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3.18 01:05

지난 9일 첫 방송된 KBS 2TV의 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아이유 주연)이 소송에 휘말렸다. 문제는 ‘이순신’이었다.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 DN(Designed Nation)이 “드라마를 통한 이순신 이미지의 재창조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며 서울지방법원에 ‘드라마 제목, 주인공이름 사용금지 및 방영금지와 저작물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DN 활동가 고희정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아직까지 전범국가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해 매주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요 집회를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프랑스 교과서까지 침투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KBS가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희화화할 경우 이순신은 젊은 세대에게 아이유로만 남을 것이고 한류열풍을 타고 드라마가 해외에서 방영될 경우엔 심각한 국가적 명예 훼손이 일어날 것이다.” “예전엔 초등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1·2위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지금은 김연아와 유재석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높아진 만큼 극중 인물의 이름에 신중해야 한다.”[각주:1]

역사교육의 부재를 파고든 ‘팩트’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라는 창작물에 너무 엄숙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또한 이런 식의 명예훼손이 남발되면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터넷사이트를 돌아다녀 보니 많은 네티즌들이 DN의 이러한 주장에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우리 성웅 이순신 장군을 감히 희화화하다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더 많은 네티즌들이 이순신을 검색하면 아이유가 나오고, 그래서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이 이순신하면 성웅이 아니라 아이유를 떠올리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혀 다른 사안처럼 보이지만 ‘이순신’ 논란과 유사한 현상이 있다. 바로 몇몇 청소년들이 일베(일간베스트)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모습이다. 지난 12일 SBS <현장21>은 최근 보수우파들의 성지가 되어버린 인터넷유머사이트 일간베스트를 심층 취재했다. 그곳에는 일베 회원을 자처하는 한 중학생이 등장했다. 그 중학생은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동이며 노무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극우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기자가 약간 놀란 듯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느냐고 묻자 학생은 “고대까지 밖에 안 배운다.”며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안 배워도 일베에서 배운다. 일베에서 배워서 다 안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일베에 접속하면 ‘역사교육’이라는 제목을 단 글과 동영상이 많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광주가 폭동이므로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한 게 잘한 일이라는 점, 김대중과 노무현이 빨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글과 동영상을 올리며 ‘팩트’를 강조한다. “좌파는 감성팔이만 하는데, 우리는 팩트로 무장하고 있다.”는 식이다.

‘이순신’ 논란과 ‘일베 역사교육’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역사교육의 부재’다. 초중고 학생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웠다면 이순신과 아이유를 헷갈릴 수 있을까? 드라마나 사극으로 역사를 배우다보니 진짜 역사와 팩션[각주:2]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대답할 수 있다. 팩션이나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다며 드라마를 찍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역사교육을 강화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칠 생각을 해야 한다. 머리에 제대로 된 역사가 박혀 있으면, 아이유가 이순신이라는 생각이 파고 들 틈이 없다.

일베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중학생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근현대사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중학생의 머리에는 역사가 부재했고, 그 틈을 일베의 ‘팩트’가 파고들었다. 근현대사와 국사는 예전부터 필수과목이 아니라 수능의 ‘선택과목’이었다. 2009년 교육과정 개정으로 국사와 근현대사가 ‘한국사’로 통합되면서 학생들은 내용도 많고 어려운 한국사 과목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왜 역사문제에 둔감한가?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 최근 BBC 매거진에 실린 한 기사는 큰 시사점을 준다. BBC 도쿄 특파원 오이 마르코는 자신의 역사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역사문제에 무관심한 이유를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까지만 역사를 ‘필수’로 배운다. 또한 역사과목에 배정된 시간도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 “호모 일렉투스부터 현대까지 무려 30만 년에 이르는 역사를 1년에 배우는데, 14살짜리가 어떻게 일본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일본 학생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거의 배우지 못하고 있다. 오이 마르코가 배웠던 중학교 2학년 역사교과서에서 태평양 전쟁 시기를 다룬 내용은 19쪽, 중일전쟁은 한쪽으로 끝나고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술은 한 줄 뿐이다. 한국인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주석으로 한 줄 언급된다.

이렇게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인들이, 왜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 일본이 역사문제를 가지고 갈등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 극우단체들은 인터넷에 파고들고, 집회와 시위를 해댄다. 인터넷에는 국수주의적인 정보, 센카쿠나 독도문제 혹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극우의 견해들이 도배된다. 역사교육이 부재한 일본인들의 머리를 극우의 ‘팩트’가 파고드는 것이다.[각주:3]

역사전쟁을 준비해야할 시간

많은 이들의 우려대로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가장 논란이 될 사안은 한국현대사, 즉 과거사 논란이 아닐까 싶다. 친일과 이승만, 박정희 등 한국 현대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대선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박근혜 주변에 “한국사회가 좌빨로 가득 차 있다.”는 식의 외눈박이 문제의식을 지닌 인사들이 즐비하다는 점에서 교과서 수정 등을 둘러싼 현대사 논란이 정국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며 신난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어댈 것이다.

이미 논란은 시작되었다.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15일자 5면에 <원로들이 우려한 좌파의 인터넷 다큐 '백년전쟁'>이라는 기사를 낸 것이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신동아 3월호도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백년전쟁이 이승만을 친일파로 낙인찍기 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역사전쟁이 위험한 이유는 역사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일베에서 현대사를 배우는 중학생처럼, 극우파들이 내세우는 편향된 역사관이 ‘팩트’로 무장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킬 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순신과 아이유를 헷갈린다는 이유로 드라마를 욕하기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이유다. 

  1. 정철운, ‘이순신=아이유는 심각한 역사 훼손?,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077 [본문으로]
  2.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말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 [본문으로]
  3. 백병규, “아베 망언에 일본사회가 무심한 까닭”,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17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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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44

청년, 정치, 비례대표제


청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 관심은 청년을 위한 공약들을 쏟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청년들이 ‘직접’ 바꾸어야 한다며 국회의원 자리를 청년들에게 내주겠다고 한다. 민주통합당이 택한 건 ‘슈퍼스타케이’다. 통합진보당은 ‘위대한 진출’을 선택했다. 공개 오디션 방식으로 국회의원 후보를 뽑고, 오디션에 합격한 청년을 비례대표 앞 순번에 배치하겠다고 한다. 돈 없고 조직 없는 청년이 당장 지역구 후보로 나와 당선되기는 힘드니 비례대표로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오디션 방식으로 청년을 비례대표로 만들면 청년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될 수 있을까?

비례대표제와 대표성

나는 얼마 전 진보신당 청년학생위원회의 자격으로 국회에서 열린 <청년, 정치, 비례대표제>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정치인들과 청년들이 모인 이 토론회에서 발표자들은 하나 같이 한국에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청년의 목소리를 더 높이기 위해서도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 역시 한국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더 늘어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비례대표제가 유권자의 의사를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들이 비례대표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 역시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현상이 진짜 ‘좋은’ 현상이 되기 위해서는 기계적으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비례대표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얼마나 좋은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한다. 즉 비례대표제 자체에 대한 논의는 널려 있다. 그러나 비례대표제가 제대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은 대표성이다. 그 이유는 대표성이 선출된 대표가 행사하는 권력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정당성 말이다. 청년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제기하기 위해 비례대표제가 필요한 이유는 지역구 중심의 현재 선거제도로는 청년 의제라는 초-지역적인 의제를 제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역구 의원들이 지역에 공항을 깔아주느니, 다리를 놓느니 하는 지역적인 의제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지역구 의원들이 지역 의제에 치중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권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례대표제로 당선된 의원들이 행사하는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 권력의 정당성과 근거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정당이 아닐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비례대표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비례대표제는 도입된 이후 늘 더러운 논쟁에 휩싸여 왔다. 친박연대의 양정례 사건이 대표적이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도 과거에 비례대표를 둘러싸고 ‘측근의 자리 나누어먹기’ 혹은 ‘돈 주고 의석 사기’ 등의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쉽게 말해서 정당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된다면 비례대표제는 정당 중진의원들이나 권력을 지닌 계파 지도자들의 안전 빵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는 지역구보다 더 비민주적이고 대표성이 낮은 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례대표제가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정당 구조, 정당 민주화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례대표제가 얼마나 좋은지도 중요하지만 각 정당이 어떤 방식으로 비례대표를 선출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비례대표제와 대표성

청년 비례대표제와 ‘대표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청년 비례대표는 청년을 대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청년이 ‘청년’을 대표할 수 있을까? 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추진하는 공개오디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슈스케를 보면 멘토들이 탈락을 좌지우지한다. 심판권을 지닌 몇 몇 당내 인사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청년들만을 걸러내지는 않을까? 이를 위해 청년들은 청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청년 정책을 생산하는데 주력하기보다, 자신의 경력을 멘토 ‘어른’들에게 어필하는 데 더 힘을 쏟지 않을까? 혹은 당의 권력을 장악한 계파 조직들이 자신의 조직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청년들을 밀어주지 않을까?

나의 이런 우려는 단순한 노파심이 아니다. 민주통합당 슈스케에 참여한 인사들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한 이들이 많았다. 당 내의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인사들의 눈에 들기 위해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한 것이 아닐까? 나로썬 ‘청년’ 비례대표가 되는 데 굳이 김대중, 노무현과의 인연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물론 정치 경력이나 행정 경험에 대한 강조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20-30대 청년들이 더 어린 시절에 정치 경력이나 행정 경험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통합진보당도 마찬가지다. 통합진보당 ‘위대한 진출’ 경선 과정에서 특정 조직이 조직의 구성원인 대학생들에게 특정 후보를 찍으라고 강요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당선된 청년 비례대표 의원은 청년을 대표할까, 아니면 당과 조직을 대표할까?

