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7.10.03 11:13

https://univ20.com/75913

[Question] MBC, KBS는 없어도 된다고?

우리가 주인이다, 이제 언론을 장악하자.

“MBC, KBS 없어도 돼. JTBC 뉴스 보면 되지. 드라마는 tvN 보면 되고.”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린다. KBS 뉴스가 여론을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끝났고, ‘드라마 왕국 MBC’도 이제 옛말이다. MBC와 KBS, 두 공영방송 없이도 우린 재밌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게 다일까?

 

음수사원(飮水思源). 상암 MBC 사옥에 걸려 있는 글귀다. 풀이하자면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언론인들이 언론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론의 근원은 어디일까? 시청자일까?

 

안광한 전 MBC 사장은 2014년 9월 MBC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 ‘음수사원’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귀에는 비밀이 하나 숨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MBC 대주주인 정수장학회의 전신, ‘5·16 장학회’에 친필로 남겼던 글귀가 바로 ‘음수사원’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MBC에 걸려 있는 이 글귀의 의미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권력자는 늘 여론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어 하고, 이를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 언론 통제였다.

 

따라서 권력자가 말하는 ‘음수사원’이란 “시청자를 생각하라”가 아니라 “권력의 눈치를 보라”는 말로 들린다. “너희들의 진짜 주인이 나라는 거, 알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언론의 근원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MBC와 KBS, 두 공영방송 언론인들이 방송 독립을 외치며 파업 중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언론인들의 ‘방송 장악’이라 말한다. 글쎄, 아마 언론의 근원을 정치권력에서 찾고 있는 이들이라면,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자는 언론인들의 요구가 자신들의 것을 빼앗아가기 위한 ‘장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방송 장악은 필요하다. 공영방송을 마침내 국민의 것, 우리의 것으로 가져오기 위한 장악 말이다. 공영방송은 공공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해 방송을 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된다. MBC와 KBS의 언론인들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다.

 

그것은 우리가 MBC와 KBS를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뉴스룸> 같은 뉴스를 만들지 못해도, <도깨비> 같은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MBC와 KBS가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예능, 젊은 층의 니즈를 겨냥한 드라마, 한층 더 깊이 들어가는 뉴스는 케이블 채널과 종편이 더 잘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방송은 우리 것이 아니다. 다른 주인이 있다. 그 주인의 이름은 사주, 광고주 등등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 방송법에는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에 관한 규정이 있다. “방송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거나 이익 추구의 실현에 불리한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충실하게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방송법 제6조 5항의 내용이다.

 

왜 소수자나 약자를 대변하라고 법으로 규정했을까? 기득권과 강자는 자신의 입장을 외칠 수 있는 마이크도 많고 뜻을 관철시킬 수단도 너무 많은데, 소수자나 약자는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방송이 나서서 그 불균형을 바로잡아주라는 뜻이다.

 

MBC와 KBS가 사라진다면, 또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사그라든다면 우리는 어떤 언론에 이런 공공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억울할 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미디어 경쟁이 극에 달해, 언젠가 시장의 논리가 방송과 언론을 완전히 지배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언론의 공공성과 공익성은 좋은 시절 한가한 소리로 취급 받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내일도 아닐 것이다. 여전히 방송의 공공성을 붙들고 있는 언론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인이다, 이제 언론을 장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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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7.09.13 09:28

http://with.ibk.co.kr/webzine/view.php?wcd=380&wno=8&searchmode=1&searchkey=&searchval=%EA%B0%80%EC%A7%9C%EB%89%B4%EC%8A%A4&list2PageNow=

‘가짜 뉴스’가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경찰이 가짜 뉴스를 수사하고, 정당과 대선 후보들은 가짜 뉴스에 대한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하지만 검열과 단속만으로 가짜 뉴스가 사라질까?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2016년 말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꼽았다. 이 탈진실 현상을 대표하는 것이 ‘가짜 뉴스(fake news)’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가짜 뉴스 덕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가짜 뉴스는 2017년의 화두가 됐다.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가 논란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에서는 뉴스 형식을 갖춘 전단지가 뿌려졌다.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특검 검사들에게 성추행 전력이 있다는 등의 ‘가짜 뉴스’로 가득 차 있었다. 기성 언론사의 제호와 헤드라인, 기사 폰트를 흉내 내서 진짜 기사처럼 만들어주는 ‘가짜 뉴스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했고, 인터넷 공간에서 이 앱을 통해 만들어진 가짜 뉴스가 퍼진다.

대통령 선거 같은 중요한 선택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가짜 뉴스는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 ‘버즈피드’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 후보 지지를 발표했다’는 가짜 뉴스의 페이스북 참여율(공유, 좋아요, 댓글을 모두 합한 통계)은 96만 건에 달했다. 민주당 클린턴 후보가 테러 단체 IS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공개됐다는 가짜 뉴스의 참여율은 75만 4000건이었다. 조기 대선을 앞둔 한국에서도 대선 후보를 겨냥한 가짜 뉴스가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고, 선관위도 가짜 뉴스에 대한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가짜 뉴스에 대한 단속과 검열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가짜 뉴스를 모두 검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더 큰 문제는 ‘누가 가짜 뉴스를 규정할 것인가?’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가짜 뉴스’를 탓했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가짜 뉴스에는 3만 달러 수수 의혹, 조카의 뇌물 수수 의혹 등 언론의 검증 기사가 포함돼 있었다. ‘나를 비판하는 것은 모두 가짜 뉴스’라는 식의 자의적 규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저서 <음모론의 시대>에서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해석 장애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음모론은 공식적 설명과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고 지적했다. 가짜 뉴스도 마찬가지다. ‘탈진실’이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기문 전 사무총장을 상처 입힌 ‘퇴주잔’ 논란은 악마의 편집으로 인한 가짜 뉴스였다. 묘에 절을 하고 퇴주잔을 마셨는데도 절하는 장면은 사라지고 음복하는 장면만 편집한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를 확인 없이 퍼 나른 건 기성 언론이었다.

지난해 말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가 “여성 대통령은 안 된다, 한국을 보라”고 말했다는 가짜 뉴스가 SNS에서 확산됐다. 한 누리꾼이 만든 합성 사진이었지만 몇몇 언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이를 보도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이쯤 되면 누가 가짜 뉴스를 만들고, 누가 진짜 뉴스를 만드는지 헷갈린다.

의심스럽다면 검색 한번만

가짜 뉴스는 뉴스 유통이 생산을 장악한 시대의 단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언론 매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뉴스를 어디서 봤나?”라고 물으면 <조선일보> 혹은 <한겨레>라고 답하는 대신 “네이버에서 봤어”. “페이스북에서 봤어”라거나 “카톡으로 누가 보내주던데”라고 답한다. 네이버, 페이스북, 카카오톡의 역할은 더 이상 생산된 뉴스를 유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뉴스 유통을 장악당한 기성 언론은 네이버 검색어에 오를 만한 뉴스나 페이스북에서 화제가 되는 이야기를 팩트 체크 없이 기사로 작성했다. 그러는 사이, 가짜 뉴스는 네이버 블로그, 페이스북, 카카오톡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다. 기사의 출처를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의도를 지닌 가짜 뉴스 생산자들이 텅 비어 있는 ‘권위 있는 뉴스’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뉴스 소비자의 비판적 사고다. 가짜 뉴스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확증편향’을 통해 퍼진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가짜 뉴스에는 “<워싱턴 포스트>가 OO라고 말했다”거나 “영국 정치학자들이 OO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많다. 해외의 권위 있는 매체에 실리거나 석학들이 말했다고 하면 무조건 믿어버리는 정서가 바탕이 되어 가짜 뉴스가 퍼지는 것이다. 만약 카톡이나 페이스북에 믿기 힘든 뉴스가 보인다면 이렇게 자문해보자.

“이 뉴스를 전하는 매체는 어디인가? 전에 들어본 적 있는 매체인가?” 의심스럽다면 검색 한번만 해보면 된다. 다른 곳에서 이 엄청난 소식이 보도됐을까? 정치인의 발언이 문제라면 유튜브에서 검색 한번 해보면 발언의 원문이 뜬다.

탈진실의 시대, 뉴스 소비자에게 가짜 뉴스를 밀어내는 역할이 주어졌다.

