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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라캉과 들뢰즈

 


라깡의 재탄생

저자
김상환외 엮음 지음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02-05-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번역에 의존하던 기존의 라깡 정신분석학 연구의 흐름에서 벗어나 ...
가격비교

<라깡의 재탄생>에서 서동욱 교수가 쓴 "라깡과 들뢰즈 -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깡의 부분 충동 : 스피노자적 욕망이론의 라깡 해석"을 요약한 것임.

 

라캉과 들뢰즈

 

1. 그토록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라캉의 공식초상화와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라캉에게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을 통한 근친상간 금지는 아이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결여된 욕망을 본성으로 하는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들뢰즈는 근친상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열중한 것은 라캉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기표를 비판하는 일이었다. “기표는 문자의 시대에 거대한 전제군주의 기호이며, 그것이 물러나면 일정한 관계로 분해될 수 있는 넓은 해변만이 남는다. 이러한 가정은 기표의 압제적이고 폭력적이고 거세적인 성격을 해명해준다.” 더 나아가, 라캉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분열된 주체 -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 간의 분열 - 역시 들뢰즈에겐 비판대상이다.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의 분열 속에서 욕망을 파악하는 것은 욕망을 주체 개념의 여러 요소(인격성, 성별 등등)들을 통해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해석인 반면 들뢰즈는 인격주의적 해석의 체제 순응적 면모를 밝히고 이로부터 욕망을 해방시켜 그것의 비인격적 혹은 비인물성을 드러내려 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라캉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들뢰즈가 상징계와 상상계를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실재계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 빚의 무게는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라캉의 장치들(대상 a, 부분 충동)과 들뢰즈의 핵심개념들을 대질시킴으로써 가늠할 수 있다. 들뢰즈가 제기한 실재계만으로 구성된 욕망이론이란 유기체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 분리된 다수의 부분적 욕망들, 인격성을 형성하지 않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개념을 원용한 것으로, 한마디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개념틀을 통해 해석된 라캉의 실재계라 할 수 있다.

2. 라캉의 충동이론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라캉의 ‘부분 충동’에 관한 이론에 크게 힘입어 성립되었다. 우리는 들뢰즈와 라캉을 비교할 때 ‘욕망’이라는 단어에 속아 들뢰즈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을 비교해선 안된다. 들뢰즈의 욕망과 라캉의 충동을 비교해야 한다.

충동이란 무엇인가? 충동은 실재계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접근 방식 중 하나로, 라캉의 충동 개념은 어떤 항상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라캉이 성적 충동들이 결코 통일적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여러 조각의 ‘부분’ 충동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그것과 다르다. 구순충동으로부터 항문충동으로 이행하는 어떤 자연적 변형이 없듯이 하나의 부분 충동과 다른 부분 충동 사이에는 어떤 생성 관계도 없다. 즉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일 뿐 전체로 통합되는 유기체가 아니다. 충동들이 실질적으로 구별되며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는 라캉의 생각은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본성과 일치한다.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동의 원천, 대상, 목적, 그것이 만족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각각의 충동에는 원천으로서의 기관이 상응하는 데, 그것이 성감대이다. 네 가지 성감대와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충동이 있다. ‘입(입술)-구순충동, 항문-항문충동, 눈-시각적 충동, 귀-청각적 충동.’ 그리고 이 충동들에 대응하는 대상이 바로 대상 a라 불리는 ‘젖가슴, 배설물, 시선, 목소리’이다. 이 대상 a는 부분 충동에 대응하는 파편적 조각이므로 부분 대상이라 불린다. 다음으로 충동의 목적이란 기관의 즐거움이며 타자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신체로부터 만족을 얻는 자기성애의 형식을 띤다. 음식을 섭취하며 욕구가 만족되는 배고픔과 달리(만족이 대상으로부터 온다.) 구순충동은 입 혹은 입술이라는 기관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왜 니코틴에 대한 욕구가 없어도 담배를 피는가? 즉 충동의 원천은 기관이므로 충동은 기관에서 출발해 우선 대상 a를 향해서 발사되지만, 대상 a는 충동이 진정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은 기관 자체이므로 충동은 대상 a의 주위를 돌아 다시 기관으로 되돌아간다. 하나의 기관은 충동이 등록되어 있는 원천이자 충동의 운동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왜 사람들은 연예인의 사진이나 종교적 아이콘에 키스를 하는가?