또 다른 우려는 공개오디션 방식에 참여하는 청년들 중에 그 당의 가치와 정강에 동의하여 들어온 이가 얼마나 될까 라는 것이다. 급진적 좌파 박가분은 지난 R칼럼에서 청년 문제를 올바르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청년 사이의 당파적인 입장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따라서 청년들이 서로 다른 정강과 가치를 지닌 정당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당파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슈스케 방식으로 청년 정치인을 ‘모집’하면 어떻게 될까? 나쁜 의미에서의 권력욕, 나쁜 의미에서의 정치인을 꿈꾸는 이들이 슈스케를 절호의 찬스로 포착하지 않았을까? 슈스케에 참여한 이들 중에 미래연대나 새누리당 경력을 지닌 참가자들이 많았다. 물론 새누리당이나 미래연대 출신이 민주통합당에 오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이 청년을 대표하겠다, 청년의 목소리를 내겠다가 아니라 단지 ‘정치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점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청년을 대표하고 싶다면 청년조직을 재건하라

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각 정당은 기계적인 비례대표제 도입 이전에 당의 청년조직들을 재건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에는 당에서 나름의 세력을 가진 청년조직이 없다. 청년위원회, 대학생위원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있지만 유명무실하며, 당원으로 활동해도 국회 인턴 및 당직자 채용 등에서의 혜택이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민주통합당은 청년비례대표를 늘린답시고 당직자에게 배정되어 있던 비례대표 할당을 줄인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떤 당원이 당을 위해 열심히 일하려고 할까? 더 나아가 어떤 청년당원이 당원 활동을 열심히 하려고 할까? 통합진보당의 경우 청년조직이 당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오디션을 통해 청년정치인을 모집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관심과 주목을 끌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청년조직이 뻔히 있는데 외부에서 정치인을 충당하는 방식을 쓰는 것이 청년을 대표한다는 면에서 도움이 될 지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청년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싶다면 각 정당은 슈스케 같은 이벤트가 아니라 청년조직을 건설하는데 힘써야 한다. 슈스케에 참여한 ‘개인으로서의 청년’이 아닌 ‘조직으로서의 청년,’ ‘집단으로서의 청년’이 당 내에서 자신들의 사업을 주도하고 예산을 확보하여, 그 안에서 정치적인 경험(당직자, 당 관료)을 쌓은 뒤 정당 내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런 시스템이 고착되어야 청년의 목소리가 꾸준히 사회에 반영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몇 몇 당내 인사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청년들만을 걸러낼 우려도 없고, 슈스케 같이 반짝하는 기회를 포착하여 자신의 이념이나 정책과 무관하게 정치인이 되고 싶어 정당에 들어오는 청년들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외부의 인사를 끌어올 게 아니라 당이 키우고 당에서 고생한 청년들이 청년조직의 힘을 등에 안고 당 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청년을 대표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청년을 구하지 말고, 청년들이 직접 당을 만들어 가야 한다.

조윤호/ 진보신당 청년당원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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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9

나꼼수 비키니 응원과 관련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논란은 한 여인이 징역형을 받고 수감된 정봉주 를 응원하는 비키니 사진을 올리면서 시작되었다. 이 여인은 정봉주의 팬 카페인 ‘미권스’에 자신의 비키니 사진을 올렸다. 가슴에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라는 문구를 새긴 채 말이다. 이어 몇 몇 여성들이 속옷이나 비키니 사진을 연달아 올리면서 이런 응원 방식이 올바른 것이냐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논란이 심해진 것은 이에 대한 나꼼수 패널들의 반응 때문이다. 김용민이 나꼼수 방송 중 정봉주가 “성욕감퇴제를 먹고 있다”며 “마음 놓고 수영복 사진을 보내라”고 말하고, 주진우가 트위터에 ‘가슴 응원 사진 대박이다.’, ‘코피 터진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나꼼수 측이 여성들을 성희롱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급기야 몇 몇 여성단체와 네티즌들이 나꼼수의 사과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진중권과 이택광 등의 진보 논객들은 나꼼수를 비판했고, 나꼼수와 친분이 있던 공지영 마저 “불쾌하다. 사과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논란의 주인공인 나꼼수 3인방은 사과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으며, 오히려 김어준은 “여성의 생물학적 완성도를 보고 감탄한 것이 뭐가 문제냐”는 반응으로 대처했다. 감옥에 있던 정봉주 만이 사과편지를 보냈다. 이 사과 편지를 공개한 공지영은 미권스와 나꼼수 팬덤의 사이버 공격에 결국 트위터를 그만 두고 말았다.


비키니응원이 표현의 자유인지 아닌지, 이에 대한 나꼼수의 발언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 이들이 사과를 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이 복잡한 논란에 대해서다루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꼼수, 나꼼수 팬덤과 미권스, 그리고 나꼼수가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단 하나의 논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왜 이들은 나꼼수가 이번 비키니응원 논란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가?


“원래 술자리 뒷담화 하듯 하는 방송인데 뭘 그러냐.” “나꼼수 4인방은 원래 저질이다. 그리고 나꼼수도 저질, B급 방송이다.”,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든다.” 대략 이런 반응들이다. 나꼼수는 원래 그런 저질스런 이야기를 하는 방송이고, 주류언론과는 다른 B급 방송인데 그런 성적인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주류언론에나 대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며 깐깐하게 구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달로 손가락을 가리키는 데, 자꾸 달을 안 보고 손가락을 본다.” 비키니 응원의 본질은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올려서라도 정봉주를 응원하고 싶은 여성의 ‘자발성’인데, 자꾸 사람들이 그 여성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 비키니나 가슴, 나꼼수 패널들의 성적 농담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꼼수가 어떻게 흥행할 수 있었느냐.”는 물음이다. 나꼼수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 1,100만 명의 청취자를 지닌 팟캐스트가 된 이유는 공교롭게도 ‘달’이 아니라 ‘손가락’의 공헌이다. 현직 대통령과 집권여당을 비판하는 언론들은 이미 있다. 보수언론은 친정부적인 보도를 한다고 쳐도 한겨레, 경향, 시사인,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 정부 비판적인 매체들은 이미 널려 있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그런 기존의 매체가 아닌 나꼼수에 열광한 것일까? 나꼼수의 메시지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태도 덕분이다.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낄낄 거리며, 욕설을 해대며 가카를 까고 한나라당을 씹어대는 그 태도 말이다. 심각한 사회 이슈를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그 태도 말이다. 각 잡은 채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전하는,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태도가 아닌 풍자와 웃음, 조롱에 환호한 것이다. 나꼼수는 재미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이슈를 잘 정리하고, 꼭 알아야할 뉴스들을 들려준다. 이게 나꼼수가 뜬 이유다. 그 특유의 ‘B급스러움’이 나꼼수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원래 나꼼수의 매력은 툭툭 던지는 음모론과 ‘소설’이다. 근거는 조금 부족하지만, 웃고 즐기면서 씹을 수 있는 음모론과 소설 말이다. 나꼼수 패널들은 ‘이것은 소설입니다’라며 연막을 치고 들어가서 한참 음모론을 풀어놓은 뒤에 ‘우리 가카는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라며 다시 안전장치를 치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나꼼수를 편집하는 김용민이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비평 과잉 청취자는 달갑지 않다. 이 안에서 숭고한 저널리즘을 기대하는 이들, 의외로 많다. 귀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다 터무니없는 소설이다, 각하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는 말 좀 새겨들어라.”(시사인, 212호)


그런데 어느 순간 나꼼수는 단순한 B급 방송이 아니라, ‘대안언론’으로 기능하고 말았다. 김용민의 말과는 달리 ‘저널리즘’이 되어버린 것이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악마기자’ 주진우는 나꼼수가 툭툭 던지는 ‘음모론’과 ‘소설’에 팩트를 부여했다. 높아진 영향력에 현직, 전직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출연했다. 정치인들은 나꼼수에 출연해 여의도의 비하인드와 국회의원 시절 이야기를 했다. 10.26 재 보궐 선거 전에는 서울시장 후보들이 나와 토론을 했다. 통합민주당 지도부 선출 직전에는 당 대표 후보들이 출연했다. 그 뿐인가? 나꼼수가 ‘의혹’이라고 제기한 디도스 공격은 사실로 드러났다.


나꼼수 팬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는가? 소위 말하는 진보지식인, 논객들이 나꼼수를 비판하는 글을 쓰거나 발언을 하면, 이들에게 몰려가서 ‘입 진보’라고 공격했다. (오마이뉴스, “건드리면 ‘폭풍 까임’ ‘입진보’ 낙인 <나꼼수> 편가르기, 빨간불 들어왔다” 참조) “나꼼수 4인방이 꼼수조직과 가카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감옥 갈 각오로 목숨 걸고 싸우는 데 너네는 입만 놀렸지 뭐했냐.”고 묻는다. 정봉주가 BBK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면서 정봉주는 거대 권력 가카에 맞서는 상징이 되었다. 나꼼수는 더 이상 단순한 B급 방송이나 술자리 뒷담화가 아니다. 대안언론으로, 반MB의 상징으로 ‘진화’한 것이다.


나꼼수 팬덤이나 미권스, 나꼼수 패널들이 아무리 ‘술자리 뒷담화’에 불과하다고 자기규정을 해도 나꼼수는 이미 ‘객관적’으로 B급 방송이 아니다. 600만 명이 다운로드를 받아 듣는다고 한다. 김용민의 말에 따르면 1,100만 명이 나꼼수를 청취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쯤 되면 나꼼수는 더 이상 비주류 B급 방송이 아니라, 이미 ‘주류’다. 과거 정권의 인사들이 방송에 나오면서. 집권 여당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나꼼수는 술자리 뒷담화를 뛰어넘었다. 나꼼수 팬덤도 나꼼수가 정권심판에 기여했느니, 젊은 층의 투표율 상승에 기여했느니 라며 나꼼수의 역할을 ‘술자리 뒷담화’ 이상으로 규정하지 않았는가? 김용민은 <인물과 사상>과의 인터뷰에서 나꼼수가 “정치에 관심이 없던 여성들의 정치적 각성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본인들이 잘 나갈 땐 온갖 정치적이고 공적인 의미 부여를 하다가 불리하면 ‘술자리 뒷담화’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나꼼수 패널들과 나꼼수 팬덤, 미권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 누구보다 김어준이 대신 해 줄 수 있다.


