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20 11:27

 


세계사의 구조

저자
가라타니 고진 지음
출판사
도서출판 b | 2012-12-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세계의 혁명을 제시한 가라타니 고진의 미래전망「가라타니 고진」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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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시사회, 국가없는 사회

가라타니 고진은 <자연과 인간>에서 지구온난화론이 음모론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들은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가라타니 고진이 지구온난화론을 음모론이라 주장하면서 무엇과 맞서려고 하는 가 라는 문제다. 가라타니는 화석연료가 지구를 뜨겁게 만든다는 과학적 근거를 통해 원자력 발전을 주장하는 이들과 맞서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상가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가가 어떤 담론과 맞서려 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도 마찬가지다. 클라스트르가 대적하고 있는 담론은 서양 중심주의와 진화론적 역사관이다. 그의 인류학은 서양 중심주의와 진화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원시사회가 미개하며 문명화된 서양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논리, 원시사회와 부족국가가 서양식 근대국가로 ‘발전’했다는 진화주의를 부정한다.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다. 이는 서양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사회다. 서양 정치사상에 따르면 정치의 본질이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사회적 분업과 권력관계이다. 하지만 원시사회는 그렇지 않다. 원시사회를 고찰한 16세기 유럽인들은 “족장이 부족에 대해 어떤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누구도 명령하지 않고 누구도 복종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신앙도 법도 왕도 없는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우두머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동맹을 관리하고, 전쟁을 수행한다.

그러나 동맹과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는 우두머리가 아니라 사회다. 우두머리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공공적인‘ 의지를 대표한다. 또한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수행할 수단(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지도자라 부르는 자들이 모든 권력을 결여하고 있고, 족장제도가 정치권력 행사의 외부에서 구성된다.” 족장에게 위세는 있으나 권력은 없다. 그의 의견은 전체로서의 사회의 관점을 표현해주는 한에서만 청취된다. 그가 권력을 발휘하거나 공공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려 들 때 그는 추방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클라스트르는 남아메리카의 야노마미족을 사례로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클라스트르가 야노마미족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렸을 때 야노마미족에게 납치당한 백인 여성 엘레나 발레로 때문이다. 발레로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추장 푸쉬에는 권력을 유지하고 넓히기 위해 전쟁을 계속 벌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혼자 싸우다 죽었다. 이처럼 원시사회의 부족원들은 권력자의 의지에 의한 전쟁을 부정한다.

한 마디로 원시사회는 나누어지지 않는 사회, ‘전체로서의’ 사회다. 이에 대해 우두머리의 권력에 맞서는 이들은 원시사회의 '개인들'이 아니냐고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시사회의 구성원들은 단순히 개인으로서 우두머리의 권력에 맞서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두머리에게는 자신이 행한 일들을 부족원들 앞에서 모두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부족원들은 우두머리의 말이 장황하거나 별로 영양가 없을 경우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의 규칙이다. 개인성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작동한 사후에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클라스트르는 이러한 원시사회를 탐구함으로써 국가의 기원, 더 나아가 ‘국가 소멸의 가능조건’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2. 원시사회, 경제를 거부하는 사회

원시사회가 정치적인 측면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어떨까? 클라스트르는 멜라네시아를 연구한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의 입을 빌려 ‘원시경제’에 대해 설명한다. 고전적인 경제인류학은 원시경제를 생존경제라 표현한다. 원시인들은 빈곤하며, 따라서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린스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원시인들은 하루에 3~5시간 밖에 노동하지 않으며, 안정적으로 생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는 풍요로운 사회다.

살린스는 원시사회를 ‘가구적 생산양식’이라 부른다. 원시사회의 부족들은 더 열심히 노동해서 잉여를 생산하고 이를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필요 이상으로 노동하는데에는 언제나 강제가 필요한데, 원시사회에는 강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량자원이 충분히 모이면 그들은 사냥과 채집을 중단한다. 최소한의 필요는 충족시키려 하지만 잉여의 형성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다. 이 최소한의 필요가 늘 충족될 수 없기에 그들도 다른 공동체와 ‘교환’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 호혜성의 원리(의무)를 따른다. 이는 ‘생활필수품이 생산에 부합하는 반(反)잉여의 원리다. 그들의 생산은 목표를 달성하면 멈춘다. 원시사회에는 구조적으로 ’경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사회적 장에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제적인 것‘이 없다.

