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10.23 15:20

“할머니는 왜 천천히 읽어?” 못 배운 게 한이 된 87명의 시인들

[서평] 보고시픈 당신에게 / 강광자 외 86명 지음 / 한빛비즈 펴냄

대학진학율이 80%에 달하는 시대, 갓난 아이에게 한글은 물론 영어까지 가르치는 나라다. 이 런 시대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이들에게 ‘글자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을 몰라서 발생하는 불편함은 겪어보지 못한 ‘보릿고개’ 같은 존재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2014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0명 중 6명은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하지 못한다. 이런 비문해자들은 264만 명에 달하고 60~70대 여성 성인 10명 중 5~6명이 문해교육을 필요로 한다. 글을 배우지 못한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여러 사정으로 공부의 때를 놓쳤고, 나이 들어서는 자식 뒷바라지하다보니 60~70세를 훌쩍 넘겼다.

신간 ‘보고시픈 당신에게’는 각양각색의 이유로 한글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한글을 배우고 어르신들이 쓴 시와 산문 89편을 엮은 책이다. 저자는 늦깎이 한글학교 학생 87명이다. 고령이라 책이 출간되는 동안 세상을 떠난 저자도 있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글자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건 삶의 커다란 귀퉁이를 하나 허물고 사는 것과 같다”고 했다. 비문해자들은 한글을 읽고 쓰는 게 익숙한 일반인들이 상상하지도 경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간단한 메모나 은행 업무는 물론 아이들 공부 한 번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안타까움과 설움, 글을 몰라 깜깜했던 평생의 이야기가 시와 산문에 담겼다.

▲ 보고시픈 당신에게 / 강광자 외 86명 지음 / 한빛비즈 펴냄

“나는 회사에서 한글을 몰랐을 때 누가 전화가 와서 사장님이 박옥남씨 이거 메모 좀 해줘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아이 낳고 출생신고를 하러 간 날 나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손도 떨리고 얼굴은 빨개지고 말도 못했다”

“아이들 어릴 적 성적표를 받아와도 볼 줄도 어디에 도장을 찍을 줄도 몰라 남편 도장을 성적표와 함께 들려 보냈다. 만약 그 때가 지금이었다면 잘했다 머리 쓰다듬어주고 도장도 진하게 찍어 보냈을텐데. 이젠 나도 내 이름이 박힌 도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 은행에 가서 십억 보증서를 써달라 해서 은행에 갔는데, 이름을 못 써서 은행 직원이 내 손을 잡고 글을 썼다. 그 때는 너무 당황해서 땀을 팥죽 같이 흘렸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글씨가 안 보여. 노래 좀 찾아달라고 했다. 지금은 공부를 하고 나니 자신이 있어 두렵지가 않다”

“할머니 책 읽어줘. 세 살 먹은 손녀딸이 나에게 책을 읽어달랜다. 가슴이 벌컥 내려앉는다. 더듬더듬, 글자는 왜 이리 구불구불. 할머니는 왜 천천히 읽어? 할머니는 할 말이 없다”

글은 자신의 삶과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다. 늦깍이 학생들이 먼저 떠난 배우자와 자식, 며느리에게 전하지 못한 메모는 뒤늦게 시와 산문이 됐다.

“여보, 미안해요. 내가 빨리 글을 알았더라면 당신 이해하고 좋은 안내, 좋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었을 것을”

“우리 아저씨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가셨다. 살았으면 내가 편지라도 했잖아”

“달력도 못 보는 시어머니, 한글도 모르는 며느리. 미워서 원망했던 시어머니도 답답하고 깜깜한 세월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 적어 편지 한 장 보내고 싶다.”

비문해자들에게 문해 교육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쓴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선다. 시를 쓰고 산문을 쓸 수 있게 된 비문해자들은 모임을 만들고 사회에 참여한다. 문해교육은 세상을 연결해주는 창이자, ‘나를 위해’ 살 수 있게 만드는 첫 번째 작업이다.

“6연 전부터 몸이 아파요. 백병원에서 파키스병이라 함이다. 땀이 비오더시 헐러내림니다. 옷 두 벌 새 벌식 배림니다. 온 몸이 떨림니다. 그래서 글이 삐뚤삐둘함니다. 부끄럽지 안아요. 잘몬한 기 업서요.”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헤어져 우물쭈물하지 말고. 그랬다. 내 무식이 알려질까봐 속으로 벌벌 떨었다. 요즘은 세상이 환하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겁이 안 난다.”

“어렸을 때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흔한 동창생이 없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 허전하다. 오십이 훌쩍 넘어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남들에게는 흔한 동창생, 나에게는 특별한 동창생 내일은 옆집 언니한테 가서 말해야지. 언니 나도 동창 모임에 가요!”

모두가 ‘디지털 3.0’을 이야기하며 모든 업무를 인터넷으로 처리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참 편해 보이는 디지털 시대, 이 수많은 비문해자들은 어디 가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업무를 처리해야할까? 국가 지원이 필요한 문해교육 기관 중 실제 지원을 받는 곳은 1/3에도 미치지 못하고, 예산이 부족해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운영되는 곳이 다반사다. 문해교육이란 평생 남을 위해 사느라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국가가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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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9.27 16:47

밀정, ‘너에게 독립운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리뷰] 암살과는 달랐던 밀정의 결말…흔들림과 망설임 속에 도달한 독립운동이라는 목적지


(영화 ‘밀정’과 ‘암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 이 법칙은 한동안 한국영화의 징크스였다. 이 징크스는 지난해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최동훈 감독)로 인해 깨졌다. 이후 ‘귀향’, ‘동주’, ‘덕혜옹주’ 등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이어졌다. 내편인지 네 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파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밀정’도 일제강점기의 경성이 배경이다.  

‘암살’의 메시지는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역)의 말에 압축돼 있다. 따라서 ‘암살’은 안옥윤이 해방 이후 친일파이자 독립군의 밀정이었던 염석진(이정재 역)을 처단하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친일파 처단을 영화를 통해 이루는 일종의 판타지다.