“내게 왜 방송에서 욕을 하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욕을 하는 지보다 욕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보고, ‘꼬추’로 달을 가리키면 그것을 본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시지를 전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시사인, 212호)


김어준의 말처럼, 메시지보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가슴에 글자를 새기면 사람들은 글자가 아니라 가슴을 본다. 정봉주를 응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나꼼수의 성적 농담에 주목한다. 그리고 나꼼수는 바로 그 손가락 덕분에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나꼼수가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말하면, 더 이상 나꼼수는 나꼼수가 아니다. 나꼼수의 딜레마는 이 지점에 있다. 나꼼수가 사과를 하면, 나꼼수는 스스로 B급 방송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이 공적인 언론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사과를 안 하면, 나꼼수는 대안언론이기를 포기한 채 말 그대로 ‘진짜’ 저질인 인터넷 방송으로 남게 될 것이다. 선택은 나꼼수 본인들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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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8

나는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이다. 작년에 있었던 반값 등록금 투쟁의 여파로,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으로 우리 학교의 등록금은 반값이 되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제 한 학기에 (평균) 119만원만 내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사립대학의 한 학기 평균 등록금이 400만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반의 반값 등록금’이다.


그러나 반값등록금 투쟁의 목표는 단지 서울시립대의 등록금을 절반으로 인하하는 게 아니다. 서울시립대 총학생회는 서울시립대 반값등록금이 다른 대학까지 이어지는 데 힘을 보태기로 결정했다. 서울시립대 총학생회가 지난 12월 19일 반값등록금 원년선포식에 참여하고(머니투데이, 2012.01.26.) 2월 1일 사립대의 등록금 인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민중의 소리, 2012.02.01.) 박원순 서울시장도 같은 입장이다. 서울시립대의 반값 등록금을 위해 18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반값등록금이 서울시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최초의 선례를 만들면 전국적 파급효과를 가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182억 쓸 가치가 있다고 생각. 그것은 제 공약이기도 합니다. 적다든지, 학교 발전을 위한 또 다른 투자를 해야 한다든지 하는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가지는 상징적 효과가 워낙 크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YTN, 2011.11.03.)


그러나 등록금 인하는 다른 학교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감사원이 일반 사립대의 등록금을 12.7% 인하할 수 있다고 발표했지만, 교과부 이주호 장관과 대학교육협의회(총장협의기구)가 대학등록금을 5% 인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대학들은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등록금심의위원회조차 열지 않거나 등록금을 동결한 대학도 있다. 인하하겠다고 했다가 등록금 고지서에는 동결로 발표한 대학도 있다. 생색내기 용으로 2~3% 인하하는 대학이 다반수다. 오마이 뉴스 보도에 따르면 2012년 4년제 대학 등록금 평균 인하 액은 평균 30만 원이고 전문대는 29만2458원이라고 한다. 실망스러운 수준이다.(오마이뉴스, 2012.01.30.)


그렇다면 왜 서울시립대는 50%나 인하했는데, 다른 대학들은 등록금을 인하하지 못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반값등록금 그 자체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이 ‘서울시립대의 방식’으로 확산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고 있다. 예컨대 서울시립대의 경우, 반값 등록금은 어쩌면 ‘간단’하다. 서울시에서 예산을 책정하고, 예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면 된다. 등록금을 인하해줄 시장을 뽑는 선거와 그 시장의 서명이라는 행정적 절차, 민주당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에서의 예산안 통과면 오케이다. 하지만 사립대는 이렇게 ‘간단히’ 등록금을 인하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떤 투쟁이 필요할까?


반값등록금 투쟁은 ‘교육 공공성’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 반값 등록금이나 등록금 인하는 학생들에 대한 시혜여서는 안 된다. ‘대학’이라는 상품의 과도하게 높은 가격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비자와 공급자 간의 가격 협상이어서도 안 된다. 반값등록금 투쟁은 교육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 모두의 권리임을 천명하는 방향으로, 따라서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교육은 ‘공공성’을 띠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의 ‘공공성’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최우선의 과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고, 해결하는 원리이다. 더 이상 총장과 재단 이사장 등 몇 명이 등록금을 결정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등록금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취지로 2010년 이후 대학에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가 설치되었지만,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1월 통과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등심위 구성시 교직원・학생・전문가 중 어느 한 쪽의 비율이 50%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만 두고 나머지는 개별 대학에게 맡기고 있다. 이러니 대부분 대학에서는 이를 악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사를 등심위 위원으로 참여시킨다. 예를 들어 학생에게는 위원 자리로 두 자리만 준 뒤, 나머지 자리는 사실상 학교 측 입장을 대변하는 학교 교직원, 외부 전문가, 총동문회 회원 등으로 채우는 식이다. 이렇다 보니 등록금 인하 및 등록금 산정 기준 공개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의견은 번번이 묵살되기 일쑤이다.(프레시안, 2011.03.29.)


더욱 필요한 조치는 사립학교법 개정이다. 사립대들은 재정압박을 내세워서 등록금을 인상한다. 하지만 그들은 수백억의 적립금을 쌓아두고, 그 돈으로 땅을 사들이고, 주식에 투자한다. 등록금을 어디다 썼느냐고 학생들이 항의하면, 경영상의 비밀이라고 뻐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이 기업화되었다고 걱정하는데, 이건 기업도 아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다.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도 안 해주면서, 무엇이 필요한지 학생들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학교에서 등록금을 어디에 사용할 지 마음대로 결정한 뒤 돈이 없으니 돈 내놓으라는 식이다. 그냥 입 다물고 돈 필요하니 돈이나 내놓으라는 게 강도가 아니고 뭘까?


노무현 정부 시절에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려다 실패했다.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개방형 이사제(사학재단 이사진의 3분의 1을 학교운영위나 대학평의원회가 추천하는 인사로 구성하는 안)를 도입하고 사립학교 학교운영위원회를 심의기구로 설치하고. 이사장 친인척의 임용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학법 개정은 학교를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사학이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막아 ‘교육의 공공성’을 되살리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보수언론과 한나라당, 사립학교 측은 이런 조치가 ‘경영권 침해’라며 반발했다. 정부의 지원금(이는 결국 국민 세금)과 학생의 등록금에 의존하면서 오직 설립 시기에 개인재산을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개인의 재산처럼 운영하고 세습하면서, 이를 ‘경영권’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등록금 결정구조를 교육의 주체인 학생에게 개방하고, 폐쇄적인 사립학교의 운영을 개방형으로 바꾸는 ‘민주적 조치’가 없는 이상, 교육의 공공성은 확보될 수 없다. 총장이나 이사단 몇 몇의 의지에 따라 운영되는 학교가 어떻게 ‘공공성’의 가치를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반값 등록금 투쟁이 불쌍한 대학생들에 대한 ‘시혜’나 ‘가격 협상’ 따위가 아니라 ‘보편적인 권리’에 대한 투쟁으로, ‘교육 공공성’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서울시립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운’좋게도 박원순이 서울시장이고, 민주당이 의회를 차지하고 있다. 근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언제 등록금이 다시 오를지 모르는 일이다.


내가 이처럼 교육 공공성 투쟁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미 대학의 시장화와 효율성,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시장주의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26일 ‘2단계 국립대학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국립대를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로 ‘선진화 지표’를 내세웠다. 선진화 지표란 ‘총장직선제 개선 여부’와 ‘기성회 회계 건전성’이다.(한국대학신문, 2012.01.26.) 하나씩 살펴보자.


선진화 지표의 첫 번째 요소는 총장직선제 개선 여부다. 총장직선제를 폐지하면 경쟁력 있고 선진화된 국립대라는 것이다. 총장직선제를 이사회의 선임제로 대체하는 것은 국공립대 법인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학교의 운영을 책임지는 총장의 선출을 학교 구성원들이 아니라 몇 몇 이사회의 손에 맡기는 것은 대학의 민주성을 침해하는 조치이며. 학교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이다.


선진화 지표의 두 번째 구성요소는 기성회 회계 건전성이다. 그간 국립대는 수업료 외에 ‘기성회비’라는 명목의 돈을 학생들에게 걷어왔다. 그리고 이 기성회비로 구성된 예산은 부당하고 불투명하게 집행 되었다. 지난 1월 27일 서울중앙지법은 “대학이 징수한 기성회비는 부당 이득”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레프트21, 2011.02.02.)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많은 국립대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전체 예산 중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80%까지 기성회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대들이 정부에게 800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동아일보, 2011.01.30.)


물론 투명하지 않게 사용된 기성회비에 ‘부당 이득’이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가 이를 ‘대학의 시장화’ 개혁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과부가 발표한 국립대 선진화 방안에 ‘기성회 회계 건전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교과부는 기성회비의 불투명한 이용을 내세워 국립대가 부패와 비리로 가득 차 있으니 이를 시장의 원리에 맡겨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며 시장화, 구조조정 을 밀어붙일지 모른다.