“가구적 생산양식이란 소비의 생산(필요충족)으로 기능하지만 교환의 생산(잉여를 상업화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것)으로는 기능하지 않는다.” “원시사회는 경제를 거부하는 사회다.” “원시사회는 모두가 겪는 빈곤을 받아들이지만 몇몇 사람들의 축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원시사회에서 재화를 분배하는 권한은 우두머리에게 있다. 하지만 우두머리가 재화를 분배한다는 이유로 ‘계급’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살린스는 멜라네이사의 빅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를 밝혀냈다. 빅맨(우두머리)은 재화를 분배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는 남들보다 훨씬 많이 일하고 이를 통해 재화를 마련해 부족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준다. 사회가 권력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클라스트르는 살린스의 분석에 대해 ‘권력’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클라스트르는 빅맨이 가지고 있는 건 권력이 아니라 위세라고 말한다. 사회는 족장(빅맨)에게 위세를 부여하고, 족장은 그 대가로 사회에게 착취당한다는 것이다.

3. 민족학자가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클라스트르는 위의 가구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맑시즘을 비판한다. 정확히는 맑스주의의 경제결정주의를 비판한다. 맑스주의는 생산력에 집중하며,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원시사회를 보면 경제는 사회, 의례, 종교적 생활에서 분리될 수 없다. “민족학자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원시사회를 사고할 수 없다.” 

 클라스트르는 같은 논리에서 ‘경제인류학’이라 불리는 조류를 비판한다. (그가 비판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경제인류학자는 모리스 고들리에와 클로드 메이야수다.) 그들은 원시사회를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 불평등에 대해 구조화된 사회에 덧씌우려 한다. 고들리에는 오스트리아 원시 부족을 연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족관계는 그 자체가 생산관계이기도 하고, 경제구조를 구성한다.” 즉 고들리에는 생산관계, 생산력, 생산력 발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틀을 원시사회에 집어넣으려 한다. 맑스주의자와 경제인류학자들 눈에 원시사회는 전(前) 자본주의 사회일 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클라스트르를 인용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으로 세계사를 다시 구성한다.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부구조라 불렀던 부분이 작동함으로써 발생하는 세계사의 변화를 고찰한다. 예컨대 유목민 사회와 수렵사회와 정주혁명이 일어난 뒤의 농업사회는 분명 경제적인 생활조건이 다르다. 그런데도 사회질서는 전복되지 않았다.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에서 국가라는 권력관계의 출현이 사회적 분업을 만들어냈고, 원시사회의 사회질서를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라는 말을 쓰려면 오히려 하부구조를 정치, 상부구조를 경제라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클라스트르의 이런 주장을 수용하여 교환양식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구조를 설명한다.

하지만 클라스트르의 이런 주장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품을 수  있다. 첫 째는 클라스트르의 맑스주의 비판이 허수아비 때리기가 아닌가 라는 의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 경제환원론자, 즉 경제가 무조건 중요하고 따른 건 안 중요하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클라스트르도 자신의 주장이 어그로를 끌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는 공식적인 저작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는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최대한 삼가한다. 그의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비판이 등장하는 부분은 유고인 <폭력의 고고학>이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저자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출판사
이학사 | 2005-06-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원시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이다. 따라서 원시사회는 불완전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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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고고학

