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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기타 칼럼 기고

스무 살,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에서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라 불린다. 성인이 되면 청소년 때 하지 못했던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술, 담배, 섹스, 19금 영화 관람 등등. 물론 많은 청소년들은 ‘몰래’ 이 모든 것을 다 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투표’다.

성인이 되면 투표를 할 수 있고, 내 손으로 나를 대표해줄 대표자를 직접 뽑을 수 있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20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이제 네가 정치에 참여해도 된다.”라고 허락하는 것이다. 투표만이 아니다. 성인이 되면 다양한 정치활동에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정당에 가입하여 돈을 내고 활동할 수도 있고, 집회나 시위에 가도 더 이상 선생님들이 잡으러 오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자유롭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과연 실질적으로 그런가?

20대는 왜 정치에 관심이 없을까?

한 때 한국사회에 ‘20대 개새끼론’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발단은 2008년 촛불집회였다. 촛불집회는 자신들의 급식에 미국산 쇠고기가 올라올 것을 걱정한 10대 청소년들, 그리고 경쟁위주의 교육에 내몰린 10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486세대,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은 10대들을 찬양했다. 동시에 20대와 대학생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투표권도 없는 10대들이 저렇게 나서는 데 대학생이라는 놈들은 뭐하는 거냐.”, “우리가 대학생일 때는 이렇게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지 않았다. 말세다.”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

촛불집회 때 딱 스무 살이었던 나는 세간의 그러한 평가가 억울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었다. 20대가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에 참여하는 친구가 얼마나 되나? 집회나 시위가 있으면 나가는 친구가 얼마나 되나? 대학 내의 ‘학생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친구는 얼마나 되나?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난 486 꼰대들처럼 20대가 정치·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한탄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20대의 정치참여를 방해하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집회에 나가자고 친구들을 유혹하면 그 때마다 친구들이 하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알바 해야 되.” “과제가 있어서, 미안.” “조모임이 있어.” “취업 스터디가 있어.” 20대들은 이렇게 먹고 살기 바쁘다. 정치참여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에 신경 쓰느라 정치에 참여하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는 것이다.

혹시 친구들이 거짓말은 한 건 아닐까? 사실은 집에서 빈둥거리고 TV를 보면서, 술 마시러 갈 거면서 알바, 과제, 조모임 등등의 핑계를 댄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거짓말을 해서라도’ 집회나 시위 등에 나가지 않으려 하는 걸까? 왜 정당이나 학생조직 등 정치조직에서 활동하는 걸 기피하는 걸까? 집단에 속한 경험, 연대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은 “너 혼자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친구들과 협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우는 게 공부가 아니라 집에 혼자 박혀서 문제집을 미친 듯이 푸는 게 공부다. 집회에 참여하거나 정치조직에 참여하는 건 혼자만의 삶에서 벗어나 공동체/집단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이다. 20대는 이러한 과정에 익숙하지 않다. 집회에 혼자 가면 뻘쭘하기만 하고 그 분위기도 적응하기 힘들다. 또 정당에 참여해서 많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그 시간에 차라리 집에서 혼자 TV를 보거나 친구들과 술 마시는 걸 선택한다.

‘자유’보다 ‘자유로워지기 위한 조건’을 고민하자!

이것이 20대의 정치, 20대 대학생의 정치가 10대 청소년의 정치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에서 10대 청소년들은 ‘형식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다. 못하는 게 너무 많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청소년들이다. 따라서 10대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선거권 연령을 낮추고, 두발규제를 비롯한 각종 용모규정을 폐지하는 것이 10대에게 급박한 정치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혹은 학교 내에서 어른들에게 당하는 차별을 없애는 것, 어른들이 보장받는 권리를 보장받는 게 10대에게 급박한 정치다. 청소년운동이 ‘인권’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10대에게는 ‘~로부터의 자유’가 시급하다.

반면에 20대는 10대보다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머리 길다고 교수들이 와서 머리를 자르지도 않고, 투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집회나 시위에 나가도 교수나 교직원들이 잡으러 다니지 않는다. 이렇게 20대들은 자유를 가졌으나, 실제로 자유로울까? 등록금에 채이고 학자금 대출에 채이고 엄청난 과제와 시험에 얽매인다. 생활비와 주거비 때문에 고생하고, 비싼 돈 들여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되지 않아 휴학을 하고 스펙을 쌓는다. 대학에 들어오지 않은 20대도 마찬가지다. 취업난에 시달리고 돈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정치에 참여할 시간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다.