이것이 등록금 투쟁이 단순히 ‘시혜’나 가격 ‘협상’이어선 안 되는 이유다. 등록금 인하라는 '시혜‘를 베푼 대가로 대학의 시장화를 밀어붙인다면 어쩔 것인가? 등록금 인하와 시장화 사이에서 ’거래‘를 하자고 나온다면 어쩔 것인가? 당장 등록금이 내려가니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사회가 학교 운영을 장악하고, 대학의 효율성과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대학의 시장화가 진행된다면, 한 번 내려간 등록금은 다시 치솟을 지도 모른다. 우리의 요구는 ’등록금 인하‘를 위한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결정할 권리‘를 달라는 요구여야 한다. 교육의 공공성을 보장하라는 요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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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7

한반도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비상이 걸렸다. 오늘(12월 19일) 12시 30분, 조선중앙티브이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소식을 공식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조선중앙티브이에 따르면 김정일은 지난 17일 오전 8시 30분 경 현지 지도를 하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원인은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쇼크 합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식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4강이 이목을 기울이고 있고, 한국은 국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고, 전 군은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비록 연기되긴 했지만 곧 3차 북미대화가, 내년 3월에는 핵 안보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며, 6자 회담도 재개될 전망이므로 김정일의 죽음과 향후 북한 체제는 앞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둘러싼 핵심 쟁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가장 시급히 파악해야 할 사항은 며칠 전 타결된 북미합의와 이번 김정일 사망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AP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북한은 바로 어제인 18일 미국이 북한에게 24만 톤의 영양 지원을 제공할 것을 최종 합의했다(19일 공식 발표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김정일이 사망한 건 17일이다. 그리고 김정일 사망은 19일 날 공식 발표되었다. 이 북미 간의 합의가 김정일 사망과 독립적인 사건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북한은 북미합의에서 이전의 입장과는 다르게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다. 24만 톤의 영양 지원의 대가로 미국이 요구한 사항을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우라늄농축프로그램 잠정중단이라는 카드를 내놓았으며, IAEA 사찰단 입국과 미사일 실험 중단에도 합의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그 동안 북미합의와 대북지원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선 핵 폐기, 선 비핵화’를 수용하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북한이 ‘선 지원, 후 비핵화 및 핵 폐기’를 고집하며 협상 불가를 외쳐왔다는 점에서 보면 상당히 전향적인 입장이다. 북한이 왜 그런 것일까? 이것이 아마 김정일 사망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을까?

 

CNN은 김정일 사망 보도가 나오자 중국이 이를 이미 알았을 것이라 보도했는데, 마찬가지로 미국도 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오바마 행정부는 그동안 비핵화, 핵 폐기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이러한 입장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입장이라는 확신이 없는 한 북미대화에도, 대북지원에도 나설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해왔다. 오바마 행정부가 만일 김정일의 죽음에 대해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면, 바로 이러한 김정일의 죽음을 북한 비핵화, 핵 폐기의 조건으로 파악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설령 오바마 행정부가 김정일의 죽음에 대해 (보도 이전에) 알지 못했다고 해도, 미국은 이미 김정일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2008년 8월 김정일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지면서 미국은 김정일의 기대 수명을 3년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즉 김정일의 죽음을 변수로 생각해 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북한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에 즉각적으로 합의를 도출해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입장이다. 북한이 북미합의에서 그동안 다른 입장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일단 이 두 가지 추측의 공통된 전제는 다음과 같다.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북미합의라는 외교적 성과와 식량 지원이라는 경제적 성과를 얻어낼 필요가 있었고, 게다가 김정은 체제로의 체제 전환과 내부 안정을 위해 대외적 안정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얻어내는 방법인데, 그 상황에서 김정일의 죽음은 북한이 미국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미국과 합의를 이뤄내는 변수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해진다. 첫 번째는 김정일의 죽음으로 북한의 전향적인 대외정책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만일 김정은을 비롯한 차기 세대들이 군부 강경파에 맞서 유화적인 대외노선과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생각했다면, 김정일의 죽음은 이 차기 북한의 지도층 입장에서 이러한 노선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의 반영이 이번에 미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한 것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추측에는 아주 복잡한 가정이 두 가지 필요하다. 바로 김정은 지도체제가 군부 강경파를 누르고 권력을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가정, 김정은과 북한 지도부가 개혁적인 방향의 노선을 결심했다는 가정, 이 두 가지가 그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에 대한 두 번째 추측은 첫 번째 추측과는 정반대로, 북한이 김정은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혼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미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은 북한이 지금의 내부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시간 벌이’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은 그동안 다른 국가들과 합의한 내용을 슬금슬금 깨버리는 일을 반복해왔다. 북미합의를 했다 손 쳐도 6자회담이나 3차 북미회담에서 합의를 깨버릴 수도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작업을 손수 지휘하며 안정적인 김일성 체제 내에서 20년간이나 후계자 수업을 받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안정적으로 체제 유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은 그럴 시간이 없다. 2009년에 후계자로 내정되고 2010년 당 대표자회의를 통해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오른 것이 경력의 전부다. 단독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국정을 운영하며. 지도력을 발휘한 경험이 거의 없다. 이에 반해 김정일 체제에서 2인자였던 장성택은 권력이 막강하다. 행정부장으로 공안업무를 책임지고, 국방부 부위원장으로 국방정책에도 관여하고 있으며, 황금평 특구 개발에도 개입하고 있다. 특히 2010년 당 대표자 회의에서 당 비서 최룡해, 당 부장 리영수, 평양시당 책임비서 문경덕, 주중대사 지재룡 등의 장성택 최측근들이 중앙정치 무대에 진입했다. 이렇게 힘이 커진 장성택이 김정은에게 복종할 것인지 미지수이다. 또한 아직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부의 존재도 미지수다.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이 새로운 권력을 꿈꿀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은 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군부와 장성택과 김정은이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지도체제나 군부와 장성택이 힘을 합쳐 김정은의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연합뉴스, “김정은 후계구도 유지될까”)

 

김정일의 죽음은 서로 다른 권력들 간의 갈등을 관리해주던 절대적인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즉 북한에서 권력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북한이 혼란 속으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김정은이 주도하여 김정은 체제의 성과를 내세우기 위해 급하게 미국과의 합의에 동의했거나, 아니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단 시간벌이용으로 합의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이번 북미합의와 김정일 사망 사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일은 북한 내부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제일 먼저 파악하고,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해도 A부터 Z까지 진행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북관계 로드맵을 작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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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6

결국 한미 FTA가 통과되고 말았다. 지난 11월 22일, 한나라당은 본회의를 소집하여 날치기로 한미 FTA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고, 이에 반발한 야당 세력과 시민, 노동자들이 매일 밤 비준무효를 외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지난 주 토요일인 11월 26일에는 2008년 촛불집회 이후 3년 만에 집회 참가자들에 의해 광화문사거리 도로가 점거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종로경찰서장이 시위대 안으로 진입하다가 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이 벌어졌고, 보수언론과 경찰, 청와대는 ‘폭력집회’와 ‘법치주의’ 프레임을 내세워 총공세에 나섰다. 한미 FTA를 둘러 싼 사회적 갈등이 점점 증폭되고 있다.

지난 번 글(http://hook.hani.co.kr/archives/35367)에서 나는 한미 FTA의 핵심이 수출이나 일자리 증진, 소비자 이익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박가분이 이전에 한겨레 훅에 올린 글(http://hook.hani.co.kr/archives/35920)에서 잘 지적했듯이, 한미 FTA로 인해 한국의 수출이 증진할지, 소비재 가격이 하락할지, 일자리가 늘어날지는 ‘알 수 없다.’ 경제학적인 논의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미 FTA로 인한 경제적인 효과는 한미 FTA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관세가 줄어들어 수출이 증대한다는 가정이 성립하려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가정이 성립하려면, 소비재 가격이 하락하여 효용이 증진한다는 가정이 성립하려면 수많은 경제학적 조건과 변수들이 고정되어 있거나 이 수많은 변수들을 우리가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떤 경제 모형에 대입하느냐에 따라 FTA의 경제적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따라서 한미 FTA의 진정한 목표는 관세 인하나 상품 교역의 증진이 아니다. 오히려 한미 FTA는 수출과 일자리 증진, 소비재 가격 하락이라는 경제적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예측할 수 없다 해도’ 더 큰 목표를 위해 해야 하는 무언가에 가깝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미 FTA가 타결되자마자 발간한 2007년 4월 5일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통적 FTA는 관세인하를 통한 무역확대가 주목적이었으나 WTO 발족 이후 탄생한 FTA는 투자유치, 경제개혁 등 동태적 효과를 중시”한다. 또한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는 관세 인하로 인한 수출 증진과 소비자 이익을 내세워 한미 FTA를 찬성하는 이들을 꾸짖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FTA를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할 수 있다.) 최근 FTA 협상의제는 상품, 관세 뿐 아니라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으로 확대(되었다). (FTA는) 상품의 교역구조는 물론 산업 및 경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FTA를 추진하면서 상품교역에 따른 이익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근시안적 접근(이다). 지식집약산업과 고부가가치산업으로의 구조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내부적 자극이 부족한 상황에서 FTA를 산업구조 고도화의 계기로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제조업과 달리 내수산업으로 성장해 오던 국제경쟁에 노출되지 않았던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이 낮은 상황(이다). 거대 경제권과의 FTA는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의 체질 강화에 기여(한다).(삼성경제연구소,「한미FTA 협상타결과 한국 경제의 미래」중 인용)

위에서 인용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는 한미FTA의 진정한 목적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한미FTA의 목적은 단순히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개방해 교역을 늘리는 데 있지 않다. 한미 FTA는 미국식 ‘선진’ 경제시스템의 도입으로 인해 한국경제의 체질을 변화시킴으로써, 양극화와 저성장으로 침체에 빠진 한국경제를 살려보자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즉 한미 FTA란 투자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동시에 공공영역의 많은 부분을 민영화하는 ‘미국식’ 경제 시스템의 도입(이는 투자자-국가 소송제나 의료민영화로 대표될 수 있다.)이자, 금융 및 서비스 산업을 포함하는 3차 산업 국가로의 전환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미 FTA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FTA를 둘러 싼 두 가지 ‘호도’에 대해 반박할 수 있다. 먼저 이런 관점에서, 보수 언론이 FTA에 반대하는 것을 대책도 없는 ‘쇄국’이나 ‘보호무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FTA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하는 행위이다. 대한민국의 대외의존도는 이미 70%가 넘는다. 대체 이 정도로 자유무역을 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미 한국은 ‘충분히’ 자유무역을 하고 있다. 미국과 FTA를 맺지 않는다고 한국이 보호무역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한미 FTA는 한국이 자유무역을 하느냐 보호무역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미국식 시스템으로 나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나는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미국식 시스템으로의 개조에 반대한다.