▲ 영화 ‘암살’ 스틸컷

‘암살’에서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는 각기 서로 다른 배경과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황덕삼(최덕문 역)은 임무를 수행하다 사망하고, 목숨을 잃을 뻔한 속사포(조진웅 역)는 다시 총을 들고 현장에 나타나 친일파를 향해 총을 쏜다. 대장 안윤옥은 끝내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고, 밀정 염석진마저 처단하는데 성공한다. 영화 암살 속의 독립군은 하나같이 포기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한다.

반면 ‘밀정’의 메시지는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역)이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역)에게 건넨 말에 담겨 있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디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정출은 젊었을 적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지만 이후 일본경찰로 길을 바꾼다. 경부 자리까지 올라가며 출세가도를 걷는다. 민족반역자, 친일파라 불릴 만하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넌 독립이 될 것 같나?’라고 묻는 회의주의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정출은 일본 경찰의 명령으로 의열단의 밀정이 되기까지, 그리고 의열단원들을 돕는 모든 과정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관련기사 : 친일파? 독립운동가? 송강호는 어느 쪽 밀정이었을까

이정출은 의열단원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기차에 탑승한 의열단원들에게 위험을 알린다. 하지만 늘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면서도 의열단과 자신을 위협하던 일본경찰 하시모토를 쏴버린다. 잡혀온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 역)을 고문하라는 명령에 망설이지만 결국 고문을 집행한다. 의열단원 김장옥(박휘순 역)을 생포하려는 첫 장면부터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정출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 영화 ‘밀정’의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역).

그가 흔들리는 이유는 ‘밀정’ 속 등장인물들에게 독립운동이란 주어진 대의가 아니라 ‘질문’이기 때문이다. ‘밀정’의 등장인물들은 내내 ‘너에게 독립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시달린다. 누군가에게 독립운동은 대의지만, 누군가에게는 대의가 아니다. 영화 속 의열단이 누가 밀정인지 누가 밀정이 아닌지 가려내기 위해 수많은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밀정’ 속 의열단원들은 한없이 나약하다. 독립운동이란 대의로 똘똘 뭉친 것 같았던 김우진(공유 역)도 잡혀가는 연계순의 모습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 영화의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연계순은 ‘암살’의 주인공 안윤옥과 같은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괴로워하다 사망한다.

이정출의 선택도 언뜻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가 왜 의열단원이라는 고생길을 택한 것일까.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선택은 어느 순간 내려진 결단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과 망설임 속에서 어느 새 도달해버린 목적지에 가깝다. 친구 김장옥의 죽음을 보며 느낀 복잡한 감정들 사이에서, 정채산을 잡겠다는 일념과 정채산이 보여준 신뢰 사이에서, 자신의 출세를 가로막는 하시모토의 등장과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의열단 사이에서, 흔들리던 그는 어느새 폭탄을 들고 김우진이 다하지 못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밀정’은 이정출이 어느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에서 독립군이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정출의 흔들리는 눈빛과 대사를 통해 그 선택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이정출은 정채산이 말한 ‘앞으로 나아가는 실패’를 상징한다. 독립이 될 것이라는 확신도, 큰 대의를 품지도 못했지만 어느새 독립운동으로 나아간 이정출. 이 영화는 대한민국의 독립은 어쩌면 수없이 흔들렸던 독립운동가들의 수없이 많은 실패를 딛고 탄생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 영화 ‘밀정’ 스틸컷.
‘밀정’은 암살이 보여준 통쾌한 복수극 대신 의열단원이 된 한 밀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낸다. 그 시점에서 이정출도 정채산도 그 누구도 자신들의 행동이 그냥 실패로 끝날지 ‘앞으로 나아가는 실패’였을지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실패가 있었기에 더 나아갈 수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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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8.23 10:18

‘터널’에는 있었지만 ‘세월호’에 없었던 한 가지

[리뷰] 구조요청에 ‘응답’하며 생명을 살려낸 영화 터널, 우리 앞에 놓인 세월호는 어떤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한 공동체의 역사적 경험은 예술가들에게도 고민을 던지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그런 사건 중 하나다. 세월호 이후 탄생한 수많은 재난영화는 세월호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터널’은 대놓고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영화다. 자동차를 타고 집에 가다 터널이 무너지면서 터널 밑에 깔리는 주인공 이정수(하정우 역)는 우연히 세월호에 탔다가 바다에 빠져버린 304명의 희생자들을 연상시킨다. 

많은 장면에서 터널은 세월호를 소환한다. 구조차량이 주차할 장소까지 들어와 버린 방송국 차량과 피해자 가족과 정치인을 향해 쉴 새 없이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들, 사고 현장에 나타나 사진을 찍는 정치인들의 모습까지 이 영화는 데자뷰처럼 세월호를 보여준다.  

▲ 영화 터널 속 이정수(하정우 역). 터널 스틸컷.
‘터널’의 붕괴사고도 기본적 수칙을 지키지 않은 데서 발생했다. 영화 속 건설사 관계자는 “대한민국에서 FM대로 지어지는 건물이 어딨나”라고 말한다. 세월호에도 그대로 적용된 법칙이다. 안전수칙은 무시됐고 그 자리를 ‘관행’이 차지했다. 

