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 /기타 칼럼 기고

정보의 바다 인터넷, 헤엄치고 싶다면 ‘권력’에 주목하라.

몇 달 전 1년 넘게 사귀던 애인과 결별했다. 애인과 결별하는 게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일단 관련된 편지와 사진들을 다 버리거나 치워버린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과 기념일 등등을 삭제한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 관련 기록들을 지우거나 안 보이게 설정한다.

이제 다 끝났다. 아니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페이스북 내 사진첩에 그녀와 찍은 사진들이 계속 떠다니는 게 아닌가. 분명히 다 지웠는데 어디서 또 나타났지 라는 생각에 지우려 해보니 지워지지 않는다. 아, 내가 올린 게 아니다. 교수님이, 다른 친구가 사진을 찍어주고 나의 이름을 태그로 걸어버려 내 페이스북에 남아 있는 것이다.

트위터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찾을 수 없는 인터넷의 바다 어딘가에 내가 올렸던 사진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걸 리트윗했거나 관심글로 지정했을 경우 다른 이의 타임라인에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그래서 내 손으로 삭제하고 싶었던 사진들은 누군가의 타임라인에 남아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무한 복제화된 정보의 바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정보매체의 등장으로 생겨난 변화다. 일단 인터넷 공간에 내 사진을 남기면, 이는 더 이상 내 사진이 아니다. 누구든 클릭 한 번, 혹은 캡처 한 번이면 나의 사진을 ‘소유’할 수 있다. 우습게 찍힌 사진일 경우 내 사진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의 ‘웃긴 사진’ ‘짤방’ 폴더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소유가 가능한 이유는 인터넷에서 ‘무한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공간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사실상 없다. 사진이 뜨면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하면 원본과 차이 없는 복제본을 얻을 수 있다. 재미있거나 멋있는 글이 있으면 ctrl+c, ctrl+v를 하면 내 것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오른쪽 마우스 금지’ ‘스크롤 금지’ 등의 기능이 생겨나지만, 이 금지를 뚫고 ‘시뮬라크르(Simulacra)’들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물론 인터넷 매체 이전의 활자 매체 시절에도 복제는 가능했다. 복사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손으로 복사를 할 수 있었고, 복사기가 발명된 이후 수많은 책과 인쇄물들의 대량복사가 가능해졌다. 이를 통한 정보의 확산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 정보의 확산의 범위를 무한정 늘려놓았고, 확산시키는 방식 또한 매우 간소화시킴으로써 사실상 ‘소유’의 개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편함은 많은 이들이 인터넷을 쓰는 이유다.

즉 인터넷 공간에서 대부분의 정보들, 그리고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은 ‘공유화’된다. 이어 인터넷에는 이 많은 ‘내 것’들을 모아놓을 수납장이 생겨난다.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시뮬라크르들을,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복사될 내 정보들을 모아놓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홈페이지와 블로그는 정보의 수납장 역할을 한다. 여기저기서 감동받은 구절들과 사진들을 올리며 나만의 수납장을 생겨난 것이다. 이제 클릭 몇 번이면 내가 모아놓은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낼 수 있다. ‘내 것’을 찾아내는 방식도 점점 고도화됐다. (제목검색, 제목+내용 검색)

싸이월드, ‘관계 맺기’를 체계화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니홈피 싸이월드’의 등장은 또 다른 혁명이었다. 2005년 무렵 한국에 급속도로 유행한 싸이월드는 두 가지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첫째, ‘미니홈피’의 보편화였다. 싸이월드가 등장하기 전 인터넷 게시판 형태 이외에 자신의 사진과 정보, 이력 등을 소개하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컴퓨터 좀 다룬다는 친구들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했고, 홈페이지들 간의 호환성이 없었기 때문에 홈페이지 유저들 간의 교류는 일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싸이월드는 클릭 몇 번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미니홈피’를 탄생시켰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급속도로 축소됨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미니홈피를 만들기 위해 싸이월드에 가입했다.

