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31 20:37

북-미 간의 갈등과 남북 간의 긴장이 갈수록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외국인들이 보면 한반도는 당장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이어진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 키 리졸브 훈련 등을 통해 남북한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엊그제 미국의 B-2 스텔스기가 한반도에 진입해 폭격 훈련을 벌였고, 그러자 북한은 ‘사격 대기 상태’와 ‘핵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최후통첩’으로 맞섰다.

언론은 연일 한반도가 당장 전쟁에 휩싸일 것처럼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보수 언론들은 노골적으로 전쟁을 부추기거나 마치 곧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위기감을 조성한다. “전쟁을 결심해야 전쟁이 없다”, “북이 미사일 쏘면 피해 없어도 상응 조치”, “북, 돌격명령만 남아”, “10배 이상 응징” 등의 살벌한 말들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다. 북한의 <로동신문>도 ‘최후 결전’과 ‘보복’을 외치며 전쟁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전쟁 위기에 대해서는 신나게 떠드는 언론들한테 어떻게 하면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난 30일 언론은 앞다투어 북한이 공개한 한 장의 사진에 대해 보도했다. 북한은 29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긴급 작전회의를 주재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그 사진에는 ‘전략군 미본토 타격계획’이라는 제목의 작전 계획도와 북한군 주요 전력이 나와 있다. <조선일보>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작전 계획과 주요 전력을 노출해 미국과 한국을 위협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중앙일보> 역시 미 본토 타격 능력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기 위해 비밀스러워야 할 회의 내용까지 의도적으로 연출했다고 보도했다. 두 신문 외에도 많은 언론들이 이런 식으로 북한이 연출된 쇼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에는 북한이 연출을 한다는 비웃음만 있을 뿐 전쟁 위기로 치닫는 한반도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북한의 강경 대응이 만일 연출된 것이라면 오히려 실제 전쟁 위협이 낮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북한이 실제로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으며 협상하자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언론은 한반도 전쟁 위기에 대해서 보도할 뿐, 평화와 타협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언론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북한에 비웃음밖에 날리지 못하고 있는 현상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김정은이 애플 아이맥을 사용한다는 내용의 조선일보 단독 보도였다. 조선일보는 북한이 미제와 전면전을 벌이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미국산 컴퓨터를 쓰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런 식으로 북한을 희화화하고 깔아뭉개기나 할 줄 알지 저 예측하기 힘든 북한을 상대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언론의 사회적인 역할은 사람 몸에 비유하자면 혈관이다. 몸에서 아무리 피를 잘 만들어도 혈관이 피를 잘 옮기지 못하면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언론은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이슈에 대해 알고, 또 고민할 수 있도록 사회에 필요한 목소리를 유통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북한 문제와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는 언론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제 한반도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잘 알고 있다. 또 북한이 이상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집단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제 평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그 이야기가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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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01 16:11

대형 입시업체 메가스터디의 ‘우정파괴’ 광고가 인터넷 세상을 들썩였다. 2013년 새 학기를 앞두고 메가스터디가 시내버스 등에 게재한 광고가 인터넷에 올라오며 논란이 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많은 네티즌들과 언론은 이 광고에 대해 “시험 잘 보려고 친구를 버리라는 말이냐.”며 메가스터디가 비도덕적이고 비교육적인 내용을 선전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우리는 메가스터디에 대한 비난을 넘어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정 혹은 친구 간의 인간관계와 같은 가치들과 ‘공부’를 대립 항으로 설정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라는 말은 사실 이미 교육현장에서 많은 교사들이 해왔던 말이 아닌가? 고등학교 때 교사들이 전교생을 강당에 집합시킨 적이 있다. 그 때 교사들은 좋은 대학에 가려면 연애도 하면 안 되고 쉬는 시간에 애들이랑 잡담도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럴 시간에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고 영어단어 한 개라도 더 외우라는 말이었다. 고3때 친구들이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 농구를 하자 학생주임이 와서 혼쭐을 냈다. “고3이 무슨 농구를 하느냐, 공부나 더 해라.” 야자 시간에 잠깐 밖에 나와 친구들하고 잡담을 했는데 담임이 나를 따로 불렀다. “너 그렇게 애들이랑 어울리다 성적 떨어진다.”