글 조윤호(<나쁜 뉴스의 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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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5.06.27 10:39

실천문학 11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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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진실은 1년이나 세월호와 함께 바다 속에 잠겨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1년은 진실을 규명하고 다른 대한민국을 만든 시간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력이 이어진 시간, ‘잊지 말자는 사람들과 지겹다는 사람들이 대립한 시간,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절규가 이어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디어가 있다. 미디어는 사고초기 정부의 책임을 감추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제는 지겹다’ ‘그만하자고 외치고 있다. 세월호 참사 1년을 맞아 미디어의 세월호 담론을 정리해봤다.

  오보에 정부 발표 받아쓰기. 처음부터 하락한 신뢰

세월호 참사 보도는 오보로 시작했다. ‘전원 구조오보였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16일 오전 11시부터 언론이 학생 338명 전원 구조오보를 쏟아냈다. 이후 2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탑승객 477명 중 368명을 구조했다고 밝혔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썼지만 이것도 오보였다. 이후 수차례 탑승자와 구조자 수는 뒤바뀌었고 언론은 그 때마다 다시 보도를 뒤집었다. 최종적으로 세월호는 476명이 탑승해 172명이 구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오보는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최악의 오보였다. 당일 가장 빨리 진도에 도착한 목포MBC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를 한 뒤 전원구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보고했으나 MBC보도국 전국부(서울본부)는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현장기자의 말 대신 정체모를 발표를 더 믿은 탓에 발생한 오보 참사였다.

속보경쟁에 더해, 포털 사이트에는 클릭 수를 노린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없는 선정적인 제목들의 기사. <타이타닉·포세이돈 등 선박사고 다룬 영화는?> <[진도 여객선 침몰] SKT, 긴급 구호품 제공·임시 기지국 증설 잘생겼다~잘 생겼다”> 등등. 오죽하면 네이버가 언론사에 메일을 보내 자극적인 편집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이처럼 참사 초기부터 미디어는 경쟁에 매달렸고 이로 인해 미디어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쳤다. 누리꾼들은 잘못된 기사들을 퍼 나르며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기레기는 일상용어가 됐다.

 

수색 이후에도 이어진 받아쓰기, 다이빙벨 공방까지

정부의 수색이 시작된 상황에서 정부 발표 받아쓰기는 이어졌다. 연합뉴스는 424사상 최대 규모 수색 총력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KBS 등 다른 언론도 비슷한 보도를 했다. TV만 지켜보는 이들은 정부가 500여명이 넘는 잠수부를 투입하고, 수십 대의 헬기와 잠수함을 투입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그것과 달랐다.

500여명의 잠수부는 투입된 인원이 아니라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 현장에서 실제 구조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고, 몇몇의 잠수부가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였다. 실종자 가족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TV만 켜면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며 떠들썩한데 현장은 조용했으니 말이다. KBS 아침방송에서 한 앵커가 정부의 구조작전에 대해 전하자, 한 실종자가족이 생방송 중에 이 앵커를 향해 쌍욕을 했고 이 욕설이 그대로 방송을 타는 해프닝도 있었다.

YTN417일 공기주입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이 방송에 나와 에어포켓존재에 대해 전하고 있던 상황이라, 실종자 가족들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가 산소공급장치는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KBS18일 오후 구조당국이 선체에서 엉켜있는 시신을 다수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해경은 즉각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오보는 왜 발생했을까. 현장 자체가 엉망진창이었다. 재난컨트롤타워는 없었다. 중대본와 해경, 해수부가 따로 놀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언론은 해경의 누구한테 들어서 보도하는데 해수부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또 어떤 언론은 중대본에 확인해서 보도했는데 해경이 부인했다. 컨트롤타워가 없었던 만큼 언론보도도 엉망이었다.

다이빙벨도 논란이 됐다. 조류나 유속과 관계없이 20시간 이상 연속 잠수 작업이 가능하다고 알려졌던 다이빙벨’. 어떤 이들은 다이빙벨을 투입해야한다고 외치고, 또 어떤 이들은 성능이 확인되지 않은 장비라며 반대했다. 결국 다이빙벨은 구조에 실패했고, 언론은 투입을 주장한 민간업체 대표를 사기꾼으로 몰아붙였고, 그 과정에서 정부의 구조 실패와 무능은 감춰졌다. 이 과정에서 마치 투입을 주장한 이들은 진보, 반대하는 이들은 보수가 되어버렸다.

1년이 지금 세월호 참사는 진보-보수 간의 정쟁으로 전락했다. 그 최초의 조짐은 다이빙벨 보도에서 등장했다.

 

유병언 괴물 만들기, 세월호를 희화화하다

미디어가 세월호 관련 소식을 전하며 가장 집중한 것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세월호를 운영한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 일가와 구원파였다. 421일 검찰이 유병언 수사에 착수하면서 미디어는 세월호 참사가 아니라 유병언과 구원파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그 과정에서 TV조선, 채널A를 중심으로 온갖 신변잡기식 보도가 쏟아졌다.

유병언이 라면을 좋아했느니, 유병언의 아들 유대균이 소심한 목소리로 치킨을 주문했느니 하는 뉴스가치가 없는 사안들도 단독’ ‘특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쏟아졌다. YTN에서는 태권도잡지 전문가를 데려다놓고 태권도 유단자인 유대균의 호위무사박수경이 왜 경찰에 저항을 하지 않았는지를 토론했다. 유병언이 시신으로 발견되자 TV조선은 유병언의 속옷 브랜드까지 알려줬다.

세월호가 아니라 유병언이 뉴스의 중심에 오르면서 해경의 무능한 구조, 정부의 미흡한 대처, 그리고 사고의 진짜 원인은 사라졌다.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은 헛웃음 나오는 희극으로 변했다. 단독과 특종이라는 이름이 갖던 가치는 사라졌다.

기레기와 다른 진짜 기자들의 탄생

소위 기레기들이 본질을 흐리는 동안, 대안언론에 대한 열망도 들끓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미디어 수용자들의 미디어에 대한 프레임은 기레기’ VS ‘진짜 기자로 짜여졌다. 손석희의 JTBC 뉴스는 실종자 가족 및 유가족, 그리고 다른 언론을 갈망하던 이들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팽목항에서 뉴스를 진행했던 손석희 앵커와 팽목항에 상주하며 나날이 피골이 상접해가는 모습을 보여준 서복현과 김관 기자는 JTBC를 세월호 참사 때 가장 빛났던 미디어로 만들었다. JTBC 메인뉴스 시청률은 5% 대까지 치솟으며 MBC 메인뉴스를 위협했다. 유가족들은 죽은 자식들이 찍은 휴대폰 영상을 JTBC에 건넸다.

그 외에도 무능한 구조 현장을 카메라에 그대로 담은 뉴스타파, 실종자 가족들의 분노와 정부의 대처를 편집없이 생중계한 팩트TV, 연합뉴스 기자에게 X라고 소리친 이상호 기자 의 고발뉴스 등이 많은 신뢰를 얻었다.

 

색깔론에 세금낭비까지, 미디어의 세월호 유가족 왜곡

세월호특별법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디어는 이 과정에서 지겹게도 가족들을 괴롭혔고,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요구를 여야간 정쟁으로 만들었다.

유민아빠김영오씨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6일 간 광화문에서 단식을 했다. 그는 세월호특별법의 상징이 됐다. 그러자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자식을 잃은 아버지에게 아빠의 자격을 묻기 시작했다. 그가 이혼한 상태로 양육비도 주지 않다가 돈 받으려고 쇼한다는 식의 보도. 미디어는 유민양의 동생과 외가에까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댔다. 그의 취미가 국궁이라는 점을 이유로 국궁할 돈은 없으면서 양육비 보낼 돈은 없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그가 금속노조 조합원이라는 점을 이유로 시비를 걸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김영오, 농성장서 가까운 강북삼성병원 대신 시립동부병원으로 간 이유는><김영오 주치의(서울동부병원 이보라 과장)는 전 통합진보당 대의원>라는 기사에서 김씨의 주치의의 정당 활동을 근거로 색깔론을 제기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왜곡은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둔 지난 42일 보수언론은 정부가 내놓은 304명에 대한 배상금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서울신문, 세계일보, 조선일보는 1면 제목에 단원고 학생들이 1인당 82000만 원을 보상금으로 받는다고 강조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천안함 희생자보다 보상금이 더 많다는 점까지 부각시켰다. 8억에 국민성금과 청해진해운이 지급하는 돈, 보험금이 포함되는 것이지 국민세금이 없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다른 사건사고보다 보상금이 적다는 점도, 더 나아가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돈이 아닌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보수언론의 돈 놀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를 인양할 의사를 밝히자, 세월호 인양에 최대 2000억 원이 국민세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보도들이 쏟아졌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수습에는 총 6000억 원이 넘는 비용이 들 수 있다. 이 돈은 대부분 국민 세금으로 충당된다고 했고, 중앙일보도 무엇보다 막대한 인양 비용을 국민 세금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 언론에는 배상 및 보상 문제로 사건을 덮으려 하지 말고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는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삭발식 관련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세월호와 함께 진실을 인양하라!