구조에 반드시 필요한 제설차는 도시의 눈을 치우느라 도착하지 못하고, 열악한 구조환경 속에서 한 구조대원이 사망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현장과 사망한 민간인 잠수사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구조대원이 사망하자 터널에 갇힌 피해자 정수의 아내 세현(배두나 역)이 “너 때문에 죽었다”고 비난받는 모습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정수의 가족들에게도 ‘이제 그만하자’ ‘지겹다’는 여론의 무관심이 가해자로 작동한다. 구조작업 중단을 결정한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처럼 세현도 “국민들이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는 말에 구조작업을 중단하는 데 동의한다. 언론은 진실을 파헤치는 대신 패널들을 불러다놓고 ‘이정수가 살아있을지’ 잡담에 가까운 토론을 벌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리얼한 인물은 김영자 국민안전처 장관(김해숙 역)이다.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김 장관은 피해자 정수의 가족과 인사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다 죽어가던 정수가 구출되어 나올 때도 사진을 찍어야한다며 호송을 늦춘다. 구조작업으로 인해 다른 터널 공사가 늦춰지고 갈등이 발생하자 “잘 협의해라”는 막연한 지시만 내린다. 참사 발생 7시간 만에 나타나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데 발견하기 힘드냐”는 질문을 던지던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 영화 터널 속 김영자 장관(김해숙 역). 예고편 갈무리.
세월호와 터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결말이다. 세월호와 터널에는 기레기(기자+쓰레기), 사진만 찍으려는 정치인, 무책임한 장관, 가해자 취급을 받는 피해자 가족들이 등장하지만 세월호 희생자들과 달리 터널의 주인공 이정수는 35일 만에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결말의 차이는 세월호엔 없었던 인물, ‘터널’의 119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역)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김대경은 무책임한 이들이 넘쳐나던 터널에서 거의 유일하게 책임지는 사람이다. 김대경 대장은 구조가 늦어질 때마다 책임을 미루는 대신 “정말 죄송하다”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다. “물이 떨어지면 오줌을 마셔라”고 말하고 난 뒤 미안한 마음에 자신도 오줌을 마신다. “나도 안 해본 걸 남에게 시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공감능력은 인간성을 끝까지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다.

김대경이 상징하는 것은 ‘응답’이다. 이 응답이 세월호와 터널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두가 구조를 그만하라는 상황에서 김대경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가버리면 미안하잖아”라며 홀로 터널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이정수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계속 누르고 있던 자동차 크락션 소리를 잡아냈다.

▲ 영화 터널 속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역). 터널 스틸컷.
영화 터널에서 ‘응답’을 상징하는 또 다른 요소는 고립된 이정수가 유일하게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클래식 방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구조현장에 나타난 수많은 카메라 대신 이 클래식 방송이 정수와 그 가족들에게는 진짜 언론이었다. 클래식 방송은 구조현장에 나타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자극적 장면을 쫓아다닌 기자들과 달리 매일 조용히 정수를 위로하기 위한 음악을 틀었고 정수의 아내 세현을 출연시켜 그의 목소리를 방송했다. 이 클래식 방송은 고립된 이정수에게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터널의 해피엔딩 이후 다시 세월호를 생각한다. 진상규명을 위해 만든 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선체인양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사를 끝마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유가족 유경근씨는 18일 특조위 조사 기간 보장을 요구하며 무제한 단식에 돌입했다. 한국사회는 이들에게 응답하고 있을까? 김대경 구조대장은 경제도 어려우니 구조를 멈추고 터널 공사를 해야 한다는 한 전문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깜빡하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저 안에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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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6.02.10 15:19

박헌영의 아내도, 맑스걸도 아닌 혁명가 주세죽

[서평] 코레예바의 눈물 / 손석춘 지음 / 동하 펴냄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나 1953년 사망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여성 혁명가 주세죽을 일컫는 말이다. 그 외에도 주세죽에게는 ‘미모의 독립운동가’ ‘박헌영의 부인’ ‘맑스걸’ ‘레이디 레닌’과 같은 호칭이 붙는다.

손 석춘의 장편소설 ‘코레예바의 눈물’을 읽기 전 내 머릿속에 있던 주세죽의 이미지도 주세죽에게 붙던 호칭과 같았다. 역사 수업 시간에 워낙 미모가 뛰어나 인기가 많았다, 박헌영의 베프(베스트프랜드) 김단야와 3각 관계여서 박헌영이 죽은 줄 알고 김단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 등 그에 대한 기억은 야사에 가까운 ‘썰’이었다.

‘코레예바의 눈물’은 카자흐스탄에서 우연히 주세죽의 기록을 발견한 문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설 속 화자로 등장하는 이 문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주세죽의 기록을 보며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떠앉는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아마 그 문인과 같은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 세죽에게 어울리는 호칭은 ‘박헌영의 아내’도 ‘맑스걸’도 ‘레이디 레닌’도 아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이후 줄곧 일본 제국주의와 맞섰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항일투쟁에 앞장섰으나 믿었던 소련 공산당에 의해 체포당한다. ‘사회적 위험분자’로 찍혀 1938년 5월 22일 카자흐스탄의 사막 도시 크즐오르다에 유배된다.

주세죽은 ‘절대음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음악에 천재성을 보이고 상하이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박헌영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이 뒤바뀐다. 박헌영은 “사회주의 조국에도 예술가가 필요하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세죽은 단지 박헌영이라는 남성을 만나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박헌영을 만나기 전부터 31.운동을 기획하다 일제에 잡혀 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수갑을 찬 손으로 경찰을 두들겨 팰 정도로 패기가 넘치던 여성이다. 그녀는 박헌영 같은 당대의 남성 혁명가들에게 가르침을 요구하지 않았다. 동등한 입장에서 정세토론을 벌였다.

▲ 코레예바의 눈물 / 손석춘 지음 / 동하 펴냄

주 세죽은 당대의 남성 혁명가들이 지닌 봉건의식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여성 혁명가였다. 박헌영은 주세죽과의 결혼을 앞두고 “주세죽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미인이다. 조선이 식민지이지만 고래등 집에게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며 “나는 주세죽 동지에게 편안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주세죽은 분노해서 그에게 따진다. 박헌영마저 “여자 팔자는 뒤웅박 따위처럼 결혼한 여성의 운명이 남편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케케묵은 양반계급 사고”에 빠져 있냐고 말이다.

남 성 혁명가들은 레닌이 부인 크루프스카야가 있는데도 애인 아르망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셋이 동거한 사실을 높게 평가한다. 레닌에게 배울 것은 혁명뿐이며, 그만큼 레닌에게 인간적인 매력이 있기에 두 여자가 같이 산 것 아니냐고 말이다. 주세죽은 “만약 크루프스카야가 젊고 잘생긴 남성 혁명가와 사랑에 몰입해도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다고 평가할 자신이 있나”라고 되묻는다. 오늘날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미러링’의 원조인 셈이다.

