런데도 사회질서는 전복되지 않았다.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에서 국가라는 권력관계의 출현이 사회적 분업을 만들어냈고, 원시사회의 사회질서를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말을 쓰려면 오히려 하부구조를 정치, 상부구조를 경제라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클라스트르의 이런 주장을 수용하여 교환양식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구조를 설명한다.

하지만 클라스트르의 이런 주장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품을 수  있다. 첫 째는 클라스트르의 맑스주의 비판이 허수아비 때리기가 아닌가 라는 의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 경제환원론자, 즉 경제가 무조건 중요하고 따른 건 안 중요하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클라스트르도 자신의 주장이 어그로를 끌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는 공식적인 저작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는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삼가한다. 그의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이 등장하는 부분은 유고인 <폭력의 고고학>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저자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5-06-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이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불완전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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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고고학

저자
삐에르 끌라스트르 지음
출판사
울력 | 2002-11-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원시사회에서 우두머리는 권력의 표면적인 장소,가정된 장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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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왜 생산양식을 통해, 경제의 변화를 통해 역사를 설명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하나의 사회가 다른 사회로 발전하는 데에는 동력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생산력 발전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클라스트르에게는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의 이행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는 이를 '수수께끼'로 남겨둘 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교환양식을 차용해 설명하는 과정에도 이행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4.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클라스트르가 경제인류학에 맞서 ‘정치’인류학을 도입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클라스트르가 내세우는 정치인류학은 서양 중심주의의 시각과 맑스주의의 경제환원론 둘 다에서 벗어나 원시사회를 하나의 대안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전쟁’을 예로 들며 국가-사회(서양)에 맞서는 국가 없는 사회(원시사회)에 대해 말한다. 원시사회의 전쟁과 폭력성에 대한 담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시사회는 폭력을 통제하는 평화로운 사회라는 담론이다. 클라스트르는 이를 일축한다. 다른 하나는 원시사회는 전쟁을 위한 존재이며, 이들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국가-사회관은 이러한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정부나 국가가 없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원시사회에서 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에 관해서는 세 가지 담화가 있다. 첫 째는 자연주의 담화이다.(르루아 구랑) 자연주의 담화에 따르면 공격적 태도는 인간의 본능이다. 르루아 구랑은 생존을 위한 사냥과 전쟁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클라스트르는 사냥과 전쟁의 동일시를 비판하며, 동시에 자연주의 담화가 종으로서의 인간 현실에 주목한 나머지, 사회적인 차원을 축출해 버린다고 비판한다. 전쟁은 원시사회의 사회적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다. 두 번째 담화는 경제주의 담화다. 빈곤한 원시 부족들이 생존을 위해 계속 전쟁을 한다는 것인데,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는 풍요로웠다며 이 담화도 일축한다.

세 번째 담화는 교환주의 담화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전쟁과 상업 간의 관계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시도했다. “상업적 교환은 평화적으로 해결된 잠재적 전쟁을 표상하고, 전쟁은 불행한 상호교류의 귀결이다.” 공동체들 간의 관계는 우선 상업적이고, 그러한 상업적 기획의 성공 혹은 실패에 따라 평화냐 전쟁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상업은 전쟁에 비해 사회학적 우선성을 지닌다.

그러나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원시사회의 공동체는 호혜성과 자급자족의 이상을 지니고 있다. 전쟁은 결여된 교환이라는 우발적 사태가 아니다. 전쟁은 원시사회의 구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라스트르는 레비 스트로스의 교환주의 담화를 비판한다. 1. 원시사회는 교환의 장을 감소시키려 한다.(자급자족의 이상) 2. 교환에 부여되는 우선권과 독점권은 전쟁을 축출시킨다. 원시사회는 이 우선권과 독점권에 반대하며 파편화와 분산을 원한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상업이 전쟁에 우선하지만, 클라스트르가 보기에는 반대다. 끊임없는 전쟁은 동맹을 만들어내고, 이 동맹 내에서 교환이 이루어진다. 전쟁의 존재가 교환의 존재를 규정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지점에서 클라스트르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클라스트르가 전쟁이라 부른 것도 일종의 '교환'이라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다른 인류학자들을 인용하며 피의 복수나 포틀래치 등의 증여 방식을 보았을 때 전쟁도 일종의 교환이라고 주장한다.

원시사회가 이렇게 전쟁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우리’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원시사회는 차이를 유지하려 하고, 통합화를 거부한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많이 벌일수록 통합화는 적어진다. 국가의 가장 강력한 적은 전쟁이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존재하는 한 국가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상태가 사회가 아니라고 본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원시사회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도 클라스트르의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원시사회가 호전성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원시사회는 전쟁을 통해 권력자를 만들어냈고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어떤 사회는 이 전쟁으로 인해 통합화가 가로막혔다. 이 두 사례의 차이는 무엇인가?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가 국가로 반드시 발전한다는 서양의 진화주의에 비판한다는 점에서 인류학적 고찰을 통해 '국가없는 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주장의 필연성 역시 입증하지 못한다. 이 역시 그에게는 '수수께끼'이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교환양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원시사회의 모습을 반영해야 하는 것인가? 국가를 통해 폭력이 통제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연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클라스트르는 대안시스템으로써의 원시사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현실이 원시사회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양식a(원시사회)를 반영하여 교환양식c(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교환양식d(미지의 것)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원시사회가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자연상태와 국가의 폭력을 넘어선 평화의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세계사의 구조>를 끝까지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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