세월호 참사 1, 밝혀진 것도 달라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 안전사고는 여전히 곳곳에서 터지고, 대통령이 적폐라고 언급했던 관피아도 여전하다. 어렵게 출범한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활동시한은 내년 9월까지인데 그 전에 세월호 선체를 인양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러한 책임의 많은 부분이 바로 사고초기 속보경쟁과 자극적인 보도경쟁을 펼친 미디어에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정부의 책임을 규명하는 대신 유병언과 구원파에 눈을 돌리게 만든 언론에 있다. 유가족의 요구대신 아빠의 자격세금낭비운운한 이들에게 있다. 세월호 인양이 결정된 현재, 이제 언론이 나서서 진실을 인양할 때다.

언론은 세월호 참사를 자성하며 재난보도준칙을 만들었다. 참사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며 유가족을 향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던 기자들을 재교육시키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해결책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재난보도준칙도, 인권보도준칙도 원래 존재했다. 언론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경쟁이 우선인 현장에서 이런 준칙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문제는 전문성 없고 권위주의적이며 현장 이해도가 낮은 언론사의 지배권력, ‘데스크가 현장 기자들을 좌지우지하며 취재를 지시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포탈 중심의 뉴스소비에 길들여져 조회 수에 목말라 있고, 기자들에게 검색어 장사를 시켰다. 현장 기자들이 전원구조가 아니라고 보고했는데도 이를 묵살했다.

결국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가 데스크보다 더 커지지 않는 한 이 문제는 반복된다. 지상파 방송이라도 앞장서 데스크급 협의체를 만들던, 데스크가 바뀌어야한다. 스스로 바뀌지 못한다면 기자들이 강제로 바뀌게 만들어야한다. 언론이 현장에 가까울수록 답이 보인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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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5.02.03 19:05

사회진보연대 기관지 <오늘보다>에 실린 글입니다.

보수의 매력은 명료함과 권력에 있다

  •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지난 2012년 말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썼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를 통해 한국이라는 사회의 보수성을 짚은 책이었다. 어쩌면 그 책을 썼을 당시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더 보수화됐다. 

한국사회의 보수화는 상식이라고 믿었던 여러 가지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과정이었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이 드러났고, 몇몇 노동조합은 자신이 노조라는 점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 한 곳은 해산 당했다.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이 공식적으로 설치고 있다. 
전반적인 보수화는 당연하게도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보수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있다. 우리가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막고, 보수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이전에 보수가 먹히는 논리에 대해 분석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믿는다

보수(保守)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킨다, 보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수 세력은 바로 현재의 구조와 전통을 지키려는 세력이다. 서양에서 보수주의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했다. 영국 보수주의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프랑스 혁명의 과격함, 폭력, 급진성을 비판했다.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은 ‘폭력’과 같은 프랑스혁명의 수단을 넘어 프랑스 혁명의 이념 그 자체를 비판했다. 자유, 평등, 박애. 인간이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계몽주의’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이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에 반대한다. 보수는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점에서 ‘신만이 완전하다’는 기독교와 보수주의가 연결된다.

보수는 인간의 이성 대신 경험을 믿는다. 수백, 수천 년 간 누적돼 온 인간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구축한 현재의 질서를 신뢰한다. 따라서 보수의 관점에서 혁명은 위험한 짓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인간의 이성을 맹신하는 행위이자 인간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수백 년 간 쌓아온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다.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질서는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공산주의 혁명은 위험한 짓이다. 보수주의자 임광규는 2000년 《월간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자본주의는 결함이 있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간의 결함이 드러나 있는 제도로서, 자본주의는 인간만큼 나쁜 제도이다. 그러나 인간을 자유롭고 풍요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서는 가장 덜 나쁜 제도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전통 중 하나는 자본주의다”
 

불평등과 차별을 옹호한다 

보수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불평등’을 옹호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이전의 보수주의자들은 귀족정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비롯한 다수 대중의 정치참여는 폭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귀족은 더 많은 특권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을 지닌 존재인 반면 평민은 권리도 책임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귀족이 없으니 이러한 생각은 사라진 것일까.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대중의 광범위한 정치 참여를 두려워한다. 2002년 대선에 출마했던 이인제는 노무현에 대한 노사모 등 대중의 지지를 ‘광기어린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극우 소설가 이문열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정치인 낙선운동에 앞장서자 ‘김대중 정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홍위병’이라고 비하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2008년 촛불시민들을 일컬어 ‘천민민주주의가 왔다'고 한탄했다. 

이 뿐 아니다. 한국사회에는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매우 일반적이다. 학력에 의한 차별, 성별에 의한 차별, 청소년과 어른의 차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옹호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는 이유로 성소수자의 성적 결합을 인정하지 않거나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귀족이 사라진 시대, 보수주의는 어떻게 진화 했나

귀족이나 평민 등 사회계급이 사라지고,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시대는 보수주의에게 위기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이 위기를 돌파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통해서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거로 보수 세력은 온갖 ‘반민주적’ 탄압을 가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존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보수주의자들이 제1의 자유로 꼽는 것이 재산권이다. 능력에 따라 재산을 마음대로 증식하고 소비하고 투자할 수 있는 자유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반대하는 이유다. 이들의 관점에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복지정책은 도둑질이다. 재개발 정책으로 밀려난 원주민들이 시위를 하는 것도 기업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방해하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하는 짓이다. 

그리고 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법치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시민과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하면 법치를 내세워 처벌하라고 외친다. 정치학자 하버에 따르면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 하의 대중의 위험과 비합리성을 억제하고 민주정치를 한정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민주주의 시대 보수의 또 다른 진화방식은 시장주의와의 결합이다. 누구나 시장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시장에서 펼쳐지는 경쟁은 공정하고 그로 인한 차별은 당연하다. 경쟁에서 이긴 기업이 진 기업보다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은 당연하고 더 ‘능력 있는’ 노동자가 많은 돈을 버는 것도 당연하다. 
누군가 불행하다면 그 원인은 구조가 아니라 게으른 개인 탓이다. 한 사회와 집단을 위해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를 맡아야 하고, 뛰어난 CEO가 고임금을 받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도 당연하다. 보수가 옹호했던 차별과 불평등은 시장 안에서 업그레이드됐다.
 
 

21세기 한국 보수의 두 가지 매력, ‘명료함’와 ‘힘’

지금까지 살펴본 보수주의자들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보수 세력이 힘을 얻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첫 번째는 보수의 논리가 매우 명료하다는 것이다. 반면 진보의 논리는 매우 복잡하고, 여러 가지 추가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수의 논리는 매우 명료하고 간단하다. “저거 불법이야” 보수언론은 실제로 쌍차 노동자들이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쌍차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쌍차 노동자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매우 복잡하다.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조사권을 부여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특별법에 반대하는 보수세력의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헌법에 위배된다” “유례가 없다” 세월호특별법이 현재 한국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매우 보수주의자다운 설명이다. 반면 특별법을 지지하는 이들은 왜 특별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지, 왜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권과 수사권이 필요한지 매우 자세히 설명해야했다. 

보수가 가진 또 다른 매력은 ‘힘’이다. 독립영화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에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진보적인 성향의 딸이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왜 한나라당을 지지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딸에게 그들에게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아버지의 말은 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보수를 지지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들이 보기에 현재의 구조를 뒤엎자고 말하는 진보세력보다는, 현재의 구조 하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보수세력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이다. 