보수 언론들 못지않게 현재 FTA를 반대하는 세력 역시 FTA의 본질을 흐리는 반대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참여정부 출신의 야권 정치인들과 참여정부 지지자들이 대표적이다. 문재인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야권 인사 일부와 김어준 같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 중 일부가 “참여정부의 FTA는 그나마 이익균형을 이뤘는데, 이명박 정부의 재협상으로 한미 FTA는 불평등해졌다”는 헛소리를 일삼고 있다. 이 헛소리 중 가히 최강은 “노무현 정부의 FTA는 착하고 진품이며, 이명박 정부의 FTA는 나쁘고 짝퉁”이라는, 듣기에도 민망한 소리들을 내뱉는 상식과 원칙 좋아하지만 상식도 원칙도 전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주장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2010년 말 미국과 재협상을 해서 자동차 분야에서의 관세 인하 보류 등을 비롯한 10가지 정도의 조항을 미국과 재협상했다. 이들은 이를 근거로 한미 간의 이익 균형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한다. 차라리 안희정 지사나 송영길 시장처럼 소신 있게(?) FTA를 찬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제전문가들마저도 한미 FTA의 효과를 다르게 예측할 만큼,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미국과 윈 윈 하는 협상을 했는데, 조항 몇 개 재협상했다고 이명박 정부는 미국에게 나라를 팔아넘겼다고? 몇 개 조항의 변동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미국과 한국에게 어떤 이익으로 돌아갈지 ‘예측’할 만큼 대단한 계산 능력을 갖추신 모양이다. 반대를 하고 싶다면 차라리 정동영 의원처럼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미국식 경제시스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 ‘미국식 경제시스템 도입’이라는 한미 FTA의 본질은 참여정부 때건 이후 이명박 정부 때건 변하지 않았다. 나는 참여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온 이 한미 FTA의 목적, 미국식 경제시스템으로의 개조에 반대한다.

참여정부는 2003년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이 미국식 경제시스템 도입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인수위 시절 내세운 ‘동북아 금융허브론’이 그것이다. 동북아 금융 허브론은 일종의 국가발전론이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에서 돈의 흐름은 국내 예금자나 투자자의 돈이 국내 은행이나 증권사를 통해 주로 국내 산업에서 운용된 뒤 다시 그 산업에서 발생한 기업이익금과 종업원 소득이 국내 은행에 저축되어 결국은 회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비해 금융허브론의 핵심은 국내는 물론 해외의 돈이 국내외 은행, 증권사, 자산운용사, 투자은행 등 금융회사를 통해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운영된 뒤 다시 국내외의 투자자에게 일정한 수익과 함께 회귀하는 자금의 흐름을 만들자는 것이다. 즉 돈의 세계적 순환이라는 금융세계화를 기반으로 하면서 국내외의 투자자들이 최대한의 수익을 뽑아낼 수 있는 금융시장 여건을 한국 내에 조성하려는 것이 금융허브론의 핵심 구상이었다.(복지국가 소사이어티에서 펴낸『복지국가혁명』244페이지 참조)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를 위해서는 금융투자가 활성화되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참여정부는 집권 내내 다양한 구상들을 실행에 옮겼다. 재정경제부는 2003년 한국을 ‘자산운용업 중심의 금융허브’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투자공사를 성립하고 ‘간접투자 자산운용업법’을 제정했으며, 2005년에는 금융기관의 아웃소싱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금융기관의 업무위탁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으며, 2007년에는 자본시장통합법을 추진했다.(『복지국가혁명』245페이지 참조) 참여정부는 한국의 금융 관련 제도들을 글로벌 스탠다드, 즉 미국 기준에 맞춰 개정했으며, 한미 FTA는 동북아 금융허브 프로젝트를 완성하여 한국을 미국처럼 만들기 위한 ‘체질 개선’ 프로젝트였다. 한미 FTA가 조항 전반에 걸쳐 금융시장 자유화와 투자자 보호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의 FTA와 노무현의 FTA는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미FTA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미국식 경제 시스템에 대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로, 투자자 보호 국가라는 국가발전모델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기준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나는 ‘선진통상국가’라는 모델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당이 ‘이익 불균형’을 내세워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에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는 ‘근시안적’이다. 이들이 집권 후에는 국익에 도움이 된다며 다시 FTA를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노무현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근시안적인 주장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지금의 FTA 반대운동이 반MB-반한나라당-진보대연합의 틀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지금 ‘MB와 한나라당에 반대하고 정권 교체를 이루기 위해’ 한미 FTA를 반대하고 있다. 진보대연합, 좋다. 그 기치에 따라 연합하고 연대하자! 단, 반MB가 아니라 반FTA로 연합하고 연대하자! 이명박의 FTA도, 노무현의 FTA도 모두 반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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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6

최근 한미 FTA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투자자 국가 소송제를 중심으로 청와대와 여당, 야당 사이에서 그리고 찬반 입장에 선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상반된 정보와 사실들이 넘쳐나서, 정보를 수용하는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옳은 이야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는 2006년에 한미 FTA가 처음 추진되었을 당시의 상황과 유사하다. 당시의 나는 당시 한미 FTA에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한미 FTA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지 못해도 한미 FTA에 대해 입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고민이 한미 FTA 비준을 앞둔 지금에도 필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한미 FTA가 추진되었던 당시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 이유는 한미 FTA를 둘러싸고 너무나 다른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성과 반대논리 모두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정교했다.

한미 FTA라는 사안 자체가 찬성 혹은 반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1) 한미 FTA란 쉽게 이야기해서 한국과 미국 간의 무역장벽을 낮추고 시장을 개방하자는 것이다. 개방되는 시장에는 상품시장은 물론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 등 광범위한 분야가 포함되어 있다.

 

최근 한미 FTA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투자자 국가 소송제를 중심으로 청와대와 여당, 야당 사이에서 그리고 찬반 입장에 선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완전히 상반된 정보와 사실들이 넘쳐나서, 정보를 수용하는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옳은 이야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는 2006년에 한미 FTA가 처음 추진되었을 당시의 상황과 유사하다. 당시의 나는 당시 한미 FTA에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한미 FTA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알지 못해도 한미 FTA에 대해 입장을 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고민이 한미 FTA 비준을 앞둔 지금에도 필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한미 FTA가 추진되었던 당시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 이유는 한미 FTA를 둘러싸고 너무나 다른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성과 반대논리 모두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정교했다.

한미 FTA라는 사안 자체가 찬성 혹은 반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 않았다.1) 한미 FTA란 쉽게 이야기해서 한국과 미국 간의 무역장벽을 낮추고 시장을 개방하자는 것이다. 개방되는 시장에는 상품시장은 물론 서비스, 투자, 지적재산 등 광범위한 분야가 포함되어 있다.

 

일단 노무현 정부는 집권 이래로 한국이 처한 경제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학력 실업이 확산되고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성장률과 성장잠재력이 둔화되고, 게다가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지금 한국에게는 새로운 성장 동력과 이를 통한 도약이 필요하다! 게다가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중국에게 따라잡힐 날이 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경제 시스템을 선진화하고, 세계시장 속 한국의 경쟁력을 제고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을 ‘경제 선진화론’이라 칭할 수 있다. 즉 한국 경제의 위기를 ‘경제선진화’를 통해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선진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개방’이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 즉 대외무역을 통한 경제 발전과 성장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 잘 먹고 잘 살려면 수출을 늘리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이를 위해 무역 장벽을 낮추고 시장을 개방하는 FTA는 필수적이다.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FTA를 통한 시장 개방에 주력하고 있다. FTA 열등생 대한민국은 이제라도 FTA라는 세계적 조류에 적극 동참하여야만 한다. 개방을 통해 경쟁력 있는 외국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면 한국 기업들도 이들과의 경쟁을 위해 기업 체질을 변화시킬 것이고, 경제 시스템 역시 선진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것을 ‘개방을 통한, 즉 외부 쇼크에 의한 내부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일단 우리는 누구와 FTA를 맺어야 하는가? 최대한의 시장 개방을 위해서는 동시다발적인 FTA 추진이 필수적이지만, 일단 미국과의 FTA가 급선무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시장이므로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경쟁국 기업들이 미국과 FTA를 맺어 미국에 진출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미국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미국은 또한 최고로 ‘선진화된 경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시장이기도 하다. 미국은 지식기반의 3차 산업인 금융, 서비스 시장이 가장 발달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현재 세계시장에서 가장 큰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금융과 서비스업이다. 한국이 미국과의 FTA를 통해 금융, 서비스 시장을 개방하고, 그 효과로 선진적인 경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면 침체에 빠져 있는 한국경제를 살릴 수 있으며, 제조업 분야 등 1,2차 산업에서 한국을 따라잡을 신흥 성장국과도 격차를 벌리면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개방은 시장을 넓히는 전략입니다. FTA와 적극적인 해외 투자, 이런 것인데 개방도 이제는 단순히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교류하지 않은 문명은 전부 쇠약하고 소멸했습니다. 세계의 역사, 이른바 물질적 측면의 세계 역사는 통상 국가가 주도해왔습니다. 물질문명을 주도하는 국가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지배받지 않으려면, 지배력에 대항하려면 적어도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통상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진적 통상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방하고, FTA도 해야 합니다.”2)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논리에 따라 FTA가 결국 한국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보수언론과 FTA를 찬성하는 지식인/전문가들도 같은 논리로 한미 FTA에 찬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 FTA 추진과정이 민주주의적 절차에 위배된다거나,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너무 성급하게 FTA를 추진한다는 비판은 정당하지만, 정부 관료들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 비판이다. 그들은 “그럴 시간이 어딨어?”라고 응대할 것이 뻔했다. 1분 1초라도 늦으면 엄청 손해 보는 이 판에서 일일이 국민의 동의와 합의를 구하며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손익 관계를 계산할 시간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개방과 선진 시스템 구축은 선택이 아니라 과학법칙이었고, 국가를 위한 필수과제였다.

