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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우리는 모두 이미 이방인이다

 


이방인

저자
알베르 카뮈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12-06-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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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모두 이방인인가?


카뮈의 이방인은 ‘부조리’를 표현한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카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부조리가 잘 돌아가는 일상이 잠시 어긋나 생겨난 틈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조리는 우리의 일상이고. 우리 누구는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이방인은 일반적인 사회적 규칙이나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인물을 뜻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방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의 규범이나 합의 공감범위 등을 준수하려 하고, 설사 준수하지 못하더라도 그 합의를 준수하는 척 연기를 한다. 예컨대 부모의 죽음에 슬프지 않아도 슬픈 연기를 하며, 사랑하지 잘 모르겠어도 결혼할 연인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회적 규칙을 어기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뫼르소는 다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게 자신을 표출했다. 그는 사회적 규범이나 합의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보란 듯 규범을 무시함으로써 그럴 배짱조차 없는, 또 법을 지키고 사는 다수의 선량한 서민 대중에게는 이방인 같은 존재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는 엄마가 죽었는데도 별로 슬퍼하지 않고, 피곤해 하기만 한다. 심지어 시신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엄마의 나이조차 잘 알지 못한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집에 가는 길에는 이제 쉴 수 있다며 기쁘다고 말한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날에는 연인을 만나 섹스를 한다. 그는 아랍인을 죽인 뒤 선 재판에서 왜 그랬냐고 묻는 판사의 물음에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재판의 방청객들은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뫼르소 입장에서는 정말 태양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표면적으로 보자면 살인죄라는 명목으로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표면적은 이유에 불과하다. 진짜 이유는 그가 사회적 규범과 가치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진짜 죄목이다. 그의 변호사는 “뫼르소가 어머니를 매장한 죄로 이곳에 온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죄로 이곳에 온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변호사의 물음에 대답하자면, 두 가지는 같은 죄목이다. 검사와 판사는 계속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그 다음날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원래 ‘그런 인간’(사회적 규범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임을 밝혀냄으로써 그의 살인을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다음의 대목을 참조해보자.


검사는, 배심원 여러분, 나는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사실 나에게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인간다운 점도 찾아볼 길 없으며, 인간의 마음을 보전하는 도덕적 원리란 모두 나에게는 인연이 멀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고 그는 이어 말했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비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검사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다음 대목이다.


그러나 이 법정에 있어서는 관용이라는 소극적 덕목은, 그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고귀한 정의라는 덕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의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 심연이 되는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그렇다. 뫼르소의 죄목은 단순히 아랍인을 죽였다는 것에 있지 않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인간을 사회가 용서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뫼르소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뫼르소는 또한 뫼르소 개인의 자격으로 재판에 선 것이 아니다. 뫼르소 외에 재판에 선 이들이 또 있다. 바로 증인으로 나와 뫼르소에 대해 증언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방인 네트워크’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들은 뫼르소와 함께 재판을 받았다.


뫼르소를 돕기 위해 증인석에 출석한 첫 번째 증인은 뫼르소가 늘 가던 식당의 주인인 셀레스트였다. 셀레스트는 뫼르소의 살인에 대해 ‘불운’이라고만 표현한다. 그러나 재판관은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은 불운을 재판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셀레스트는 그 한 사람이 사회 규범을 파괴하는 정도는 운이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가 달라고 호소했으나, 재판관은 단호하게 한 개인의 충동적이고 우연적인 규범 파괴를 용납할 수 없고 대답한 것이다. 뫼르소는 그의 호소에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 때가 생전 처음’일 정도로 공감했다.


두 번째 증인은 그와 사랑은 나눈 마리이다. 마리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나 검사의 강권에 뫼르소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를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잠잠해진다. 사람들의 ‘재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뒤늦게 마리는 그게 아니라며, 다른 것도 있다며 사람들이 억지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이야기를 시킨 것이라며 흐느껴 운다. 나를 잘 알고 있으며 아무것도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미 모든 이들이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뫼르소를 유죄로 판결한 이상, 마리는 공범일 뿐이다. 공범이 필요한 건 다른 범인의 죄를 폭로할 때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용도를 다한 이후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증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송은 얌전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주장했으나 거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살라미노 영감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를 반복했으나, 개를 패는 이상한 영감의 말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 살인사건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 레몽이 나섰으나,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그가 포주 노릇을 업으로 하고 있으며 파렴치한 공범이므로 그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사회적 규범을 파괴한 뫼르소와 같은 편이자 뫼르소만큼 이상한 사람들(살라미노, 레몽이 대표적이다)인 ‘이방인 네트워크’는 뫼르소와 더불어 ‘너희들의 말은 신뢰가 없다’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규범 혹은 합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규범을 따르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에 따르지 않으면 이방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뫼르소는 이방인이 된다. 그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서 거짓말이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가 아는 것 보다 더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즉, 사회적 합의의 일종인 것이다. 뫼르소와 변호사가 대화하는 다음의 대목을 참조해보자.