  인간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훌륭한 공부가 아닌가? 왜 선생들은 교실에 짱 박혀 문제 푸는 것 외에는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한국의 교실에서는 친구들끼리 협동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공부로, 교육의 일환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 불만을 가지면 어른들은 “대학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가? 학점을 잘 받으려면 서로 경쟁해야 되고 좁은 취직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현실이 20대가 정치.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현상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의 20대에게는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게 아닐까? 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취업이나 알바 등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쉽게 살아가려면 ‘함께’ 요구함으로써 이 사회를 바꿔야 하는 데도 말이다.

  한국사회는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 때부터 학생들에게 나 혼자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친다. ‘공부’는 홀로 자기계발을 하거나 문제집을 푸는 좁은 의미로 한정된다. 메가스터디의 광고가 표현하고 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이처럼 개개인이 갈기갈기 찢겨진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들은 정치. 사회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에만 몰두하게 된 것이 아닐까?

  공동체는 공동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개인들을 통해 성립할 수 있다. 개인들이 더 이상 공동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재생산에 실패하고, 파편화된 개인들만 남는다. 이것이 우리가 교육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한겨레>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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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27 22:22

도서정가제에 던지는 질문

나는 책을 몇 권 쓴 ‘저자’다. 내가 첫번째 책을 썼을 때 인세로 책 정가의 10%를 받았다. 출판사 편집자는 “나머지 90%를 출판사가 다 가져가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출판업계의 유통구조가 복잡하다는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의 ‘도서정가제’ 논란을 보니 단순히 유통구조가 복잡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책이 정가가 아니라 할인된 가격으로 팔리다 보니 저자의 인세 비율을 높게 책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최근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도서정가제는 책의 판매가격을 정해놓는 제도다. 이는 대형 유통업체와 달리 박리다매로 책을 팔지 못하는 영세 서점들과, 책을 만들어내고도 제값을 받지 못하는 영세 출판사들을 살리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 내용은 발행 1년 이내의 간행물(신간)에 대하여 정가제를 적용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판매되는 경우 10%까지만 할인판매를 허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서정가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예외 대상이 워낙 많을뿐더러, ‘신간’의 규정이 발행한 지 18개월로 범위가 넓어지면서 도서정가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도서정가제를 강화하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출판업계와 유통업계가 난타전을 벌이고 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은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고 소비자들의 반대서명을 받았다. 책을 싸게 살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에 출판업계는 책은 일반적인 소비재로 보기 힘들며, 영세 출판업계의 도산과 출판시장의 다양성이 침해되는-정가제 대상이 아닌 할인율 높은 도서만 판매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도서정가제가 필요하다고 맞서고 있다. 급기야 도서출판 창비가 알라딘에 책을 공급하지 않겠다고 나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는 출판업계의 입장에 더 공감한다. 도서정가제로 인해 출판시장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건 사실이다. 또한 책이 싸게 팔리는 게 꼭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출판사가 할인 가격을 고려해 책의 정가를 높게 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리 한쪽 편을 들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첫째, 도서정가제의 혜택을 본 건 알라딘 같은 유통업체뿐인가? 출판사들도 도서정가제의 혜택을 본 건 아닌가? 영세 출판사들이야 손해를 보았다지만, 대형 출판사들도 그럴까? 홈쇼핑을 틀면 대형 출판사의 책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되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책을 싼 가격에 팔 수 없는 영세 출판사들은 도산하고 대형 출판사들이 파이를 독식하는 사태가 온 건 아닌가? 도서정가제를 통해 출판시장의 ‘갑’이 된 건 유통업체뿐일까?