여성 혁명가가 맞선 것은 일본 제국주의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성을 남성의 종처럼 취급하는 봉건적 악습은 물론 타락한 소련 공산당과도 맞서야 했다. 주세죽를 ‘맑스걸’ ‘레이디 레닌’ ‘박헌영의 아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그녀가 살아온 삶과 맞지 않는다. 그녀는 조선의 혁명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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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5.07.05 08:47

다수의견이 된 ‘소수의견’, 권력을 넘지 못한 ‘소수의견’

[리뷰] 영화 ‘소수의견’…“실화가 아니다”란 자막 뒤에서 빛나는 현실성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영화는 특정한 사건, 사실과 관계가 없다”

영화 <소수의견>은 이러한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이 자막은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가 ‘현실’임을 말해주는 가장 강력한 기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픽션이다. 진짜 실화가 아니라면 굳이 “실화가 아니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소수의견>은 2009년 1월 벌어진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강제 철거에 저항하며 맞선 철거민들, 그리고 경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철거민과 경찰의 죽음. 참사를 덮으려 대대적으로 홍보한 살인사건. 용산 참사를 아는 이들은 누구나 <소수의견>을 보며 5년 전의 끔찍했던 참사를 떠올릴 것이다.

<소수의견>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 바로 ‘의견’이다. <소수의견>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고,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자세히 조명한다. 이 영화의 제목에 ‘참사’라는 말도, ‘국가 폭력’이라는 말도 들어가지 않는 이유다.

   
▲ <소수의견>의 변호사, 윤진원.
 

영화의 초점은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철거민 박재호는 처음에 의경을 죽인 살인자에 불과했다. 국가는 용역깡패가 그의 아들을 죽였고, 박재호는 경찰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경찰이 아들을 죽였다”는 박재호의 외침은 정신 나간 살인자의 읊조림에 불과했다.

박재호 혼자만의 주장은 곧 ‘소수’의 의견으로 거듭난다.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윤진원. 그리고 철거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자 공수경. 그리고 윤진원의 부탁으로 국가를 상대로 100원 짜리 소송을 진행하는 변호사 장대석.

여러 차례의 국민참여재판과 쏟아지는 증거들 속에서 이들의 ‘소수의견’은 다수의견이 된다. 국민참여재판의 재판관들은 박재호의 정당방위를 인정한다. 판사는 국민참여재판의 다수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3년’을 선고한다. 빗발치는 야유 속에 퇴장하는 판사, 국가권력의 주장은 어느새 ‘소수의견’이 된다.

‘천만영화’ <변호인>과 비교하면 <소수의견>의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변호인>은 <소수의견>에 비해 히어로물에 가깝다. 먹고 살기에 바빴던 한 변호인이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 뛰어들고,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 제1조의 의미를 몸으로 깨닫는다.  그는 어느 새 민주투사가 되어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지만, 부산 지역의 수많은 변호사들이 그의 ‘변호인’을 자처한다.

<소수의견>의 등장인물들은 ‘히어로’가 아니다. 윤진원 변호사는 철거민의 변호를 맡는 정의로운 인물이지만, 변호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범죄자의 변호를 맡기도 한다. 장대석 변호사는 정 때문에 변호인을 자처하지만, 증언을 듣기 위해 증인에게 천만 원을 건네는 인물이다. 기자 공수경은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지만, 특종에 목마른 여타의 기자들과 다를 것 없는 기자다. 재판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무시하고 단독기사를 쓰기도 한다. 철거민 박재호는 국가권력과 맞서는 투사가 아니라,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한 인간이다.

한 명의 히어로가 아니라 몇몇 나약한 인간들의 알량한 양심들이 모여 소수의견을 다수의견으로 만들었다. 검사에게도 까다로운 판사의 깐깐함, 검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변호사협회 징계위원장의 자존심, 그리고 몇몇 증인들의 솔직한 고백이 소수의견을 다수의견으로 만들어낸다. 이들은 모두 많은 단점을 가진 인간들이었으나 이들의 작은 장점들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 영화 <소수의견> 포스터.
 

<소수의견>의 포스터는 한 명이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들 얼굴이 모두 균등하게 담겨 있다. 이러한 구성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가 현실적인 점은 결국 ‘다수의견’이 소수의견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박재호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징역3년을 받았다. 사건을 조작하려 한 검사는 옷을 벗었지만 로펌의 변호사로 들어갔다.

검사가 마지막에 윤진원에게 묻는다. “국가는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봉사로 돌아가는 거야. 박재호는 희생을 했고 나는 봉사를 했어. 근데 넌 뭘 했냐?” 윤진원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 질문이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쁜 놈’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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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4.08.11 11:05
지존파와 삼풍백화점이 '리얼'로 반복되는 2014년
[리뷰]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 픽션 아닌 리얼의 1994년, 반복되는 2014년

최근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90년대는 아름답다. ‘응답하라 1994’가 그렇고, ‘건축학개론’이 그렇다. 하지만 90년대 역시 여느 시대처럼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시대였고, 아름다운 추억 외에도 떠올리기 싫은 악몽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 <논픽션 다이어리>(감독 정윤석)는 추억 속에 묻혀 잊혀졌던 90년대의 악몽들을 다시 끄집어낸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제목 그대로 ‘픽션’이 아닌 ‘리얼’이다. 94년 추석에 벌어진 끔찍한 지존파 연쇄살인사건. 얼마 지나지 않은 94년 10월에 벌어진 성수대교 붕괴사고, 95년에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논픽션 다이어리>는 얼핏 관계없어 보이는 살인사건과 안전사고를 ‘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90년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루어진 세계화와 개방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 있다.
 