이런 믿음 하에 노무현과 경제 관료들은 모든 반대를 억누르면서 2007년 4월 2일 한미 FTA 협상을 최종 타결했다. FTA 협상 전반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은 협상이 결렬될 위기에 처하거나 국내로부터의 격렬한 정치적 반대에 직면했을 때마다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이 빛을 발했다고 칭찬했다. 늘 노무현의 결단력을 무모하고 위험한 치기라고 비난해왔던 조선일보마저 한미 FTA가 최종 타결되던 날만큼은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위대한 결단을 내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노무현의 이러한 결단은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위험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가 FTA를 추진하는데 기반하고 있던 믿음이란 한 마디로 미국과의 FTA를 통해 지식 기반의 3차 산업 시장을 개방해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이를 경제도약의 기회로 삼아 양극화를 비롯한 한국이 처한 경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이 한미 FTA를 처음 공론화한 2006년 1월 18일 신년 연설의 주제가 다름 아닌 ‘양극화 해소’였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러한 믿음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과연 한미 FTA는 양극화를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FTA가 추구하는 대규모 시장 개방, 그리고 모든 영역의 시장화를 제한적이나마 경험한 적이 있다. 바로 1997년의 IMF 사태 이후의 경제개혁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양극화가 문제시되기 시작한 때는 IMF 사태 이후였다. IMF 이후 도입된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인해 한국은 노동자들은 언제나 실업의 위기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상태를 살아가게 되었다. 즉 IMF 이후 나타난 양극화의 심화는 시장개방과 상시적 구조조정 같은 신자유주의정책의 ‘결과’였다. 한미 FTA는 IMF 경제개혁에 절대 뒤지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정판이다. 한미 FTA로 인해 서비스 분야를 비롯한 다양한 공공 영역이 모두 개방되어 시장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고, 정부가 공공성의 확보를 하고 싶어도 이를 되돌리는 정책을 시도할 수 없다.

게다가 한미 FTA가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제성장이 분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일단 파이가 커지면 그 커진 파이를 다 같이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 분배로 이어진다는 경제학에서의 낙수 효과(Trickle down)가 과연 현실에서도 작동하는 것일까? 현실에서 정부나 국가권력의 개입이 없으면 부는 집중되기만 할 뿐 나누어지지는 않지 않는가? 그러나 한미 FTA 협정문은 정부의 시장 개입을 강력하게 저지하는 조항들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FTA로 인한 경제성장의 혜택이 많은 노동자, 농민, 서민들에게 ‘자발적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또한 정부가 주장하는, 한미 FTA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선진화된 경제 시스템이 과연 ‘선진적’인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선진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정부가 한미 FTA로 커질 것이라 생각하는 파이가 과연 실속 있는 파이인가에 대한 의심이다. 미국식 선진 경제 시스템을 대표하는 ‘금융 산업’은 실물 경제에 기초하지 않은 채 ‘돈 놓고 돈 먹기’를 통해 성장한다. 이런 ‘돈 놓고 돈 먹기’는 언젠가 경제공황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고, 2008년에 미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두 번째, 공공영역마저 시장에게 맡길 경우 돈 없는 사람들은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 영화 <식코>가 잘 묘사했듯이 돈이 없어서 아파도 병원에 못가는 사람들이 즐비한 나라가 미국이다. 이것을 ‘선진화된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이 몇 퍼센트 오르고 주가지수가 얼마 오르는 것만으로 그 체제를 ‘선진적’이라 말한다면, 그 ‘선진화’는 너무 비인간적이다. 선진 안 하고 말겠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한미 FTA에 반대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한미 FTA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한미 FTA에 반대한다. 한미 FTA를 하면 한국과 우리가 얻을 수 있다는 바로 그것들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들을 얻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

 

각주

1) 한미 FTA의 대표적인 찬성론자인 이화여대 최병일 교수는 한미 FTA 찬반 유형을 생계형 반대/이념적 반대/경제적 중립/무관심/비판적 지지/전략적 지지/생계형 지지라는 8가지로 정리했다.(최병일,『한미 FTA 역전 시나리오』, 랜덤하우스, 2006, pp.65-79 참조)
2) 노무현의 2007년 6월 참여정부평가포럼 연설 중 한 대목이다.『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193페이지에서 재인용했다.

3) 이 발언은 한미 FTA를 처음 노무현에게 제안하고 그 기획과 추진을 주도했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서 한 말이다.『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김현종, 홍성사, 2010)의 12, 13페이지에서 인용했다. 이 책에는 한미 FTA를 추진한 실무자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FTA를 추진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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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4

정치권이 ‘오세훈 사퇴’로 소용돌이에 휩싸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곽노현 쇼크’다. 검찰이 2010년 교육감선거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곽노현 교육감과 금품을 주고받은 혐의로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를 소환, 조사했을 때만 해도 검찰이 표적수사를 한다는 의혹이 많았다. 그러나 곽노현 교육감이 지난 28일 박명기 교수에게 2억 원을 건넨 사실을 시인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는 지난 8월 28일 서울시교육청에서 연 기자회견 자리에서 “박 교수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 선의로 총 2억원을 지원했다”며 “박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 선거 과정에서 (후보 사퇴 전까지) 많은 빚을 졌고, 이때 생긴 부채 때문에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에 있다고 들어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선거에선 공정성을 위해 ‘대가성 뒷거래’를 불허해야 하지만, 선거 이후는 또 다른 생활의 시작인만큼 박 교수의 곤란한 처지를 외면하는 것은 몰인정한 법 집행”이라며 검찰이 의심하고 있는 대가성을 전면 부인했다.

곽노현이 대가성이 아닌 선의를 내세우는 것과는 별개로 검찰 수사는 진행 중이다. 곽노현의 부탁을 받고 박명기에게 2억 원을 건넨 것으로 알려진 강모 교수가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곽노현의 부인 역시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오늘 9월 5일 곽노현 본인 역시 검찰수사를 받았다. 검찰 수사의 쟁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1) 곽노현이 건넨 2억 원에 대가성이 있느냐. 2) (대가성과 관련해서) 곽노현 측이 선거비용 보전을 요구한 박명기 측에게 돈을 주기로 '미리' 합의했느냐. 3) 이러한 양측의 합의를 곽노현이 미리 알고 있었느냐, 아니면 실무자들이 합의하고 난 뒤 나중에 알았느냐.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을 비롯한 보수 세력은 부패 비리교육감은 당장 사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목소리가 갈리는 것은 진보 세력들이다. 민주당과 진보정당,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곽노현 책임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곽노현이 교육감으로서의 책임의식을 느끼고 사퇴해야 한다고 말한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박주선, 정세균, 조배숙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이러한 목소리를 냈다.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과 금태섭 변호사, 시사평론가 진중권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지금껏 진보세력이 부패한 보수 정치인과 관료에게 적용했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곽노현 역시 같은 기준에 따라 사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곽노현을 방어하는 진보 세력도 있다. 천정배, 전병헌, 김진애 민주당 의원이 당 지도부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며 민주당을 비판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심상정 진보신당 고문, 최재천 변호사, 조국 교수 역시 보수 세력과 일부 진보세력의 곽노현 때리기를 비판했다. 곽노현이 이미 스스로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법적인 책임(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보수 세력의 주장에 휩쓸려 곽노현 때리기에 동참하는 행동은 섣부르다는 것이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도 ‘나는 꼼수다’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대가성 입증 전까지 입을 다물어야한다.”고 말했다.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은 박명기 교수의 변호를 법부법인 바른(보수적 성향의)이 맡았다는 언급을 하며 정권 차원의 표적 수사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는 이 글에서 곽노현이 사퇴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번 사건의 다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보세력에게 ‘도덕성’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판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진보세력은 도덕성을 무기로 삼아왔다. 그리고 실제로 이는 훌륭한 무기로 작동했다. 진보는 기득권을 장악한 채 부패하는 보수에게 맞설 무기로 도덕성을 제시한다. 보수는 부패한 기득권이지만, 진보는 그들보다 깨끗하고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2002년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은 어떻게 보수양당의 ‘대세’(이회창과 이인제)를 모두 꺾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도덕성이었다. 그는 돼지저금통을 만들어 국민에게 직접 후원을 받은 다음, 그 사용내역을 매일매일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했다. 부패를 방지할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도덕적이고, 청렴한 이미지는 당시 국민들에게 굉장한 신뢰를 주었다.

도덕성이 진보의 중요한 무기라는 사실은 일부 진보세력이 내세우는 ‘곽노현 책임론’의 근거이기도 하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은 “도덕성·개혁성이 유일한 무기인 진보진영이 이를 내다버리고 싸울 수 없다”며 곽노현이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한다고 말했다. 진보세력이 도덕성을 상실하면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을 수 있으므로, 이른바 ‘가지 쳐내기’를 통해 도덕성을 잃은 진보 정치인과 진보세력을 구별 짓기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성은 진보에게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그 무기는 양날의 검이다. 도덕성을 통해 보수와는 다른 좋은 이미지와 신뢰를 얻을 수 있지만, 반면에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 터지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은 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진보적인 정치인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도덕성을 무기로 내세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내내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도덕성 공세에 시달렸다. 2003년 10월 최도술 당시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그룹에게 11억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을 때,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가 그러했다. 노무현에게 도덕성은 너무 중요한 무기였기 때문에, 그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재신임’과 ‘대통령직 사퇴’까지 내걸면서 맞섰다. 그 이후에도 조중동 등의 보수언론은 썬앤문그룹 95억 원 제공 의혹, 유전 개발 의혹, 행담도 개발 의혹, JU 로비 의혹, 바다이야기 연루 의혹 등 수 많은 공세를 퍼부었고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특검제를 들이대며 노무현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재임 시절에는 대부분의 의혹들이 사안이 경미하거나 무혐의인 것으로 밝혀졌지만, 퇴임 이후 박연차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노무현의 죽음 이후 상황이 완전히 뒤집히기는 했지만) 당시 노무현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보수 진보 양측으로부터 난타를 당해야 했다.