진보정당도 문재인도 박근혜도 똑같이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똑같이 경제민주화 이야기를 한다면, 박근혜가 더 잘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박근혜가 진보정당이나 문재인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기업을 때려눕히고 기업을 더 많이 삥 뜯을 수 있는 권력은 힘없는 진보세력이 아닌 힘 있는 보수세력에게 있다는 논리다. 

보수세력은 이러한 매력 발산을 통해 점점 대중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고 한국사회는 더욱 더 보수화되고 있다. 진보가 보수에 맞서 대안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이러한 매력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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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5.01.30 17:33

월간 <신문과 방송>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국일보가 어떤 신문이었던가. 누가 뭐래도 사회면 기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간신문의 대명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뜨끈뜨끈하고 생동감 넘치는 기사들로 젊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창업자인 장기영은 언론 사주이자 기자였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기자 공채를 시작했고 학력 제한을 두지 않고 수습기자를 뽑았다. 그리고 여기자가 가장 많았던 신문이기도 했다

20136, 김선주 전 한겨레 논설주간이 쓴 칼럼 <한국일보는 없다’>의 일부다. 그의 말대로, 한국일보는 1980년대 초까지 1등 신문이었고, 조중동과 함께 4대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물론 과거형이다. 지금의 한국일보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비리 사주 몰아낸 한국일보 기자들

김선주 전 주간이 이 글을 썼던 20136월 한국일보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구성원들은 장재구 회장을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지난 2006년 한국일보는 창간 이후 계속 머물렀던 터전 중학동 사옥 부지를 한일건설에 매각했다. 매각대금 900억에 더해 새로 들어설 건물의 2000평을 우선 매수할 수 있는 권리, 즉 우선매수청구권 등을 확보했다.

건물은 2011년 완공됐으나 한국일보는 중학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장재구 회장이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우선매수청구권을 팔아버린 것이다. 기자들의 항의에 장재구 회장은 돈을 갚겠다고 했으나 1년 반 동안 갚지 못했다. 노조는 검찰에 장 회장을 고발했다. 한국일보를 상징하는 곳이었던 중학동사옥은 그렇게 한국일보의 손을 떠났다.

노조와 기자들의 반발에 사측은 편집국장 교체로 대응했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일보 구성원들은 편집국장 교체에 반대표를 던지며 저항했다. 2개의 편집국이 존재하는 상황이 지속됐고 사측은 용역들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했다. 언론사가 편집국을 폐쇄한 초유의 사태였다.

대다수 기자의 반대에도 사측은 한국일보 발행을 강행했다. 바이라인도 없는, 심지어 사설까지 연합뉴스를 베낀 짝퉁 한국일보였다. 한 때의 ‘1등 신문한국일보의 자존심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짝퉁 한국일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의 이어진 싸움과 각계각층의 연대가 이어졌고, 법원이 사측의 편집국 폐쇄가 부당하다고 인정하면서 장재구 회장은 물러나야만 했다. 기자들이 비리도 모자라 편집국 폐쇄까지 강행한 사주를 몰아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58일 만인 2013812일 한국일보는 정상발행됐다.

장재구 회장은 물러났으나 한국일보의 과제는 산적해 있었다. 일단 장재구 일가가 경영하면서 산적한 빚이 과제였다. 장재구 회장이 경영하던 때 취재비, 원고료, 출장비는 2년째 감감 무소식이었고 퇴직금도 지급하지 못했다. 사업보고서 상 부채는 700억 원, 200억 원의 자본금은 잠식 상태였다. 중학동 사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고, ‘임시 사옥이던 남대문로 한진빌딩에 머물러야 하는 처지가 됐다.

장재구 일가의 재산에 가압류를 한다 해도, 지난한 소송과정이 남아 있었다. 좋은 사주를 찾아 새로운 도약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한국일보는 삼화제분과 지난해(2014) 225일 투자계약인수를 맺었다.

하지만 삼화제분은 결국 한국일보의 새 주인이 되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826일 삼화제분에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재매각 공지를 냈다. 삼화제분이 계약기간인 6개월 안에 계약금 잔액을 납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화제분이 경영권 분쟁에 휩싸였던 탓이다. 이로써 한국일보의 시계는 신문이 정상 발행된 2013812일로 되돌아오게 됐다.

한국일보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새 주인을 찾았다. 지난 113일 동화그룹과 본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도 삼화제분 때보다 올랐다. 채무를 청산하고도 남는 액수였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회생계획안 작성, 채권관계인 집회 등의 절차를 거쳐 1월 말 전에는 법정관리를 졸업할 수 있다.

시즌2, 과거 청산과 혁신

1월이면 이제 한국일보는 시즌2를 맞는다. 시즌2를 맞는 한국일보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장재구 일가가 남긴 것들을 청산하는 것이다. 삼화제분, 그리고 동화그룹과의 인수 작업을 거치면서 이 과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한국일보는 계획했던 상암동 사옥 이전이 잘 되지 않을 경우 서울시에 100억 원 정도를 물어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20143월 이 과제를 해결했다. 우발채무, 즉 장부상 부채에는 없지만 드러나지 않은 부채에 대한 우려는 어느 정도 사라진 셈이다. 서울경제, 인터넷한국일보 등 장재구 일가로부터 받을 돈도 생기면서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생겼다. 삼화제분과의 계약이 무산된 이후 동화그룹이 더 많은 돈을 주고 한국일보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이유다.

인적청산도 상당 부분 이루어졌다. 장재구 회장 편에 섰던 이들이 2014년 초까지 대부분 회사를 떠났다. 고재학 편집국장은 20146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주도적으로 비리사주에 붙어서 편집국 폐쇄를 주도한 이들은 다 나갔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장재구 일가의 그림자를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새로운 혁신이다. 이제 한국일보는 더 이상 과거의 1등 신문도, 4대 신문도 아니다. 신문시장의 파이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한국일보는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혁신을 택했다.

한국일보는 창간 60주년을 맞은 2014623디지털퍼스트를 선언했다. 60년 간 종이신문에 올인했던 한국일보가 종이신문의 종언을 이야기하며 디지털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6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발자를 뽑았다.

선언은 창간 60주년에 맞춰졌으나, 도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일보는 지난 519일 온라인 사이트인 한국일보닷컴을 개설했다. 한국일보 기사를 게재하던 한국아이닷컴과는 계약을 끊었다. 온갖 선정적 광고가 난무하던 한국아이닷컴과 달리 한국일보닷컴에는 광고가 없다. ‘클린홈페이지다. 콘텐츠도 다르다. 실시간 검색어로 도배된 낚시성 기사가 가득했던 한국아이닷컴과 달리, 한국일보닷컴에는 품을 들인 온라인 전용 기사들이 올라온다.

한국일보는 디지털뉴스팀을 중심으로 수천 개의 사진을 이어 붙인 타임랩스 영상 포토플레이’, SNS에서 화제가 된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인터뷰 (SNS)’, 복잡한 사회 이슈를 만화로 풀어주는 한이와꾹이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래는 디지털퍼스트에

클린 홈페이지 한국일보닷컴은 역설적이게도 장재구 덕(?)에 탄생 가능했다. 한국일보가 보유한 한국아이닷컴 지분은 65%였는데 한국일보 사태 때 장재구 회장의 한국일보가 이 지분을 15%로 낮췄다. 유기적 연결이 어려워지면서 새로운 닷컴을 만들자는 논의가 나왔고 그 결과로 한국일보 닷컴을 만들었다.

잃을 것도 없었다. 원래 한국아이닷컴과 한국일보가 계약을 맺을 때 한국일보 콘텐츠를 1억 원에 가져가고 한국아이닷컴이 서버를 이용해 가공, 포털에 쏴주는 등등 기타 용역비로 6천 만 원을 책정했다. 즉 한국일보가 4천만 원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한국아이닷컴이 용역비를 1억 원으로 올리면서 한국일보의 수입은 0원이 됐다. 한국아이닷컴을 버리고 한국일보닷컴을 만들면 온라인과 모바일 수익이 온전히 한국일보 것이 된다. 광고나 어뷰징 기사 수입에 목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국일보의 미래는 디지털전환에 달렸다. 다른 언론에 비해 한국일보는 디지털퍼스트 분야에서는 앞서가는 편이다. 디지털퍼스트를 온라인 조회 늘리기혹은 본격적인 어뷰징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동시에 한국일보에도 디지털퍼스트를 선언한 다른 언론이 겪고 있는 고민이 있다.