지존파사건은 우리에게 끔찍한 살인마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납치해 무자비하게 살인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논픽션 다이어리>가 다루는 지존파 사건은 조금 다르다. 지존파는 부자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부유한 자들을 없애자는 강령을 지니고 있던, “빈부격차가 살인동기가 된 연쇄살인사건”이었다. 지존파가 사형 당하기 전 지존파를 만난 간수들과 형사들, 종교인들은 하나같이 지존파 구성원들이 놀라울 정도로 ‘순진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당시 지존파는 ‘괴물’로 묘사됐다. 언론에는 “더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악마들의 모습이 등장했고, 사형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속전속결로 집행됐다. 도덕성이 타락했다며 도덕 교육을 강조하는 운동들만 벌어졌다. 지존파라는 괴물이 탄생했던 그 배경, 빈부격차와 도농 간 격차, 그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등은 그대로 남았다.
 
  
▲ 논픽션다이어리 예고편 갈무리
 
지존파 사건 이후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상품백화점이 무너졌다. 500명이 넘는 사람이 한 순간에 사망한 최악의 참사였다. ‘없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상징, 백화점에 ‘안전’이 없었다. 건물이 붕괴하고 있는 조짐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관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문제제기는 묵살됐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 살인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사이에서 공통점 두 가지와 차이점 한 가지를 발견한다. 공통점은 한국이 경제성장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자본주의의 모순’이 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수습과정이다. 잔인한 살인을 저지른 지존파 구성원 전원은 1년 만에 사형 당했다. 하지만 삼풍백화점 사건의 책임자들은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 혐의를 받았고,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지금도 잘 살고 있다. 
 


논픽션 다이어리 (2014)

Non-fiction Diary 
7.3
감독
정윤석
출연
고병천, 김형태, 박상구, 조성애, 오후근
정보
다큐멘터리, 스릴러 | 한국 | 93 분 | 2014-07-17



지존파 사건과 삼풍백화점 모두를 경험한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은 우리에게 반문한다. "두 사건 모두 돈 때문에 일어났다. 하지만 연쇄살인을 저지른 지존파는 모두 사형 당했는데 왜 5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사건의 책임자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을까." <논픽션다이어리>는 이 지점에서 5.18 광주를 끌어들인다. 한 지존파 구성원은 경찰에 의해 끌려나가며 이렇게 일갈한다. 

“왜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나만 유죄냐!!!”
 
지존파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와 고민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존파사건은 살인범들을 사형시키는 것으로 끝났고, 삼풍백화점은 죽은 사람만 억울한,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참사’가 되어버렸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논픽션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공포영화에 가깝다. 얼마 전 육군 28사단에서 윤일병이 다른 병사들에 의해 구타‧고문당하다 결국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해자들을 향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다. 20년이 지난 후 2024년에도 우리는 여전히 군대 폭력에 직면하고, 20년 전 군대 내 ‘폭력의 대물림’에 주목하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있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참사 이후, 언론은 선장과 선원들을 비난했다. 대통령은 선장을 살인자로 규정했다. 지존파 사건 때처럼, ‘살인자’들을 엄벌하면 그걸로 끝나는 걸까. 유병언 일가도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과실치사’ 이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삼풍백화점 사건처럼, 그렇게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논픽션 ‘다이어리’가 기록한 90년대는 암울했다. 이 다이어리에 적힐 2014년은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90년대가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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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4.03.20 20:25
“남조선은 가나안 땅입네까?”
[리뷰] 영화 ‘신이 보낸 사람’, 북한 주민들의 유일한 탈출구 ‘기독교’

언제부턴가 가스통을 들고 ‘빨갱이들’을 때려잡자고 외치는 우익단체들의 집회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그 우익단체들 속에는 ‘탈북자단체’가 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북한에서 고생한 사람들이니 김정일이나 김정은 정권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탈북자가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까?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탈북자나 북한 출신 새터민은 없는 걸까? 있다면 그들은 왜 내 눈에, 언론에 보이지 않는 걸까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은 이러한 의문을 일정 부분 해소해준다. 북한 주민들과 한국의 보수 세력 간의 연결고리는 ‘기독교’다. <신이 보낸 사람>은 종교 활동이 금지된 북한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영화다. 이들은 지하교회를 조직해 믿음을 공유하고, 이들 중 여력이 되는 이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남한으로 떠난다.

지하교회조직에서 활동 하는 북한 주민들이 14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독교를 믿다 적발될 경우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총살을 당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몰래 지하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기독교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 ‘신이 보낸 사람’ 포스터
 
지옥 같은 현실에서 사는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있는 유일한 힘은 ‘지금 견디면 나중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기독교는 내세와 구원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미래의 삶을 제안한다. 기독교를 믿는 북한 주민들은 ‘신’에게 기도를 하며 지옥 같은 현실을 벗어난 꿈을 꿀 수 있다.

기독교는 또한 실제로 북한을 탈출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기도 한다. <신이 보낸 사람>에서는 주민들이 국제선교조직을 통해 북한을 탈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지 않지만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많다.

영화의 주인공 주철호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그의 부인 영미는 지하교회조직에서 활동하다 북한군에 끌려가지만 고문당하는 와중에도 성경 구절을 외는 등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철호는 고문에 괴로워하는 영미를 위해 스스로 그녀의 목숨을 끊는다. 철호는 그런 영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안 믿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 수 있는 데 왜 믿음을 고집한단 말인가. 그는 영미 같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북한에서 탈출하기 위해 ‘거짓’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영미가 죽은 지 2년 만에 마을로 다시 돌아온다. 그가 탈북을 위해 기독교를 거짓으로 믿었다면 마을로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다. 그는 탈출과 믿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중국에 있을 때 구정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북한에서 탈출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간증한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실한 신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그의 입장은 지하교회 리더와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지하교회의 리더 박성택은 모두를 탈출시키겠다는 철호에게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있다. 이곳에서 우리 믿음을 이어가야한다”고 말한다. 철호는 “믿음도 살아남아야 지킬 수 있는 것”이라며 탈출을 고집한다. 한마디로 그는 ‘현실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영화 말미에 완전한 기독교 신자로 재탄생한다. 그는 공개처형 당하기 직전 웃으며 자신의 믿음을 긍정한다. 그가 기독교 신자로 재탄생하는 계기는 지체장애인 용석의 죽음이다. 용석은 철호가 땅에 묻어놓은 채 숨기고 있던 예수 그림으로 땅 위로 꺼내고,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닌다. 그리고 북한 경찰들과 마을 사람들, 철호가 보는 앞에서 분신자살한다. 철호는 북한 군인들이 자신을 폭행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절규하며 용석의 죽음을 지켜본다. ‘신이 보낸 사람’은 주민들을 남한으로 탈출시키려는 철호가 아니라 예수와 같이 자신을 순교해 다른 사람을 완전한 기독교 신자로 만든 용석이었다.