그렇다면 진보는 이 양날의 검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끊임없이 진보는 보수보다 도덕적이어야 한다며 비리를 저지른 진보적인 인사들의 도덕성 문제를 ‘진보 세력 전체’가 아닌 ‘개인적인’ 문제로 만들며, ‘가지 쳐내기’를 반복해야 할까? 아니면 정희준 교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도덕성은 보수에게나 던져버리고, 진보는 다른 무기를 찾아야 하는가?(정희준, "도덕성, 보수에게나 던져버려라.", 경향신문, 2011.09.0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042108105&code=990000)

아니면 계속 도덕성이라는 무기를 손에 쥔 채 “상대적으로!”라고 외쳐야 할까? ‘그래도 우리는 한나라당보다 낫다’면서, 한나라당이 뿌린 돈에 비하면 곽노현이나 노무현이 받거나 준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치며 인정에 호소해야 하는가? 곽노현이나 노무현을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진보세력들에겐 이 호소가 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진보나 보수나 정치인은 ‘그놈이 그놈이다.’ 깨끗하고 부패하지 않았다고 해서 뽑아줬는데 도덕성에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냉소주의에 빠질 뿐이다.

진보가 도덕성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도덕성이 작동하는 조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인권변호사에, 거대자본 삼성과 맞섰던 곽노현이다. 진보개혁세력의 상징이었던 그다. 그가 어쩌다가 도덕성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정치’에 대해 다시 되물어야 한다. 정치인의 엄청난 도덕성에 기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바로 그 정치에 대해 다시 되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진보가 도덕성을 계속 무기로 삼아야 하는지, 아니면 버려야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두 주장 모두 본질을 놓치고 있다. 도덕성을 무기로 계속 삼으면서 진보 정치인의 비리를 '개인' 문제로 보는 것도,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도덕성은 보수에게나 줘 버리자는 주장 양자 모두, 곽노현 사건이 드러낸 도덕성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정치인의 엄청난 도덕성에 기대는 것 외에 별로 방법이 없는' 정치라는, 문제의 본질 말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택하고 있는 정치적 제도에 문제가 없는지 되물어야 한다. 어마어마한 정치자금이 동원되는 선거에서, 후원제도도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후보자들은 늘 돈의 유혹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박명기에게 정권의 편에 섰다느니 배은망덕하다느니 하는 '도덕적 비난'을 가하기 전에 개인 돈으로 선거에 출마하고 그 돈을 다 날리면서 단일화를 해야 했을 때 그의 입장이 어떠했을지 생각해야 한다. 이번 곽노현 사건을 통해 드러난 '정치자금'과 관련된 문제들이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후보자들은 늘 돈 거래의 유혹에 시달리고, 곽노현 사건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국에서 작동하는 대의 민주주의가 정치인의 도덕성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한다. 일단 한 번 선거에서 이겨 권력을 잡고 나면, 대표자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자들은 도덕성을 버리고 싶은 유혹, 부패를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선거 이후 이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성을 무기로 삼기 전에, 깨끗한, 굳은 신념을 가진 정치인들이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로소 우리는 '정치라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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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3

현대 자본주의가 운영되는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장치 중 하나는 ‘신용’이다. 자본주의에서 교환은 화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화폐만으로는 대규모 거래나 자본의 축적과 성장이 힘들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신용이다. 자연인 혹은 법인들은(채권을 발행하는 국가도) 상대방이 일정기간 후 상환 또는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인정함으로써 물건이나 돈을 빌려주거나 지불을 연기하는데, 이것을 신용이라 한다. 이러한 신용을 통해 자연인이나 법인들은 지금은 돈이 없어도 자금을 빌려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상업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 시대 이 신용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금융자본주의의 시대라 부를 수 있는 지금도 이 신용은 막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신용을 기반으로 엄청난 파생상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수천 조의 돈이 시장에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어떤 자연인이나 법인, 더 나아가 국가의 신용은 누가 평가하고 결정하는가? 많은 기관들이 신용 평가 혹은 신용등급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주목해야 할 이들은 신용평가사이다. 많은 신용평가사들 중 특히 세계 3대신용평가사라 불리는 S&P(Standard & Poors), 무디스, 피치가 세계금융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과 국가의 신용등급을 발표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저승사자’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행사해왔다. 이들이 매번 발표하는 신용등급이란 한마디로 돈을 빌리려는 국가나 기업에 대한 ‘재무 성적표’이다. 즉 채무를 이행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환 지연 혹은 부분 상환에 따라 손실 규모가 얼마나 될지 측정해 등급별로 표시하는 예측 지표이다. 채권을 사는 투자자들은 투자의 안전성을 가늠하는 정보로 이를 활용한다. 신용평가사들에 따르면, 그들은 이러한 등급 설정을 통해, 안전한 투자처에는 자금 유입을 장려해 사업을 확장시키고 부실한 곳에는 자금 유입을 막아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기능을 담당해왔다(고 한다).

이 저승사자 중 한 명이 최근 파격적인(?) 신용등급 강등을 발표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한 곳인 S&P가 70년 동안 최고 신용등급인 트리플 A(AAA)를 유지해온 미국의 신용등급을 AA+로 한 단계 강등하고(미국 국채의 신용등급의 하락을 뜻한다) 2년 내 AA로 추가 하향할 수도 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S&P는 몇 차례 미국에게 신용등급 강등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해왔다. 발단은 미국의 부채한도액이다. 모든 국가에게는 자국 내의 기준에 따른 ‘부채한도액’이 있다. 미국의 부채한도액은 14조 3000억 달러이다. 미국의 부채가 이 한도액을 넘어서면 미국은 공식적으로 디폴트(국가 부도) 상태에 빠지게 된다.(8월 2일이 그 시한이었다.) 따라서 미국 정치권에서는 이 부채한도액을 인상하려고 노력해왔는데, 공화당과 오바마가 내세운 한도액이 서로 달라 갈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S&P는 부채한도 인상을 가지고 계속 정치권이 분열한다면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고, 공화당과 오바마가 부채한도액 인상에 합의했음에도 신용등급 강등을 발표했다. 미국이 내세운 부채한도액과 장기 재정적자 감축 계획(부채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하락함에 따라 상징적이고, 그리고 실제적인 ‘충격’이 있었다. 몇 몇 언론들은 미국의 위기니 몰락이니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신용등급 강등을 위기로 판단하는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미국은 높은 신용등급을 유지한 대가로 국채를 마음껏 발행하여 재정 적자를 극복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미국 국채’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매입하니 재정이 적자 상태여도 금방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국채의 이자율이 낮아도 많은 이들이 미국의 신용도 때문에 미국 국채를 구입했다. 하지만 신용 등급이 강등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투자자들은 위험성이 높다고 판정받은 미국 국채를 덜 사려 할 것이고, 재정 적자에 처한 미국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채 발행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국채를 팔기 위해서는 국채의 이자율을 높여야한다. 이 경우 국채와 연동되어 있는 주택 대부 금리, 자동차 융자 금리 등이 한꺼번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러한 금리인상은 자연스레 소비 위축으로 이어져 미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더욱이 이미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등급이 떨어진 미국 국채를 팔아버린다면 상황은 더욱 안 좋아진다. 신용등급 강등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1)

그러나 나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세상에, 아직도 S&P 같은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이 객관적인 지표로 작용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실제로 영향을 받다니! 나에겐 다름 아닌 이것이 충격이었다.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 평가는 얼마나 객관적이고, 또 정확한 것일까? 과연 신용평가사들에게 엄청나게 역동적인 변수들을 통해 결정되는 기업이나 국가의 ‘신용’상태를 평가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것일까? 바꾸어 말하자면, 남들의 신용을 평가하는 역할을 하는 신용평가사는 과연 ‘신용’할만한 이들일까? 폴 크루그먼이 최근 칼럼에서 언급한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신용할 수 없는 자들인지가 드러난다. S&P는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바로 그 달에도 리먼 브라더스의 신용등급을 A로 유지했다. 시장성이 없고 투자가치가 없는 기업이, 즉 신용이 없는 기업이 시장에서 바로 퇴출당하듯이, S&P는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 때 회사 문을 닫았어야 했다. S&P의 신용등급은 아무 객관성이 없는 지표로 전락했어야 했다.

리먼 브라더스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S&P를 비롯한 신용평가사들은 2008년 금융위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엉터리 신용평가로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그들은 검찰 수사와 청문회에 불려 다녀야했다. 신용 평가사들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 참여 했을 때 공개된 신용평가사 회사 직원들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그 거래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등급을 매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부자가 돼서 은퇴할 때까지 이것이 무너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06년과 2007년 신용평가사들이 최고 등급 판정을 내린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모기지) 상품 가운데 90% 이상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정크본드(쓰레기 채권. 투자 위험성이 지나치게 높은 채권)로 판명되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1년 분식회계(회계장부 조작)가 밝혀져 거대 에너지기업 엔론이 파산한 사건이 있었다. 무디스와 S&P는 엔론이 파산하기 나흘 전 그들에게 ‘투자적격 등급’을 매겼다. 채무불이행까지 이르렀던 캘리포니아의 전기. 가스. 수도기업인 캘리포니아 유틸리티스는 채무불이행 2주 전까지 A-등급을 받았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1997년 11월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아 국가부도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에게 ‘투자 적격’에 해당하는 A등급을 안겨주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이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자 한 번에 6~12등급까지 강등시키면서 한국이 더욱 빚을 갚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엉터리 신용평가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졌듯이, 국가와 기업들은 높은 신용등급을 받기 위해 신용평가사에 엄청난 로비를 한다. 신용평가사들이 어떻게 신용등급을 매기느냐에 따라 국가와 기업의 경제에 엄청난 득이 될 수도, 엄청난 타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정확한 지표가 나올 리가 없다.

즉 신용평가사들은 별로 정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지표를 내세워 권력을 행사하고, 그 결과 많은 투자자들과 기업, 국가경제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이 권력을 이용해 국가와 기업을 협박하기까지 하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신용평가사들이다. 2008년 잘못된 신용평가로 금융위기가 터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놓고. 염치가 없는 건지 낯짝이 두꺼운 건지 이제 와서 미국의 신용등급이 어쩌구 떠들어댄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신용평가사들은 신용 없는 국가와 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면서 자본주의의 수호자 행세를 해왔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해서, 신용 없는 신용평가사들도 전부 시장에서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자본가들과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가 시장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합리적인 체제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자본주의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금융시장에서 돈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신용’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합리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힘과 권력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신용평가사라는 권력에 의해서 말이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보여준 충격은 바로 이것이다.