한국일보의 한 관계자는 신문시장은 점점 쭈그러드는 데, 그래서 방향은 디지털로 가는 게 맞다얼마나 발을 담궈야 하는지가 고민이다. 100을 이루기 위해 30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40에서 시작해야하는지라고 말했다. 이러한 고민의 근간에는 아직 디지털퍼스트로 인한 수입은 많지 않다는 현실이 있다. 인풋 대비 아웃풋 효과가 크지 않다는 뜻이다. 디지털 분야의 수입은 기껏해야 전체의 5-10%인데, 화끈하게 투자하다가 기존에 가진 것도 잃게 되지 않을까라는 고민이 있다는 것이다.

기자들 일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기자들 일이 30-40% 늘어난다고 월급을 30-40% 늘려줄 수 있을까. 화끈한 투자가 가능하다면, 다른 돈벌이수단이 있다면 가능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디지털퍼스트일만 늘어 난다고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기자들 업무가 늘어나는 속에서 업무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기자들을 독려할 것인가, 결국 조직개편과 리더십이 문제다.

한국언론의 미래

정리하자면 한국일보의 미래는 디지털퍼스트 전략을 정착시키는 데 달렸고, 디지털퍼스트는 한국일보닷컴이 어떻게 수익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부 구성원의 동의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에 달렸다.

이러한 과제는 한국일보만의 과제가 아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도, 신문에 실리는 광고도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거의 대다수의 언론이 직면한 과제다. 우리가 한국일보의 미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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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4.05.06 17:08
지 난 16일 오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인근 해상에서 수학여행을 떠나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 400여명이 탑승한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한국 언론도 같이 침몰했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이렇게 컸던 시기가 있을까. 이런 분위기 때문에 기자들은 수첩도 못 꺼낸다. 실종자 가족들이 기자들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다로 던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 는 언론이 자초한 일이다. 세월호 침몰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 못지않게 언론도 오락가락했다. 사고초기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언론들의 집단 오보는 아마 세계사에 길이 남을 오보가 될 것이다. 17일에는 세월호에 산소공급이 진행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지만 오보였다. 산소공급 장비는 도착조차 하지 않았다. 검색어 장사도 난무했다. 세월호 침몰을 언급하며 재난영화를 소개하거나, SKT가 임시기지국을 건설했다며 “잘생겼다~잘생겼다”를 제목으로 뽑은 기사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과 절망을 ‘검색어 장사’로 이용한 행태, 가족이 모두 실종된 어린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가 죽은 건 아나”라고 물어본 행동 모두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이런 언론 보도를 옹호하고 싶진 않다. 문제는 기자들을 싸잡아 ‘기레기’로 매도하는 현상이다. 재난 앞에서 기자들은 갈등에 빠진다. 대중에게 사실을 알려야 하지만, 이를 위해선 누군가의 죽음 앞에 카메라나 마이크를 들이대야 한다. 모두가 슬퍼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마이크를 들어 사실을 전달하고, 누군가는 유족에게 말을 건다. 억울한 죽음을 폭로하고, 그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었다고 밝혀내는 것도 기자들이다. 그래서 정부 정책을 바꾸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실 종자 가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기자들은 욕을 먹었다. 하지만 실종자의 메시지를 공개한 기사는 공감을 받았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감동적인 사연을 알기 위해 기자는 집요하게 취재했을 것이고, 가족들을 많이 괴롭혔을지 모른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다. 즉 취재준칙의 유무다. 외국언론은 장례식장을 찍을 때 유족들의 얼굴을 직접 보여주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를 ‘기레기’들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니다.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당시 막내기자였는데 어디까지 취재할 수 있는 건지 전혀 몰랐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취재경쟁도 기자들을 압박한다. 기자들은 새로운 걸 알아내야 한다는 특종경쟁의 압박과 물먹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 압박은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욕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받는 압박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기자들이 오보를 쓰고, 비윤리적으로 취재한다고 비난하다가도 ‘언론이 현장에 대해 보도를 안 한다’고 비난한다.

검 색어 장사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매도하고 캡처해서 퍼 나르고, 메일에 욕을 보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참혹한 현실의 배경에는 포탈 검색어에 의존해 조회 수를 올린 뒤 광고로 생존하는 인터넷 언론들과 이 현실에 적응한 언론사 데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진 도 세월호 침몰사건 관련 기사를 썼다가 ‘기레기’라는 비난을 받은 한 기자는 나에게 “제목은 내가 붙이지 않았다. 조회 수를 의식해 데스크가 붙인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 기자는 “하지만 데스크가 잘못했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고 한다. “언론사 대부분이 그런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 소비자의 대다수가 포털 검색어를 통해 유입되는 한국적 현실에서, 광고로 생존하는 한국 인터넷 매체들은 검색어 장사를 안할 수가 없다. ‘기레기’로 비난받은 기자들이 기자 일을 그만둬도, 그 자리는 곧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고 검색어 장사는 반복될 것이다.
 
같 은 기자가 봐도 ‘기레기’는 있다. 하지만 기레기보다 현장에서 열심히 취재하는 기자들이 훨씬 많다. 우리가 감시해야할 것은 그 기자들의 이름 뒤에 숨어 제목을 달고, 자극적인 이슈의 취재를 지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괴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기자들을 취재 경쟁과 검색어 경쟁으로 내모는 한국 저널리즘의 위기다.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세월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한국 저널리즘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조윤호 ssain747@naver.com
마음이 잘생긴 기자. 재빨리 대학을 졸업해 20대 중반의 나이에 <미디어오늘>의 2년 차 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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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4.03.30 10:45

27일 코레일이 850여명의 전보를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코레일은 ‘효율적 인력운영’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철도노조는 강제전출이 사실상 노조탄압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노조 간부들이나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유배’라는 것이다.

강제전보 외에도 코레일과 정부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철도노조에 대한 탄압을 이어가고 있다. 이미 130명을 해고했으며 251명을 정직시켰다. 파업참가 조합원 8400명에 대한 징계도 검토하겠다고 한다. 162억 원의 손해배상과 116억 원에 대한 가압류도 있다. 이는 지난 12월 한국사회 최대이슈였던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의 결과다. 철도노조는 여야가 국회 철도산업발전소위원회를 만들어 철도민영화 대책을 논의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파업을 접었지만, 철도소위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철도노조에 대한 각종 탄압만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철도노조는 재파업을 경고했다.

지난 겨울 철도노조 파업 때 한국노총은 민주노총과 철도노조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의 반노동 정책이 역설적으로 ‘노동자 대통합’을 이뤄낸 순간이었다. 한국노총 위원장은 철도노조가 주도한 총파업에서 지지 연설을 했고, 많은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총파업 집회에 참석했다.

코레일이 철도노조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고, 철도노조과 민주노총이 이에 대응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노총은 무엇을 해야 할까. 한국노총은 좋든 싫든 이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고 공기업 개혁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이다. 수많은 한국노총의 공기업 노조가 공기업 개혁을 두고 박근혜 정부와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곧 다가올 것이다.

한국노총이 민주노총과 더 연대해야하는 이유이자, 철도노조의 싸움에 더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미안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게 공기업 노조의 싸움은 ‘밥그릇 싸움’으로 보인다. 보수언론의 공세 때문이든 박근혜 정부가 공기업 노조를 ‘암 덩어리’처럼 묘사하기 때문이든 많은 국민들은 공기업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 겨울 철도노조가 파업했을 때도 많은 국민들은 그렇게 의심했다. 하지만 철도노조가 민영화 반대를 기치로 내걸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싸우자고 외치자 많은 국민들이 철도파업을 지지했다. 언론이 대놓고 철도노조 파업을 이기적인 파업으로 때리고 귀족노조로 몰아붙였는데도 과반이 넘는 국민들은 철도파업을 지지했다. 보수언론과 정부는 “민영화 아니야!”라며 자신들이 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랬던 철도노조가 패배한다면 어떤 노동자가, 어떤 노동조합이 이길 수 있을까. 공공의 이익을 내세운 파업과 투쟁조차 승리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밥그릇 싸움’으로 낙인찍힌 투쟁이 이길 수 있을까. 게다가 대화와 타협이란 것이 없는 박근혜 정부다. 19년차 노동자 연봉 6300만원이 ‘비효율’이면 대한민국 노동자 모두 언젠가 정리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노총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노총> 기관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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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4.03.04 20:42

1년차 기자, 나에게 외압이 필요해

 
1년 전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일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4학년 때부터였다. 나는 글 쓰는 연습을 했고, 다량의 뉴스를 보았으며 국어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는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기자 경험을 하며 내린 결론에 따르면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말에 상처받지 않는 담대함 그리고 회유와 협박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무심함 이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만난 한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선배 일하면서 ‘외압’ 같은 거 없어요?” “외압이 뭔데?” “기사 썼는데 항의한다거나 기사 내리라고 한다거나.”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다. 고민을 하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외압’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들은 외압이라고 할 텐데 나는 너무 일상적이라 외압이라고 안 느끼니 이건 외압도 아니고 외압이 아닌 것도 아니고…모르겠다.”
 