따라서 20대가 고민해야 할 것은 ‘~로부터 자유’보다 그 자유를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조건들이다. 한국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먹고 살기 퍽퍽해진 것인지, 나를 옭아매는 사회경제적인 구조는 어떤 것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 지 등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20대에게 급박한 정치는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는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집단을 구성하고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함께’ 문제를 외치고 연대해야 한다. 구조의 문제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너 자신이 변화하는 게 더 빠르다.”고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 한국사회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힐링 전도사‘들이 그들이다. 혜민, 법륜, 정목 등의 스님 멘토들과 김난도 같은 청춘 멘토들이 그들이다. 그들이 하는 조언의 결론은 “네가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게 변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 자신이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힐링은 받을 수 있겠지만 나를 옭아매는 사회의 구조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힐링 멘토들의 조언들

혜민 :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보지 말고 나를 살펴보세요. 우리는 마음이라는 창구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지금 세상 복잡하고 바쁘죠. 하지만 정말 세상이 바쁜지, 자신의 마음이 바쁜지 한번 돌아보세요.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입니다.” (혜민은 이전에 트위터에서 ‘워킹 맘’에게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애를 돌보면 애를 1시간이라도 돌볼 수 있다는 조언을 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그에게 육아정책에 대한 고민이나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법륜 : “우리는 우리가 겪는 불행을 자꾸 남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남 탓으로, 아내 탓으로, 남편 탓으로, 부모 탓으로, 자식 탓으로, 이웃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바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법륜은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게 성폭행으로 인한 괴로움은 다 네 마음가짐 때문이며,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고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김난도 : “사회에 갓 들어와 힘을 갖고 있지 않은 세대한테 구조적인 문제를 바꿔보라고, 투쟁하라고 하는 건 힘든 것 같아요. 그건 사회(기성세대)에 얘기하고, 청년들한테는 그것보단 ‘이런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자기 성취를 하려면 이런저런 노력이 필요한 것 같으니 힘내서 하자.’ 이렇게 격려해야 한다고 봐요.”(20대가 투쟁 안 하면 기성세대가 알아서 바꿔줄까? 20대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다.)

20대가 자신이 처한 조건과 구조, 즉 ‘자유로워지기 위한 조건’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서는 힐링 멘토들의 서적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정치조직에 참여해야 한다. 과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대학에는 여전히 사회과학 책을 읽는 학술동아리와 정치. 사회문제에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조직들이 활동하고 있다. 학술동아리의 세미나에 참여하고, 정당이나 학생회, 학생조직이 개최하는 행사나 집회에 기웃거려보자. 학내 문제나 사회 이슈에 문제를 제기하는 학내 자치언론에 글을 쓰는 것도 좋겠다.

물론 이러한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인지 말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하지만 이들을 싸그리 묶어 ‘운동권’이라고 규정하고 기피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운동권을 싫어하고, 학생운동이니 노동운동이니 다 망했다고 하는데도 왜 아직 이 사람들은 여전히 운동에 참여하는 걸까? 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문제의식에 귀를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당신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해야 할 지 말지는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자유를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300 (2007)

300 
7.7
감독
잭 스나이더
출연
제라드 버틀러, 레나 헤디, 도미닉 웨스트, 데이빗 웬헴, 빈센트 레간
정보
액션, 전쟁 | 미국 | 116 분 | 2007-03-14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에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등장한다. <300>이 던지는 메시지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스스로 정한 공동체의 규율에 복무하며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나를 옭아매는 사회 구조에 문제를 제기해보는 건 어떨까?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나는 관대하다’며 자신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다 살려주겠다고 그리스인들을 유혹했다. 한국사회의 거대한 구조도 20대를 유혹하고 있다. “나는 관대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만 해라, 네가 이 질서를 따르면 너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우리는 그러한 유혹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혼자가 아닌 ‘우리’가 던질 때 성립할 수 있다. 연대하고, 정치적인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