이 충동의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 충동의 목표는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이지만 그 기관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 충동의 목적은 아니며, 목적은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환적 여정을 계속 생산해내는 것, 이를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다. 활쏘기에서 당신이 명중시킨 새는 목표이지만,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명중시킴으로써 점수를 얻은 것이다. 충동은 이 활쏘기에서의 화살과 같다. 그것이 겨냥하는 목표물과 점수를 얻기 위해 활쏘기라는 도정을 계속하는 것(목적)은 다르다.

이 충동의 메커니즘은 욕망의 메커니즘과 다르다. 그 둘 모두에게 대상 a는 결여이지만, 충동과 욕망에게 결여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대상 a는 상징계 안에서 욕망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지만 상징계 안에서 (들뢰즈의 표현대로) 오직 빈집, 빈 선반, 빈 단어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욕망은 이 대상 a의 모방 밖에 얻을 수 없으며 이 모방, 기표를 다른 기표로 바꾸는 덧없는 여행을 계속할 뿐이다. 실재계는 고정되어 있고 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방황에 의해 상징계의 대체물들이 자리바꿈을 되풀이한다. 이 쉼 없는 방황을 대상 a가 일으킨다는 점에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다. 그러나 충동은 이와 달리, 그 목적이 대상 a가 아니며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지도 않는다. 충동의 목적은 순환운동이며 이 운동으로부터 만족을 얻어지기에, 대상 a는 충동에게 거머쥘 수 없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그 원인은 될 수 없다.

3. 결여로서의 욕망과 생산으로서의 욕망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캉의 부분 충동 사이의 유사성은 충동과 욕망의 비교를 통해 드러난다. 들뢰즈는 욕망을 불만으로, 결핍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결여로서의 욕망은 잃어버린 것의 획득이라는 플라톤의 상기론의 변주이며 목적론이라는 신화에 의존하는 욕망의 신학화라는 것이다. 절대자는 부정의 형태 속에서만 현상계에 나타나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자들의 욕망은 이 절대적 초월자를 향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다. 이 부정신학적인 초월의 운동은 라캉의 욕망 개념과도 매우 유사하다. 대상 a는 부재하는 빈집을 통해서만 부정적으로 출현하고, 부정적 매개만을 반복하는 욕망의 영원한 운동은 대상 a에 의해 궁극적으로 인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라캉의 충동 개념은 들뢰즈가 내세운 ‘생산으로서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생산으로의 욕망은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스피노자의 힘 개념이 그 원형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의 힘은 신의 본질 자체이며 이 본질이 만물을 생산하는데, 이 본질이 바로 속성들이다. 즉 신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의 진정한 원인이다. 스피노자의 속성이 생산하는 욕망 개념의 철학사적 원천이며 곧 ‘욕망하는 기계’와 동치이다. 스피노자 말고 라캉 역시 들뢰즈에게 영감을 주었다. 라캉의 충동은 끊임없는 순환운동을 목적으로 하여 그로부터 만족을 얻는다. 즉 충동의 유일한 목적은 그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의 속성, 라캉의 충동, 들뢰즈의 욕망기계는 모두 생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며 그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면 들뢰즈가 왜 ‘기계’라는 단어를 사용해 욕망을 지칭했는지 알 수 있다. 기계는 목적론에 맞서기 위한 개념이다. 욕망과 달리 충동의 운동은 원인도 목적도 없이 기계적이다.