기자들에게 기사에 대한 항의와 기사를 내리라는 요구는 ‘외압’ 축에도 못 끼는 일상적인 일이다. 내가 워낙 전투적인 매체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론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외압’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무조건 삭제’ 형. 모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해서 파업 소식을 알리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잘 마무리되어 파업이 철회됐다. 그랬는데 기업 홍보팀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파업이 끝났으니 기사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게 예의”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 임기 끝났으니 이 전 대통령 관련 기사는 다 삭제할까요?”라고 되물었다. 하루는 모 언론사의 내부 문건을 반영한 기사를 썼다. 그러자 언론사의 한 간부가 전화를 해서 기사를 내리라고 했다. 내부 문건을 자기네가 검토해봤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검증을 거친 문건이었기에 사실이 아니라는 근거를 대라고 했지만 “우리가 검토해봤다” 이상의 이유는 없었다. 반론을 기사에 넣어주겠다고 해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싫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는 ‘만나서 이야기하자’ 유형이다. 모 기업의 부당 내부거래 의혹 관련 기사를 썼다. 그러자 그 기업 홍보팀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자.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소주가 당기던 날이었지만 바쁘다고 뻐겼다. 또 어느 날은 모 기업의 인턴제도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그러자 기업 담당자가 회사로 찾아왔다. 기사 내용 중 틀린 건 없는데, 우리 회사가 이렇게 좋은 일도 많이 했다며 자료를 보내주고 갔다. “언제 소주 한 잔 하자”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알고 보니 그 기업 담당자는 나의 ‘선배’였다.

셋째, ‘내가 시키는 대로 고쳐라’ 유형이다. 한 대학의 시간강사와 인터뷰했는데, 그 시간강사가 학교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했다. 인터뷰에 넣었는데, 사실과 다르다며 수정을 요구했다. 어떻게 수정해줘야 하느냐고 묻자 자기네가 아예 기사를 써서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니 사실과 달랐다. 결국 기사는 내가 쓴 대로 나갔다. 대학에서는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고 소송까지 검토하겠다고 방방 뛰었지만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이런 사례들만 소개하다보니 나를 외압에 맞서는 정의로운 기자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정정 보도를 한 적도 있고, 기사를 수정한 적도 있다. 다만 사실이 다르지 않은 기사를 내리거나 수정할 수는 없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언론계에는 기사로 ‘조지고’ 그 대가로 광고를 받아먹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거래로부터 자유롭게 원칙을 지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난 이런 외압 말고 좋은 외압을 받고 싶다. 독자들이 “더 강하게 비판해야 한다” “이런 점은 왜 보도 안하냐”라고 따져 묻는 외압이라면, “이 기사는 다른 관점을 더 강조했어야 한다”고 지적하는 외압이라면, 아무리 시달려도 좋겠다. ‘기레기’라고 욕하지 말고, 아직은 원칙과 소신을 가진 기자들에게 좋은 외압을 행사하는 독자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조기자 qdbu2@hanmail.net
마음이 잘생긴 기자. 재빨리 대학을 졸업해 20대 중반의 나이에 1년 차 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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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11.09 14:55

몇 달 전 1년 넘게 사귀던 애인과 결별했다. 애인과 결별하는 게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알고 있다. 일단 관련된 편지와 사진들을 다 버리거나 치워버린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과 기념일 등등을 삭제한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 관련 기록들을 지우거나 안 보이게 설정한다.

이제 다 끝났다. 아니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페이스북 내 사진첩에 그녀와 찍은 사진들이 계속 떠다니는 게 아닌가. 분명히 다 지웠는데 어디서 또 나타났지 라는 생각에 지우려 해보니 지워지지 않는다. 아, 내가 올린 게 아니다. 교수님이, 다른 친구가 사진을 찍어주고 나의 이름을 태그로 걸어버려 내 페이스북에 남아 있는 것이다.

트위터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찾을 수 없는 인터넷의 바다 어딘가에 내가 올렸던 사진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그걸 리트윗했거나 관심글로 지정했을 경우 다른 이의 타임라인에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그래서 내 손으로 삭제하고 싶었던 사진들은 누군가의 타임라인에 남아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 무한 복제화된 정보의 바다

이는 인터넷이라는 정보매체의 등장으로 생겨난 변화다. 일단 인터넷 공간에 내 사진을 남기면, 이는 더 이상 내 사진이 아니다. 누구든 클릭 한 번, 혹은 캡처 한 번이면 나의 사진을 ‘소유’할 수 있다. 우습게 찍힌 사진일 경우 내 사진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의 ‘웃긴 사진’ ‘짤방’ 폴더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소유가 가능한 이유는 인터넷에서 ‘무한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공간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사실상 없다. 사진이 뜨면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 ‘다른 이름으로 저장’을 하면 원본과 차이 없는 복제본을 얻을 수 있다. 재미있거나 멋있는 글이 있으면 ctrl+c, ctrl+v를 하면 내 것이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오른쪽 마우스 금지’ ‘스크롤 금지’ 등의 기능이 생겨나지만, 이 금지를 뚫고 ‘시뮬라크르(Simulacra)’들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물론 인터넷 매체 이전의 활자 매체 시절에도 복제는 가능했다. 복사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손으로 복사를 할 수 있었고, 복사기가 발명된 이후 수많은 책과 인쇄물들의 대량복사가 가능해졌다. 이를 통한 정보의 확산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 정보의 확산의 범위를 무한정 늘려놓았고, 확산시키는 방식 또한 매우 간소화시킴으로써 사실상 ‘소유’의 개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편함은 많은 이들이 인터넷을 쓰는 이유다.

즉 인터넷 공간에서 대부분의 정보들, 그리고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은 ‘공유화’된다. 이어 인터넷에는 이 많은 ‘내 것’들을 모아놓을 수납장이 생겨난다.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시뮬라크르들을,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복사될 내 정보들을 모아놓을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홈페이지와 블로그는 정보의 수납장 역할을 한다. 여기저기서 감동받은 구절들과 사진들을 올리며 나만의 수납장을 생겨난 것이다. 이제 클릭 몇 번이면 내가 모아놓은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낼 수 있다. ‘내 것’을 찾아내는 방식도 점점 고도화됐다. (제목검색, 제목+내용 검색)

싸이월드, ‘관계 맺기’를 체계화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니홈피 싸이월드’의 등장은 또 다른 혁명이었다. 2005년 무렵 한국에 급속도로 유행한 싸이월드는 두 가지 의미에서 혁명적이었다. 첫째, ‘미니홈피’의 보편화였다. 싸이월드가 등장하기 전 인터넷 게시판 형태 이외에 자신의 사진과 정보, 이력 등을 소개하는 개인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컴퓨터 좀 다룬다는 친구들만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했고, 홈페이지들 간의 호환성이 없었기 때문에 홈페이지 유저들 간의 교류는 일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싸이월드는 클릭 몇 번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미니홈피’를 탄생시켰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급속도로 축소됨에 따라 수많은 이들이 미니홈피를 만들기 위해 싸이월드에 가입했다.

두 번째, 싸이월드는 ‘일촌’ 제도를 마련했다. 이전의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에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따로 분류할 수 있는 체계가 없었다. 하지만 싸이월드에서 서로 일촌을 맺으면 상대방에게 비밀 글도 남길 수 있으며 사진이나 글을 ‘퍼가요~’할 수 있다.