둘째, 도서정가제를 실시한다고 동네 서점과 영세 출판사가 살아날 수 있을까? 기업형 슈퍼마켓(SSM) 규제와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통시장을 위해 기업형 슈퍼를 막아야 하지만, 기업형 슈퍼가 없다고 전통시장이 살아나는 건 아니다. 전국의 책값이 모두 똑같다고 대형 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을 찾던 이들이 동네 책방을 찾을까?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더욱이 도서정가제가 없어진다고 영세 출판사들이 살아날 것 같지도 않다. 실용서나 참고서 외의 책은 잘 읽지 않는 현실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독서 인구를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노동시간은 길지만 책은 보지 않는, 교육열은 높지만 책은 읽지 않는 사회가 한국이다. 공공도서관은 10만명당 한 곳에 불과하다. 책 읽는 문화가 발달해야 도서정가제 강화가 출판시장의 활기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도서정가제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윤호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저자

 

<한겨레>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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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10

2012년 마지막날의 글이다. 나는 이번만은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힘들 것 같다. 죽음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이운남 조직부장, 청년노동활동가 최경남,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지부 이호일 지부장, 이기연 수석부지부장. 이들이 연달아 죽음을 맞이했다. 이들은 자본권력의 노동자 탄압에 맞서고, 자본권력의 탄압을 방조하는 정치권력의 폭력에도 맞서며 현장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들이다. 이들의 죽음은 ‘희망’이 사라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 죽음의 행렬을 막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23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잇따른 죽음을 목격했다. 이런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이러한 비극을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첫째도 연대이며 둘째도 연대이며 셋째도 연대이다. 연대를 통해 노동자와 활동가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죽음을 선택할 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연대를 통해 우리가 이루고 싶은 변화(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손배가압류 철폐’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는 한 단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손배가압류란 손해배상 청구소송 및 재산가압류의 줄임말이다. 사용자(자본가)가 노동자의 파업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다며 제기하는 민사소송과 그 소송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재산가압류라는 행정집행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가 65억원에 달하는 사쪽의 손해배상 청구와 재산가압류에 저항하며 분신자살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도 사쪽의 구조조정과 150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를 철회하라며 고공농성을 벌이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기업이 노조나 노동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액수가 지난해 7월 기준으로 700억100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가압류 신청 금액도 지난해 기준 160억4900만원이다. 최강서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한진중공업 사쪽의 손해배상 청구액은 158억원이다. 이운남을 비롯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현대차 사쪽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액은 116억원이다. 노동자들이 평생을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돈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손배가압류는 사쪽의 사유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손배가압류와 마주한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싸움을 포기한다. 사쪽 관리자들은 사표를 쓰면 소송을 철회하겠다며 노동자들의 입을 막고, 까불면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막는다.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가마저 노조와 노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한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공세 앞에 노동자들은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박근혜 당선인이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고 한다. 민주주의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누구에게나 보장하는 사회를 뜻한다. 따라서 재벌개혁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와 서민에게 경제를 통제하고 결정할 힘이 있어야 진정한 경제민주화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본의 탄압에 맞설 방어적 무기인 노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자본과 국가권력은 손배가압류라는 무기를 통해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짓밟는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손배가압류를 없애고, 노동권을 보장받는 사회로 나아가자. 그리고 노동자와 서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경제민주화’로 나아가자.

 

<한겨레>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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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10

‘꿈: 대통령.’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은 아이들이 장래희망으로 대통령을 꼽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쁜 사람을 혼내주기 위해 높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대통령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곧 그 꿈을 포기했다. 대통령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수백명의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언론플레이의 달인들이었다. 옆집 아저씨, 윗집 아주머니 같은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옆집 아저씨와 윗집 아주머니를 대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들이 대변하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정치인 노무현을 좋아했다. 그 사람은 옆집 아저씨 같았다. 말을 빙빙 돌려가며 책임 회피 하는 다른 정치인들과도 달라 보였다. 그의 솔직한 말을 들으면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서 노무현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서민과 노동자가 아니라 부자와 자본가 편에 섰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기는 서민 편이라고 우겼다. 노무현의 팬이었던 나는 노무현 정부의 행동 없는 말의 향연에 지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대통령이라는 꿈을 포기했다. 아무리 신념 있는 사람이라도 대통령이 되면 막상 다 똑같아지는구나. 아무리 대통령에게 막강한 힘이 있어도 기득권을 깨뜨리는 건 역부족이구나.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다. 가끔 나는 대통령이 선출된 ‘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백성을 가엾이 여기는 성군을 뽑기 위해 투표장에 나오는 게 아닐까?