두 번째, 싸이월드는 ‘일촌’ 제도를 마련했다. 이전의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에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따로 분류할 수 있는 체계가 없었다. 하지만 싸이월드에서 서로 일촌을 맺으면 상대방에게 비밀 글도 남길 수 있으며 사진이나 글을 ‘퍼가요~’할 수 있다.

이 ‘퍼가요~‘로 인해 소유방식의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친구의 사진을 퍼가면, 친구의 사진은 내 싸이월드 홈피에 남는다. 우연히 대학 동기들의 미니홈피에 들어가서 사진을 구경하다 지금은 헤어진 캠퍼스 커플들의 사진을 발견하고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는 경도 종종 있다. 내 사진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마음대로 삭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페이스북, 누구든지 함께 ‘소유’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싸이월드의 발전된 형태다.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이 생기자 싸이월드를 버리고 페이스북으로 갈아탔다. 페이스북은 개인 페이지를 만드는 방식이 싸이월드보다 훨씬 간소화시켰다. 메일과 비밀번호 하나면 나만의 공간이 생겨나고 마음대로 글도 쓰며 사진도 올릴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은 더욱 간소화된 동시에 체계화됐다. 싸이월드에서 일촌을 맺을 때 항상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일촌명’이 사라졌다. 대신, 친구들을 그룹별로 관리하며 내 게시물을 특정인들에게 안 보이도록 설정할 수 있다. ‘일촌끊기’보다 더 잔혹한 ‘차단’도 생겨났다. A가 B를 차단하면 친구관계가 끊기는 것은 물론 B에게는 A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 페이스북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추천하는 친구를 통해 잊고 지냈던 친구들을 계속 보여줘 새로운 관계맺음을 유도한다. 싸이월드는 페이스북에게 유저들을 빼앗기자 뒤늦게 ‘친구 추천’을 도입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에게 가장 혁명적인 기능은 ‘태그’다. 친구와 연락을 하고 싶을 때 굳이 메시지를 날리거나 그 친구 홈페이지에 가서 방명록을 남길 필요가 없다. 그냥 내 타임라인에 글을 쓰면서 친구를 태그하면 친구한테 알람이 뜬다. 그럼 친구가 와서 댓글을 남긴다. 심지어 여러 명 태그도 가능하다. 단체사진을 찍고 나서 귀찮게 친구들한테 메일을 달라고 하거나 미니홈피에 올려놓을 테니 퍼가요~누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진을 올리고 친구들을 태그 걸면 그만이다. 그 사진은 나와 친구들이 함께 소유하는 사진이 된다.

태크에 버금가는 혁명적 기능은 ‘좋아요’다. 좋아요는 페이스북에서 굉장히 정치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내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 때마다 별 내용도 아닌데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아마 이 사람들이 나중에 나한테 무슨 부탁을 하면 꼭 들어줄 생각이다. 또한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 글을 하나 올리면 별 내용도 없는데 좋아요가 수백 개씩 달린다. 좋아요 누른 사람들을 보면 그 정당의 당원이나 활동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른바 ‘좋아요 조직화’다. 이 ‘좋아요’를 통해 나의 글이나 사진이 다른 이들에게 퍼져 나간다. 내 친구 B가 나와는 친구가 아닌 C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 나한테도 그 글이 보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조직화’를 하는 이유는 곧 이 글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댓글과 ‘공유하기’도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트위터, 소유 개념 자체가 사라지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좋아요 조직화’는 트위터의 ‘리트윗 조직화’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한번은 SNS를 즐겨하는 내 친구가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페이스북은 친구들 상대로 싸지르는 거, 트위터는 허공에 싸지르는 것”

트위터에서는 나의 글이나 사진이 무한대로 퍼져 나갈 수 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널리 알리고 싶을 때 ‘무한RT' 아니면 ’무한 리트윗!‘이라고 외치는 이유다. 가끔 내가 언제 올렸는지도 모르는 글에 누군가 맨션을 보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는 내가 술 먹고 싸지른 글이나, 잊고 싶던 기억의 글들이 모두 ’기록‘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있다.