4.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들 없는 신체

들뢰즈는 라캉의 충동이 지닌 비유기체적인 부분적 성격, 파편성을 스피노자의 구별이론을 통해 이해한다. 부분 충동들,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성은 서로 간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며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통합되지 않는 ‘속성’들 간의 구별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은 어떻게 종합하는가? “관련성의 부재는 이들 전체의 정합적 결합의 특별한 힘을 구성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는 점은 그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신적 실체에 속한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말한다. 무한한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반대관계도 모순관계도 없기에 신에게만 귀속 가능하다. 부분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도 마찬가지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실체 자체요. 부분 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즉 궁극적 요소들이다.” 그는 욕망하는 기계를 속성과, 기관 없는 신체를 실체와 동일시한다. 스피노자에게서 각각의 속성들 사이에는 ‘비관계’만이 있다. 이접적인 속성들이 유일실체에 귀속되는 것처럼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귀속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관들 없는 신체란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다. 이는 칸트와 스피노자가 신이라 부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신은 개별자들에 귀속할 수 있는 모든 술어들의 총체적 저장창고이며 스피노자에게도 모든 속성의 총체가 신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이론을 사용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설명하는 동시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책이라 말한다. 즉 기관들 없는 신체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자 칸트적 의미에서 실재의 총체이다.

이처럼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기계에 대해 독립된 지위를 가지는 존재자도, 경험상에 현시될 수 있는 표상도 아니다. 오직 서로 이접적인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체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들 자체를 통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한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을 리비도라고 부르고 이것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 그 힘을 신적인 힘, 누멘이라 부른다. 칸트에게서 만물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소재를 이 실재의 총체로부터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총체가 신이라 불릴 만하듯이 개별자가 잠재적으로 지닐 수 있는 모든 소재에 해당하는 욕망하는 기계들 전부가 귀속되어 있는 총체라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적이며 그것의 에너지도 신적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라캉의 욕망이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들뢰즈와 라캉이 사용하는 ‘알의 메타포’를 비교해야한다. 들뢰즈는 기관들이 유기체화되기 이전의, 층들이 형성되기 이전인 알이 기관들 없는 신체라고 말한다. 라캉은 알의 메타포를 통해 부분 충동들의 발생을 설명한다. 자궁 속에서 빠져 나온 갓난아기는 껍질 밖으로 흘러나온 알(깨어진 알, 라멜르)과 같은데, 이 때 자궁에서 갈라져 나온 아기가 택한 생존방식은 분열이다. 아기의 신체는 유기체를 이루지 않은 채 여러 개로 분열된 아메바들이 제각기 기어 다니는 하나의 대지와도 같다. 이 분열된 각각의 아메바들이 기관을 중심으로 고착된 것이 부분충동이다. 순수한 생존본능에 지배되어 있는 라멜르가 성감대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순간이 바로 부분 충동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충동이 그 주위를 맴도는 대상 a는 자궁 밖으로 빠져 나온 라멜르가 자신의 신체적 보완물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가질 때 이 보완물의 등가물로 자리잡는 것이다. 기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라멜르와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다. 라캉의 알 메타포에서 라멜르의 세상 첫 경험은 신체부분(자궁)의 상실이라는 ‘결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라캉의 메타포는 상실된 통일성에 대한 신화적 가설에 의존한다.

그러나 라멜르가 부분 충동의 형태로 기관들에 고착되면 그것의 운동방식은 더 이상 어떤 결여의 신화와도 관계가 없어진다. 대상 a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충동들에 대해 결여로도, 원인으로도, 목적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목적은 끊임없는 생산이다. 이 생산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경우와 똑같다. 또한 아기의 신체 안에서 부분충동들 서로 간의 이접성은 기관 없는 신체에서 욕망하는 기계들 간의 이접성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들뢰즈는 한 신체 안의 성감대의 분포를 기관들 없는 신체의 상태와 동일시한다. 제각기 쏘다니는 부분 충동들과 그들 각각의 전진기지인 기관들은 유목민의 캠프처럼 신체 위에 흩어져 있다.