저자
삐에르 끌라스트르 지음
출판사
울력 | 2002-11-3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원시사회에서 우두머리는 권력의 표면적인 장소,가정된 장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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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왜 생산양식을 통해, 경제의 변화를 통해 역사를 설명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하나의 사회가 다른 사회로 발전하는 데에는 동력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생산력 발전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클라스트르에게는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의 이행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는 이를 '수수께끼'로 남겨둘 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교환양식을 차용해 설명하는 과정에도 이행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4.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클라스트르가 경제인류학에 맞서 ‘정치’인류학을 도입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클라스트르가 내세우는 정치인류학은 서양 중심주의의 시각과 맑스주의의 경제환원론 둘 다에서 벗어나 원시사회를 하나의 대안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전쟁’을 예로 들며 국가-사회(서양)에 맞서는 국가 없는 사회(원시사회)에 대해 말한다. 원시사회의 전쟁과 폭력성에 대한 담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시사회는 폭력을 통제하는 평화로운 사회라는 담론이다. 클라스트르는 이를 일축한다. 다른 하나는 원시사회는 전쟁을 위한 존재이며, 이들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국가-사회관은 이러한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정부나 국가가 없는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원시사회에서 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가에 관해서는 세 가지 담화가 있다. 첫 째는 자연주의 담화이다.(르루아 구랑) 자연주의 담화에 따르면 공격적 태도는 인간의 본능이다. 르루아 구랑은 생존을 위한 사냥과 전쟁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클라스트르는 사냥과 전쟁의 동일시를 비판하며, 동시에 자연주의 담화가 종으로서의 인간 현실에 주목한 나머지, 사회적인 차원을 축출해 버린다고 비판한다. 전쟁은 원시사회의 사회적 존재에 뿌리내리고 있다. 두 번째 담화는 경제주의 담화다. 빈곤한 원시 부족들이 생존을 위해 계속 전쟁을 한다는 것인데,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는 풍요로웠다며 이 담화도 일축한다.

세 번째 담화는 교환주의 담화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전쟁과 상업 간의 관계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시도했다. “상업적 교환은 평화적으로 해결된 잠재적 전쟁을 표상하고, 전쟁은 불행한 상호교류의 귀결이다.” 공동체들 간의 관계는 우선 상업적이고, 그러한 상업적 기획의 성공 혹은 실패에 따라 평화냐 전쟁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상업은 전쟁에 비해 사회학적 우선성을 지닌다.

그러나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원시사회의 공동체는 호혜성과 자급자족의 이상을 지니고 있다. 전쟁은 결여된 교환이라는 우발적 사태가 아니다. 전쟁은 원시사회의 구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라스트르는 레비 스트로스의 교환주의 담화를 비판한다. 1. 원시사회는 교환의 장을 감소시키려 한다.(자급자족의 이상) 2. 교환에 부여되는 우선권과 독점권은 전쟁을 축출시킨다. 원시사회는 이 우선권과 독점권에 반대하며 파편화와 분산을 원한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상업이 전쟁에 우선하지만, 클라스트르가 보기에는 반대다. 끊임없는 전쟁은 동맹을 만들어내고, 이 동맹 내에서 교환이 이루어진다. 전쟁의 존재가 교환의 존재를 규정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지점에서 클라스트르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클라스트르가 전쟁이라 부른 것도 일종의 '교환'이라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다른 인류학자들을 인용하며 피의 복수나 포틀래치 등의 증여 방식을 보았을 때 전쟁도 일종의 교환이라고 주장한다.

원시사회가 이렇게 전쟁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우리’로써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원시사회는 차이를 유지하려 하고, 통합화를 거부한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많이 벌일수록 통합화는 적어진다. 국가의 가장 강력한 적은 전쟁이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존재하는 한 국가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을 고찰했다는 점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상태가 사회가 아니라고 본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원시사회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도 클라스트르의 설명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원시사회가 호전성을 지니고 있지만, 어떤 원시사회는 전쟁을 통해 권력자를 만들어냈고 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어떤 사회는 이 전쟁으로 인해 통합화가 가로막혔다. 이 두 사례의 차이는 무엇인가? 클라스트르는 원시사회가 국가로 반드시 발전한다는 서양의 진화주의에 비판한다는 점에서 인류학적 고찰을 통해 '국가없는 사회'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주장의 필연성 역시 입증하지 못한다. 이 역시 그에게는 '수수께끼'이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교환양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원시사회의 모습을 반영해야 하는 것인가? 국가를 통해 폭력이 통제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연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클라스트르는 대안시스템으로써의 원시사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현실이 원시사회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교환양식a(원시사회)를 반영하여 교환양식c(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교환양식d(미지의 것)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원시사회가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해결해야 한다. 자연상태와 국가의 폭력을 넘어선 평화의 세계란 과연 무엇일까. <세계사의 구조>를 끝까지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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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8