그는 침대 위에 앉은 다음, 나의 사생활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정보를 수집했노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최근에 양로원에서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되어 마랑고로 조사를 갔었는데 엄마의 장례식 날 ‘내가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조사원들이 알아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신에게 이런 걸 묻는 것은 거북한 일이지만,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거기에 답변할 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소의 중대한 논거가 될 것입니다.”하고 변호사는 말하였다. 그는 내게 그에게 협력해달라고 했다. 그날 슬펐었냐고 그는 나에게 물었다. 이 질문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만약에 내가 그런 질문을 해야 될 처지라면 나는 매우 거북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자문해보는 습관을 좀 잃어버려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물론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뫼르소는 슬프지 않으면 슬프지 않다고 말하는 솔직한 사람이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그 죽음을 바랄 수도 있다는, 누구나 한번 쯤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뫼르소는 서슴지 않고 입에 담는다. 일반 사람들이 이에 기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는데, 매우 흥분한 듯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나에게 시켰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는 육체적 욕구가 흔히 감정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매우 피곤해서 졸음이 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하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가 이처럼 사회적 규범을 잘 따르지 않다보니, 그는 또한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판장에서 다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인 마리와 결혼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이러한 뫼르소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라고 마리를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게다가 결혼을 요구한 것은 그녀 쪽이고, 나는 그저 승낙을 했을 뿐이다. 그때 마리는, 결혼이란 중대한 것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기와 같은 관계로 맺어진 다른 여자로부터 같은 청혼이 있었어도 승낙을 했을 것인가, 다만 그것만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생각해보는 듯했으나,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길이 없었다. 잠시 또 묵묵히 있다가 그녀는 말하기를, 나는 이상스러운 사람이라고, 아마 그 때문에 자기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 테지만, 바로 그 같은 이유로 내가 싫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마리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우리가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은근히 좋아한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을 해주니까 말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어느 순간 그 사람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뫼르소 역시 오랫동안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생각과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과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랍인을 죽인 이후, 사회는 더 이상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뫼르소를 기소한 검사가 말 한 대로, 뫼르소 같은 이들을 사회가 용인할 수는 없다. 한 사회는 그 사회 나름의 합의와 가치가 있으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를 지켜야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회의 가치나 규범 역시 결국 누군가의 가치가 아닌가? 이 가치에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소수자들은 자신의 가치를 억누르고 이를 따라야 하는 것인가? 아니, 더 나아가 우리는 항상 ‘소수자’임에도 다수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사회는 개인들이 모여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일단 한 번 구성되면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규범, 관습, 가치가 하나의 생명력을 갖고 활약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회는 관습과 가치, 규범에 의해 관성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그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는,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들은 하는 개인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견이 있어도 토를 달지 못하며, ‘우리가 합의했으니까’, ‘사회 질서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묻혀버린다. 뫼르소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이러한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의구심을 전면화하고 극단화시킨 캐릭터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뫼르소’다. 또한 뫼르소가 겪는 부조리는 아무 이유도 모르고 어쩌다 ‘불운’하게 누군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죽음이 ‘불운’이나 ‘우연’아 아니라, 한 사회가 운영되기 위한 필연적인 법칙이라는 사실, 그런 현실이 바로 부조리의 실체다. 우리는 부조리를 ‘체험’하지 않는다. 부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의 법칙이다.