5. 독신기계 - 부분적 주체이론

속성(욕망기계)과 실체(기관 없는 신체)에 이어, 양태에 해당하는 개별자들, ‘주체’의 발생해보자. 이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부분 충동들 각각이다. 부분 충동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반성적 구조, 자기동일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성 구조는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그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육체적 층위에만 머무른다는 점에서 ‘나’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완전한 주체화가 아니라 주체 개념 없는 주체화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욕망 자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적 개별성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파생되는 개체로서의 주체이다.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 부분 충동들의 종합으로 생성된다. 들뢰즈는 이 종합을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고 표현했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주체의 발생에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소비이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이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를 낳는다는 뜻에서 연접적 종합이다. 이는 스피노자적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이해 가능한데, 스피노자에게선 서로 이접적인 속성들의 종합 위에서 양태로서 인간 개체가 존립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라는 양태로 이루어진 인간 개체는 서로 이접적인 속성, 사유와 연장의 연접 속에서 생산된다. 속성들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으며, 인과관계는 오직 실체와 양태 사이라는 종단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주체는 이 상이한 속성들,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을 횡단하는 과정이자 흐름이다. 즉 주체란 그 안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강림해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가곤 하는 투명한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주체는 분열증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동일성을 가진 어떤 고정된 주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 분열증적 주채에 독신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의 에너지는 볼룹타스(즐거움)인데, 이는 욕망하는 기계의 힘인 리비도와 기관들 없는 신체의 힘인 누멘의 변형이다. 마치 스피노자가 인간의 힘을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힘의 일부분,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독신기계의 에너지가 즐거움이라는 것은 이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자(환자)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을 구별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병원의 정신분열환자는 무엇인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인 반면, 혁명가는 탈기호화와 탈영토화 과정이라는 정신분열적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정신병자는 자기 안에서 이질적인 다수의 부분충동을 제한없이 작동시키는 작업이 좌절된 사람이다. 이 좌절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기표라는 억압적 기제를 통해 다수의 비인격적 욕망하는 기계들의 흐름을 가족주의적 도식 속의 ‘한 인물’의 욕망으로 고정시켜버리는 데서 일어난다. 고로 주체의 자유란 수많은 상태들을 횡단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계속 실현하고 이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기계의 종류


경제 형태


힘의 변용


종합의 형식


스피노자의 해당 개념


비고


욕망하는 기계


생산


리비도


연결

(connexion)


속성


라캉의

부분충동


기관들 없는

신체


등록


누멘


이접

(disjonction)


실체


칸트의

실재의 총체


독신기계


소비


볼룹타스


연접

(conjonction)


양태


분열증적 주체,

부분적 주체


이 들뢰즈의 주체 이론은 라캉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체에 대한 고정된 위치도 자기 동일성도 거부한 들뢰즈의 주체, 즉 부모도 배우자도 없는 ‘독신’기계와 상징계 속에서 오이디푸스화한 주체가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가? 들뢰즈는 라캉이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자, 즉 라캉을 오이디푸스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곳에서 분열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라캉에게 있어서 기표는 인간의 존재조건이다. 인간이 기표에, 즉 대타자의 질서에 순응할 때 한 사회체제 속에서 허락된 욕망이, 다시 말해 인간 주체가 탄생한다. 기표의 질서 속에서 어린아이의 자기 성애적 단계, 실재계에 속하는 대상 a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충동은 소외되어버린다. 상징계는 사물의 살해이며 이 살해는 주체 안에서 욕망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상징계 안에서 실재계의 대상들과 부분 충동들이 억압된 형태가 바로 욕망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라캉의 사상이다.