 

올해 대선은 박근혜 대 문재인의 양자구도로 진행될 것이다. 박근혜와 문재인이 대표하는 것은 박정희와 노무현이다. 이번 대선은 권위, 국가주도의 발전, 반공을 상징하는 박정희와 탈권위,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 평화를 상징하는 노무현의 대결이다. 두 가지 가치는 매우 다르지만, 두 가지 가치의 지지자들은 똑같이 ‘성군’을 꿈꾸는 게 아닌가?

 

박근혜 지지자들은 대부분 박정희를 떠올리며 그의 딸이자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를 지지한다. 박근혜 지지자들에게 박정희는 반인반신의 영웅이며, 오늘의 한국을 만든 신화다. 그리고 박근혜는 이 신화를 계승하여 흔들리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성군이다.

 

문재인을 지지하는 야권 지지자들은 어떤가? 이 ‘깨어있는 시민’들도 사실 성군을 바라는 게 아닐까? 기득권과 한국의 보수파를 박살내고 국민을 대변해줄 정상적인 국가! 광해와 정조대왕을 보며 노무현을 떠올리는 이들 역시 ‘어게인 2002’, ‘돌아와요 노짱’을 연호하는 것이 아닐까? 가치와 방향은 다르지만, 박빠와 노빠한테는 공통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요구가 보인다.

5년 전의 이명박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면 주가를 올리고 747을 이뤄내겠다고 큰소리쳤다. 세상에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경제가 살아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일까? 마찬가지로,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오고 내가 바라는 국가가 나를 대변해줄 거라는 게 올바른 생각일까?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누구를 지지하든 그건 유권자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메시아를 꿈꾸며 누군가를 지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메시아가 아니라 나만이, 그리고 ‘나’들이 연대한 우리만이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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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09

나는 사회에 불만이 많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이나 몇몇 친구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바꿀 수 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냥 참으라는 말을 참 어렵게도 하시네요”라며 발끈했다. 그러나 나는 최근에야 이 말이 굉장히 슬픈 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많은 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관심과 냉소의 벽을 뚫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현대차 울산공장의 송전탑에 두 명의 노동자가 올라가 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해고당한 최병승과 현대차 비정규지회 사무국장 천의봉이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현대차가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라는 것이다. “2년 이상 근무한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불법파견에 해당하므로 현대차의 정규직”이라는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현대차가 책임지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법을 지키라’는 당연한 말을 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이 추운 날 송전탑에 몸을 묶은 채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자본의 부당한 횡포와 이 횡포를 방관하는 국가에 저항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했다. 사측의 부당해고에 저항하기 위해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은 철탑에 올라야 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도 표준운임제와 운송료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철탑에 올라야 했다. 사측의 부당해고에 맞서 한진중공업의 해고노동자 김진숙도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랐고, 굶다 쓰러졌으며 몸에 시너를 끼얹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누군가가 목숨을 걸어야 그 사람을 한번쯤 쳐다보는 사회다. 아니, 여전히 그런 이들 앞에서 경영상의 위기나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들먹이고 ‘기업이 살아야, 국가경제가 살아야 니들도 살지’라고 말하는 사회다.

 

대선을 앞두고 대선주자들과 정당들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한다. 법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재벌과 대기업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서로 소리친다. 그렇게 자신 있거든 있는 법도 무시하고, 대법원 판결도 무시하는 현대차한테 본때를 보여주길 바란다. 대선주자들은 하나같이 대기업과 재벌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렇게 자신 있거든 현대차부터 엄벌에 처하길 바란다.

