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25 10:06

지난 9일 첫 방송된 KBS 2TV의 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아이유, 조정석 주연)이 소송에 휘말렸다. 문제는 ‘이순신’이었다.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 DN(Designed Nation)이 “드라마를 통한 이순신 이미지의 재창조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며 서울지방법원에 ‘드라마 제목, 주인공이름 사용금지 및 방영금지와 저작물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DN 활동가 고희정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아직까지 전범국가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해 매주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요 집회를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프랑스 교과서까지 침투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KBS가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희화화할 경우 이순신은 젊은 세대에게 아이유로만 남을 것이고 한류열풍을 타고 드라마가 해외에서 방영될 경우엔 심각한 국가적 명예 훼손이 일어날 것이다.” “예전엔 초등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1·2위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지금은 김연아와 유재석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높아진 만큼 극중 인물의 이름에 신중해야 한다.”[각주:1]



역사교육의 부재를 파고든 ‘팩트’

다행히도 KBS와 제작진이 포스터를 교체하고,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조롱하는 대사들(‘이순신이면 가서 독도나 지켜라.’, ‘이 100원 짜리야.’)도 사라지면서 이 논란은 마무리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논란이 수습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일까?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라는 창작물에 너무 엄숙하게 반응하는 게 아닐까? 또한 이런 식의 명예훼손이 남발되면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터넷사이트를 돌아다녀 보니 많은 네티즌들이 DN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우리 성웅 이순신 장군을 감히 희화화하다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더 많은 네티즌들이 이순신을 검색하면 아이유가 나오고, 그래서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이 이순신하면 성웅이 아니라 아이유를 떠올리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혀 다른 사안처럼 보이지만 ‘이순신’ 논란과 유사한 현상이 있다. 바로 몇몇 청소년들이 일베(일간베스트)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모습이다. 지난 12일 SBS <현장21>은 최근 보수우파들의 성지가 되어버린 인터넷유머사이트 일간베스트를 심층 취재했다. 방송에는 일베 회원을 자처하는 한 중학생이 등장했다. 그 중학생은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동이며 노무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극우파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기자가 약간 놀란 듯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느냐고 묻자 학생은 “고대까지 밖에 안 배운다.”며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안 배워도 일베에서 배운다. 일베에서 배워서 다 안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일베에 접속하면 ‘역사교육’이라는 제목을 단 글과 동영상이 많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광주가 폭동이므로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한 게 잘한 일이라는 점, 김대중과 노무현이 빨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글과 동영상을 올리며 ‘팩트’를 강조한다. “좌파는 감성팔이만 하는데, 우리는 팩트로 무장하고 있다.”는 식이다. 일베 유저들이 일베 사이트를 대상으로만 ‘역사교육’을 실시하는 게 아니다. 네이버나 다음에 김대중/노무현이나 5.18 관련 기사가 실리면 일베 유저로 추정되는 이들이 와서 “5.18은 폭동이고 김대중/노무현은 빨갱이다. 이건 팩트다.”라는 내용의 댓글을 올린다. 아마 이 글에도 그런 댓글이 달릴지 모르겠다.

‘이순신’ 논란과 ‘일베 역사교육’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역사교육의 부재’다. 초중고 학생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웠다면 이순신과 아이유를 헷갈릴 수 있을까? 드라마나 사극으로 역사를 배우다보니 진짜 역사와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말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대답할 수 있다. 팩션이나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다며 드라마를 찍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역사교육을 강화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칠 생각을 해야 한다. 머리에 제대로 된 역사가 박혀 있으면, 아이유가 이순신이라는 생각이 파고 들 틈이 없다.

일베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중학생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근현대사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중학생의 머리에는 역사가 부재했고, 그 틈을 일베의 ‘팩트’가 파고들었다. 근현대사와 국사는 예전부터 필수과목이 아니라 수능의 ‘선택과목’이었다. 2009년 교육과정 개정으로 국사와 근현대사가 ‘한국사’로 통합되면서 학생들은 내용도 많고 어려운 한국사 과목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왜 역사문제에 둔감한가?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 최근 BBC 매거진에 실린 하나의 기사는 큰 시사점을 준다. BBC 도쿄 특파원 오이 마르코는 자신의 역사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역사문제에 무관심한 이유를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오이 마르코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까지만 역사를 ‘필수’로 배운다. 또한 역사과목에 배정된 시간도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 “호모 일렉투스부터 현대까지 무려 30만 년에 이르는 역사를 1년에 배우는데, 14살짜리가 어떻게 일본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일본 학생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거의 배우지 못하고 있다. 오이 마르코가 배웠던 중학교 2학년 역사교과서에서 태평양 전쟁 시기를 다룬 내용은 19쪽, 중일전쟁은 한쪽으로 끝나고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술은 한 줄 뿐이다. 한국인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주석으로 한 줄 언급된다.

이렇게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인들이, 왜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 일본이 역사문제를 가지고 갈등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 극우단체들은 인터넷에 파고들고, 집회와 시위를 해댄다. 인터넷에는 국수주의적인 정보, 센카쿠나 독도문제 혹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극우의 견해들이 도배된다. 역사교육이 부재한 일본인들의 머리를 극우의 ‘팩트’가 파고드는 것이다.[각주:2]

역사전쟁을 준비해야할 시간

나는 이전에 박근혜 취임을 맞아 미디어스에 올린 글에서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가장 논란이 될 사안은 한국현대사, 즉 과거사 논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집권 이후 친일과 이승만, 박정희 등 한국 현대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대선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박근혜 주변에 “한국사회가 좌빨로 가득 차 있다.”는 식의 외눈박이 문제의식을 지닌 인사들이 즐비하다는 점에서 교과서 수정 등을 둘러싼 현대사 논란이 정국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며 신난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어댈 것이다.[각주:3]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역사전쟁의 스타트를 끊었다. 조선일보는 15일자 5면에 <원로들이 우려한 좌파의 인터넷 다큐 '백년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신동아 3월호도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백년전쟁이 이승만을 친일파로 낙인찍기 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보수인사로 저명한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며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며 ‘잘 살펴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역사전쟁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으로 시작될 모양이다.

이러한 역사전쟁이 위험한 이유는 역사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일베에서 현대사를 배우는 중학생처럼, 극우파들이 내세우는 편향된 역사관이 ‘팩트’로 무장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킬 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순신과 아이유를 헷갈린다는 이유로 드라마를 욕하기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이유다. 

  1. “이순신=아이유는 심각한 역사 훼손?”,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077 [본문으로]
  2. “아베 망언에 일본사회가 무심한 까닭”,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178 [본문으로]
  3. “박근혜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1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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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18 08:31

지난 주말, 하나의 글이 페이스북에 올라오면서 SNS가 발칵 뒤집혔다. “A대학 정보통신대 남학생들이 미팅에서 JM을 하라고 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JM은 장애인을 흉내 내며 하는 FM으로, FM은 대학 신입생들이 이름과 과를 큰 소리로 외치는 자기소개 방식을 뜻한다. 이 글을 올린 특수교육과 여학생에 따르면, 여학생들이 미팅이 끝난 후 말실수 한 거 아니냐며 따지자 남학생들은 웃으면서 “그게 우리들 문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들이 사과해야 하는 이유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인터넷에선 A 대학 남학생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언제 어디서나 늘 존재하는 극소수의 몰지각한 인간들을 제외하고 남학생들을 옹호하는 의견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학생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비난하는 이유에는 조금씩 온도차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 여학생들이 불쾌했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고등학교 친구들끼리도 아니고 미팅 가서 처음 보는 여자애들한테 장애인 흉내내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는 의견이 꽤 있었다. 물론 그 여학생들이 불쾌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보는 여학생들이 아니라 친한 친구에게 JM을 하라고 했다면 이것은 용납해도 되는 것일까? 실제로 A대 정보통신대 학생회장은 인터넷에 이번 사태에 대한 사과 글을 올리며 “상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인권 자체에 대한 대단한 잘못”이라고 말했다.

혹자들은 그 여학생들이 특수교육과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특수교육과 학생들 앞에서 장애인을 희화화하는 건 심한 일이다.”라는 의견도 있었다. 만일 그 남학생들이 상대 여학생들이 특수교육과 학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의로 JM을 요구한 거라면, 그놈들은 정말 쌍욕을 먹어도 싼 놈들이다. 하지만 특수교육과 학생이 아니라도 그런 행동에는 기분 나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시각은 장애인 인권을 몇몇 특수한 사람들의 이해관계 정도의 문제로 취급해버린다.

