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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논문 및 레포트

데카르트의 철학과 그 방법

1. 데카르트 철학의 목표

데카르트 철학의 최대 목표는 이성을 사용하여 철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철학은 지혜의 탐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지혜란 모든 사물들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다. 비유하자면 도덕, 의학, 역학 이 나무의 가지라면 철학은 뿌리이다. 동시에 철학이란 실천적 가치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근대철학의 시조이자 혁명적인 이유는 그가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 철학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이성에만 의지하여 명석하고 판명된 것(확실한 것=지식)과 추측, 그저 그럴 듯한 것(데카르트는 이것이 스콜라철학의 책임이라 말한다.)을 구분한다. 하지만 그가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과거 몇몇 철학자들의 공로는 참된 것으로 인정했다. 다만 ‘올바른 방법을 통해’ 재발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의 공격하는 철학 사조는 회의주의이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이상이란 학문적으로 확립된 진리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라 보았다.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도록 질서 지워진 진리의 체계가 철학이며, 철학이란 통일된 전체로서의 학문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비교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다른 학문의 서로 다른 주제와 내용들이 서로 다른 방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대학문, 철학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데카르트가 이미 제시된 진리를 단지 재배열하고 증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올바른 방법의 사용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리를 알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물론 철학사가 코플스턴이 비판하듯이, 이러한 데카르트의 방법론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수학적 방법이란 자명한 원리들로부터 이 원리들에 논리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명제들을 연역해내는 작업인데, 연역이란 인과관계와 논리적 함축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이 경우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체계를 채택할 수밖에 없으며, 형이상학과 논리학이 동일한 것이 된다. 또한 물리학은 어떠한가? 물리학의 진리가 연역될 수 있다면 물리학 실험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물론 데카르트도 이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실제적 연구절차와 이상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2. 데카르트의 방법과 원리

데카르트는 확실하고 손쉬운 규칙들을 제시하고, 이를 지키기만 하면 참, 즉 진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의 규칙이란 인간 정신과 별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자연적 능력과 작용을 올바르게 하기 위한 규칙을 의미한다. 이 규칙을 작용하는 방법은 직관과 연역으로 구성되며, 연역을 직관으로 변형할 수 있다. 예컨대 제 1원리에서 직접 연역되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제1원리 자체는 직관이며 그 결론은 연역이다. 연역의 확실성은 기억의 타당성에서 비롯되는 데, 추론을 반복함으로써 제1원리에 결론이 함축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파악함으로서 기억의 역할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직관과 연역을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은 규칙이 아니다. 방법은 두 정신적 작용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규칙들로 이루어지며 질서를 이루려는 것이다. 우리는 질서 있는 규칙을 지켜야한다. 그렇다면 규칙이란 무엇인가? 방법서설에 의거하여 살펴보자. 첫 번째 규칙.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이외의 어떤 것들도 받아들이지 말 것. 이를 회의라 한다. 또한 방법이란 우리의 정신이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대상들을 질서지우고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복잡. 모호한 명제들을 단계적으로 단순한 것으로 환원해야 한다. 이는 2번째 규칙과 연관된다. 즉 두 번째 원칙이란 검토해야만 하는 각각의 어려움들을 가능한 한 많은 부분들로 나누는 것이다. 이를 분석. 분해. 발견의 원리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원칙, 인식에 이르는 길을 되돌아간다. 단계가 안 빠졌는지, 두 번째 명제가 첫 번째 명제에서 나온 것인지. 이를 종합. 합성. 혹은 ‘이미 알려진 것을 논증’하는 규칙이라 한다.

왜 우리는 분석하는가? 우리는 분석을 통해 단순한 본성들에 대한 직관에 이를 수 있다. 단순한 본성이란 무엇인가? 물체는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물체를(물질적 본성, 연장성, 형태 등) 이러한 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물로 파악하며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형태를 더 이상 어떤 요소로 분석할 수 없다. 단순한 본성들이란 분석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요소를 뜻한다. 형태, 연장성, 운동 등이 물질적 단순한 본성에 해당한다. 지적인 본성은 의지, 사고, 회의이며, 공통되는 본성은 현존, 단일성, 지속성이다.