이 ‘퍼가요~‘로 인해 소유방식의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친구의 사진을 퍼가면, 친구의 사진은 내 싸이월드 홈피에 남는다. 우연히 대학 동기들의 미니홈피에 들어가서 사진을 구경하다 지금은 헤어진 캠퍼스 커플들의 사진을 발견하고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는 경도 종종 있다. 내 사진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마음대로 삭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페이스북, 누구든지 함께 ‘소유’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싸이월드의 발전된 형태다.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이 생기자 싸이월드를 버리고 페이스북으로 갈아탔다. 페이스북은 개인 페이지를 만드는 방식이 싸이월드보다 훨씬 간소화시켰다. 메일과 비밀번호 하나면 나만의 공간이 생겨나고 마음대로 글도 쓰며 사진도 올릴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관계를 맺는 방식은 더욱 간소화된 동시에 체계화됐다. 싸이월드에서 일촌을 맺을 때 항상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일촌명’이 사라졌다. 대신, 친구들을 그룹별로 관리하며 내 게시물을 특정인들에게 안 보이도록 설정할 수 있다. ‘일촌끊기’보다 더 잔혹한 ‘차단’도 생겨났다. A가 B를 차단하면 친구관계가 끊기는 것은 물론 B에게는 A의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다. 페이스북에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추천하는 친구를 통해 잊고 지냈던 친구들을 계속 보여줘 새로운 관계맺음을 유도한다. 싸이월드는 페이스북에게 유저들을 빼앗기자 뒤늦게 ‘친구 추천’을 도입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에게 가장 혁명적인 기능은 ‘태그’다. 친구와 연락을 하고 싶을 때 굳이 메시지를 날리거나 그 친구 홈페이지에 가서 방명록을 남길 필요가 없다. 그냥 내 타임라인에 글을 쓰면서 친구를 태그하면 친구한테 알람이 뜬다. 그럼 친구가 와서 댓글을 남긴다. 심지어 여러 명 태그도 가능하다. 단체사진을 찍고 나서 귀찮게 친구들한테 메일을 달라고 하거나 미니홈피에 올려놓을 테니 퍼가요~누르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사진을 올리고 친구들을 태그 걸면 그만이다. 그 사진은 나와 친구들이 함께 소유하는 사진이 된다.

태크에 버금가는 혁명적 기능은 ‘좋아요’다. 좋아요는 페이스북에서 굉장히 정치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내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 때마다 별 내용도 아닌데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아마 이 사람들이 나중에 나한테 무슨 부탁을 하면 꼭 들어줄 생각이다. 또한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 글을 하나 올리면 별 내용도 없는데 좋아요가 수백 개씩 달린다. 좋아요 누른 사람들을 보면 그 정당의 당원이나 활동가들인 경우가 많다. 이른바 ‘좋아요 조직화’다. 이 ‘좋아요’를 통해 나의 글이나 사진이 다른 이들에게 퍼져 나간다. 내 친구 B가 나와는 친구가 아닌 C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 나한테도 그 글이 보이기 때문이다. ‘좋아요 조직화’를 하는 이유는 곧 이 글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댓글과 ‘공유하기’도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트위터, 소유 개념 자체가 사라지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좋아요 조직화’는 트위터의 ‘리트윗 조직화’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한번은 SNS를 즐겨하는 내 친구가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페이스북은 친구들 상대로 싸지르는 거, 트위터는 허공에 싸지르는 것”

트위터에서는 나의 글이나 사진이 무한대로 퍼져 나갈 수 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널리 알리고 싶을 때 ‘무한RT' 아니면 ’무한 리트윗!‘이라고 외치는 이유다. 가끔 내가 언제 올렸는지도 모르는 글에 누군가 맨션을 보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는 내가 술 먹고 싸지른 글이나, 잊고 싶던 기억의 글들이 모두 ’기록‘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있다.

따라서 트위터에는 소유 개념 자체가 없다. 트위터에는 개인 페이지라는 게 딱히 없다. 비유를 하자면 트위터는 광장인데, 무수히 많은 투명의 방이 늘어져 있는 광장이다. 무슨 말을 하든 ‘멀지만 않으면’(내 타임라인에 떠 있기만 하면) 다 들린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트위터는 좌빨과 수꼴과 노빠․깨시민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내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블락을 먹이고 모조리 차단을 하면 나는 평화롭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 트윗을 리트윗하고, 그 리트윗이 다른 정치색을 가진 이들에게 조리돌림 당하기 시작하면 이제 ‘전쟁’ 시작이다.

이 광장 안에서는 무슨 말을 하든 사적인 말인 동시에 공적인 말이 된다. 따라서 난 개인적으로 한 말이라면서 성희롱이 섞인 말을 올리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글을 트위터에 올려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트위터는 분명 페이스북이나 블로그와는 다르다. 트위터는 이들보다 훨씬 공적인 공간이고, 사적인 것이 거의 없는 공간이다. 이곳에 올린 모든 것은 공유되고, 따라서 트위터에는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내가 쓴 재치 넘치는 트윗을 자기 아이디어인 것처럼 자기 트윗에 올려둘 수 있다. “왜 출처를 밝히지 않냐”고 누군가 비판하면 “140자라 짧아서 그랬어요”라고 말하면 끝이다.

네이버와 다음, 구글, 수많은 '내 것‘들을 정리하다

오늘날의 정보매체를 설명할 때 검색엔진을 빼놓아선 안 된다.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블로그든 어떤 커뮤니티든 검색엔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검색엔진은 특정 키워드를 통해 꼭꼭 숨은 정보들을 찾아내는 일종의 돋보기다. 검색엔진을 타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나의 블로그에 들어와 ‘내 것’들을 살펴보고,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들어와 나쁜 의도 없이 사찰을 한다.

오죽하면 ‘구글링’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요즘 미팅을 하건 사람을 만나건 ‘구글링’은 기본이다. 구글링 한 시간만 돌리면 웬만한 사람의 사생활과 개인정보 등 거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 SBS 스페셜에서는 독심술사가 실험 대상자들의 개인정보와 친구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들을 알아맞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사실 독심술사는 독심술을 쓴 게 아니라 구글링을 한 것뿐이었다.

네이버와 다음, 구글 등의 검색엔진들은 수많은 개인들의 ‘내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일본의 오타쿠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저서 <일반의지 2.0>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일반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검색엔진이 쌓아둔 수천 아니 수백억 단위의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만 있다면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상상하는지, 그 ‘일반의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아즈미 히로키가 상상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도지사가 도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지 결정하는 회의를 한다. 회의장에는 도지사와 도청 공무원들, 도 의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이들은 이전에는 각자 다른 ‘일반의지’를 대변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회의장 한 편에는 트위터를 통해 올라온 수십, 수천 개의 의견들이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구글에 쌓여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정리하면 많은 이들이 도 예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통계’를 낼 수 있다.

장 자크 루소는 일전에 규모가 아주 작은 정치공동체에서만 ‘일반의지’를 집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모두가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해서는, 대표하는 자가 곧 대표되는 자인, 작은 정치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즈마 히로키는 현대사회에서는 토론과 논의가 필요없다며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오히려 수없이 많은 데이터가 모이고 모여서 ‘일반성’을 갖출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일반의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반의지를 이야기한 루소가 “사유재산은 인류사회의 암적인 존재”라고 주장한 건 우연이었을까. 루소는 ‘땅의 모든 결실들은 모든 사람에게 속하며 땅 그 자체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며 나의 노동을 통해 얻은 건 나의 소유물이라는 존 로크와 대척점에 섰다. 그리고 아즈미 히로키의 의견대로 일반의지 실현을 위해 기술적 능력을 갖춘 현대사회 인터넷 공간에서 점점 소유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 그것이야말로 인터넷 공간을 작동하게 하는 ‘기반’이다.

인터넷은 ‘국가권력’에게도 열려 있다.