이번 사건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그 남학생들이 장애인을 희화화하고 유머코드로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문화’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처음 보는 여학생들’에게 JM을 요구했다는 사실도 문제지만, 그것을 문화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 자체가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상상의 공동체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출판사
나남 | 2004-09-0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책.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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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적 일체감의 근원, 비참함의 공유

정치학자 베니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모든 애국심과 집단적 일체감의 근원에는 비참함의 공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남자라면 군대를 떠올리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군대 안에서 겪은 비참한 경험들(?)을 공유하며 연대의식과 집단적 일체감을 형성한다. 군대 안에서 겪은 각종 황당한 사건과 나를 갈구던 선임과 내가 갈구던 후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과장해서 이야기하며 ‘군대 다녀온 남성’ 간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이나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모종의 연대감을 통해 한국의 병영문화가 형성된다. 그들은 (특히 인터넷에서) 군대를 기피한 연예인들을 욕하고, 안보의식이 부족해 보이는 여성들을 비난한다. 수색대나 특수부대에 자원한 연예인에게는 ‘까방권’(까임방지권)을 행사하고 군대를 소재로 만든 개그와 각종 짤방에 공감하며 웃음을 터트린다.

비참함의 공유를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는 ‘의식’이 군대에만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사회집단이건 새내기나 신입들이 그 사회로 들어서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식’이 있다. 막걸리 잔에 소주를 가득 넣어 원샷 하는 ‘사발식’을 치르기도 하고 나이 지긋한 선배님들과 상사들 앞에서 어설픈 장기자랑을 펼치기도 한다. 사실 장기자랑이나 재롱잔치, 사발식은 정말 창피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런 의식을 거치면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선배들은 다가와 술 한 잔 따라주며 “나도 옛날에 다 그랬다.”며 그 날의 창피하고 비참했던 경험을 공유한다.



푸르른 틈새

저자
권여선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7-07-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996년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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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도 마찬가지의 경험이 아닐까? 소설가 권여선은 소설 <푸르른 틈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FM이라 불리는 대학 특유의 자기소개 방식은 더 노골적으로 비참함의 공유를 요구한다.(실제로 FM은 Field Manual의 약자로 군대 용어이다.) 신입생은 자신을 바라보는 동기와 선배들 앞에서 이름과 소속을 우렁차게 밝혀야 한다. 하기 싫어서 대충 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작다!”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치러야 하는 ‘의식’이다. 이는 창피하고 비참한 경험이지만 이를 이겨내면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연대의식의 폭력성

이런 연대의식은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비참함을 공유하지 않은 , 즉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에 대한 적대감이나 희롱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남성 집단에는 여성을 일체감을 느끼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쯤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있다. 남성들끼리 모여 여성들을 품평하고, 서로의 첫 경험을 캐물으면서 희희덕 거린다.

이런 적대감과 희롱은 비참함을 돌파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여성의 사례처럼 이러한 폭력의 대상은 주로 자신들과는 ‘다른’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이다. JM은 비참함의 공유라는 집단적 일체감이 소수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였다. FM이라는 자기소개 ‘의식’을 통해 일체감을 형성한 이들은 이 비참함을 견고한 연대감으로 승화시킬 공통의 웃음 포인트를 찾아낸다. 우리와는 다른 장애인들을 흉내 내며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는 것이다. 추론하건대 그들이 보기에 더 리얼하게 장애인을 흉내 내는 사람은 가장 큰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군대 안에서 여성과의 관계를 희화화하여 서로 경쟁하듯이 이야기하고, 더 자극적이고 강한 경험을 이야기할수록 박수를 받고 웃음을 자아내는 모습과 유사하다.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통해 연대의식을 고취하지 않기

이번 JM사건에 대한 반응은 “이 못 돼먹은 대학생 놈들!”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을 통해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야 하며,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노력들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수단 삼아 연대의식을 고취하려는 집단문화가 사라져야 한다. 더 나아가 집단이 공유하는 비참함과 특유의 의식들도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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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11 00:32

경향신문의 단독보도로 ‘종북’이 다시 한 번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경향신문의 4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28일 국정원이 북한을 찬양하는 게시물이나 웹사이트 등을 국정원에 신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초청행사를 열었고, 행사에 변희재 빅뉴스 대표가 강사로 참여했다. 이날 변 대표는 박원순. 이정희. 낸시 랭. 공지영 등이 대표적인 종북주의자라고 주장했다.[각주:1] 

경향신문의 보도 이후 CBS 시사자키가 낸시랭을 인터뷰했고, 낸시랭이 인터뷰에서 변희재를 조롱하면서 ‘종북’ 논란은 더욱 확산되었다. 그러자 변희재는 고발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낸시랭을 종북주의자로 지목한 적이 없다며 경향신문 보도는 오보라고 주장했다.[각주:2]

‘광의의 종북 개념’, 종북은 과연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종북은 무엇인가? 우파들은 늘 진보좌파들을 향해 종북의 칼을 겨누고, 진보좌파들은 자신이 종북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고발뉴스에 실린 변희재 인터뷰에 종북이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가장 협의의 종북은 ‘간첩과 이적 단체’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가장 극단적인 광의의 개념으로 가게 되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인간의 질이 낮은 사람'까지를 말할 수도 있다. 북한 김씨 일가는 현명한 판단을 못하도록 북한 주민들의 인간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종북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인간의 질이 낮은 사람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의 김씨 일가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공통점 때문에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종북이 된다. 이런 논리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전두환 정권 시절 발생한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편을 들었을 때 피고인도 알리 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행위냐.” (이 말을 들은 최병국 검사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자제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검사도 ‘광의의 종북 개념’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A와 B가 가진 공통점 혹은 유사성 때문에 A와 B가 똑같다고, A가 B를 추종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일성이 알리를 응원하고 나도 알리를 응원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김일성과 내가 같은 편이 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의 김씨 일가가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또 나도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내가 북한의 김씨 일가를 ‘따르는’ 종북이 될 수는 없다. 또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주관적인 기준이 아닐까? 내 눈에는 아무한테나 종북 딱지를 붙이는 자들이야말로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같은데, 그렇다면 그 자들도 ‘종북’이란 말인가?



종북이라는 이름의 사상검증

문제는 이러한 넓은 의미의 종북을 근거로 사상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낸시랭이나 공지영, 박원순이 간첩 행위를 한 종북세력이라는 이유로 법적인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종북이라고 낙인찍힌 진보좌파들이 모두 법적인 처벌을 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종북’ 개념은 이들에게 사상검증의 잣대로 기능한다.

수구꼴통들이 모여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자신들이 싫어하는 집단이나 인물에 대해 전부 다 ‘종북’ 딱지를 붙인다. 종북 페미니스트, 종북 학생회, 종북 동성애자 등등.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이 싫어하는 집단이나 인물에게 붙이는 칭호가 ‘종북’인 걸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멍청이, 바보, 찌질이라고 불러도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종북’이라는 단어를 쓴다. 종북 세력을 축출하자고 주장하는 우파 논객들은 아무한테나 종북 딱지를 붙일 의도가 없다고 말한다.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미 넓은 의미의 종북 개념이 인터넷 상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사상검증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북 낙인찍기는 찌질한 넷우익들의 장난질 수준을 넘어섰다. 국정원 직원 김씨는 4대강이나 무상보육 철회,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두둔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치켜세우는 글을 작성했다. 야당 인사를 비판하고 박근혜를 띄우는 활동을 하고, 야당 후보를 칭찬하는 글에는 반대를 눌렀다. 국정원은 이런 직원의 활동을 ‘대북심리전’이라 칭하고, 종북세력을 감시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고 야당 인사를 비판하는 게 종북주의랑 대체 무슨 상관인 걸까? 국가 정책에 반대하면 북한 편이라는 걸까? 국방부가 나꼼수를 ‘종북 앱’으로 규정한 사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방부는 나꼼수 등 정부 비방 팟캐스트를 듣는 군인들의 스마트폰을 조사하고, 삭제 조치했다.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 곧 종북이란 말인가?

국정원이 시민단체인 환경연합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했다가 환경연합의 항의를 받고 사과를 하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지난해 8월 6일, 4대강에서 녹조가 발생하자 환경연합은 ‘4대강으로 남조류 발생’ ‘녹조 오염 물고기, 물놀이로 독소 노출’이라는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2주 후인 8월 20일 북한의 <우리민족끼리>가 ‘녹조는 이상기후 아니라 보 때문’ ‘녹조오염 물고기 섭취도 치명적’이라는 논평을 냈다. 국정원은 둘이 똑같은 주장을 한다며 환경연합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국정원의 주장을 인용해 <‘한쪽이 정부비판하면 바로 옳소'>, <‘북한-종북 단체들, 온라인선전 2만건 글 보니’>라는 기사까지 썼다. 국정원과 동아일보는 a와 b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a와 b가 똑같으며 a가 b를 추종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일보는 통합진보당 대의원들이 이름표를 들어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이 북한과 닮았다고 지적했고, 넷우익들의 사이트에는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북한 글꼴로 피켓 문구를 작성했다며 종북 운운했다. 넓은 의미의 종북 개념을 학습한 이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진보좌파들이 ‘종북’ 낙인에 맞서야 하는 이유

이런 사상검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반대파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개객끼 해봐.” “너 종북이지?”와 같은 물음 속에서 진보좌파들은 항상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자신의 사상이 북한과 관계없다는 것을 밝히는 수세적인 입장에 내몰린다. 이런 사상검증이 판을 치는 이상 합리적인 토론은 불가능하고, 표현의 자유도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특히 진보좌파들에게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합리적인 문제제기나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종북세력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고자 어떤 진보좌파들은 우파들처럼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종북이라는 단어는 진보진영 내에서 탄생했다. 2001년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간에 논쟁이 있었을 때 사회당 인사들이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분당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탈당파들이 민주노동당 당권파를 ‘종북’이라고 불렀다. 조선일보는 탈당파 인사였던 조승수를 인터뷰하여 “진보진영 내에 종북세력이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고, 그 뒤로 보수언론과 우파들은 친북보다 종북이라는 단어를 더 즐겨 사용한다.