 


윤리형이상학 정초

저자
임마누엘 칸트 지음
출판사
아카넷 | 2005-08-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번역한 책.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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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에 직면한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가하는 물리적. 구조적 폭력과 전쟁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하게 된다. 인간이 복제되고 대량 생산되는 미래를 상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존중받고 도덕적으로 대우받을 권리를 지닌 존재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이런 시대에도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계몽주의 시대에 살았던 칸트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경험적 사실들과 시대적 상황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모두 소거하고 남는 ‘순수한 선험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이유는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율은 인간의 모든 이성적 자연존재자의 존엄성의 근거이다.”(161) 그렇다면 인간 존엄성의 근거인 ‘자율’이란 무엇인가? 자율(自律)이란 스스로 법칙을 수립하고, 그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만이 ‘자율’이 가능한 존재일까?


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선의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하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을 오로지 선의지뿐이다.”(77) 칸트는 선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선한 행위를 진짜 선한 행위라고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우리는 흔히 행동의 결과를 보고 선한 행위를 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이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을 보고 ‘착하다’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그 행동의 동기를 파악하여 선한 행위를 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어떤 청년이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옮겨주다가 실수로 그 짐을 떨어뜨려 짐이 상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그 할머니가 청년에게 욕을 한다면 사람들은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 청년이 결과적으로는 할머니에게 피해를 주긴 했지만 할머니를 돕고자 했던 ‘동기’가 선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이 선한지, 짐을 옮겨주는 청년이 선한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칸트에 따르면 선한 행위의 기준은 선한 동기나 좋은 결과가 아니라 선의지이다. 청년이 주위 평판이나 사회적인 눈초리(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때문에, 무언가의 이익이나 보상을 바라고 자리를 양보했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다면, 그는 선한 것이 아니다. 그 청년은 내면의 의지가 아니라 타율에 의해 행동했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들이 변화한다면 그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경향성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한 행위의 기준은 내면의 의지, 옳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택하는 의지, 선의지이다.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또 어떤 세워진 목적 달성에 쓸모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79) 다른 말로 하면, 선한 행위는 오로지 ‘의무로부터’ 나와야 한다. 어떤 행위가 언제 변할지 모르고 타율적인 자신의 이해관계나 사회적 압력이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위 하는’ 의무에서 기인할 때 그 행위는 참으로 선하다.


인간이 이런 선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 선행해야 한다. 이는 결코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순수 이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자만이 이러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인간이 바로 이 이성적 존재자에 포함된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윤리형이상학 정초> 2절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법칙과 윤리법칙, 둘 다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3절에 따르면 인간이 감성계와 예지계(지성계) 둘 다에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 역시 동물처럼 자연적 법칙과 자연적 경향성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감성계에 속해 있다. 동물들처럼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연법칙으로부터 독립된 법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윤리법칙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타율, 자연법칙에 따르지 않고 새로운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자율) 지성계에 속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자연적 경향성만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그 법칙 자체에 대한 존경에 의해 행위 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다. 배가 고파도 인간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밥을 먹지 않고 다른 행위를 하거나, 살을 빼기 위해 식사량을 조절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배가 고프지도 않은 데 밥을 먹을 수 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계획과 자기 원칙에 따라) 다이어트와 폭식이 가능한 이성적 존재자다. 졸려도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하고, 수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가 인간이다.