따라서 트위터에는 소유 개념 자체가 없다. 트위터에는 개인 페이지라는 게 딱히 없다. 비유를 하자면 트위터는 광장인데, 무수히 많은 투명의 방이 늘어져 있는 광장이다. 무슨 말을 하든 ‘멀지만 않으면’(내 타임라인에 떠 있기만 하면) 다 들린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트위터는 좌빨과 수꼴과 노빠․깨시민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내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블락을 먹이고 모조리 차단을 하면 나는 평화롭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 트윗을 리트윗하고, 그 리트윗이 다른 정치색을 가진 이들에게 조리돌림 당하기 시작하면 이제 ‘전쟁’ 시작이다.

이 광장 안에서는 무슨 말을 하든 사적인 말인 동시에 공적인 말이 된다. 따라서 난 개인적으로 한 말이라면서 성희롱이 섞인 말을 올리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글을 트위터에 올려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트위터는 분명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와는 다르다. 트위터는 이들보다 훨씬 공적인 공간이고, 사적인 것이 거의 없는 공간이다. 이곳에 올린 모든 것은 공유되고, 따라서 트위터에는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내가 쓴 재치 넘치는 트윗을 자기 아이디어인 것처럼 자기 트윗에 올려둘 수 있다. “왜 출처를 밝히지 않냐”고 누군가 비판하면 “140자라 짧아서 그랬어요”라고 말하면 끝이다.

네이버와 다음, 구글, 수많은 '내 것‘들을 정리하다

오늘날의 정보매체를 설명할 때 검색엔진을 빼놓아선 안 된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블로그든 어떤 커뮤니티든 검색엔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검색엔진은 특정 키워드를 통해 꼭꼭 숨은 정보들을 찾아내는 일종의 돋보기다. 검색엔진을 타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나의 블로그에 들어와 ‘내 것’들을 살펴보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들어와 나쁜 의도 없이 사찰을 한다.

오죽하면 ‘구글링’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요즘 미팅을 하건 사람을 만나건 ‘구글링’은 기본이다. 구글링 한 시간만 돌리면 웬만한 사람의 사생활과 개인정보 등 거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 SBS 스페셜에서는 독심술사가 실험 대상자들의 개인정보와 친구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들을 알아맞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사실 독심술사는 독심술을 쓴 게 아니라 구글링을 한 것뿐이었다.

네이버와 다음, 구글 등의 검색엔진들은 수많은 개인들의 ‘내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일본의 오타쿠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저서 <일반의지 2.0>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일반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검색엔진이 쌓아둔 수천 아니 수백억 단위의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만 있다면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상상하는지, 그 ‘일반의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아즈미 히로키가 상상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도지사가 도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지 결정하는 회의를 한다. 회의장에는 도지사와 도청 공무원들, 도 의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이들은 이전에는 각자 다른 ‘일반의지’를 대변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회의장 한 편에는 트위터를 통해 올라온 수십, 수천 개의 의견들이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구글에 쌓여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정리하면 많은 이들이 도 예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통계’를 낼 수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일전에 규모가 아주 작은 정치공동체에서만 ‘일반의지’를 집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모두가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해서는, 대표하는 자가 곧 대표되는 자인, 작은 정치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는 현대사회에서는 토론과 논의가 필요없다며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오히려 수없이 많은 데이터가 모이고 모여서 ‘일반성’을 갖출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일반의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의지를 이야기한 루소가 “사유재산은 인류사회의 암적인 존재”라고 주장한 건 우연이었을까. 루소는 ‘땅의 모든 결실들은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땅 그 자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며 나의 노동을 통해 얻은 건 나의 소유물이라는 존 로크와 대척점에 섰다. 그리고 아즈미 히로키의 의견대로 일반의지 실현을 위해 기술적 능력을 갖춘 현대사회 인터넷 공간에서 점점 소유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 그것이야말로 인터넷 공간을 작동하게 하는 ‘기반’이다.

인터넷은 ‘국가권력’에게도 열려 있다.