진보좌파들이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종북세력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은 북한을 지지하는 종북세력과 다른 ‘좌파’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언론과 사상검증으로 혈안이 된 우파들 눈에는 언제나 ‘그놈이 그놈’이 될 수 있다. ‘종북세력’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진보좌파들은 언제나 종북세력으로 몰릴 수 있다. 종북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낙인찍고 사상검증을 시도하는 이상 그 칼날은 언제든지 종북이 아닌 좌파들에게도 되돌아올 수 있다. 진보좌파들에게 “우리는 종북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 이상의 대응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1. 경향신문, <국정원 강연서 “박원순·공지영…낸시 랭도 종북주의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40600145&code=940202 [본문으로]
  2. 고발뉴스, <변희재 “낸시랭은 종북세력에 속하지 않아”>,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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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04 01:46

며칠 전 대형 입시업체 메가스터디의 광고가 SNS 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어떤 네티즌이 2013년 새 학기를 앞두고 메가스터디가 시내버스 등에 게재한 광고를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서 논란이 일었다. 문제가 된 메가스터디의 광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아브라카다브라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



이 광고는 소위 ‘우정파괴’ 광고라 불리며 많은 네티즌과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많은 네티즌들과 언론은 이 광고에 대해 “시험 잘 보려면 친구를 버려야한다는 말이냐.”며 메가스터디가 비교육적인 내용을 선전하고 입시경쟁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메가스터디는 “해당 광고는 새 학기를 맞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학생들에게 가장 와 닿는 소재인 친구를 차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우정이냐 공부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우리는 메가스터디에 대한 비난을 넘어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정이나 인간관계 같은 가치들과 공부를 대립 항으로 설정하고 배치시키는 한국의 교육 현실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SNS 상에서 이번 메가스터디 광고 논란에 대해 “현실이 잘못된 거고 메가스터디는 그러한 현실을 표현했을 뿐이다.”, “친구가 경쟁자인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더 문제다.”라는 의견도 많았다.

이미 많은 교사들이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라는 말을 해왔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고2때 교사들이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시킨 적이 있다. 그 때 교사들은 대학 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 일장연설을 했다. 그리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우리가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목록에는 연애도 있었고,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쓸데없이 잡담하거나 놀지 말라는 말도 했다. 그런 거(?) 할 시간에 수학문제를 하나라도 더 풀고 영어단어를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3때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밖에서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학생주임 선생이 와서 아이들을 혼냈다. “고3이 한가롭게 농구나 하고 있냐? 그럴 시간에 공부해라.” 고3때 내가 야자 시간 도중에 잠깐 밖에 나와 친구들하고 잡담을 한 적이 있다. 담임이 나를 따로 불렀다. “너 그렇게 애들이랑 어울리다 성적 떨어진다.”

공교육기관이라는 학교도 이런데, 학원은 오죽하겠는가? 고등학교 때 학원에 다닌 적이 있는데, 이사장과 학원 선생들은 정기적으로 학생들을 모아놓고 대학 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좋은 대학에 가려면 우정이나 연애, 기타 개인적인 희로애락들은 개나 줘버려야 한다는 정신교육을 시켰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메가스터디 광고를 패러디했다.

서로가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공부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공부가 아닐까?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문제에 부딪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동해야 한다. 그런데 왜 선생들은 교실에 짱 박혀 문제 푸는 것 외에는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한국의 교실에서는 친구들과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공부로, 교육의 일환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한국의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은 ‘나 혼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2008년 내신등급제가 도입될 당시 언론들은 서로 필기노트도 보여주지 않고, 친구가 교과서를 훔쳐 갈까봐 자물쇠로 사물함을 잠그는 교실의 풍토에 대해 보도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협동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이겨야 할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네가 자는 동안 남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지난해 4월 서울시교육청이 초·중·고교생 26만여 명을 대상으로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조사를 했다. ‘친구들과 사이가 원만해서 좋다’는 문항의 만족도 지수에서 고등학생은 5.0점 만점에 3.2점을 기록했다. 이는 초등학생 4.42점, 중학생 4.24점에 비해 낮은 수치다. 입시경쟁이 본격화될수록 동급생을 친구가 아닌 치열한 경쟁자로 인식하는 게 아닐까?[각주:1] 

‘공동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청년들

내가 고3일 때 어른들은 “1년만 참아.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해. 연애도 하고 친구들하고 마음대로 놀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지금도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대학생이 되어도 자유를 만끽할 수 없다. 학점을 잘 받으려면 서로 경쟁해야 되고 좁은 취직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높은 등록금과 생활비에 시달리면서 공부를 병행해야 한다. 고3을 겨우 버텨낸다 해도 더 심한 경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실이 20대가 정치.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현상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청년들은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에 대해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내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집회에 같이 가자고 유혹하고, 정치조직이나 정당에 참여해보자고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취업 스터디 때문에 바빠서”, “알바를 해야 해.” 하지만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 알바를 여러 개 해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은 우리가 공통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활동’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들에게 중요한 건 이런 공통의 목소리가 아니라 취업이나 알바 등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것이 되어버렸다. 몇몇 진보적인 어른들은 요즘 청년들이 보수화되었다고 한탄하지만, 보수화된 게 아니라 원자화된 것이 아닐까?

한국사회는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학생들에게 나 혼자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친다. ‘공부’는 홀로 문제집을 푸는 행위, 남들을 이기기 위한 자기계발 등의 좁은 의미로 한정된다. 메가스터디 광고가 표현하고 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단순히 우정이냐 공부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한 양자택일 속에 숨겨진 현실은 공동체가 개개인으로 갈기갈기 찢겨짐으로써 공동체로서의 학교가 사라진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개인들은 정치. 사회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 아닐까?

교육에 대해 고민하자!

공동체는 공동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개인들을 통해 성립한다. 개인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재생산에 실패하고, 파편화된 개인들만 남는다. 이것이 우리가 교육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1. 한겨레, <“친구 끊고 공부해” 우정파괴 메가스터디>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575642.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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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2.25 10:23

25일 0시를 기점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시대가 개막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인터넷상에서 대선 수개표, 재검표를 요구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부정하지만, 이제 우리는 ‘대통령 박근혜’라는 표현에 익숙해져야 한다. 박근혜에 반대하고,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았던 진보좌파들은 새롭게 도래할 5년, 박근혜 시대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명박산성’에 이은 근혜산성?

이명박 정부 5년간의 키워드는 ‘소통’이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서울도심에 설치된 ‘명박산성’은 시민과 노동자들을 대하는 이명박의 마인드를 보여준 상징물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남의 말과 비판을 듣지 않고 4대강, 쇠고기협상, 한미 FTA 등을 밀어붙였고 그 과정에 ‘불통’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와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박근혜 정부는 불통이 아닌 소통의 정부가 될 수 있을까? 인수위의 활동을 보면 이명박 정부보다 더 답답할 정도다. 어떤 언론도, 심지어 대통령의 최측근도 누가 장관이 될지 누가 총리가 될지 알 수가 없다. 인수위 간사들은 박근혜의 함구령 지시를 받고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고, 대변인은 현장에 와서 밀봉된 봉투를 뜯어 장관 인선을 발표했다. 언론은 예측을 빗나간 인선에 허둥지둥했다. 정부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는데도 자기들 마음대로 장관 인선까지 마쳤다. 정부 조직안에 동의하지 않는 야당을 새 정부 발목 잡는 세력으로 몰아붙이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이러한 박근혜 식 밀봉 인사, 불통, 비밀주의는 아버지 박정희의 그림자와 연결되면서 진보세력으로부터 더 심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진보세력은 정부의 불통에 문제를 제기하며, 거리로 나가 소리를 질러야 했다. 박근혜 5년도 마찬가지 아닐까? 진보세력 앞에는 명박산성이 치워지고 근혜산성이 자리 잡았다.

박근혜가 (말)바꾸네?

이명박 정부는 남들의 비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공약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박근혜도 이명박과 같은 불통이라면, 재벌이나 시장주의자들의 비판에 귀를 닫고 복지, 경제민주화 공약을 밀어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박근혜와 인수위가 내놓은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박근혜가 내세운 복지공약들이 줄줄이 후퇴하고 있다. 박근혜는 대선 때 만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공약은 만 65세 이상 노인을 소득수준과 국민연급 가입 여부에 따라 4개 그룹으로 나눠, 그룹에 따라 월4만원에서 20만원까지 차등지급하는 안으로 바뀌었다. 4대 중증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 질환)의 총 진료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하겠다는 공약도 후퇴했다. 상급병실료, 선택 진료비, 간병비 등 ‘3대 비급여 항목’은 국가가 부담하는 진료비에게 제외하겠단다. 의료단체와 환자들은 3대 비급여 항목을 국가가 지원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지금이랑 별로 달라질 게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노인 임플란트 건강 보험 적용’ 공약도 흔들리고 있다. 박근혜는 대선 때 65세 이상 노인의 모든 치아를 대상으로 하는 임플란트에 건강 보험을 적용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공약은 ‘75세 이상 노인의 어금니 2개’를 대상으로 하는 임플란트에만 건강 보험을 적용한 뒤 점차 확대하겠다는 식으로 후퇴했다.