   
▲ ‘신이 보낸 사람’의 한 장면. 왼쪽은 영미, 오른쪽은 철호
 
철호는 공개처형 당하기 전 ‘남조선은 가나안 땅입니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영화 속 북한 주민들은 북한을 벗어나기 위해 남한을 ‘유토피아의 땅’으로 설정한다. 그곳에 가서 돈을 벌고, 오순도순하게 살 계획을 세우며 하루하루를 산다. 하지만 영화 속 북한 주민들은 결국 아무도 북한을 벗어나지 못한다. ‘남조선은 가나안 땅인가’라는 질문에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기독교가 그 매개 역할을 하는 현실이 함축되어 있다.

이 질문은 또한 남한에 넘어온 탈북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그들이 ‘가나안 땅’이라 믿고 있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남조선은 정말 가나안 땅일까? 자본주의의 풍요 속에서 빈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즐비한 남한 사회, 적응하지 못한 몇몇 탈북자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남한 사회는 정말 가나안 땅일까? 목숨도 믿음도 지킬 수 있는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정말 저 믿음을 실천하고 있는 것일까? 남한에는 용석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기독교인들이 많을까,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기독교인이 더 많을까?

남한은 ‘가나안 땅’이 아닌데도, 탈북자단체들은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를 긍정하는 우익단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출구를 제공하는 것은 기독교이고, 그들을 돕는 것도 기독교단체들 뿐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기독교를 믿으면 북한에서 탈출할 수도 있고, 우리와 함께라면 한국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 밖에는 대안이 없어서가 아닐까.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대변한다는 진보진영이 탈북자들이나 북한 주민들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 수 있을지,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지, 이 영화를 보며 다시 한 번 고민해야할 때다.


신이 보낸 사람 (2014)

APOSTLE 
8.6
감독
김진무
출연
김인권, 홍경인, 최규환, 김재화, 지용석
정보
드라마 | 한국 | 112 분 | 201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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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06

 


패왕별희 (1993)

Farewell My Concubine 
9.5
감독
첸 카이거
출연
장국영, 공리, 장풍의, 장문려, 게유
정보
로맨스/멜로, 시대극 | 중국 | 170 분 | 1993-12-24

과제 용으로 대충 씨부림.


영화 패왕별희의 핵심은 혼란의 시대, 개인의 흔들리는 정체성이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의 시기, 중국 민중들은 ‘너는 자본주의자냐 공산주의자냐’라는 질문에 시달리고, 자신이 혁명과 당에 충성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꼭 문화대혁명 시기가 아니라도 당시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시달려 왔다. 일제, 군벌정부, 국민당 정부, 공산당 정부 중 누구를 따라야할 지 모르는 혼란상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다. 주인공 샬로는 공산주의자들도 까불면 싸우겠다는 말을 했다가 나중에 공산당에게 문초를 당한다.


이런 당시의 시대상은 주인공 데이의 ‘성 정체성’에서 드러난다. 그는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서 사내아이도 아닌데’라는 노래 가사를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데’리며 계속 틀린다. 현실은 사내아이로서 본인을 자각하고 있는데, 그의 시대는 그에게 계집아이의 정체성의 강요한다.


그는 ‘거세’당함으로써 계집아이가 된다. 샬로가 그의 입에 담뱃재를 집어넣는 장면은 그의 거세 장면과 다를 것이 없다. 결국 데이는 현실의 자아를 포기하고. ‘우희’가 된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샬로와 주변인들은 데이에게 경극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데이는 우희 역에 동화되어 현실과 경극을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무대와 현실, 남녀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M.butterfly>의 여주인공 송 링링 역시 마찬가지의 역항을 강요받았다. 그는 ‘본래 사내’이지만, 국가왇 당을 위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요받았다. 그렇게 강요해놓고, 당은 그가 퇴폐적인 짓을 하고 동성애를 했다고 나무란다. 현실과 연극을 구별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연극을 구별해서는 르네 갈리마르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역시 현실과 연극을 완전히 구별하지 못한 채, 갈리마르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그는 시대의 요청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강요받았고. 그 결과 현실과 연기의 구별을 넘어서버렸다. <패왕별희>의 데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대는 이러한 자아 정체성 확립의 노력을 가만두지 않았다. 송 링링이 당으로부터 이제 그만 연극을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오라는 강요를 받았던 것처럼, 데이 역시 그런 강요를 받아야 했다. 문화대혁명은 그에게 경극을 그만두라고 강요한다. 현실과 연극을 구분할 줄 알았던 샬로는 쉽게 당의 명령을 따른다. 그러나 데이는 이를 거부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않고 ‘우희’처럼 죽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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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06

 


블라인드 마운틴 (2011)

Blind Mountain 
7.7
감독
이양
출연
황로
정보
드라마 | 중국 | 102 분 | 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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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의 체제를 건설할 때 서로 다른 가치와 이념, 정책 사이의 조화와 혼합을 추구한다. 신자유주의가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신자유주의만 밀어붙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으며, 복지국가가 아무리 대안으로 떠올라도 복지국가적인 이념과 정책만을 하나부터 열까지 밀어붙이는 나라 역시 어디에도 없다. 이는 우리가 두 가지 가치 각각의 장점이 하나의 체제 안에서 동시에 살아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이념과 복지국가 정책을 혼합하면서 자유 경쟁의 효율성과 사회적 재분배의 형평성이 동시에 발현되길 원한다.