그렇다면 이제 칼 맑스가 이야기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 것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이 말 그대로 순진한 ‘공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언제나 ‘조작’이 가능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일반의지는 ‘조작’이 가능하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떠올리면 이 상황이 명료해진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여론조작을 했다. 밝혀진 것만 5만 개가 넘는 트윗을 남겼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분탕질까지 해대며 댓글을 달았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국군 사이버사령부까지 비슷한 짓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대선 전에는 새누리당 SNS홍보담당을 맡았던 윤정훈 목사가 이끄는 ‘십알단’(십자군알바단)의 정체가 드러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국가기관이 대규모로 여론조작을 할 수 있는 건 ‘인터넷’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공무원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말을 하면 선거법 위반으로 큰 벌을 받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싶다고 말해 ‘탄핵’까지 당하지 않았나.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누가 국정원 직원인지 새누리당 알바인지 사이버사령부 요원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주장들이 복사되어 끊임없이 뿌려진다.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이미 많은 독재정권들이 ‘선동’과 ‘여론조작’을 위해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이를 일컬어 이슈를 조작한다는 의미의 단어 스핀(spin)와 인터넷(internet)의 합성어인 스핀터넷(spinternet)이라 부른다. 러시아, 중국, 이란 정권은 블로거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키고 돈을 지불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친 정권적인 댓글을 남기고 블로그에 친 정권적인 글을 올리도록 한다. 정보의 급속한 확산력과 파급력은 반정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정보에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들이 이런 정보의 조작을 택하는 이유는 인터넷을 ‘검열’하는 것이 별로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내용을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이 글을 차단한다 해도 그 내용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차단을 하면 할수록 더 퍼져 나간다. 그래서 독재정권들은 오히려 이 ‘열린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공간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 뿐만 아니다. 국가권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은 독재정권에게도 열려 있다. 과거에 이란의 민주화 활동가들이 서로 접촉하는 방식을 알아내기 위해, 이란 정부는 수주, 수개월에 걸쳐 이들을 뒷조사해야만 했다. 그리고 소련의 KGB는 반정부 인사들의 계보도를 그리기 위해, 조직원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잡혀 온 반정부 인사들을 계속 고문해야만 했다. 그러나 SNS가 발달한 지금 각 국의 독재정권들은 이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페이스북 페이지와 트위터 팔로어를 보면 반정부 인사들이 연계되어 있는 방식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인물의 글에 ‘좋아요’를 누른 페이스북 유저들을 뒤져보면 비슷한 성향이나 비슷한 조직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다 드러난다. 리트윗한 ‘트친’들도 마찬가지다. ‘좋아요 조직화’나 ‘리트윗 조직화’의 양상은 독재정권들이 검색 몇 번만 하면 다 알 수 있다. 인터넷 창에 그 사람 트위터 아이디를 치면 그 사람이 올린 트윗이 죄다 검색된다. 독재정권은 프락치를 심어서 누가 반정부 인사인지를 알아낼 필요 없이 검색 한 번으로 누가 반정부 인사인지 알아낼 수 있다.

현실의 소유방식이 바뀌어야 인터넷도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아직 인터넷 공간보다 ‘현실’이 더 견고하기 때문이다. 진짜 중요하고 핵심적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떠돌지 않는다. 정보를 독점한 세력이 그 정보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정보를 매체를 통해 풀어놓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권력’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독점의 견고함은 현실세계의 ‘소유방식’의 견고함에서 기인한다. 정보를 독점한 이들은 이 정보를 운용하고 관리할 물질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국정원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은 채 댓글 다는 데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썼다. 독점적인 소유가 정보의 독점을 낳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터넷의 자유로움과 혁명성 등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진짜 자유로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고민해야 한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소유방식의 변화가 진짜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결국 현실세계의 소유방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 정치세력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시민들의 통제 하에 두고, 공동으로 소유하여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인터넷을 ‘정보매체’로 이용한다. 그 이유는 그곳의 소유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권력이 인터넷 공간에 개입하면서 일반의지를 조작한다면 우리는 인터넷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고, 정보매체로 활용할 수도 없게 된다. 인터넷을 잘 쓰고 싶다면 ‘현실’의 문제, 즉 권력의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작가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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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9.08 11:05



더 테러 라이브 (2013)

The Terror Live 
8.4
감독
김병우
출연
하정우, 이경영, 전혜진, 이다윗, 김소진
정보
스릴러 | 한국 | 98 분 | 2013-07-31


최근 개봉한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을 잘 묘사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윤영화(하정우 역) 앵커는 마포대교를 폭파한 ‘건설노동자 박노규’를 ‘테러범’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박노규’를 ‘근로자’라고 부른다. 폭탄테러가 이어지는 와중에, ‘박노규’의 처지에 공감하던 윤영화는 마침내 그를 ‘노동자’라고 호명한다. 그가 ‘박노규’를 노동자라고 부르는 순간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윤영화는 ‘한국 언론’의 상징이다. 기회주의자에 출세를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그의 모습은 사회비판자가 아니라 권력으로 기능하는 한국 언론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윤영화보다 더 간악한 인물은 그의 상관인 보도국장 차대은이다. 차대은은 인질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대신 청와대의 입장을 그대로 읽으라고 강요한다. 목숨 걸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현실보다 국가기관의 해명, 자본의 입장만 대변하는 한국 언론의 모습이 아닌가. 아마 윤영화도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차대은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윤영화는 마포대교를 폭파한 ‘건설노동자’를 ‘테러범’이라 불렀다. 하지만 ‘테러범’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에만 노동자들에게 붙는 것은 아니다. 한국 언론은 일상적으로 노동자를 테러범 취급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죽창과 쇠파이프를 들고 도심을 어지럽히고 거리를 점거하는 테러리스트의 모습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2004년 10월 3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조선일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알카에다의 활동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주노조 합법화를 위해 활동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진을 실었다.

윤영화가 테러 그 자체보다 ‘박노규’와 건설노동자들의 억울한 사연에 주목하면서 테러범은 근로자로 바뀐다. 근로(勤勞者)는 열심히 일했다는 뜻이며, 근로기준법 제14조에 나온 정의에 따르면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뜻한다.

근로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째, 근로자라는 단어에는 지배계급의 관점이 담겨 있다. “열심히 일했으니 오늘은 좀 쉬게 해주자”는 식이다. 근로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열심히 일했는지’를 평가하는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다. 산업화를 위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이 ‘근로자’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근로자’라는 말이 서로 층위가 다른 계급들을 뭉뚱그려 호명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노무과장이나 경영 지원실장, 좀 더 나가면 전무나 상무‧이사 같은 경영진, 심지어 사장도 월급 사장이라면 근로자에 해당할 수 있다. 언론이 박근혜 정부의 세법 개정안을 비판하며 ‘근로자의 주머니를 턴다’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윤영화는 “대통령 사과 한 번 해결되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렵냐”고 말하며 근로자의 처지에 공감한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다 죽었는데, 지배세력인 대통령이 사과 한 번 못하느냐”는 분노다. 사과만 하면 끝나는데, 사과만 하면…

윤영화는 곧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는다. 청와대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윤영화를 희생시키려 하고, 검찰과 경찰은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사과 한 번 하지 않던 대통령은 테러범과 싸워서 승리한 것처럼 떠들어댄다. 대통령이 사과 한 번 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박노규’의 테러의 배후에는 한국사회의 지배질서가 있었다. 이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윤영화는 ‘박노규’를 ‘노동자’라고 부른다.

노동자라는 말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 대립과 모순이라는 계급의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자는 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주체다. 보수언론이 노동자라는 말을 피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 사회가 바뀌길 원하지 않으며 사회변화의 주인공이 평범한 노동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윤영화는 마지막 순간 ‘박노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이 사회의 본질을 직시한 윤영화는 왜 ‘박노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까.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그를 테러범이라, 근로자라 호명한 언론에 대한 자기고백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장면을 떠올려보자. 극악무도한 것처럼 보이던 ‘박노규’가 심경의 변화를 보였던 순간이 있다. 흔들리는 마포대교를 떠나지 않고 위험에 처한 시민들의 소식을 전하던 이지수 기자, 그가 진심으로 호소했을 때 ‘박노규’는 처음으로 흔들렸다.

노동자에게 “미안하다”고 자기 고백하는 윤영화의 마지막 모습과, 노동자가 죽어나갔던 마포대교 바로 그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뉴스를 전하던 이지수의 모습에 한국 언론이 나아가야할 모습이 있다. 한국 언론은 노동자를 노동자라고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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