경제민주화는 또 어떤가? 박근혜는 지난해 7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국민행복을 위한 3대 핵심과제’ 중 하나로 경제민주화를 제시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는 최근 인수위가 발표한 5대 국정목표에서 제외됐다. 200쪽에 달하는 국정과제 자료집에 경제민주화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고, 대신 성장 중심의 ‘창조경제’가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경제정책의 핵심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사령탑들도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시장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경제관료 출신이다. 그는 그간 “대기업은 나쁘다는 식으로 정서적인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를 풀어서는 안 된다.”, “기업형 슈퍼마켓의 진입을 규제하는 것은 시장 왜곡을 초래한다. 우선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 등의 발언을 통해 경제민주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내정된 조원동 역시 시장주의 원칙을 강조하는 경제 관료이다.

박근혜 시대의 복지, 경제민주화 공약이 이명박 시대의 ‘반값 등록금’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명박은 반값등록금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이를 깡그리 무시했고, 대학생들은 공약을 지키라며 반값 등록금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복지와 경제민주화 요구와 맞물리면서 반정부 운동과 진보세력의 집결로 이어졌다. 진보세력도 박근혜에게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대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다시 한 번 복지와 경제민주화 열풍으로 이어질지 그렇지 않을지는 진보 세력에게 달려있다.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

저자
조윤호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2-10-2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박근혜로 한국 사회 읽기『보수의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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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와의 전면전?

박근혜가 경제민주화를 포기한다면, 노동계는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박근혜는 얼마 전 한국경영자총연합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고용경직성이 강하다.”, “법과 질서가 존중되는 노사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나아가 정부의 노사 문제 대응방침에 대해 밝혔는데, 그것은 ‘노사문제의 자율적 해결’, ‘불법 관행에 대한 단호한 대처’였다. 또한 박근혜는 경총, 한국노총과 긴밀하게 파트너십을 유지하며 노동문제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박근혜 정부의 노사 문제 대응방침, 노사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고 불법 관행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태도는 이명박 정부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자본과 대기업은 대법원 판결도 무시하며 불법적인 관행들을 일삼아왔고, 이를 제대로 바로잡자는 게 경제민주화의 취지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대기업과 자본가들의 횡포를 막으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보다는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경제정책을 내세우고 있으며, 정부의 개입이 아닌 ‘노사의 자율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가 내세우는 법과 질서는 결국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하지 말고, 파업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민주노총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민주노총은 불법적인 파업을 일삼는 세력이다!”)와도 일맥상통한다.

현대사를 둘러싼 전면전!?

결국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를 이슈로 내세울 의지가 없는 것 같다. 경제정책의 방점을 경제성장에 두고 이를 추진할 경제 관료들을 경제사령탑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곧 경제정책은 전문가, 즉 관료들에게 일임하겠다는 의사 표현이 아닐까? 노사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 역시 노동 문제는 기업의 자율에 맡겨두고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불법적인 투쟁만 제어하겠다는 태도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와 노동 문제를 이슈화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이에 맞서 진보세력과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노동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슈화하고,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킬 부문은 무엇일까? 한국현대사, 즉 과거사 논란이 아닐까 싶다. 친일과 이승만, 박정희 등 한국 현대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부 때 뉴라이트가 금성출판사 등 교과서의 좌편향성(친북/반미/반재벌)을 제기하며 교과서 수정을 요구하고,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교과서 수정을 지시하는 일이 있었다.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대선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박근혜 주변에 “한국사회가 좌빨로 가득 차 있다.”는 식의 외눈박이 문제의식을 지닌 인사들이 즐비하다는 점에서 교과서 수정 등을 둘러싼 현대사 논란이 정국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며 신난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어댈 것이다.

논란은 이미 시작되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지난 1월 22일 ‘초중등교육법 일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 법안은 장관의 교과서 수정권을 법률에 명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안에 따르면 교과부 장관은 국정 교과서를 직접 수정할 수 있고, 검정교과서의 경우 저작자나 발행자에게 수정을 요청할 수 있다. 또한 교과서 편찬, 검정, 인정 단계에서 필요한 경우 교과부 장관이 감수를 할 수도 있다. 출판사가 장관의 수정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출판사의 검·인정 합격을 취소할 수 있다. 합격이 취소된 출판사는 3년간 교과서 심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각주:1]

박근혜 정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진보세력에게는 박근혜 정부의 등장에 낙담하거나, 이제 끝났다고 한숨 쉴 시간이 없다. 이명박 정부 못지않게 박근혜 정부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거부하고 노동계에게 법과 질서의 철퇴를 내리치면서 말이다. 박근혜의 시대는 이명박의 시대만큼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들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좌편향을 한탄하는 우파들이 현대사를 둘러싼 논란을 제기하는 식으로 말이다. 진보좌파들은 이 시대를 다시 뚫고 버텨내야 한다.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

  1. '朴통 시대' 발맞춰 '교과서 전쟁 시즌 2' 시작되나?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3012215115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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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2.18 11:36

몇 년 전 한국사회에 ‘강남좌파’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사회의 엘리트이거나 주류 계급의 위치에 있지만 서민이나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복지를 요구하는 이들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우리는 강남좌파가 기존의 좌파들이 지닌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남좌파는 “사회경제적인 계급이 의식을 결정한다.”는 기존 좌파들의 사고를 넘어서고자 한다. 사회경제적인 계급이 주류에 속해 있더라도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좌파의 두 가지 계급조건, 부동산과 교육

하지만 난 여전히 인간은 사회경제적인 계급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강남좌파의 한계이기도 하다.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는 마음껏 할 수 있지만,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라는 차원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강남좌파들이 얽매이는 첫 번째 사회경제적인 계급조건은 ‘부동산’이다. 한국사회에서 부동산은 계급 재생산이자 부의 바로미터다. 아무리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주장을 하는 강남좌파들이라도 자신의 재산과 계급 재생산의 문제가 걸린 부동산 문제에서는 좌파적인 주장을 하기 힘들다. 이러한 측면에서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강남좌파>에서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땅값을 올리는 데 기여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노무현 정부가 강남좌파를 표방했고, 강남좌파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남 좌파

저자
강준만 지음
출판사
인물과사상사 | 2011-07-2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강남 좌파, ‘이념’보다 ‘엘리트’ 문제다『강남 좌파』에서는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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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들을 옭아매는 또 다른 계급조건은 ‘교육’이다. 강남좌파들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자식들의 ‘학벌’이다. 실제로 좌파, 진보 지식인을 표방하는 사람들 중에 자식이 서울대를 가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칼럼리스트 김규항은 이런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수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진보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진보 아이들도 영어 잘하게 키웁시다?

지난 일요일 트위터에서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의 글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진보 아이들도 영어 잘하게 키웁시다!’[각주:1]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기숙은 강남좌파, 더 나아가 한국의 진보적인 부모들이(정확히 표현하자면 자기 자식이 강남좌파가 되길 바라는 진보적인 부모들) 지닌 자식 교육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영어공부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한 뒤, 조기숙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사회에서 영어는 계급이고 신분입니다. 영어가 별 쓸 데도 없는데 권력을 취득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어요.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에 지식은 곧 권력입니다. 진보 아이들은 보수 아이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운전기사, 노동자만 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이 올곧으면서도 사회의 권력을 갖도록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영어 잘하게 만드는 게 왜 나쁩니까? 진보는 늘 공부 안 시키고, 놀리기만 하고, 경쟁은 무조건 반대한다는 말은 잘못된 신화입니다. 외국의 진보들은 모두 주류입니다. 그들은 공부를 억지로 시키지 않고 즐겁게 하도록 만들고, 놀이도 삶과 공부의 일부가 되도록 하고, 약자를 짓누르는 경쟁이 아니라 나쁜 놈을 이겨서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경쟁을 시킵니다. 진보는 왜 맨날 물러 터져서 지고, 양보하고, 악인에게 패해야 하나요? 자녀들이 자율적으로 재미있게 놀면서 공부하도록 하고, 힘든 이웃도 돌아보게 하고, 악착같은 승부근성으로 나쁜 놈을 이기는 법도 가르쳐 주자구요. 보수 부모는 강제로 학원 보내고 억지로 경쟁시킨다면, 진보부모는 아이의 인권을 존중하며 즐겁게 공부시키는 게 차이점 아닐까요?^^”

자신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부모들

조기숙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대체 ‘어떤’ 진보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키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대체 ‘어떤’ 진보 부모가 영어 잘 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였다. 이미 대부분의 진보 부모들이 자식들의 영어교육을 위해 돈과 시간을 쏟아 붇고 있다. 영어가 신분이자 계급이라는 걸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진보가 늘 공부 안 시키고, 놀리기만 하고, 경쟁은 무조건 반대하는가? 아니, 오히려 ‘아무도’ 그런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아무도 이러한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게 문제 아닌가? 주장은 진보적으로 하면서 자기 자식들은 혹독하게 학벌의 경쟁으로 몰아넣는 게 문제 아닌가?