 

대선주자들이 그런 행동을 보이지 않은 채 대선공약으로 비정규직 철폐, 경제민주화, 복지를 내세운다면 이는 결국 ‘네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세상을 바꿔’의 다른 버전이 아닌가? 대통령 시켜주면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은 훌륭한 인품과 결단력을 지닌 누군가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만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누군가가 굳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아도, 아래에 있는 우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이다. 노동자들은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송전탑에, 크레인에, 철탑에 올랐다.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분신 투쟁에 대해 ‘죽음으로 말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나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정말 그 시대가 끝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있다. 저 위에 사람이 있다. 자리 말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보자. 그리고 노동자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하는 이 시대를 이만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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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09

지난 4일 가수 싸이의 공연을 보러 서울광장에 8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남스타일’을 ‘떼창’하며 축제를 즐겼다. 눈에 띄는 전광판 하나가 싸이의 공연을 보도하는 방송국 카메라의 언저리에 잡혔다. ‘재능교육’. 8만명의 시민들이 즐거운 축제를 즐기러 서울광장에 찾아왔을 때,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이 서울광장 맞은편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농성중이었다. 1735일째의 농성이다.

 

그들은 왜 1700일이 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게 된 것일까? 학습지 교사들의 요구는 임금인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노동자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학습지 교사들은 학습지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특수고용직이다. 특수고용이란 사용자가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등록하도록 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업자화하여 근로계약 대신 위탁, 도급 등의 계약을 체결하고 일을 시키는 형식의 고용형태를 말한다. 즉 특수고용직은 개인 사업주, 사장이다. 기업들이 이 개인 사업주와 일대일로 계약을 맺는다. 기업은 월급이 아니라 수수료, 수당을 지급한다. 현재 학습지 교사뿐만 아니라 화물노동자, 덤프트럭 기사, 레미콘 운송차주, 간병인, 택배기사, 애니메이터, 에이에스(AS·애프터서비스) 기사 등이 특수고용직으로 분류된다.

 

특수고용직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도 보장받지 못하며, 산재보험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재능교육은 회원을 늘릴수록 수당을 더 받을 수 있으니 좋은 거라고 주장했으나 학습지 교사들의 노동조건은 매우 불안정해졌다. 재능교육은 틈만 나면 수수료를 낮추려 했다. 교사들은 회원을 늘리기 위해 유령회원을 만들고, 자신의 돈으로 회비를 대납한다. 학업성취가 뛰어난 학생들에게 주는 스티커나 기타 학생관리비용도 모두 교사들이 부담해야 한다. 사업주니까.

 

재능교육 교사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사측과 단체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재능교육은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능교육은 교사들에게 돌아가는 수수료를 삭감하려 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은 노조원들이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조합 활동으로 해고된 교사들의 복직과 노조 인정이다. 현재 전국에서 58만~200만명의 특수고용직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특수고용직 문제는 결코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수많은 비정규직이 있다. 프리랜서 에디터, 디자이너, 방송작가 등이 특수고용직과 다를 바 없이 불합리한 고용계약, 착취, 임금 체불 등에 시달리며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가 아니므니다, 그렇다고 사장도 아니므니다. 우리 사회 수많은 노동자들이 정체성을 잃은 채 타자로 전락해가고 있다. 복지도, 경제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노동에 대해 합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가 아니라면 그 사회의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허울일 뿐이다.

 

싸이의 공연을 보러 모인 인파들이 재능교육으로 달려가 연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과 수많은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서울광장에서 마음 놓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노동하기 좋은 사회를 희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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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08

박근혜의 ‘통 큰 통합’이 화제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와 자신의 정적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방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찾아가 인사를 나누었다. 보수언론과 박근혜 지지자들은 이러한 박근혜의 행보가 ‘국민통합’, ‘화합’이라는 박근혜의 모토에 걸맞은 행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반응에 탄력을 받았는지 박근혜는 전태일까지 찾아 나섰다. 박근혜는 전태일재단을 방문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추모하겠다고 밝혔다. 전태일재단이 방문을 거부하자 꽃을 들고 전태일 동상을 찾아갔다. 자, 이쯤 되면 박근혜가 ‘국민 통합’, ‘화합’을 외치며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그 패턴이 보인다. 박근혜는 방문과 악수, 인사를 ‘통합’, ‘화합’과 동일시하는 듯하다. 통합하기 참 쉽다. 정적이 있으면, 정적을 찾아가 악수하면 그게 통합이다. 정권의 반노동 정책으로 인해 사망한 노동자들이 있으면 찾아가 참배하면 그게 화합이다.