그렇다면 이제 칼 맑스가 이야기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 것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이 말 그대로 순진한 ‘공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언제나 ‘조작’이 가능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일반의지는 ‘조작’이 가능하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떠올리면 이 상황이 명료해진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여론조작을 했다. 밝혀진 것만 5만 개가 넘는 트윗을 남겼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분탕질까지 해대며 댓글을 달았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국군 사이버사령부까지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대선 전에는 새누리당 SNS홍보담당을 맡았던 윤정훈 목사가 이끄는 ‘십알단’(십자군알바단)의 정체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기관이 대규모로 여론조작을 할 수 있는 건 ‘인터넷’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공무원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말을 하면 선거법 위반으로 큰 벌을 받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싶다고 말해 ‘탄핵’까지 당하지 않았나.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누가 국정원 직원인지 새누리당 알바인지 사이버사령부 요원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주장들이 복사되어 끊임없이 뿌려진다.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이미 많은 독재정권들이 ‘선동’과 ‘여론조작’을 위해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이를 일컬어 이슈를 조작한다는 의미의 단어 스핀(spin)와 인터넷(internet)의 합성어인 스핀터넷(spinternet)이라 부른다. 러시아, 중국, 이란 정권은 블로거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키고 돈을 지불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친 정권적인 댓글을 남기고 블로그에 친 정권적인 글을 올리도록 한다. 정보의 급속한 확산력과 파급력은 반정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정보에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들이 이런 정보의 조작을 택하는 이유는 인터넷을 ‘검열’하는 것이 별로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내용을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이 글을 차단한다 해도 그 내용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차단을 하면 할수록 더 퍼져 나간다. 그래서 독재정권들은 오히려 이 ‘열린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공간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 뿐만 아니다. 국가권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은 독재정권에게도 열려 있다. 과거에 이란의 민주화 활동가들이 서로 접촉하는 방식을 알아내기 위해, 이란 정부는 수주, 수개월에 걸쳐 이들을 뒷조사해야만 했다. 그리고 소련의 KGB는 반정부 인사들의 계보도를 그리기 위해, 조직원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잡혀 온 반정부 인사들을 계속 고문해야만 했다. 그러나 SNS가 발달한 지금 각 국의 독재정권들은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페이스북 페이지와 트위터 팔로어를 보면 반정부 인사들이 연계되어 있는 방식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의 글에 ‘좋아요’를 누른 페이스북 유저들을 뒤져보면 비슷한 성향이나 비슷한 조직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다 드러난다. 리트윗한 ‘트친’들도 마찬가지다. ‘좋아요 조직화’나 ‘리트윗 조직화’의 양상은 독재정권들이 검색 몇 번만 하면 다 알 수 있다. 인터넷 창에 그 사람 트위터 아이디를 치면 그 사람이 올린 트윗이 죄다 검색된다. 독재정권은 프락치를 심어서 누가 반정부 인사인지를 알아낼 필요 없이 검색 한 번으로 누가 반정부 인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현실의 소유방식이 바뀌어야 인터넷도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직 인터넷 공간보다 ‘현실’이 더 견고하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떠돌지 않는다. 정보를 독점한 세력이 그 정보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정보를 매체를 통해 풀어놓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권력’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독점의 견고함은 현실세계의 ‘소유방식’의 견고함에서 기인한다. 정보를 독점한 이들은 이 정보를 운용하고 관리할 물질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국정원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은 채 댓글 다는 데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썼다. 독점적인 소유가 정보의 독점을 낳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터넷의 자유로움과 혁명성 등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진짜 자유로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고민해야 한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소유방식의 변화가 진짜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결국 현실세계의 소유방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정치세력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시민들의 통제 하에 두고, 공동으로 소유하여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인터넷을 ‘정보매체’로 이용한다. 그 이유는 그곳의 소유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권력이 인터넷 공간에 개입하면서 일반의지를 조작한다면 우리는 인터넷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고, 정보매체로 활용할 수도 없게 된다. 인터넷을 잘 쓰고 싶다면 ‘현실’의 문제, 즉 권력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작가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