‘진보 부모도 자식 교육 잘 시켜서 진보 세력이 사회의 주류가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받는 사람, ‘아이’의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교육 때문에, 지나친 경쟁에 내몰려 불행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자식들을 자신의 욕망의 대리자로 취급한다. “내가 서울대 못 갔으니 너라도 서울대 가야 집안이 잘 살 수 있다.”, “내가 서울대를 갔으니 너도 서울대를 가야 집안이 계속 잘 살 수 있다.” 등등의 방식을 통해 부모들은 자식들을 몰아붙인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지에 관심이 없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집에서 자식들과 대화를 하기보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는 게 자식들을 위해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조기숙의 주장은 진보 부모 입장에서는 “나는 보수 부모와 달라.”는 자기 위안을 마련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별로 다를 게 없다. 조기숙은 “보수 부모가 강제로 학원 보내고 경쟁 시킨다면, 진보 부모는 아이의 인권을 존중하며 즐겁게 공부시킨다.”며 보수 부모와 진보 부모를 구별 짓기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부모가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마도 조기숙은 보수 부모와 진보 부모의 욕망이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보수 부모는 아이가 엘리트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라고 좋은 대학에 보내려 하지만, 진보 부모는 엘리트가 되어 나쁜 놈들 물리치고 정의사회 구현하려고 좋은 대학에 보내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약자를 짓누르는 경쟁이 아니라 나쁜 놈을 이겨서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경쟁을 시킵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코웃음 나오는 말이다. 보수 부모건 진보 부모건 자신을 경쟁으로 내모는 태도는 다르지 않으며, 일단은 좋은 대학에 가고, 영어를 잘해서 엘리트가 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보수’ 부모에 속한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에게 “나는 진보적인 목소리와 의제에 관심이 많고, 대학을 꼭 가지 않아도 그런 걸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부모님은 나에게 “일단 대학을 가고, 성공을 한 다음 그런 목소리를 내라.”고 말했다. 좋은 교육 받아서 엘리트 되고, 사회를 변화시키라고 말하는 조기숙의 말이 보수 부모인 우리 부모님이 했던 말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뭐야, 결국 시키는 대로 공부 열심히 하라는 거잖아?” 김규항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보수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고 말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내가 당당 하냐, 불편하냐의 차이가 있겠지만 경쟁에 밀어 넣어지는 아이 입장에서 그런 차이가 느껴질까?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진보가 진짜 가르쳐야 할 것들

부모가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욕망이 갖는 ‘전제’다. 그것은 ‘높은 사람이 되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다. 조기숙이 “보수 아이들이 운영하는 회사의 운전기사, 노동자만 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 아이들이 올곧으면서도 사회의 권력을 갖도록 키워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운전기사, 노동자가 돼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사회를 진보적인 사회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권력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진보가 바라는 세상이 과연 선하고 도덕적이고 올곧은 지도자와 엘리트가 나타나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상인가? 그런 우연적인 요소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엘리트들에게 희망을 거는 사회가 진보가 바라는 세상일까? 노무현이나 안철수 같은 올곧은 메시아들이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보수는 ‘엘리트만이 세상을 운영할 능력이 있으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엘리트주의자다. 그렇다면 진보는 ‘평범한 사람들도 세상을 운영할 수 있으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닐까? 진보 부모의 아이들이 영어교육을 열심히 받아서 사회 엘리트가 되는 사회가 이러한 세상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의문이다.

진보 부모가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운전기사나 노동자야말로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서로 연대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남을 착취하는 보수 아이들의 회사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성공해라.’가 아니라 ‘차별은 배제하고 평등은 옹호하라’는 것이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

  1. http://cafe.daum.net/slowschool/BytC/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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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2.12 00:49

당신이 만약 2010년대의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를 하나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꼽지 않을까? 힐링은 모든 단어에 붙여도 되는 만능키가 되어버렸다. 힐링 하우스, 힐링 여행, 힐링 다이어트, 힐링 푸드, 힐링 뮤지컬, 힐링 강연, 힐링 메이크업 등등. 힐링이라는 이름을 단 상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2013년 한국의 키워드, 힐링

서점가에도 힐링이 대세다.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시작에 불과했다. 힘들고 외로운 청춘들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책의 독자층이 점차 넓어졌다. 스님의 지혜와 현답(賢答)을 통해 위로를 느끼려는 독자들로 인해 혜민 스님, 법륜 스님, 정목스님 등의 ‘힐링 멘토’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방황해도 괜찮아>,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스님의 주례사> 등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힐링을 내세운 대표적인 브랜드는 sbs의 토크쇼 <힐링 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산속이나 친환경적인 스튜디오 안에서 유명인들이 세 명의 진행자와 대화를 나누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다. 힐링 캠프에 출연하여 사실상 대선 신고식을 치렀던 박근혜 당선인도 자신의 대선캠프를 ‘힐링캠프’라 불러달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되어 한국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도 대선 기간 중에 일자리와 복지정책으로 대표되는 ‘힐링 코리아 정책’을 제안했다. 대선이 끝나자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과 진보언론들은 대선 패배로 충격을 받은 이들을 위해 ‘힐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힐링이라는 단어가 현재의 한국 사회를 응축해 보여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힐링’의 범람 현상은 어쨌든 한국인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불안감이 그만큼 크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2000년대의 유행어였던 ‘웰빙’이 더 조화롭게 잘 살기 위한 대중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면, 2012년의 ‘힐링’은 더 잘 살고 싶기는커녕 받은 상처를 치료라도 하고 싶은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동안 살기는 더 팍팍해진 것이다.”[각주:1]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 ‘나’를 극복하기.

이처럼 먹고 살기 퍽퍽한 현실에서 대중들이 힐링을 원하고, 이에 따라 기업과 저술가들이 다양한 힐링 상품들을 생산하면서 힐링은 대세가 되었다. 실제로 영미권에서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불교 관련 서적이나 명상 서적들이 강세를 보여 왔다고 한다. 살기 힘들수록 사람들은 자아를 치유하고, 위로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자아의 치유와 위로를 통해 결국 ‘나’를 극복하는 것이 힐링이다. 이 빌어먹을 현실을 극복하려면 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힐링이다. ‘나’는 힐링을 위해 나의 서사를 고백한다. 나는 사업하다 부도가 났거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취직을 하지 못하거나, 나의 가족이 불행해진 이야기들을 남들 앞에서 풀어놓는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고통에 공감한다. 이 과정은 힐링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힐링 캠프>에 출연한 유명인이 즐거운 삶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한다고 생각해보자.(<힐링 캠프>를 <무릎팍 도사>로 바꿔도 좋다.) 그 사람은 힐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잘나 보이는 스타나 유명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에게도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진행자들은 그 슬픔에 공감한다. 나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리고 이에 대해 타인의 공감을 얻음으로써 ‘나’는 상처를 치유 받는다. <힐링 캠프>는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힐링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겪은 고통이 남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남들도 나만큼 힘들었고, 결국 어떤 이들은 그 고통을 이겨내고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나도 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청춘 멘토 김난도가 쓴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네가 지금은 아프지만, 청춘이란 원래 그런 과정을 겪는 거란다, 힘내.” “불안하고 흔들리지? 그게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야. 자연스러운 거야.” 혹자들은 김난도의 메시지가 “너만 힘드냐? 모두 다 힘들어! 혼자 힘든 척 하지 마!”라는 꼰대질 아니냐며 반발했지만, 많은 청춘들은 그가 던진 공감의 메시지에 힐링을 받았다.

더 나아가, 우리가 힐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내가 바뀌어야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는 스님 같은 멘토형 조언자의 힐링이 유행하는 풍토와도 연결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최근의 힐링 서적 열풍에 대해 “전통적인 심리치유서의 저자가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였다면, 최근엔 스님 등 ‘멘토형 조언자’가 다수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힐링의 주체가 더 이상 전문가가 아니라 ‘나’이며,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멘토형 조언자가 더 절실하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말한 사람은 <시골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의 저자 고은광순이다.