하지만 두 가지의 혼합이, 각각의 장점이 살아나는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단점이 살아나는 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흔히 과거의 관습이나 풍습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이념과 가치가 유입되었을 때 이런 결과가 발생한다. 한국의 회사원들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의 회사원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유교적인 사내 문화에 얽매이는 동시에, 엄청난 경쟁이라는 서구식 기업관에도 얽매여 있다.


원래 사회주의 국가였다가 자본주의적 가치들과 서구식 이념을 수용한 중국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중국 사회의 병폐들은 유교적 전통, 사회주의 의 관습, 자본주의 가치관 이 세 가지가 얽히고 얽혀서 발생한다. 리양 감독의 영화 <맹산>과 <맹정>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 <맹산>은 대학생 바이 수에메이가 농촌으로 팔려나가는 이야기이다. 수에메이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서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려다가 한 농촌의 농부 후앙 데구이 집으로 팔려가고 만다. 대학생이 비싼 돈을 들여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서 쉽게 돈을 버는 일에 빠져드는 일은 한국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대학생을 노린 다단계가 횡행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농촌에서 이런 식으로 여자 대학생을 인신매매하여 집안의 대를 잇는 이유는 여성들이 도시로 빠져 나가 농촌 남성들이 결혼을 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납치만 안 했지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농촌 총각들은 결혼할 여성이 없어서 동남아시아에서 배우자를 구한다.


이렇게 대학생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여기저기 돈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현상, 농촌에 여자가 없어서 납치를 하지 않으면 배우자를 구할 수 없는 현실은 급격한 개혁개방과 자본주의 도입의 폐해라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선부론’을 내세웠다. 일단 먼저 누군가 부자가 되고, 그 부를 나중에 나누자는 것이다. 이 ‘선부’에서 소외된 이들은 가난과 실업에 시달려야 했다. 대학생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국가가 일자리를 정해주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농촌 사내들이 결혼할 여성이 없다는 현실 역시 농촌을 혁명의 근거지로 생각했던, 인민공사를 추진했던 마오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실업률 28%, ‘실질적’ 실업인구 1억 7천만 명. 이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대학생마저 일자리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 기술직이나 단순 노동 밖에 할 줄 모르는 이들은 더더욱 일자리를 찾기 힘들 것이다. 영화 <맹정>에서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16세 소년 펭밍에게 다른 어른들은 “10일을 기다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맹정>의 주인공 송진밍과 탕 챠오양이 젊은이들을 속여 죽일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그들이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송진밍, 탕 챠오양, 펭밍이 취직한 광산의 사장은 “일하기 싫으면 말아. 일할 사람은 많아.”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정말 ‘일할 사람’은 많다.


자본주의와 개혁개방의 또 다른 병폐는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만능주의이다. <맹산>에서는 인신매매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농촌 마을의 모두가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맹정>에서도 송진밍과 탕 챠오양은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이를 광산 사고로 위장해 광산 사장에게 보상금을 받는다. 광산 사장 역시 사람이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라곤 얼마에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것뿐이다. 사람 목숨이 3만 위안으로 거래된다.


유교적 가치들은 이러한 중국 사회의 병폐와 병리현상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맹산>에 등장하는 농촌 마을 사람들은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인신매매를 서슴지 않는다. 납치당한 여대생들은 애 낳는 기계과 일 하는 도구 이상의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다. <맹정>에서 송진밍이 살인을 저지르는 명분은 ‘자식 교육’이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그는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관습은 이 병리현상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병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강력한 공권력과 국가의 개입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관습들은 이러한 해결방식을 가로막고 있다. 단순히 관료들이 뇌물을 받고 뒤를 봐주는 부패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경찰력과 행정력은 마치 옛날 중국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 전역을 통제하지 못하며, 작은 행정 단위의 마을이나 촌락에는 공권력의 힘보다 촌장의 힘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 촌장이 당의 지지를 받으며 촌락을 좌지우지하던 사회주의 시절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유교적 관습의 영향이기도 하다. 영화 <귀주 이야기>가 잘 묘사했듯이 법 같은 공식적 절차가 아니라 촌장의 중재, 당사자들의 합의 같은 인치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맹산>에서 수에메이를 구출 하러 온 공안들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오히려 마을 주민들은 수에메이를 데려가려는 공안에게 몰려 가 물리력을 행사하고, 공안들은 마을 촌장의 도움을 요청한다. 마을 촌장이 물러서라고 하자 마을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집단으로 공권력에 저항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2011년 11월 16일에는 밀수 담배를 수색하려는 공안 단속 대원들을 폭력배들이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고, 11월 말에는 인민법원의 결정에 불복한 이들이 법관을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맹정>에서도 광산 사장들은 사람이 죽자 이 사건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사자들을 따로 불러 협상을 진행한다. 사장은 돈을 더 요구하자 칼까지 들이대며 3만 위안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소송 같은 공식적 절차가 아니라 당사자들 간의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소송만능주의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엄청난 병리현상이 드러나지 않은 채 공공연하게 발생하는 중국의 경우 이런 인치(人治)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공식적으로, 공공의 영역에서 ‘사회적으로’ 해결될 수 없게 만든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에서 유교적 전통, 자본주의 가치관, 사회주의의 관습의 안 좋은 점들이 얽히면서 막대한 병리현상이 발생하고, 더 나아가 이 병리현상이 정당화되는 동시에 병리현상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병리현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인간성의 상실’이다. 중국인들은 남이 곤경에 처해 있어도 잘 나서지 않으며 따라서 중국인 모두가 이 병리현상의 공범이다. <맹산>에 등장하는 모든 농촌주민은 공범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이 모두 공범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영화 <맹산>과 <맹정>의 제목에 모두 맹(盲: Blind)자가 들어간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수에메이의 탈출을 농촌 주민 모두가 필사적으로 막았던 이유, 광산의 사장들이 외부로 광부들의 죽음이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 했던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춰진 산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 감춰진 광산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중국의 병리현상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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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05

 


책상서랍 속의 동화 (1999)