요약해보자. 데카르트를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무엇인가? 최초에 모든 명제를 직관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제들을 통해 현존과 같은 단순한 본성이 추상화 과정에 의해 분리된다. 판단은 명제의 형식이며, 단순한 본성들 사이의 결합, 판별이라는 연결은 그대로 남는데, 이는 바로 명제들에 의해 확인된다. 그렇다면 단순한 본성들이 이상적 질서인가? 단순한 본성들을 존재에 관한 결론으로 연역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존재에 관한 명제로부터 신의 현존을 이끌어낸다. 그는 존재와 아무 관련이 없거나 존재와의 관련이 의심스러운 형이상학을 산출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존재에 관한 명제 도입이 수학적 방법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 발언은 수학의 역할을 과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원리’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원리는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언명과 같은 추상적 원리일 수 있다. 이 같은 원리에선 어떤 것의 현존도 연역될 수 없다. 또 원리는 현존을 확인하는 명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이러한 원리로부터 신, 자신을 제외한 피조물들의 현존이 연역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발견의 질서가 존재의 질서에 앞선다. 신이 앞선 게 아니라 발견의 질서에 따라 자기 자신의 현존이 앞선다. 자기 자신의 현존에서 신의 현존, 사물들의 현존을 발견한다. 즉 데카르트에 따르면 ‘나’가 있고 나서야 신이 있다. (과연 ‘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는 뒤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비슷한 논리에 따라, 물리학이 형이상학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신이 창조하려고 선택하였을지도 모를 어떤 물질적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한 지식과 실제로 신이 창조한 물질적 사물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구별한다. 분석을 통하여 단순한 본성 도달하고, 이로부터 일반 법칙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앞에서도 언급한 의문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데카르트의 방법에서 경험, 실험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리적 사물의 현존한다는 사실을 선천적으로 연역할 수는 없다. 자석의 존재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석의 참된 본성을 규명하기 위해선 데카르트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관찰들을 수집하고 이로부터 연역을 한다. 단순한 본성으로부터 연역한 다음 실험을 통해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를 확인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데카르트는 일차적, 일반적 결과와 원리들, 개별적 결과를 구별한다. 전자는 어려움 없이 연역되지만 하나의 동일한 제1원리로부터(후자) 연역되는 무한한 결과들은 쉽게 연역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실제로 발생하는 것과 발생할 수 있었지만 신에 의해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 구별을 위해 우리는 경험, 실험을 사용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범 수학주의(수학적 방법론이 옳다!)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실험과 감각, 경험을 인정한다 해도 순수한 연역이라는 데카르트의 이상은 남아있다.

데카르트의 또 다른 방법은 회의이다. 회의는 보편적이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그러나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의심스러운 것으로부터 구별한다는 점에서 방법적이다. 신뢰하지 않았던 것을 반드시 새로운 명제로 대체시킬 것을 목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잠정적이기도 하다. 회의의 범위는 모든 감각적인 것이다. 데카르트트는 우리가 잠잘 때 속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회의는 수학 명제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설령 마음대로 섞어 허구적인 것을 만들어 낸다 해도 이것을 구성하는 색깔만은 적어도 참 되다. 눈, 머리, 손 등의 일반적인 것이 공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과는 다른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물질적 본성 일반 및 그 연장, 그리고 연장적 사물의 형태, 그것의 양, 즉 그것의 크기와 수, 그것이 존재하는 장소, 그것이 지속하는 시간 등이다. 따라서 자연학, 의학 및 복합적인 것을 고찰하는 모든 학문은 의심스럽지만,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을 다루는 대수학, 기하학 등은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다. 내가 깨어있든 잠들어 있든 이 더 하기 삼은 언제나 오이며, 사각형은 네 변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가설을 통해 수학 명제조차 회의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낸다. 악마가 속이고 있다는 가정이다.