“과거 나의 화두는 사회에 대한 원망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였다. 그 책들은 그걸 어떻게든 고쳐보려는 몸부림이었다면, 이번 책은 우리들 자신의 내면의 에너지를 높이는 진화된 방법을 이야기한다.” “내 표정이, 내 에너지가 바뀌면 바로 저 사람이 달라진다. (중략) 많은 사람들은 고통의 원인을 '남편이 잘못해서, 시어머니가 잘못해서, 상사가 잘못해서'라며 타인에게 돌린다. 상대를 원망하고 그러면 내가 아프고, 다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악순환이다. (중략) 자기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내공이 높아지면 상대를 바꾸려고 하지 않게 된다. 부처나 예수가 누구 때문에 짜증내는 거 봤나. 나는 신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에서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누구나 부처처럼, 예수처럼 될 수 있다고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달라지는 것이다."[각주:2]

힐링이 위험해지는 순간들

혹자들은 나 자신을 극복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자는 게 뭐가 문제냐고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어떤 현실로 인해 상처받는다면 그 현실을 뜯어고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 힐링이 이러한 개혁의 필요를 내면의 변화라는 틀 안에 가둬버린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가장 위험한 사례는 지난 토요일 <한겨레>에 실린 법륜 스님의 글이다.[각주:3]

법륜 스님의 이 글이 공개된 순간 트위터나 인터넷상에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상담을 요청한 글에, 법륜 스님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성추행을 했다고 해서 몸이 더러워지는 게 아니라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몸이 더러워지는 거라면서 말이다.

힐링멘토로 불리는 법륜스님이 내세우는 논리, 즉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고, 모든 문제는 나를 극복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그의 논리는 힐링 열풍에 근저 하는 논리다. 그리고 그 논리가 성폭행 피해자의 상처를 힐링 한답시고 적용되었을 때 은폐되는 지점들이 있다는 점이다. 성폭력은 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가진 권력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법륜스님은 이에 대해 오히려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이다. 성폭력이 남성이 여성에 대해 가진 권력 때문에 발생하는데, 성폭력 피해자가 그 권력 중 일부인 가부장에 감사를 표하라고 말하는 셈이다. 아니면 “널 낳아주신 아버지인데 어쩌겠어. 그냥 네가 참고 이해해.”를 돌려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의 사례는 다소 극단적일 수 있지만, 힐링 열풍에 근저한 “문제의 원인은 나”라는 논리는 이처럼 현실에서 발생한 문제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어떤 이들은 종교인이 종교적으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법륜스님은 스님이기 때문에 불교 교리에 의거하여 상담에 응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종교인의 종교적인 이야기가 사회의 힐링 열풍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사상을 떠올려보자. 동양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처세술과 자기계발 서적들에 인용되고, 또 이용되어 왔다. 동양철학자 신정근은 동양철학에 대해 말하면 사람들이 처세술 밖에 떠올리지 못한다고 말한다.[각주:4] 이게 별로 문제없는 현상일까? 처세술이나 자기계발서적들이 왜 동양사상을 인용할까? 많은 사람들이 고전이나 오래되고 전통 있는 사상에는 진리와 지혜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이용해서 “당신도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말하는 게 처세술 서적들 아닌가?

종교인이 종교 교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도 마찬가지 효과를 지닌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힐링 열풍은 “문제는 너에게 있어. 자신을 극복해야 해.”라는 논리를 근저에 깔고 있으며 이는 현실의 진짜 원인을 은폐하는 위험한 효과로 기능한다. (법륜 스님의 사례가 이를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오랫동안 도를 닦은 종교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권위를 누린 종교의 교리를 통해 이 논리를 보충한다. 종교인이 종교적으로 말한 것에 불과하니까 문제가 없다고? 아니, 정반대다. ‘힐링’이 지닌 문제점들은 종교인이 종교적으로 말함으로써 더 심각해진다.

힐링을 넘어설 무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힐링을 넘어선 무언가다. 우리가 처한 위험과 위기를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극복하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내가 처한 현실이 모두가 공감할 정도라면, 모두가 힘을 합쳐 이 현실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

  1. 문강형준, "[크리틱] ‘힐링’이라는 돌팔이", 한겨레, 2012.8.31. [본문으로]
  2. 전두환은 부처" "히틀러는 천사" 그럼, 대통령은?, 프레시안 [본문으로]
  3. 아버지의 성폭행, 법륜 스님의 처방은?, 한겨레 [본문으로]
  4. 신정근, "동양고전은 왜 처세서로 읽히는가", <싸우는 인문학>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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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2.04 01:21

국정원 요원들을 다룬 드라마 <7급 공무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보기관 요원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아이리스2>도 곧 방영될 예정이다. 7급 공무원과 아이리스2 이전에도, 국가정보기관 요원들의 삶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는 많았다. 그곳에서 정보기관 요원들은 임무에는 냉철하지만 인간다운 매력을 풍기는, 하지만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멋진 요원들로 묘사된다.

나 알바 아니야, 정직원이야!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 눈앞에 있는 정보기관 요원들의 모습은 어떨까? 제 작년 초를 떠올려보자. 한국 무기를 구입하겠다며 방문한 인도네시아 외교사절단의 호텔방에 한국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숨어들어 노트북을 훔쳐보다 호텔직원에게 걸렸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정원의 허접한 일처리(?)와 무리한 임무수행을 질타했다.

최근 국정원이 다시 정치권과 언론의 중심에 있다. 국정원이 북한 간첩이라도 소탕한 걸까? 아니면 북한의 핵개발에 관한 주요한 정보라도 입수한 걸까? 아니다. 문제는 인터넷이다. 민주당이 대선을 전후로 국정원 여직원이 집권여당에 동조하고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글을 올렸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적 없다고 잡아뗐으나 수사를 통해 사실이 드러나자 국정원은 인터넷 상의 종북주의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보도를 통해 국정원 직원이 진보성향의 인터넷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 야당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무더기로 올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국정원은 “대북심리전 활동을 위해 글을 올렸다.”고 말을 바꿨다.

 

이 사건을 접하고 맨 처음에 든 생각은 “아니,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고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여론 선동을 하다니!”라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나.”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당이 최초로 의혹을 제기하며 국정원 직원의 집을 에워쌌던 날,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 바로 하루 전날에도 국정원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정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 않을 것이라 공식 발표했다. 두 가지 사건이 대비되면서 국정원의 무능함은 더욱 빛났다. 트위터에는 “인터넷에서 ‘너 알바지?’라고 물으면 기분 나빠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알바가 아니라 정직원이었구나.”라는 자조 섞인 유머가 떠돌았다.

종(從)북 vs 종(從)명박

이 사건이 황당하게 느껴지는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활동을 국가안보, 국익으로 포장하는 국정원의 가증스러움 때문이다. 국정원은 종북주의자들에게 인터넷과 여론이 조작당하지 않도록 대북심리전을 펼친 것이라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은 김정일과 김정은,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올렸다고 한다. 북한에 관련된 글이니 국정원에 이에 대해 개입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치자. 북한에 관한, 사실과 다른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자 국정원이 이에 대응한 거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정원 직원 김씨가 4대강 사업이나 무상보육 철회, 제주해군기지 철회 등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두둔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치켜세우는 등 이명박 정권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당 인사를 비판하고 박근혜 후보를 띄우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를 칭송하고 박근혜를 치켜세우는 게 종북주의에 대응하는 것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그리고 이게 왜 ‘대북심리전’일까?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고 박근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적이고, 한국의 적인 북한과 똑같은 놈들이라는 걸까?

대선 직전 <한겨레>는 전직 국가정보원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가정보원이 2011년부터 4대강 사업 등 국정홍보와 ‘좌파와의 사상전’을 내세워 심리정보국 산하에 안보 1, 2, 3팀을 설치해 ’인터넷 댓글 사업’을 전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국정원 엘리트 70명 ‘댓글알바…자괴감 느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65765.html) 이 인터뷰에서 전직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 4대강을 비롯한 치적홍보에 열을 올렸는데, 국정원에서도 처음에는 이런 정권홍보를 위해 조직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치적 홍보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홍보 활동을) 확장하게 되면서 야당 인사에 대한 비판 또는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에 반박 댓글을 다는 쪽으로 확장된 것이다”고 전했다.

이 인터뷰는 ‘국정원이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건 나쁘다’는 식으로 전개되었지만, 사실 치적 홍보 역시 ‘정치적 활동’에 가깝다. 특정 정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안보 관련 사항도 아닌 정부정책을 홍보하는데 왜 국가정보원이 동원되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홍보처를 통해 정책홍보를 하면 되지 왜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여론전을 하는 걸까? 이들은 특정 정권,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과 국익을, 특정 정치세력의 정권유지와 국가안보를 혼동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정권의 이익 및 안정과 국익, 국가안보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UN 안보리에 회부했을 때의 일이다.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건 관련 정부 발표문에 대한 의문점을 UN안보리에 서한으로 발송했다. 청와대와 보수언론은 참여연대를 난타하며 어느 나라 국민이냐고 물었다. 그 때 어김없이 국익논리가 등장했다. 한국 정부의 발표에 반박을 제기하는 주장을 한 것이 국익을 해친다는 것이다. 정부발표에 의혹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게 국익을 해친다고? 국익을 해치는 게 아니라 ‘이명박 정부’가 욕을 먹는 것이 아닌가?

국방부가 나꼼수 등 정부 비방 팟캐스트를 듣는 군인들의 스마트폰을 조사하고, 삭제 조치한 일도 있었다. 군인들이 지키는 건 국가이지 특정 정권이 아니다. 나꼼수 듣는다고 종북이면, 나꼼수를 못 듣게 한 국방부는 종(從)명박이다.