각주

1) 이러한 예측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미국 신용등급 강등 이후 오히려 미국 국채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양지선, ““S&P, 네가 틀렸어”… 신용등급 강등 이후 美 국채 가격·인기 되레 올라“, 국민일보, 2011.8.17.) 어쩌면 폴 크루그먼이 뉴욕 타임즈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s&p의 신용등급 평가는 객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제는) 실제 경제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참고자료

권웅, “신용평가사에 끌려 다니는 오바마”, 시사인 제 202호, 2011.8.4.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30)
박형숙, “신용평가사 ‘빅3’ 너희를 평가해주마”, 시사인 제60호, 2008.11.5.(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3204)
이승선, "미국이 처한 위기는 디폴트가 아니라 신뢰 상실", 프레시안, 2011.07.28.(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728153642&section=05)
이승선, “美 신용등급 초유의 강등 사태…'트리플 A'에서 'AA+'로”, 프레시안, 2011.08.06.(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806140447)
H, “미국의 정부부채와 신용등급”(http://socialandmaterial.net/?p=1181)
Paul Krugman, "Credibility, Chutzpah and Debt", The New York Times, 2011.8.7.(http://www.nytimes.com/2011/08/08/opinion/credibility-chutzpah-and-debt.html?_r=3&src=ISMR_HP_LO_MST_F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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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9 00:33

지난 22일 노르웨이에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노르웨이 현지시각으로 오후 3시 30분 경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정부청사 근처에서 차량 폭탄으로 보이는 테러가 발생해 7명이 숨졌고, 오후 5시 30분 경에는 오슬로에서 30km 떨어진 우토야 섬에서 열린 집권 노동당 청소년 캠프장에서 한 남성이 총기를 난사해 85명이 숨졌다. 경찰은 정부청사 테러와 총기난사의 용의자로 32세의 노르웨이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을 체포했다. 그는 극우 성향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이민자들을 널리 수용하는 집권 노동당의 다문화주의 정책에 반발하여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어떤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가장 쉬운 분석은 그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번 노르웨이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브레이빅이 미쳤다고 한다면 문제는 매우 쉬워진다. 브레이빅이 범행 전 약물 복용을 했고,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폭력적인 게임을 즐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유럽의 몇 몇 극우정당들은 이민자들을 몰아내자는 브레이빅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미치광이를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범죄를 방지하는 대안을 제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문제는 쉬워진다. 우리는 브레이빅처럼 미치지 말아야 한다. 좀 더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우리 사회 내의 다른 타자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말고, 그들을 보듬는 관용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노르웨이 참사를 보도하면서 하나 같이 이런 목소리를 냈다. 보수언론의 노르웨이 참사 관련 사설과 칼럼들을 살펴보자.

“한국에서도 내실 있는 다문화 정책을 펴나가면서 소외아동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최연혁, “노르웨이 테러 불러온 北歐 가족 해체”, 조선일보 7월 27일자 시론)

닫힌 마음으로는 대한민국이 글로벌시대에 계속 발전해갈 수가 없다.”2)(오태진, “외국인 혐오”, 조선일보 7월 26일자 만물상)

“우리나라는 유럽 국가와 처지가 다르고 다른 문화, 다른 인종, 다른 종교에 열린 태도를 취해야 글로벌 시대에 역동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3)(동아일보 7월 26일자 사설)

“사회구성원들이 소외된 이웃의 친구가 돼주기 위해 적극 노력을 한다면”4)(주성하, “탈레반 테러만 위험한건 아니다… 전세계에 경종 울린 증오범죄”, 동아일보 7월 25일자 기자의 눈)

“테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약화될 때 고개를 내민다.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인 만큼 다를수록 서로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존과 관용의 정신이 전제돼야 한다.”5)(중앙일보 7월 25일자 사설)

보수언론은 ‘배려와 관심’, ‘열린 태도’, ‘공존과 관용’, ‘친구 되기’ 등의 단어를 사용해가며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 포용과 관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또, 과연 이번 참사에서 브레이빅이 경멸하고 혐오했던 ‘다문화주의’가 바로 보수언론들이 역설하는 그 ‘다문화주의’일까?

다문화주의는 단순히 다양한 문화가 한 공동체 내에서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아름답게 공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문화주의란, 나의 문화적 정체성과 시민적 권리 사이에 아무런 상관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그 누구도 그 공동체의 시민적 권리에서 배제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문화주의다. 따라서 다문화주의는 단어 자체가 지닌 탈 정치적인 뉘앙스와는 달리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정치를 고전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의 재생산’이라고 정의한다면, 다문화주의란 한 공동체를 재생산할 권리를 누구에게 부여하는가라는 문제(이민자들에게도 그 권리가 있다!)와 관련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참사를 통해 드러난 ‘다문화주의’의 문제는 보수언론들의 주장처럼 ‘이민자들을 포용하고 열린 태도로 이들을 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느냐 마느냐’이다.

브레이빅이 반대한 다문화주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다문화주의다. 그는 실업자 양산, 범죄의 증가, 복지비용의 증대와 같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기독교 백인들의 고유한 영토였던 유럽을 침입해 들어온 (이슬람)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이슬람 이민자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유럽이라는 공동체 구성원이 누리는 권리, 시민권을 부여하는 다문화주의라는 정치이념을 증오했던 것이다. 미국의 외교 문제 전문가인 존 페퍼가 이번 사건에 대해 “유럽의 극우파들이 경멸하고 공격하는 이슬람 교도 등 이민자들은 장기판의 말일 뿐, 사실 이번 사건은 유럽 내 이데올로기 전쟁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브레이빅이 이슬람교도들을 혐오했다면 모스크를 테러하면 될 일이다. 이슬람교도들에게 꺼지라고 외치면서 그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스크 대신, 노동당 출신 총리집무실이 있는 정부청사를 테러 했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총기를 난사하는 대신 노동당 청소년 캠프에 참여한 노동당 당원들을 무자비하게 쏴 죽였다. 그는 그가 척결해야 할 대상이라고 믿는 그 대상들 대신에,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국가권력, 정확히 말하자면 집권여당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것도 앞으로 그 집권여당의 핵심 인물이 될 청소년들을 향해 말이다. 그의 학살은 단순한 증오범죄가 아니라, 정치적인 요구를 담은 ‘폭력적 선전술로써의 테러리즘’이다.

이것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를 단순한 미치광이의 범행으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테러라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유럽의 극우정당들은 이미 많은 부분 브레이빅이 했던 주장을 반복해왔다.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지에서 강세를 보인 극우정당들은 브레이빅이 한 말과 별로 다르지 않는 공약을 내세우며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했고,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며 보수적 이민정책이 등장하기도 했다. 브레이빅처럼 테러를 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았을 뿐 유럽의 수많은 극우정당과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관대한 이민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을 상대로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개하며,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마리오 보르게지오 유럽의회 의원이 브레이빅에 대해 "폭력 부분을 빼면 일부는 훌륭하다"고 말하고, 네덜란드 극우정당 지도자 헤이르트 빌더스가 테러를 비난하면서도 반(反)이슬람주의 자체는 '평화지향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 극우단체 '영국수호동맹'(EDL) 대표는 반이슬람주의자들에게 감정을 표현할 민주적 수단을 제공하지 않으면 브레이빅 같은 '괴물'이 또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르웨이 참사는 테러라는 급진적인 방식을 띠기는 했지만 분명히 유럽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데올로기, 정치 투쟁의 한 단면이자, 그 기반이 탄탄한 극우세력들의 목소리의 반영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정치투쟁은 현 시기 노동운동과 노동자 정당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자 도전이다. 현재 세계정세 속에서 (특히) 이슬람권으로부터 들어오는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한다는 것은 현 시기 노동운동이 내걸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는 오늘날 유럽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대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6) 또한 우리는 누가 좌파이고 누가 우파인지, 이념적 경계가 점점 흐트러지는 현실에서 이민정책에 대한 태도가 유럽에서 누가 좌파이고 우파인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척도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이민에 반대할수록 우파, 포용적인 이민정책을 추진할수록 좌파로 분류된다.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취한다는 것은 유럽에서 좌파를 표방하는 정당, 정치세력이 내걸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태도이다. 브레이빅의 테러가 대표하는 극우정당들의 반 다문화주의, 관대한 이민정책에 대한 반대는 유럽의 노동자 정당, 좌파정당에 대한, 더 나아가 이 정치세력들이 기반하고 있는 노동운동과 노동계급의 연대에 대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투쟁이다. 옌스 스톨텐부르크 노르웨이 총리가 “이것은 노르웨이의 노동운동에 대한, 노르웨이의 노동당과 그 청년조직에 대한 공격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스톨텐부르크 노르웨이 총리는 너희 같은 꼴통들하고 타협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난 24일 오슬로 대성당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라고 말했다. 노르웨이를 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나라로 만들겠으며, 브레이빅이 내세운 반 이슬람, 반 이민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극우파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리고 유럽에서 이 투쟁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단일한 문화라는 이유로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모범 사례로 제시한 한국에서, 점점 외국인 이민자의 비중이 늘어가는 한국에서 앞으로 이 문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이번 참사를 미치광이의 소행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5년 전 작가 브루스 바워가 이슬람과 이민자, 다문화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쓴 책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해보자. “결국 유럽의 적은 이슬람교도나 이슬람 급진주의자가 아니다. 유럽의 적은 유럽 자신이다.”7)

각주

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7/2011072702356.html
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26/2011072602199.html

3) http://m.donga.com/MColumn/3/04/20110726/39076826/2

4) http://news.donga.com/Column_List/3/04/20110725/39047444/1

5)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643/5841643.html?ctg=
6) [메모] 노르웨이 참사(http://socialandmaterial.net/?p=1155)

7) 김봉규, “"왜 백인을 공격했냐고? 백인들이 진짜 적이니까”, 프레시안, 2011.07.29.(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727233142&Section=05)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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