3.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 한다

앞에서 데카르트의 말대로, 내가 보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내 기억은 기만적이다. 나는 어떠한 감각도 갖고 있지 않으며. 물체, 형태, 연장, 운동 및 장소도 환영 이외에 다름 아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뿐이다. 그런데 이 확실한 사실을 나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내 안에 다른 누군가 있다면? 누군가 나를 설득했다면? 설사 다른 누군가 있다 해도, 누군가가 들어설 ‘내’가 존재한다. 누군가 나를 설득했다 해도, 그가 설득할 ‘내’가 존재한다.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이 나를 속인다 해도, 속일 대상인 ‘내’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세심히 고찰해 본 결과, ‘나는 있다, 나는 현존 한다’는 명제는 필연적으로 참이다.

나는 이 전에 나를 신체라고, 물체의 하나로 가정해왔다. 그러나 악신이 나를 속인다면 신체는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가? 이것은 나와 분리될 수 없다. 내가 사유하는 동안,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나는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이란 의심하고, 이해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의욕하고, 의욕 하지 않으며,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는 ‘내’가 현존한다.

가장 판명하게 파악된다고 믿는 물체를 고찰해보자. 밀랍이 있다. 밀랍은 나름의 빛깔과 모양, 향기를 가지고 있다. 이 밀랍을 불 가까이로 가져가면 밀랍의 모든 것이 변한다. 그럼에도 밀랍은 여전히 밀랍이다. 왜인가? 내가 밀랍을 밀랍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랍에게 속하지 않는 특성들을 모두 지우고 나면 연장성, 유연성 및 가변성이 남는다. 이것들이 밀랍의 본질이다. 이는 오로지 정신에 의해 지각될 수 있다. 즉 물체조차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오성에 의해 지각된다. 물체는 만져서 혹은 보아서가 아니라 이해함으로써 지각된다. 내 정신보다 더 쉽게 또 더 명증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제1원리가, 의심할 수 없는 원리가 등장한다. 여기서 사유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의식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제1원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나”는 무엇인가? 사고 작용과 구별되는 다른 어떤 것의 현존은 확인할 수 없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영혼(정신, 의식)과 육체의 구별을 하고 있다. 나 자신은 육체가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코플스턴은 이 점을 지적한다. 사고 작용이 사고하는 자를 필요로 한다는 데카르트의 가정은 사고 작용, 사고 자체는 대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상이 아니며 나는 사고하는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회의되지 않았다. 이는 스콜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실체’의 개념을 전제하고, 실체의 이론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 현존을 증명한 이후에야 실체에 관해 다룬다. 나는 단지 ‘사고 작용’이 아니라 내가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나의 사유는 어떻게 하면 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명제가 참이고 확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데카르트는 확실성에 대한 일반적 기준을 검토한다. 진리임을 보증해 주는 것은 자신이 그 명제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매우 명석하고 매우 판명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참(일반 규칙으로)이다. 지각은 판명하지 않으면서 명석할 수 있지만 명석하지 않고서는 판명할 수 없다. 이러한 기준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존재한다. 첫째, 우리가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들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둘째, 나에게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들에 관해서도 내가 속임을 당할 수 있도록 신이 나에게 그러한 본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데카라트는 신의 현존을 증명해야한다.

4. 신의 현존을 증명하라!

데카르트는 우리를 속이는 자로서가 아닌 신의 현존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내부로부터의 신 증명이다. 데카르트는 과장된 회의를 제거하려는 용도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기 때문에, 그는 외부세계와 전혀 관련하지 않은 채 신을 증명해야한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 안에 있는 관념들은 특성의 측면에서 서로 다르고 어떤 관념은 다른 관념보다 더욱 큰 객관적 실재성을 포함한다. 이 관념들 모두는 야기된 것이며 더욱 완전한 것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연장성, 운동이란 관념이 내가 단지 사고하는 존재일 뿐이라면 어떻게 갑자기 등장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관념들은 실체의 어떤 양태일 뿐이고 나는 실체이므로 그들은 분명 나 자신 안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신의 관념을 나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가? 내 자신은 이런 것들에 대한 관념들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 유한 실체의 나에게서 무한 관념인 ‘신’은 도출될 수 없다.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의 관념과의 비교에서 나의 유한함과 한계가 드러난다. 내가 지니고 있는 무한의 관념은 명석하고 판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나 자신도 무한한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는 반박이 가능하다. 그러나 완전성에 이를 정도로 지식을 증대시키는 능력은 현실적이고 무한한 신의 완전성이라는 관념과 비교해보면 단지 불완전한 것에 불과하다.