‘정권 유지’라 쓰고 ‘국익’이라 읽는다.

이명박 정부만 이렇게 해괴한 국익 논리를 내세운 건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벌어진 황우석 사태를 떠올려보자. 황우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 (PD수첩을 비롯한) 언론은 정치권은 물론 온갖 ‘국민’들의 물리적, 정신적 협박에 시달렸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은 황우석을 비난하는 건 국익을 해치는 것이라 주장했다. 유시민은 "언론의 자유가 판을 쳐서 악취가 난다"는 말까지 했다. 국익이 침해되는 게 아니라 황우석을 밀어주고 줄기세포 사업을 추진한 정부의 공이 사라지기 때문에 정당한 의혹제기를 막은 게 아닌가? 만약 황우석에 대한 의심이 전혀 제기되지 않다가 나중에 황우석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은 개망신을 당했을 것이고 세계인들의 안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국익을 침해한 걸까?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국정원의 모습도 유사하다. 정권 유지를 위해 봉사하면서 이를 국익과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정권 유지라 쓰고 국익이라 읽는다. 경찰이나 검찰 등 다른 국가기관이라고 다를까? 보수우파들은 언제나 그들이 하는 일에 국익, 국가안보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국익은 누구를 위한 국익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안보는 누구를 지키기 위한 것일까. 국정원은 ‘대북심리전’을 한답시고 정권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쳤다.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는 국정원은 아마 그런 네티즌들은 국민도 아니고, 지켜야 할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안보가 많은 사람들을 지켜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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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28 09:56

지난 주 언론이 ‘국제중’ 논란으로 들썩였다.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의 아들이 최근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으로 서울 강북구 영훈 국제중학교에 입학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훈 국제중에 따르면 이 부회장의 아들(13)이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에서 ‘한부모 가정의 자녀’라는 자격으로 응시했고, 최종 합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겨레나 경향 같은 진보언론은 물론 조선일보, MBC, KBS까지 비판에 나섰다. 입학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는 의혹과 저소득층 자녀도 국제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마련한 ‘사회적 배려대상자’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대다수였다.

삼성의 이건희도 보편적 복지의 수혜자!?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논란의 핵심에는 ‘평등’이 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 논란 속에서 우리는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보편적 복지가 넘어서야 할 거대한 산과 마주한다. 바로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가장 강한 논리-부자들한테 뭐 하러 그런 걸 해주냐-를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경향신문이 이와 관련해 중요한 점을 잘 지적했다. <경향>은 1월 22일 기사에서 이 부회장 아들의 국제중 입학에 관련된 논란을 보도하며, 사회 일각의 비판을 소개했다. “영훈국제중의 경우 2011학년도부터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경제적 배려 대상자와 비경제적 배려 대상자로 나누고 한부모 가정 자녀 요건에서 ‘저소득’ 조건을 제외시켰다. 이 부회장과 임세령 대상그룹 상무는 2009년 이혼해 아들이 ‘한부모 가정의 자녀’로 사회적 배려 대상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날 포털사이트 등에서는 ‘재벌 자녀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여기서 기사가 끝났다면 다른 언론의 보도와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경향>은 논쟁이 될 만한 화두를 던지며 기사를 마무리한다. “반대로 ‘정서적 약자’까지 배려하자는 제도의 취지로 볼 때 ‘부자는 한부모 가정 자녀라도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라는 시각은 편협하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이혼 가정의 자녀가 느끼는 상실감은 빈부를 떠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논쟁은 보편적 복지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보편적 복지 찬성론자들은 그동안 이건희 회장의 손자(이 부회장의 아들)도 무상급식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해왔다. 같은 맥락에서 이 부회장의 아들도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영훈 국제중에 입학할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경향>이 지적한 것은 한국에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처한 난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회장의 아들이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국제중학교에 입학한 것이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이야기하며, 이것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몇몇 언론은 “법적이고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을 지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국민정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많은 사람들이 부자의 자식들에게 뭐 하러 밥을 주냐고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이건희 같은 부자 노인들이 지하철에 공짜로 타면 안 된다며 노인 무임승차에 반대하며 돈 많은 집안 자식들까지 등록금을 안 내고 학교에 다니는 건 부당하다며 보편적인 반값등록금에 반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대가 진보진영이 주장한 보편적 복지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이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복지를 둘러싸고 여권과 야권은 각각 선별적 복지 vs 보편적 복지의 입장에 서서 대립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어떤 복지에 더 찬성할까? 지난 1일 <경향>의 보도에 따르면 국민의 68.7%가 대학 등록금을 소득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것에 찬성했다. 소득과 무관하게 반값등록금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29.6%만이 찬성 의견을 냈다. 대선 전 서울권대학언론연합회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 조사의 결과도 비슷했다. 박근혜에 대한 대학생의 지지는 18%로 문재인/안철수에 비해 낮았지만, 박근혜의 정책에 대한 지지는 꽤 높았다. 등록금, 대학교육지원의 항목에서 박근혜의 정책이 문재인/안철수의 그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학생들조차 무조건 보편적으로 뭘 해주겠다는 공약보다 소득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우하겠다는 정책을 더 지지한 것이다.

이는 보편적 복지를 주장한 진보진영이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다. 많은 국민들이 한국 최고의 갑부인 이건희 가족이 왜 복지의 혜택을 누려야 하는가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새누리당과 보수진영은 복지에 관한 의제가 등장할 때마다 이러한 논리로 맞섰다. 보편적 복지=부자 복지라는 것이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이런 의문에 대처할 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건희와 서민인 ‘내’가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게 ‘평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가 서민인 ‘나’에게 복지와 혜택을 집중하는 것이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부회장 아들이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국제중에 입학한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한부모 가정의 자녀라는 이유로 입학한 것”이라며 “한부모 가정의 자녀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정서적 약자라는 게 이 제도의 취지”라고 밝혔다. 부자건 가난한 자건 정서적 약자이므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코웃음을 치는 것은 쉽지만, 보편적 복지를 내세우는 입장(이건희 아들이건 서민의 아들이건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이라면 이 사안에 대해 단순히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어떻게 배려 대상자가 되냐.”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 복지의 반대자들은 똑같은 논리로 무상급식, 무상의료, 보편적인 반값등록금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밥을 공짜로 주냐. 그렇게 돈 많은 사람에게 왜 공짜로 등록금을 주냐.” 등등.

 

평등을 다시 사유하기

몇몇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번 논란에 대해 이 부회장의 아들이 입학하는 과정에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한겨레>는 보도를 통해 “영훈국제중이 2013학년도 입학전형에서 입학전형위원회 위원 가운데 외부 위원을 단 한 차례도 입학전형 절차에 참가시키지 않은 채 신입생을 선발해 관련 지침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물론 입학 부정은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입학 부정이 없이, 규정에 따라 공정하게 입학이 진행되었다고 한들 논란이 없었을까? 국민들은 이건희의 손자가, 이재용의 아들이 사회적 배려대상자에 해당한다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이 그 취지와 맞지 않게 왜곡되었다는 비판은 또 어떤가? KBS는 23일자 뉴스광장에서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은 국제중 도입 당시 주로 저소득층을 위해 마련됐다.”는 전교조 관계자의 말을 전하며 “사회적 배려 대상자의 상당 부분이 배려 대상의 입학 전형이라기보다 특례를 받은 입학 전형의 성격으로 변질됐다”고 보도했다. MBC도 22일자 뉴스데스크에서 “법과 절차상 문제는 없었지만 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부모 가정의 요건을 충족시키더라도 소외계층을 배려한다는 취지에 걸맞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도의 취지를 살린다고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가 실현될 수 있을까? 국제중학교의 성격에 대해 알아보자. 국제중은 일반 중학교와는 달리 국제 관련 교과 수업을 특화해 대부분의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는 특성화 중학교다. 국제중은 특목고로 진학하는 관문이라는 이유로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사회 고위층 자녀들의 인맥 관리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학비만 900만원이 넘고 수학여행 경비만 24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계속 사교육을 받아야 하므로 사교육비도 만만치 않게 든다.

이런 학교에 ‘사회적 배려 대상자’를 도입한들 저소득층이 입학할 수 있을까? 입학한다 해도 차별과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공부할 수 있을까? 실제로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입학한 학생들이 하위 성적과 저소득층이라는 딱지로 인해 인격적 모독과 정서적 위화감을 느끼고 전학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애초에 학교 자체를 귀족학교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저소득층을 배려하는 입학전형을 마련한다고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이건희의 손자가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국제중에 입학했다는 사실에 분개해야 하는 게 아니라, 국제중 같은 학교가 있다는 것 자체에 분개해야 한다. 부모의 신분에 따라 아이들을 구별 짓기 하고, 다른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 자체에 분개해야 한다.