들뢰즈는 반면에 라캉이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바는 오이디푸스와 기표를 비판하고 그 이면에 은폐된 “욕망의 실재계적인 비유기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아버지 기표를 욕망을 규정짓는 보편적 조건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단계에서만 출현하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도구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에서 기표의 기원을 전제군주제에서 발견한다. 아카드 문자의 고전적 유래에 따르면 문자 혹은 기표는 주인민족과 노예민족의 만남이라는 전제군주제의 산물로, 노예민족 쪽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주인의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 노예들이 자신의 새로운 알파벳을 만드는 조건이다. 문자는 사회적 합의 같은 게 아니라 권력의 산물, 전제군주적 경제체제와 제도의 산물이다. 어린 아이는 본성상 아카드인 같은 문맹자이다. 무의식을 결정하는 기표는 무의식이 이미 전제 군주적으로 지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의 작업은 인간 개념의 구성 요소, 즉 기표의 전제 군주적 성격 일반을 비판하는 작업인 동시에 이 무의식의 기표적 구조화가 언어학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구조주의 언어학 자체가 전제 군주적 체제의 도구임을 밝혀내는 계보학적 작업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인간의 욕망은 ‘욕망의 욕망’ 혹은 ‘대타자(기표)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정식은 이렇게 변형된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에 대한]의 욕망이 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가 전제 군주적 지배의 산물이라면, 라캉에게서 진정한 주체는 무엇인가? 들뢰즈에 의하면 바로 독신기계이다. 중심은 기계가 차지하고,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주체는 자기가 지나가는 상태들로부터 끌어내진다. 우연히 나타나는 서로 이접적 상태들의 결합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끊임없는 운동의 부산물이다. 기계들이 주체의 부분들로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기계에 의해 생산된 결과이다. 들뢰즈는 라캉의 텍스트를 통해 이런 사실을 발견하지만, 이 해석은 자의적 측면이 강하다. 이 인용은 프로이트의 자아분열과 관련하여 결여로부터 탄생한 주체라는 들뢰즈의 주체 개념과 정반대되는 주체 개념에 대한 논의의 일부로 씌여졌기 때문이다.

6. 결론 : 욕망과 혁명 - 결국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는......

그러나 들뢰즈에 의해 해석된 라캉과 라캉 정신분석학 그 자체엔 아무런 차이도 없는가? 라캉은 상징계, 아버지의 이름, 기표를 고작 패배하기 위해 만든 것인가? 라캉과 들뢰즈의 차이점은 우선 결연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근친상간의 금지가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다른 부족에게서 여자를 구하는 것이 욕망들 간의, 부족들 간의 결연을 가능케 한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결연을 다른 의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을 인물들의 욕망으로 이해하는 이상, 혼인을 욕망들 사이의 결연의 불가결한 형태로 이해하는 이상 결연을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욕망을 비인물적인 부분 충동의 층위에서 이해할 때만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개체는 서로 통합되지 않은 이접적인 여러 개의 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부분 충동들, 부분 대상들,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이 개체 안에서 다수의 충동은 성의 횡단이란 방식으로 공존하는데, 개체 안의 다수의 성끼리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며 이들은 다른 개체의 부분 충동들과만 소통할 수 있다. 한 남자의 수컷 부분은 한 여자의 암컷 부분과도, 한 여자의 수컷 부분과도, 다른 남자의 암컷 부분과도, 다른 남자의 수컷 부분과도 소통할 수 있다.

