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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단상

국정원이 박살낸 ‘인터넷 민주주의’

많은 정치인과 학자, 지식인들은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민주주의도 발달할 것이라 예견했다. 수많은 ‘아고라’에서 다양한 시민들이 토론하고 소통하며 이것이 실제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11년 재보궐 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는 SNS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줄지, 민주주의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오갔다.

하지만 최근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을 보면 인터넷, 나아가 SNS와 블로그 등이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든다. 국정원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중립적이어야 할 국가기관이 특정후보를 위한 기관으로 전락한 모습만이 아니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적인 행태는 ‘인터넷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산산히 깨뜨려 버렸다.

‘인터넷 민주주의론’은 서구 NGO 활동가들이나 미국, 영국의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지역’에서의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뉴미디어와 인터넷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벨로루시 출신의 언론인 에브게니 모르조프는 이들을 ‘사이버 유토피아론자’ 혹은 ‘아이팟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뉴미디어가 “미사일로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며 “폭탄 대신 아이팟을 뿌리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80년대 팩스와 복사기가 그랬던 것처럼 블로그와 소셜 네트워크들은 시위의 경제성을 극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어나올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충분한 연결성을 부여해주고 충분한 도구를 공급해주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 SNS 등은 사람들 간의 연결성을 높여주었고, 스마트폰이나 아이팟 등의 도구들을 통해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2009년 이란 반정부 시위대가 트위터를 통해 모여들고, 아랍 민주화 운동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 확산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경우에도 SNS나 인터넷을 통해 모여든 이들이 부당한 일에 대항해 시위를 조직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퍼트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난 2011년 있었던 한진중공업 사태와 희망버스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기술은 그 자체로 ‘실천성’을 갖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누가 어떻게 통제하고 활용하느냐이다. 민중들이 SNS를 활용해 정치권력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권위주의적인 정부나 독재정권이 SNS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SNS나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더욱 억압적인 통치를 펼친다.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의 저서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한 구절은 이같은 현상을 예견한다.

‘많은 국가에서 모바일과 인터넷 보급률이 올라가 군중을 동원하거나 물자를 분배하는 등 몇몇 전술적인 노력을 펼치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혁명적인 움직임이 늘어나더라도, 혁명이 완전히 실현되어 기존에 정권을 잡은 세력이 혁신적으로 바뀌는 일은 더 줄어들 것이다. 오래 가는 리더가 많지 않을 것이고, 사안에 따라 정부가 요령 있게 대응하면서, 2010년 말 시작된 아랍혁명에 맞먹는 엄청난 규모의 변화는 여지없이 차단될 것이다.’ 사이버 유토피아론자들의 낙관주의에 찬물을 끼얹는 현실적인 주장이다.


권위주의적 정부나 독재정권은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이버 공간에서 ‘선동’에 나선다. 이를 일컬어 이슈를 조작한다는 의미의 단어 스핀(spin)과 인터넷(internet)의 합성어인 스핀터넷(spinternet)이라 부른다. 실제로 러시아, 중국, 이란 정권은 블로거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키고 돈을 지불함으로써 이들로하여금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친 정권적인 댓글을 남기고 블로그에 친 정권적인 글을 올리도록 한다.

한국의 국정원은 한 술 더 떠 친히 댓글을 달았다. 국가정보원의 직원들이 ‘원장님 지시 말씀’에 따라 인터넷 게시판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방하는 글을 남기고, 국가안보나 대북심리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부정책을 옹호하고 특정 지역을 혐오하는 글을 남겼다. 인터넷독립 언론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트위터 계정들이 정부에 비판적인 이들을 종북으로 몰거나 친 정권적인 인사들의 글을 리트윗하기도 했다.

국가기관이 이런 식으로 인터넷 여론조작을 벌이는 이유는 인터넷 상에서 빠르게 유통되는 반정부적이거나 정부에 불리한 정보들을 모두 차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정보들은 차단할수록 다른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속성이 있으므로 권위주의적인 정부나 독재정권은 이 열린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 공간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구 소련의 KGB는 반정부 인사들의 계보도를 그리기 위해 조직원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고문 등의 방법을 써야 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도 운동권의 계보도를 그리기 위해, 누가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는 말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소위 운동권 인사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학교에 잠입하는 등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 댓글만 보면 누가 반정부적인 주장을 하고 다니는지, 페이스북 페이지와 트위터 팔로어, 리트윗만 보면 누구와 만나고 의견을 나누는지 다 알 수 있다. 국가정보원이 우리민족끼리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시민 몇몇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한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4월 국정원 직원이 대선 때 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방 글을 인터넷과 트위터에 올린 시민의 아버지를 찾아가 주의를 요구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권위주의적 정부나 독재정권은 인터넷을 통해 여론조작을 시도하거나 누가 반정부적인 주장을 하는지 사찰한다. 한국의 국정원도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없도록 인터넷을 사찰하고, 이 의견들의 집합인 여론에 개입하여 조작을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자유롭게’ 인터넷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까? 또 이같은 의견들의 집합으로 나타난 여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국정원이 지난 대선 기간, 아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임명됐던 2009년부터 했던 행동에는 단지 댓글 수 천 개를 달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국정원은 유권자들이 공평하게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1표를 우습게 만듦으로써 인터넷 민주주의, 나아가 전체 민주주의를 짓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