진보진영의 보편적 복지가 내세워야 하는 것은 이 같은 ‘평등’의 가치이다. 이건희도 나도 똑같은 사람이며 똑같은 권리와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는 한 보편적 복지는 대중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무상급식 논쟁을 떠올려보자. 많은 부유층이 무상급식에 반대했다. 새누리당의 주장대로 무상급식이 부자급식이라면, 본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무상급식에 왜 부유층이 반대했을까? 무상급식이 ‘평등’을 내세우며 구별 짓기를 거부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부모가 누구건 무상급식은 ‘똑같은’ 밥을 준다. 그리고 그 밥은 부모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속한 공동체가 제공하는 밥이다. 부자들은 이러한 평등의 가치에서 불편함을 느껴 무상급식에 반대한 게 아닐까? 무상급식은 능력에 따라 차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우파의 가치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몇몇 어른들은 “애들 밥 먹이는 거 가지고 정치싸움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상급식은 단순히 아이들 밥 먹이는 문제가 아니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둘러싼 중요한 정치쟁점이다.

진보진영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고 이를 통해 보수 진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 이처럼 평등이라는 개념을 다시 사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제중의 존재는 인정하되 저소득층도 국제중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평등’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제중의 존재 자체가 평등이라는 가치에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러한 평등의 가치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해야 한다. 이런 고민 없이 ‘무상’ 노래만 부르다가는 보수 진영한테 다시 패배하고 말 것이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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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21 02:29

 


레미제라블 (2012)

Les Miserables 
8.3
감독
톰 후퍼
출연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아만다 사이프리드, 앤 해서웨이, 헬레나 본햄 카터
정보
드라마, 뮤지컬 | 영국 | 158 분 | 2012-12-18

 

‘레미제라블’ 열풍이 무섭다. 벌써 500만 관객을 넘겼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언론에서는 레미제라블 열풍을 해석하기 바쁘다. 대선이라는 정치적 국면과 영화 개봉이 맞물리면서 야권 지지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 대선 패배로 인한 상처를 치유 받았다는 분석이 대다수의 견해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함을 참을 수 없었다. 영화 속 거의 모든 대사는 노래인데, 몇 몇 배우들이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물론 이런 단점쯤이야 내가 뮤지컬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 치부할 수 있다. 현장 녹음이라는 도전정신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을 참지 못했던 건 단지 배우들이 뮤지컬 영화를 소화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힐링 포인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예컨대 나는 다른 관객들이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지목한 부분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친구들은 영화 마지막에 배우들이 합창을 하는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합창 장면에서도 일말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내 감수성이 메말라 버린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

나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예술이나 영화를 보는 ‘감수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국민 영화’였는데, 누가 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주인공이 달랐다. 50-60대의 보수적인 남성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연산군(정진영 역)이라고 생각했다. 연산군이 ‘왕’이고, <왕의 남자>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로맨스와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10대 20대 여성들은 공길(이준기 역)이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왕의 남자라는 소재를 제공한 장본인이자 이야기와 사건의 중심에 공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에 연산군과 공길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왕의 남자의 주인공은 장생(감우성 역)이었다. 연산군과 공길이 벌려놓은 일들을 다 수습하고, 결국 책임을 진 사람이 장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떤 일이든 그 일을 묵묵히 처리하고 뒷수습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한다는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물론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당연히 장발장이다. 나도 어렸을 적 빵을 훔쳤다가 감옥에 갇힌 장발장 이야기는 알았어도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영화를 관람한 많은 이들도 장발장 캐릭터에서 매력을 느끼고, 장발장이 당연히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범죄자였지만 시장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오른 장발장에게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판틴과 코제트를 돕는 장발장에게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자베르 경감에게서 강한 매력을 느낀다. 자베르는 ‘법의 수호자’다. 그는 소란과 변화가 아니라 체제의 안정을 갈구하는 도시의 수호자다. 영화 속 자베르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신념을 노래한다. 마치 판옵티콘의 감시자 같은 모습이다.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자베르가 던지는 메시지를 매우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장발장이 위기에 처한 자베르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나 자베르는 장발장을 돕거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힘없이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범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자, 신념을 위해 신념을 흔드는 자신을 버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인공은 꼬마 가브로슈와 에포닌이다. (가브로슈와 에포닌은 원작 레미제라블에서 남매로 등장한다.) 가브로슈는 끝없이 흔들리는 ‘어른’들과 달리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혁명에 가담했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나는 가브로슈가 총에 맞는 순간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강남좌파(?) 마리우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혁명에 가담하고, 그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에포닌의 모습 역시 정말 감동적이었다.

 

용서와 구원의 드라마??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지루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장발장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망이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상징하는 것은 용서를 통해 구원받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삶이다. 죄를 짓고 도망치던 장발장은 마리엘 주교의 용서와 관용 덕분에 마들렌이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쫓겨난 판틴과 마주하고, 이제 그녀의 삶을 구원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판틴은 금방 죽고, 장발장은 판틴의 삶 자체였던 코제트를 구원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코제트의 삶이 되어버린 마리우스를 구원하기 위해 혁명의 현장에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적수인 자베르를 만난다. 자베르는 자신을 죽이라 말하지만 장발장은 그를 용서한다. 그리고 죽음의 현장에서 마리우스를 구해낸다. 마침내 자신이 구원하려 했던 판틴이 장발장의 눈앞에 나타나 그에게 ‘토닥토닥’ 해주자 장발장은 만족한 듯 세상을 떠난다.

나는 주인공 장발장의 인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용서와 구원이라는 메시지에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는 과연 레미제라블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많은 이들이 레미제라블을 보고 난 뒤 “빵 훔친 거 가지고 19년이나 감옥에서 산 건 너무 하다.”라는 평을 남겼다. 배고픈 조카들을 먹이려고 빵 하나 훔친 건데, 그 정도는 ‘관용’으로 넘어가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다. 장발장 역시 사회의 굶주린 자들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판틴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사정을 좀 봐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자베르는 이와는 반대로 딱한 사정을 하나 둘 씩 봐주다보면 법은 지켜질 수 없으며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원칙주의자다.

장발장 식의 온정주의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다. 굶주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온정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온정으로 인해 사회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가려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당대의 프랑스가 빵 하나 훔친 사람을 19년간이나 부당하게 가둬놓는 사회였다는 점에 분노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당대의 프랑스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 하나 구할 수 없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범죄의 근원인 빈곤을 없애려 하지 않고 범죄‘자’만 때려잡는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장발장 식의 온정주의에 그친다면, 자베르 같은 우파들의 반론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조선일보 문화부장 박은주는 장발장의 19년 옥살이가 부당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18/2013011802332.html)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불쌍하다고 봐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법에게 선처를 요구하고, 온정을 요구하지만 과연 누구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자베르나 조선일보 같은 우파들은 누구에게는 온정을 베풀고 누구에게는 가혹할 경우 법은 법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물론 조선일보의 논조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재벌과 가진 자들의 온갖 불법에는 입 다물거나 국익을 위해 선처하라고 말하면서 빵 하나 훔친 거 가지고는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작자들이니 말이다. 이것들에겐 우파라는 호칭도 아깝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왜 하필 구원의 대상이 판틴인가? 왜 하필 코제트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왜 장발장은 하필 판틴을 구원하고, 코제트를 구원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구원 받는 것일까?

혁명이란 모두를 구원할 새로운 ‘원칙’을 만드는 것

급진적인 청년들이 장발장 식의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혁명을 시도했다. 법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 법에 맞서 ‘모두’를 구원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민중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그것은 민중들이 개인의 구원, 온정을 더 욕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음을 동반해야 할지도 모르는 급진적 변화보다 개인적인 구원과 온정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가브로슈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에서도 원칙대로 행동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목숨을 버린 이유는 성공할 혁명의 ‘매개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자베르는 죽은 가브로슈의 가슴에 자신의 훈장을 달아준다. 가브로슈는 자베르가 첩자로 혁명군 안에 숨어들었을 때 그의 정체를 폭로해 그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가브로슈를 인정했다. 그 이유는 자베르와 가브로슈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신념을 위해 목숨도 던질 수 있는 인물들이다. 자베르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해서 가브로슈에게 기꺼이 자신의 훈장을 내어준 게 아닐까?

에포닌의 죽음 역시 온정주의자 장발장 가족의 구원과 대비되며 더욱 돋보인다. 마리우스는 사랑 때문에 혁명을 포기하려 했지만 에포닌은 사랑 때문에 혁명에 동참했다. 장발장은 딸을 위해 마리우스를 구출하고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결혼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장발장도 둘의 행복한 모습을 뒤로 한 채 구원받으며 숨을 거둔다. 반면에 에포닌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구원이 아니라 총을 선택했고, 마리우스를 지키고 숨을 거둔다.

이 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7년 만에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민중 혁명이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레미제라블 속의 혁명을 실패가 아닌 ‘미완’으로 여기고, 결국엔 혁명이 성공한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가브로슈와 에포닌이 동참한 혁명이 뒤이어 일어날 혁명의 매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온정주의나 개인적 구원보다는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에 목숨을 던졌기 때문이다. 내가 장발장이 아니라, 미완의 혁명을 주도한 혁명가들을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꼽는 이유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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