 

박근혜는 전태일 동상에 헌화를 하려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김정우의 항의를 받았다. 김정우 지부장은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서 전태일 열사와 화해하겠다는 것은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는 앞을 가로막은 김정우를 바라보지 않고, 전태일의 동상만 바라보았다. 기자들은 박근혜의 얼굴을 찍느라 바빴다. 전태일 동상에 헌화를 하기 위해, 박근혜의 경호원들은 김정우의 멱살을 잡아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박근혜는 과거의 적들과 화해할 순 있어도, 현재의 적들과는 화해할 수 없다. 박근혜는 죽은 전태일과 화해하기 위해 살아있는 김정우의 멱살을 잡았다. 박근혜의 눈은 자신에게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이미 죽어 동상으로 남은 전태일을 향했다. 박근혜가 전태일과 화해하고 싶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박근혜는 살아있는 전태일과 화해할 수 없다. 박정희는 국가 중심의 경제개발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노동자 착취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전태일은 이에 저항하고, 아래로부터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알린 열사다. 화해와 사과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얼굴을 붉히며 본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행동이다. 박정희 시절 ‘본의와 다르게’ 피해를 입은 분들께 사과한다는 박근혜가, 5·16이 구국의 혁명이며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한국 역사에서 불가피했으며 꼭 필요했다고 주장하는 박근혜가 박정희를 통째로 부정한 전태일과 화해할 수 있을까? 박근혜는 이미 죽어 말이 없는 전태일하고만 화해할 수 있다.

 

박근혜는 박정희가 김대중을 탄압하던 시절이 아니라, 박정희가 죽고 김대중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야 김대중과 화합할 수 있었다. 박근혜는 노무현이 죽고 나서야 노무현과 화해했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정적이었던 장준하의 유가족들을 찾아가 화해했다. 그러나 장준하가 박정희 정권에 타살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정치공세’라며 눈을 부라렸다. 박근혜에게 죽은 장준하는 화해의 대상이다. 하지만 장준하가 ‘현재’의 문제로 다시 살아난다면 박근혜는 장준하와 화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의 통합과 화합의 방식은 항상 방문, 인사, 참배다. 박근혜는 과거와 화합할 수 있어도 현재와는 화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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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08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고 모인 지 8개월도 지나지 않아, 통합진보당의 실험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혁신파’가 지난 통합진보당 의원총회에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을 제명하는 데 실패하면서, 통합진보당은 해체 직전으로 치닫고 있다. 당원들의 탈당이 줄을 잇고, 혁신파는 공공연하게 탈당 및 재창당을 언급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 가리지 않고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의 종북주의를 안줏거리 씹듯 씹어대고 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태를 그냥 ‘종북’으로 정리하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진짜 문제는 종북주의라는 신념이 아니라, 그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을 장악하려는 태도이다. 구당권파는 당직 및 공직을 차지하기 위해 위장전입이나 투표 조작 같은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위반했다.

 

지난 2008년 구당권파와 구당권파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은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이어졌다. 그때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던 당원들은 당권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때문에 탈당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당권파가 종북주의를 ‘패권적’으로 밀어붙이는 데 신물을 느낀 비당권파 당원들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것이 민주노동당 분당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통합진보당이 창당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통합진보당의 탄생을 축하했다. 진보적인 정치인들과 정치평론가들은 통합진보당이 우왕좌왕하는 민주당을 진보정치로 이끌 동력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엠비(MB) 심판이라는 대의를 주도할 통합의 정당이 탄생했다고 기뻐했다. 그들의 기대가 산산이 박살난 지금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종북’이라고, 진보를 망쳤다고 비판한다. 국민의 뜻과 엠비 심판이라는 대의를 내세워 통합을 부추기던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이 제3자가 되어 통합진보당을 비판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지금 통합진보당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책임을 느껴야 할 ‘당사자’이다. 엠비 심판을 위해 통합을 주장하던 이들은 구당권파가 ‘그런 사람들’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 아니, 말은 똑바로 하자. 그런 사람들인 줄 모른 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인지 아닌지 알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비례대표 경선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직후, 통합진보당 게시판은 ‘엔엘/피디’(NL/PD)에 대해, 구당권파의 실체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참여당계 당원들의 글로 가득 찼다. 본인들이 통합할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이루어진 통합이었다.