2. 이중적인 인간 뫼르소? 뫼르소도 사람이니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통 받았다. ‘모친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 키워드가 ‘부조리’라면 뫼르소의 개인적 관계 또한 충분히 ‘부조리’에 가까울 것이다. 소설은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고, 그리고 죽은 자의 친자로서 장례식을 참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회적 통념상 ‘나’라는 존재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자신을 낳아준 직계인 ‘어머니’이다. 그러나 뫼르소와 어머니의 관계는 ‘상식적 일촌’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어머니의 죽음은 어떠한 감정적 서술 없이 덤덤하게, 이방인의 시각에서 서술되어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그의 일련의 대사들은 흡사 상식적 관계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이처럼 뫼르소는 관계에 있어서 ‘이방인’의 모습을 취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럴수록 그는 오히려 관계 속에 얽매이게 된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타자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뫼르소에게서도 계속 드러난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회사에 휴가를 신청하지만 사장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사실에 뫼르소는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그의 변명인 ‘엄마의 죽음은 내 탓이 아닙니다.’는 이러한 그의 감정을 여실히 표현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변명’이라는 행위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일종의 관계유지책의 하나이다.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그 관계의 유지를 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가 사장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또 다른 대목은 사장이 휴가를 마친 뫼르소에게 그의 어머니의 연세를 묻는 부분이다. 어머니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하는 뫼르소는 어림짐작으로 대답한다. 이러한 행동 또한 ‘변명’에 가까운 행동이다.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은 타자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다면 그냥 ‘모른다.’라고 대답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어림짐작의 답이라도 내놓는다는 것은 오히려 상식적 관계를 유지하고자하는 그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장례식 후에 마리와 만나 관계를 가지는 대목에도 그가 관계를 맺는 데에서 발생하는 이중성이 드러난다. 물론 그는 남녀 사이의 ‘혼인’에 대해서는 이방인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으나 적어도 마리와 만나는 그 시간만큼은 그는 상식적 사람인 것처럼 만나고, 영화를 보고, 섹스를 한다. 이는 그의 친구 레몽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큰 거부감 없이 같이 소시지를 먹고, 술을 마신다. 배신한 그의 여자친구에 대한 복수를 위해 편지를 써주기도 한다. 또한 레몽의 부탁에 그녀의 오빠인 아랍인과 그의 패거리를 확인해 주기도 한다. 결국 그를 사형으로 내몬 사건의 배경인 별장도 레몽의 초대로 가게 된 것이고 사건이 발생한 이유도 별장에서 그가 아랍인과의 다툼에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실제로는 레몽과의 관계를 이방인적인 태도가 아닌 ‘상식적' 태도에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웃의 살리마노 영감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도 그는 이방인적 태도가 아닌 상식적 태도를 취한다. 이는 개를 잃어버린 살리마노 영감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는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다. 피부병에 걸린 개를 학대하던 살리마노 영감이 개를 잃어버리고 슬퍼하던 장면에서 뫼르소는 살리마노 영감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며 개를 찾는 것에 대한 조언과 몇 가지 예측을 제공한다. 이는 살리마노 영감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행위로 판단할 수 있다.


종합해볼 때 뫼르소가 철저히 이방인적 태도를 유지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대상은 주로 어머니와 관계된 사람들이다. 소설의 시작인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에서 만난 양로원의 문지기, 양로원의 원장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어머니의 절친했던 친구. 그리고 2부에서 등장하는 검사와 판사 모두 여기서 뫼르소의 어머니와 직간접적인 관계가 존재했던 대상들이다. 검사와 판사의 경우 뫼르소의 어머니에 대한 태도를 그들의 주장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간접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면에 의도하였든 혹은 의도하지 않았든 뫼르소가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대상들은 뫼르소 그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사장, 이웃집의 살리마노 영감, 역시나 이웃에 살고 있는 레몽, 그리고 자신과 연인사이였던 마리까지 이들 모두 어머니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상대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방인 네트워크’와의 관계 유지를 이해 그는 나름대로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에 대한 뫼르소의 관계적 부조리, 즉 관계의 이중성은 그가 휴가에서 돌아온 후 회사에서 그가 손을 씻는 수건에 대해 생각하는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다. ‘저녁이 되면 축축해서 불쾌한 수건’. 그러나 화장실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수건은 축축해서 불쾌한 그 수건 하나뿐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철저히 이방인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하지만, 그리고 그 행위가 불쾌하지만 피할 수 없는 관계. 이 속에서 뫼르소의 관계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우리 모두 ‘이미’ 뫼르소라는 앞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다. 우리는 모두 ‘쿨하게’ 살기를 원한다. 쿨함에 대한 욕망이 있다. 관계에 있어서 얽매이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우리는 관계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방인의 시선을 택하고자 했던 뫼르소 역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장과,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에 완전히 무관심한 독고다이(왕따)나 타자와의 관계에 완전히 얽매인 자의식 과소 인간은 현실에 드물다. 오히려 현실엔 뫼르소처럼 이중의 모습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인간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이러한 측면에서 모두, 이미 이방인이다.


3. 뫼르소는 과연 귀차니즘에 빠진 ‘탈 가치적’ 인물인가?