데카르트는 두 번째 신 증명을 살펴보자.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의 관념을 지니고 있는 내가 그러한 존재가 현존하지 않더라도 현존할 수 있는가? 내 현존을 신보다 덜 완전한 어떤 다른 근원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나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나는 다른 존재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인은 최소한 결과가 지닌 것만큼의 실재성을 지녀야한다. 그러나 내가 의존하고 있는 존재가 신보다 못하다면 이 존재의 현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두 번째 신 증명이다. 완전한 관념을 지니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원인으로서 신을 확인한다. 그러나 역시 완전한 것이라는 관념 자체는 긍정하고 있다. 이 완전한 관념은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도출된 것도 아니며 정신적 허구도 아니며 결국 내 안에 본유적으로 들어 있다. 즉 나와 신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인데, 데카르트는 신이 나를 창조했을 때 넣어둔 것이라 말한다. 즉 우리는 본성상 신을 인식할 수 있는 본유적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데카르트는 내부적으로 신의 관념을 형성하고 있다.

만일 내 안의 완전한 존재의 관념이 없다면 (비교를 통하여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나는 어떻게 내가 회의하고 욕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내가 완전한 것을 동경해서 무한하고 완전한 것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완전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의 불완전성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논리이다.

5. 데카르트의 ‘임시의 도덕’

데카르트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식을 기초로 각종 도덕 법칙들을 이끌어내고, 신의 현존까지 증명해냈다.. 하지만 그는 이와 별개의 도덕에 대해『방법서설』 3부에서 언급한다. 이성이 여러 판단에 있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행동에 있어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 상태에 있는 일이 없도록 마련해야 할 임시의 도덕이 그것이다.

그 중 첫 번째는 자신이 속한 나라의 법률과 관습에 복종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가 어렸을 적부터 배워 온 종교를 지키며,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는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보통 받아들이고 있는 가장 온건하고, 극단에서 가장 먼 의견들을 따라 나를 다스리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의 진정한 의견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의 실제 행동이다. 그리고 그 의견들 가운데 오직 온건한 것들만 택한다. 이는 온건한 의견들이 언제나 실행하기 가장 편하고, 참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지며, 모든 극단은 으레 좋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실수를 하는 경우에도 극단적인 의견들 중 하나를 택하고 나서 나중에 그 반대되는 극단을 따라야 했음을 깨닫는 경우보다 내가 올바른 길로부터 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는 내 행동에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확고하고 가장 결연한 태도를 취하며, 또 아무리 의심 가는 의견들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 그것들이 아주 확실한 것인 양 어디까지나 그것들을 따르는 것이다.

세 번째는 언제나 운명보다 나를 이기며, 세계의 질서보다는 오히려 내 욕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생각뿐이며, 따라서 그 생각 외부에 있는 것들에 관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한 후에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믿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마지막은 자신의 이성을 개발하는 데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며, 진리 인식에 있어서 내가 스스로 나에게 과한 방법을 따라 될 수 있는 데까지 전진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6. 데카르트 전반에 대한 평가

데카르트에 대한 후세 철학자들의 코멘트를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헤겔은 데카르트가 사고 또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사고나 이성 자체로부터 의식의 내용을 연역해 내지 않고 사고나 이성을 경험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의식, 사고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철학의 혁명을 이루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현상학자 후설은 학문들의 통합을 목표로 삼았던 데카르트였기에 주관주의의 출발점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데카르트는 자기 반성적 자아에 대한 성찰로 출발하며,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주관, 의식을 지니고 있는 자아와 관련된 현상으로 보면서 논의를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후설은 데카르트를 현대 현상학의 선구라고 평가한다.

 

참고문헌

르네 데카르트,『방법서설 :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1997.

르네 데카르트,『성찰』,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1997.

에드문트 후설,『데카르트적 성찰』, 이종훈 역, 한길사, 2002.

F.C. 코플스턴,『합리론』, 김성호 역, 서광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