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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미디어스 칼럼

JM, 사라져야 할 ‘우리’의 문화

지난 주말, 하나의 글이 페이스북에 올라오면서 SNS가 발칵 뒤집혔다. “A대학 정보통신대 남학생들이 미팅에서 JM을 하라고 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JM은 장애인을 흉내 내며 하는 FM으로, FM은 대학 신입생들이 이름과 과를 큰 소리로 외치는 자기소개 방식을 뜻한다. 이 글을 올린 특수교육과 여학생에 따르면, 여학생들이 미팅이 끝난 후 말실수 한 거 아니냐며 따지자 남학생들은 웃으면서 “그게 우리들 문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사과해야 하는 이유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인터넷에선 A 대학 남학생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언제 어디서나 늘 존재하는 극소수의 몰지각한 인간들을 제외하고 남학생들을 옹호하는 의견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학생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비난하는 이유에는 조금씩 온도차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여학생들이 불쾌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도 아니고 미팅 가서 처음 보는 여자애들한테 장애인 흉내내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는 의견이 꽤 있었다. 물론 그 여학생들이 불쾌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보는 여학생들이 아니라 친한 친구에게 JM을 하라고 했다면 이것은 용납해도 되는 것일까? 실제로 A대 정보통신대 학생회장은 인터넷에 이번 사태에 대한 사과 글을 올리며 “상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권 자체에 대한 대단한 잘못”이라고 말했다.

혹자들은 그 여학생들이 특수교육과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특수교육과 학생들 앞에서 장애인을 희화화하는 건 심한 일이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만일 그 남학생들이 상대 여학생들이 특수교육과 학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의로 JM을 요구한 거라면, 그놈들은 정말 쌍욕을 먹어도 싼 놈들이다. 하지만 특수교육과 학생이 아니라도 그런 행동에는 기분 나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시각은 장애인 인권을 몇몇 특수한 사람들의 이해관계 정도의 문제로 취급해버린다.

이번 사건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그 남학생들이 장애인을 희화화하고 유머코드로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문화’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처음 보는 여학생들’에게 JM을 요구했다는 사실도 문제지만, 그것을 문화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상상의 공동체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출판사
나남 | 2004-09-0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책.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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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일체감의 근원, 비참함의 공유

정치학자 베니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모든 애국심과 집단적 일체감의 근원에는 비참함의 공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남자라면 군대를 떠올리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군대 안에서 겪은 비참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연대의식과 집단적 일체감을 형성한다. 군대 안에서 겪은 각종 황당한 사건과 나를 갈구던 선임과 내가 갈구던 후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과장해서 이야기하며 ‘군대 다녀온 남성’ 간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이나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모종의 연대감을 통해 한국의 병영문화가 형성된다. 그들은 (특히 인터넷에서) 군대를 기피한 연예인들을 욕하고, 안보의식이 부족해 보이는 여성들을 비난한다. 수색대나 특수부대에 자원한 연예인에게는 ‘까방권’(까임방지권)을 행사하고 군대를 소재로 만든 개그와 각종 짤방에 공감하며 웃음을 터트린다.

비참함의 공유를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는 ‘의식’이 군대에만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사회집단이건 새내기나 신입들이 그 사회로 들어서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식’이 있다. 막걸리 잔에 소주를 가득 넣어 원샷 하는 ‘사발식’을 치르기도 하고 나이 지긋한 선배님들과 상사들 앞에서 어설픈 장기자랑을 펼치기도 한다. 사실 장기자랑이나 재롱잔치, 사발식은 정말 창피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런 의식을 거치면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선배들은 다가와 술 한 잔 따라주며 “나도 옛날에 다 그랬다.”며 그 날의 창피하고 비참했던 경험을 공유한다.



푸르른 틈새

저자
권여선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7-07-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96년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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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도 마찬가지의 경험이 아닐까? 소설가 권여선은 소설 <푸르른 틈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FM이라 불리는 대학 특유의 자기소개 방식은 더 노골적으로 비참함의 공유를 요구한다.(실제로 FM은 Field Manual의 약자로 군대 용어이다.) 신입생은 자신을 바라보는 동기와 선배들 앞에서 이름과 소속을 우렁차게 밝혀야 한다. 하기 싫어서 대충 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작다!”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치러야 하는 ‘의식’이다. 이는 창피하고 비참한 경험이지만 이를 이겨내면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연대의식의 폭력성

이런 연대의식은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비참함을 공유하지 않은 , 즉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에 대한 적대감이나 희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남성 집단에는 여성을 일체감을 느끼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쯤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있다. 남성들끼리 모여 여성들을 품평하고, 서로의 첫 경험을 캐물으면서 희희덕 거린다.

이런 적대감과 희롱은 비참함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여성의 사례처럼 이러한 폭력의 대상은 주로 자신들과는 ‘다른’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이다. JM은 비참함의 공유라는 집단적 일체감이 소수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였다. FM이라는 자기소개 ‘의식’을 통해 일체감을 형성한 이들은 이 비참함을 견고한 연대감으로 승화시킬 공통의 웃음 포인트를 찾아낸다. 우리와는 다른 장애인들을 흉내 내며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다. 추론하건대 그들이 보기에 더 리얼하게 장애인을 흉내 내는 사람은 가장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군대 안에서 여성과의 관계를 희화화하여 서로 경쟁하듯이 이야기하고, 더 자극적이고 강한 경험을 이야기할수록 박수를 받고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과 유사하다.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통해 연대의식을 고취하지 않기

이번 JM사건에 대한 반응은 “이 못 돼먹은 대학생 놈들!”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을 통해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야 하며,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노력들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수단 삼아 연대의식을 고취하려는 집단문화가 사라져야 한다. 더 나아가 집단이 공유하는 비참함과 특유의 의식들도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