주인공인 뫼르소는 가치관이 없는 무가치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책에서 그가 제일 자주하는 말 중에 하나가 무엇 무엇이라고 생각했지만 귀찮아질까봐 아니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에 그런 생각을 말하기 않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얼핏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뫼르소는 오히려 자신만의 명확한 가치관을 가치고 있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장례를 둘러싼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 어머니가 죽고 장례식을 치룬 다음날 그는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사랑을 나눈다. 이는 자신의 세상의 중심이고 자신이 행복이 제일 중요하다는 자기중심적 가치관이다. 뫼르소가 느꼈던 일시적인 행복이 쾌락이라고 본다면, 그는 심리적으로 거리가 먼 어머니보다 자신의 만족감을 더 우선시한 것이다. 아무리 핏줄이 만든 부모 자식과의 관계라고 해도, 그와 어머니의 심리적 거리는 매우 멀었다. 뫼르소는 양로원이 가기 전에도 어차피 어머니와 자신은 별 애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부모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자기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한 뫼르소에 대해 비인간적이고 아무 감정도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 자신’을 더욱 중요시하는 자신의 가치관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 아닐까?


사회적 잣대들은 손쉽게 개인의 만족이나 욕구를 억누른다. 특히 한국 같이 ‘공동체의 가치’가 중요시 되는 사회에서는 ‘인간관계(특히 혈육)’에 있어서 사회적 잣대가 엄격하다. . 요즘 현대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사회적 잣대에 못 이겨 본의와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조의 조원 중 한 명인 양원태도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물론 뫼르소와 비교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양원태는 하나밖에 없는 삼촌의 결혼식을 나의 개인적인 유희를 추구하기 위해 불참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 점점 고향에 있는 삼촌에게 거리감을 느껴게 된 것이다. 사회적 잣대와 주변사람들의 이목이 신경쓰여 결혼식에 가야되겠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자아의 만족, 생활의 유희를 찾다보니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양원태는 두 가지를 느꼈는데, 하나는 자아가 추구하는 쾌락에 대한 만족과 하나는 직면하게 될 주변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일을 후회할 수도 있고, 그때 재밌게 놀았다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 뫼르소 역시 두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기만족의 가치관을 밀어붙인 것이 아닐까?


사장의 눈초리를 신경 쓰면서 자신에 대한 비난을 두려워하는 모습 역시 자기만족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반영된 행동이 아닐까? 어머니의 죽음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뫼르소가 사장의 눈초리를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이유는, 현재의 관계에서 사장은 자신의 만족을 현실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경우는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제약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사장의 경우는 자신의 행복과 자기만족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다. 물질적인 욕구와 현재 자신의 심리적인 모습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장의 눈초리는 자신 중심적인 가치관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영향을 주는 사회젓 잣대는 관념적이고 무시하면 되는 것이지만 사장의 눈초리는 이전의 경우보다 구체적이며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뫼르소가 가진 또 다른 확고한 가치관은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이다. 그는 야심이라곤 없으며, 현실이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할 것이라는 어떠한 낙관적 기대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지독한 냉소가 엿보인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사장이 뫼르소를 파리로 출장 보내려는 데에 대해 뫼르소가 대답하는 장면이다.


“자넨 젊으니까, 그런 생활이 자네 마음에 들 것 같은데.”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이 생활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어떤 생활이든지 다 그게 그거고, 또 이곳에서의 내 생활에 조금도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불만스러운 눈치를 보이며 하는 말이, 나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 언제나 딴전이고 나에게는 야심이 없는데 그건 사업하는 데는 아주 좋지 못한 점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생활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봐도 나는 불행하진 않았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단순히 야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사형 선고를 앞둔 마당에도 냉소주의를 보인다.


“그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거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혹자들은 냉소주의가 어떻게 가치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냉소주의는 모든 것을, 즉 어떠한 주도적인 가치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지만 뫼르소는 냉소주의를 부정적인negative 형태 넘어서는 ‘긍정적이고’ ‘힘을 가진’ 가치관으로 만들어낸다. 그가 단 한 번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일반적인 사회 규범 - 인간은 신에게 용서받고 심판받아야 한다. - 을 강요하는 신부의 말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지 않는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차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을 것이다.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뫼르소처럼 확신에 차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할 수 있을까? 그는 누구보다 강한 믿음으로 세상에 대한 냉소주의를 밀어붙이고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 대해 냉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이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은 채 냉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이미 이방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