이런 소통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의 종합의 형식인 연결이며, 이 연결엔 결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욕망은 어머니의 결여를 메우기 위한 대용품으로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일을 겪지 않는다. 욕망이 한 인물의 성욕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는 일, 욕망이 남자와 여자라는 인물의 형태로 움직이는 일은 오이디푸스적 조작 이후에나 일어난다. 오이디푸스로부터 생겨난 인물 차원에서 성들 간의 연결은 어머니를 배제하고 그 결여를 메우기 위해 다른 여자와 혼인한다는, 배제와 결여의 논리를 따를 수 밖에 없다. 들뢰즈는 상징계적 인물을 매게로 한 이러한 연결에 반대하여 실재계 차원의 비인격적 부분 충동들의 연결을 내세운다. 실재계 안에는 어떤 인물 형태의 성욕이나 성별은 없다. 결국 들뢰즈 욕망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자에게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을 돌려주는 것, 그의 여러 성을 돌려주는 것이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개념을 이용해 혼인관계의 질서를 규명하고자 했던 라캉은 인물과 인물을 지배하는 상징계적 법칙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들뢰즈와 라캉의 또 다른 차이점은 대상 a가 나타나는 방식, 실재와 만나는 방식에 있다. 들뢰즈는 한 개체의 부분 충동이 연결되고자 하는 대상이 다른 개체의 부분 충동이기에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그가 실재계의 부분 대상을 부분 충동이 정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라캉에게 충동의 운동은 대상 a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자기 성애적 형태를 띤다. 즉 대상 a와 맞닥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이 ‘실재로’ 연결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 데, 이는 실재계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지젝은 실재의 응답이라는 표현을 통해 실재계가 환영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주장하는데, 들뢰즈는 이런 식으로 환영을 통해 실재계와 만나는 것을 비판한다. 부분 대상과의 연결, 실재와의 만남은 실재로 일어나는 사건이지 환영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실재계 안에서 정말로 이루어지는 대상 a와의 만남을 ‘주관적인’ 환상의 영역으로 변질시켜버렸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차이로, 들뢰즈와 라캉은 혁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인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혁명적이다.”(들뢰즈) 들뢰즈는 1) 의도적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것, 즉 새로운 사회적 개체를 추진하는 원인들과 목적들의 질서 속에서 자기들의 활동을 하는 혁명과 2) 갑자기 돌출해 원인들 및 목적들과 관계를 끊고 사회적 개체를 다른 국면으로 되돌리는 욕망에 의한 혁명을 구별한다. 원인과 목적들의 질서에 기반한 표상으로서의 혁명에는 늘 자본주의화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자본주의는 혁명조차 자신의 공리계에 추가하여 스스로의 경계를 넓혀간다. 파시스트 연대장이 마오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더불어, 혁명세력의 오이디푸스화 역시 매우 위험하다. 혁명집단은 자본주의적 지배체제와 동일하게 부성적 주체집단과 그 밑의 예속집단으로 변질된다. 동구권 혁명세력의 관료화처럼 말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혁명의 가능성을 혁명의 표상을 추구하는 집단에서가 아니라 욕망(부분 충동)의 본성에서 발견한다. 부분 충동으로서의 욕망은 무목적적이지만, 자본주의가 “자본씨, 대지부인, 이 둘의 아이 노동자”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통해 지배하려는 데 반해 욕망은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 욕망이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이상 욕망의 본성에 대립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욕망의 본성은 어떠하기에 그 자체로 혁명적인가? 욕망은 실재계의 부분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상징계에 대해서 혁명적이다.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혁명적이다. 여기서 욕망은 상징계적 매개를 거치지 않은, 실재와 직접 연결되려 하는, 어떤 목적론적, 신학적, 변증법적 함의도 지니지 않는다. 이 기계의 본성에 어긋나는 모든 상부구조, 상징계, 이데올로기 등은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힘 개념을 빌려온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힘은 권력에 대립한다. 네그리에 의하면 스피노자 철학은 매개라는 비열한 게임에 굴복하지 않는데, 여기서 매개란 힘으로서의 생산력을 자기 아래 종속시키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말한다. 이 매개는 들뢰즈에게 오이디푸스라는 복종의 장치이기도 하다.

라캉 역시 대상 a로부터 기존의 구조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의 힘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그는 들뢰즈처럼 욕망이 승화 같은 매개나 변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실재계와 조우함으로써 혁명이 달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5월에 대해 “구조는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고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5월 사건이 증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구조가 거리로 나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구조를 옹호하는 라캉에 반대하며 들뢰즈에 가타리는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68년의 사건은 상상계적이지도 상징계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실재계의 침입이었다.” 부분 충동이 실재와 조우하면서 생긴 사건이었다. 인간이라는 단위에 선행하는 분자적 차원, 비인물적 욕망들의 해방에서부터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어떤 형태가 됐건 이욕망들을 가두는 ‘구조’를 변호하려는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

이처럼 라캉과 들뢰즈의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수많은 모순된 차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양립 불가능한 주장들의 싸움터가 있는 반면에 들뢰즈에겐 자신들의 개념을 경작하는 터전인 라캉의 밭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