Not One Less 
9.7
감독
장예모
출연
웨이 민치, 장혜과, 전정달, 고은만, 손지매
정보
드라마 | 중국 | 100 분 | 1999-10-30

 

어떤 사회가 발전된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교육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정치발전도 경제발전도 사회발전도 문화 육성도 결국 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이란 바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처럼 개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교육은 어느 정도 공공성을 띠며, 국가는 교육과 인재 육성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이상을 지닌 사회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도 사회주의를 표방한 만큼 국가가 교육에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교육제도와 교육환경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사회주의’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교육 불평등이 심각하다. 도시에는 등록금이 1만 달러가 넘는 사립학교와 귀족학교들이 즐비한 데 반해, 농촌의 교육현실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영화 <책상 서랍 속의 동화>는 중국 농촌의 이러한 교육현실을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슈쿠안 초등학교의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분필도 하루에 한 개만 사용하고, 돈이 없어 망가진 교탁을 계속 사용해야 할 정도이다. 또한 중국 농촌의 학교에서는 교사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이 대리교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 영화 속의 웨이민치 역시 원래 교사였던 가오 선생님의 대리로 한 달 간 수업을 진행한다. 그는 겨우 13살에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노래의 가사와 율동도 잘 알지 못한다.


다행히 슈쿠안 초등학교는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웨이민치가 장휘거를 찾으러 도시로 갔다가 방송에 출연하고, 슈쿠안 초등학교의 열악한 환경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지원 물품과 지원금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국 인민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중국의 모든 농촌학교들이 방송을 타고 알려질 리도 없고, 슈쿠안 초등학교에 온 지원 물품과 지원금 역시 일시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중국 농촌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의 교육제도의 개혁과 교육환경의 개선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교육제도와 교육환경은 어떻게 바뀌어야할까? 영화 <책상 서랍 속의 동화>는 웨이민치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웨이민치는 무자격 대리교사에 불과하다. 그가 대리교사를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는 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이해하건 말건 글자를 칠판에 잔뜩 적어두고 밖에 나가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이렇게 대충 수업하는 웨이민치에게도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오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기 전, 웨이민치에게 “원래 40명이던 학교의 학생이 벌써 28명으로 줄었다”면서 “더 이상 학생이 줄면 안 된다.”며 웨이민치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가오 선생님은 웨이민치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학생이 그대로 있으면 돈을 더 주겠다는 말도 한다. 웨이민치는 이 원칙만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고수한다. 도시의 체육학교에서 스카웃 한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고 숨겨놓는다. 장휘거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자 장휘거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웨이민치도 도시로 떠난다.


처음에 웨이민치를 움직이던 동력은 ‘돈 몇 푼’이었으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새 웨이민치는 자신의 동력을 넘어선다. 웨이민치는 장휘거를 다시 데려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들을 잔뜩 데려가 벽돌공장에서 일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장휘거를 다시 데려오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가 돈을 얼마나 더 벌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계산을 하며 공부를 한다. 마을촌장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대리교사가 제법이군. 수학도 가르치네.”라고 말한다. 웨이민치는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이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웨이민치가 이 원칙을 답답할 정도로 고수하는 과정에서 그는 ‘돈 몇 푼’이라는 자신의 동력을 넘어서서 진정한 ‘선생님’으로 거듭난다. 웨이민치가 고작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그 생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벽돌공장에서 번 돈이 모자라 걸어서 도시까지 갔다가, 벽보를 부치고 방송을 하고 방송국장을 만나려고 며칠을 방송국 앞에서 기다린다. 가져간 돈도 다 써버린다. 웨이민치는 방송에 출연해 울면서 ‘장휘거 어디 있니’라고 말한다. 이미 ‘돈 몇 푼’이라는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장휘거를 찾아 데려가는 것 그 자체,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안 된다’는 원칙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웨이민치는 대리교사에서 선생님으로 변모한다. 자신을 애타게 찾는 방송을 보던 장휘거는 웨이민치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말썽꾸러기 장휘거가 웨이민치를,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선생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칠판에 분필로 한 글자씩 써보라는 웨이민치의 말에 장휘거는 칠판에 ‘웨이민치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전까지 웨이민치는 늘 ‘대리교사’로 불렸다. 도시에 가서 장휘거를 찾을 때 늘 자신을 대리교사라고 소개했다. 그러던 웨이민치가 마침내 자신이 애타게 찾던 ‘학생’ 장휘거에 의해 ‘선생님’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중국의 교육개혁은 웨이민치를 롤모델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웨이민치는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 사람이라도 없어선 안 된다’는 원칙에만 집중했다. 보통의 교육개혁은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집중되기 쉽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영수사를 중심으로 가르치느냐 ,필수과목에 미적분을 넣느냐 마느냐 등등이 교육개혁의 중심이다. 대학입시에 수능이 중요한 가 내신이 중요한 가 입학사정관제가 중요한 가 등등이 교육개혁의 중심이다.


중국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인민들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마오 사상을 학습했다. 개혁개방시기 중국 인민들은 기초과학이나 외국어, 음악, 미술, 지리 등의 실용학문을 학습했다. 하지만 웨이민치는 그런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 교육의 대상에는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데올로기를 가르치느냐 실용학문을 가르치느냐가 아니라 불평등이다. 대도시의 사립학교와 귀족학교의 학생들은 높은 등록금을 부담하고, 국가의 엄청난 지원을 받으며 엘리트로 자라난다. 반면 농촌의 학생들과 사회적 약자, 사회 취약계층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도시에서 농촌으로 건너 온 농민공은 심각한 교육 박탈의 상황에 처해 있다. 100만 명이 넘는 농민공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는 수많은 ‘장휘거’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장휘거’들을 다시 데려올 웨이민치는 존재할까? 이는 웨이민치와 같은 교사 개인의 헌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웨이민치 역시 지원금과 지원 물품을 가지고 장휘거와 함께 돌아왔다. 중국의 교육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중국 정부이며, 중국 사회 전체이다. 중국이 곧 웨이민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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