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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문학 외

내 안에 귀신 있다

 


귀신이 온다 (2001)

Devils on the Doorstep 
9.4
감독
강문
출연
강문, 사와다 겐야, 첸 치엔, 오대유, 유안 딩
정보
전쟁, 드라마 | 중국 | 134 분 | 2001-10-26

영화 <귀신이 온다>는 평온하던 한 마을에 들이닥친 두 개의 자루에서 시작한다. 이 마을은 1945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군 마을이다. 이곳은 매우 평온한 마을이다. 비록 점령지이긴 하지만 일본군은 이 마을에 큰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일본군은 매일 매일을 밴드 연주와 수영으로 살아가며,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주고 기껏해야 종종 닭을 잡아먹고 싶어 마을을 찾아올 뿐이다. 마을은 말 그대로 평온하다, 아무 일이 없다.


그러나 이 평온은 정말 ‘평온’인가? <귀신이 온다>의 감독 강문이 영화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러한 질문이다. 외세가 침략해도, 제국주의 군대가 마을을 지배해도, 마을에 큰 위협만 가하지 않으면 정말 그 마을을 ‘평온’할 수 있는가? 정말, ‘아무 문제없는 것’인가?


이 영화의 제목은 ‘귀신이 온다’이다. 여기서 과연 귀신은 누구일까? 귀신이란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현세를 떠도는 넋을 뜻한다. 주인공 마다산과 마을 주민들에게 귀신이란 두 개의 자루, 일본군 장교 하나야와 통역사 동한천을 맡기고 떠난 ‘나’이다. 그리고 이 귀신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현세의 문제’란 일본군 장교 하나야와 통역사 동한천이다.

사람들이 귀신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귀신의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나타났는지, 왜 나타나 나에게 공포를 주는지 인간은 알지 못한다. 갑자기 나타나 마다산에게 총을 들이민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으며, 두 개의 자루를 일본군에게 들키지 않고 맡아놓으라고 한다. 이제 마다산과 마을 사람들은 귀신이 해결하라고 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설날만 지나면 ‘나’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6개월 동안 마다산과 마을 사람들은 귀신이 맡기고 간 현세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우왕좌왕한다. 문제가 되니 죽이려고 했다가 부정이 탄다며 죽이지 못하고, 갈등하다가 하나야가 살려주면 곡식을 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일본군에게 하나야와 동한천을 넘긴다.


그러나 과연 귀신은 ‘나’인가? 평온하게 살아가던 마다산과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감독의 메시지에 따르면 귀신은 바로 마다산과 마을 사람들 그 자신이다. 마치 영화 <디 아더스>의 귀신들처럼, 그들은 자신이 귀신인 것을 모르고 있다.


마다산과 주민 사람들은 점령지의 주민이지만 일본군에게 적당히 굽신 거리면 아무 탈 없이 살 수 있다. 사탕이나 구걸하고, 닭이나 잡아주면 일본군은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 늘 반복되는 군악대의 연주는 이런 삶을 대표한다. 마다산과 마을 주민들에게 지배와 수탈이니, 외세의 침략이니 하는 것은 별 상관없다. 지금 상태가 그저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는 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고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 그들 역시 피해자이고 피수탈자이며, 어떤 식으로든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 일본군 점령지의 중국인으로써 말이다. 일본군은 관용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이며, 그들은 장난치듯이, 축제를 벌이듯이 그들을 모조리 학살해버릴 수도 있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미 다른 마을에서는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침략에 저항한 이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이 일본군이다.(강문이 출연한 다른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는 이러한 일본군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마다산의 마을은 매우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는 사실 진짜 평화가 아니다.


감독 강문은 ‘나’라는 인물을 통해 거짓 평화 속에 안주하고 있는 중국인 마을에 ‘당신들이 바로 귀신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은 ‘나’라는 인물의 갑작스런 등장을 통해 나0타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짓 평화를 누리면서 욕망과 바람도 없이 살아가는 중국인들 자신에게 내재하고 있었다는 메시지! 그들에게 던져진 하나야와 동한천은 ‘나’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점령군에게 지배당하는 인간들이 풀어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자신들이 점령군 일본과 점령자에 맞서 싸우는 중국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죽음의 공포는 늘 그들 곁을 따라다닌다는 그 ‘과제’ 말이다. 평온하고 변화 없는 마을을 상징하던 ‘군악대의 연주’가 이제는 공포의 대상이다. 가끔 들이닥쳐 닭을 먹고 싶다던 일본군도 이제는 공포의 대상이다. 언제 일본군 장교 하나야가 소리를 질러 일본군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잘 모르고 있던 자신들의 과제를 깨달은 순간, 중국인들은 공포에 휩싸여 우왕좌왕한다. 귀신이 자신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자신이 왜 귀신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한(恨)을 해결해야 현세를 떠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귀신은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마다산과 마을 주민들이 딱 그 꼴이었다. 하나야와 동한천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면서 우왕좌왕한다.


결국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자신을 살려주는 대가로 엄청난 곡식을 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하나야와 동한천을 일본군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일본 천황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가만히 하루만 버티고 있었으면 연합군이 들이닥쳐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곡식을 준다는 말에 넘어가 하나야를 일본군에게 넘겼다. 일본군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곡식을 잔뜩 가지고 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파티를 벌이다가 그 파티를 학살극으로 마무리한다. 이제 패배했고, 죽는다는 생각에 분풀이로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해버린 것이다. 그들의 평화가 얼마나 거짓된 평화였는지 드러난 순간이다. 그리고 마다산과 마을 주민들은 그것도 모르고 곡식을 준다는 말에 신나서 그들에게 목을 내민 것이다.


반일감정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인의 반일감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중국 침략과 잔혹한 중국 학살에서 비롯되었다. 난징대학살은 중국인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다. 물론 어떠한 이유에서건 전쟁을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한 행위는 역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죄이다. 거기다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도 한 적이 없으니,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감독 강문은 ‘일본이 잘못했으니 반일감정을 가진다.’는 단순한 도식에서 벗어나 과연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귀신은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짓된 평화에 만족하며 살아갔던 중국인 자신이 아니냐고 말이다. 역사는 일본인의 잘못을 열거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수동적인 방식으로 일본의 지배에 동참했는지,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반일감정은 일본이 사과를 안 한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으로만 전개되고 있지는 않은가? 중국이 반대해야 하는 대상은 일본에 수동적으로 협력한 중국인들 자신이 아닐까? 중국 정부가 이 영화를 상영 금지시킨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마다산은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학살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일본군에게 맞서는 투사가 된다. 그는 일본군 포로수용소로 침입해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일본군을 살해하다가 붙잡힌다. 포츠담 선언을 위배했다는 죄다. 중국 국민당 정권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써 일본군 포로를 더 이상 해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다. 중국인 장교는 마다산이 이러한 평화협정을 위배하고 일본군포로들을 살해했으니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로 중 한 명이자 마다산이 살려준 하나야가 그의 사형을 집행한다. 그는 자신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투사로 변했지만 이제 국가는 그 투사를 용납하지 않는다.


마다산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 화면은 컬러로 바뀐다. 죽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내가 귀신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이상 귀신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의 과제를 해결하고, 귀신 마다산은 미소를 지으며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