 

통합진보당은 능력은 안 되지만 권력은 잡고 싶은 정치세력들이 뭉쳐서 만든 선거용 정당이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자신들의 가치와 이념에 근거해 뭉친 정당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선거용 정당이다. 엠비 심판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들의 공통적인 가치와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이 급하게 만든 정당이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대의를 위해 본인들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묻지마 통합’이 가져온 비극이다.

 

구당권파는 종북주의라는 이념을 밀어붙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묻지마 통합을 외쳤던 이들은 엠비 심판과 정권 교체를 위해 가치와 이념을 저버렸다. 통합진보당을 ‘까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번 사태의 당사자이다. ‘진보세력’이 쉽게 통합진보당을 깔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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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1:07

영화 <두 개의 문>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개봉한 지 13일 만에 2만명이 넘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았고, 유명 인사들과 정치인들이 잇따라 영화를 관람하면서 용산참사가 다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두 개의 문>은 용산참사라는 무거운 사회·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사회고발 다큐다. 이런 유의 다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사건을 공론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 분노의 화살은 ‘악덕하고 나쁜’ 놈들에게 날아간다. 우리는 <도가니>를 보고 파렴치한 장애인학교 교사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부러진 화살>을 보며 비상식적이고 권위적인 판사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 분노의 화살은 구조와 시스템까지 도달해야 한다. <도가니>는 사학개혁 논의로, <부러진 화살>은 사법개혁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개의 문>은 우리에게 용산참사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안한다. 영화에는 용산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동안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의 눈으로 용산참사를 바라본다. 영화는 철거민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것처럼, 상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경찰 개개인 역시 국가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을 통해 영화는 재개발을 포함한 국가폭력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을 제안한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국가의 폭력은 도처에서 힘없는 이들을 억누르고 있다. 재개발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환경과 평화를 지키려는 민중들의 투쟁 현장에서 국가는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피해자들의 광범위한 연대다. 그런데 <두 개의 문>이 제안한 대로 경찰 개개인도 국가폭력의 피해자라면, 결국 그들과도 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경찰노동조합’을 하나의 대안으로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과 미국에는 이미 경찰노조가 있으며, 유럽(파업권을 인정하지 않는 영국 제외)과 미국의 경찰들은 노동 3권을 보장받고 있다.

 

<두 개의 문>은 경찰청장 취임을 앞둔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치적을 위해 무리하게 경찰을 투입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경찰들은 늘 열악한 근무조건과 성과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 상부의 무리하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으려면 경찰에도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조 설립의 근거를 단순히 ‘경찰이라는 이익집단의 이권’으로만 설명하면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치안 유지와 국민의 편익’이라는 더 큰 이권에 묻혀버릴 것이다. ‘교사들이 무슨 파업이냐’고 비난을 받던 전교조는 ‘참교육’이라는 보편적인 대의를 내걸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학생들의 수업권’이라는 이권을 넘어서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경찰노조 역시 경찰 자신들의 이권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대의를 내걸어야 할 것이다.

 

물론 경찰노조가 그 자체만으로 사회에 엄청나고 대단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체행동권을 보장받는다 해도 실제로 행사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무리한 진압을 지시하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를 통해 원주민과 경찰관 모두를 희생시킨 용산참사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연대의 힘이 아닐까? 우리 앞에 ‘두 개의 문’이 있다. 함께 살 것인가, 아니면 함께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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