그러나 ‘순수 이성’의 측면에서 인간이 지성계에 속해 있고 자연적 경향성에 따르지 않고 자율적으로 의무로부터 행위 ‘할 수 있다’고 해도, ‘실천 이성’의 측면에서의 과제는 남는다. 실제로 안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일종의 강요이자, 자기에게 부과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이란 이성적 존재자가 자신에게 가하는 명령이며, 법칙이다. 인간은 법칙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감성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정언 명령이라는, 자연적 경향성과 같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늘 따라야 하는 명령이자 의무가 필요하다.


칸트는 구체적인 정언명령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132) 이 첫 번째 정언명령에서 인간이 존엄성이 드러난다. 자율적인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이 자신의 준칙/법칙/의무를 수립할 때, 그는 그것이 보편적인 입법이나 준칙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신의 행위가 특수하고, 자신 만에게 유용한 것이 되느냐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세계 보편의 법칙이 될 수 있는 지를 늘 고민해야 하는 존재자가 인간이다. 이런 보편적인 법칙을 수립하려는 인간의 자기 법칙수립적인 자율성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다.


두 번째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간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148)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한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인간의 자율성에 의해 생겨나 인간 스스로가 복종한 법칙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된 목적의 왕국에서 모든 것은 가격이나 존엄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다른 것과 교환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목적의 왕국에서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모든 가격을 뛰어넘는 어떤 것은 존엄성을 갖는다.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과 필요 등은 가격을 가지며,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이루는 것은 한낱 상대적 가치, 다시 말해 가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가치, 다시 말해 존엄성을 갖는다.”(159)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법칙을 수립하는 인간의 자율성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다.

이처럼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자율성이라는 칸트의 주장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인간이 왜 존엄성을 갖느냐는 질문에 대해,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 그러한 천부인권을,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제기하는 대답은 그러한 천부인권, 자연법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날 때부터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은 타율적으로 정해진 것이며, 자연적 경향성이다. 또한 인간이 천부인권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자연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보장해줄 수 없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시기, 이러한 천부인권은 국가나 정부에 의해 보장받는 시민권 아래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천부인권이나 자연적 경향성,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국가나 정부의 시민권에서 찾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인간 내면의 의지에서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찾아냈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외부의 무언가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자율성에서 찾음으로써,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철저히 인간 내면에서 발견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국가나 정부, 자연 등 외부의 그 무엇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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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7

 


도덕에 관하여

저자
데이비드 흄 지음
출판사
서광사 | 2008-04-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근대 경험론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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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종종 덕스러운 행동을 한다. 정의로운 행동을 별 부담 없이 하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르신들을 보면 자리를 양보하고, 지나가다 거리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으면 주워서 버린다. 하지만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난 뒤 그는 의문이 있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한 걸까?” 칸트라면 나의 이런 행동이 ‘네 마음의 도덕법칙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라면 ‘네가 그렇게 행동해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다. “나의 정의로운 행동은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른 행동일까 아니면 법과 도덕, 사회적 규범 때문일까?” 이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철학자는 아마 흄일 것이다.


흄에 따르면, 정의는 인위적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흄은 덕에 대한 감각, 정의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우리가 누군가가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말할 때,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동기’이다. 우리가 칭찬하고 찬동하는 것은 그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산출한 동기이다. 그렇다면 그 동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유덕한 행동,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만드는 독립적 원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와 같은 행동을 수행할 역량을 가진 독립적 원리가 인간 본성에 있으며 또 원리의 도덕적 아름다움이 그 행동을 값지도록 한다는 것이다.”(56)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내가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나는 왜 그 돈을 갚아야 하는가?


“내가 눈곱만큼이라도 정직하거나 의무감과 책임감을 눈곱만큼이라도 가졌다면 내가 정의를 존중하고 나쁜 행동과 속임수를 싫어한다는 것이 나의 이유로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규율과 교육을 통해 수련 받은 계몽된 상태의 사람에게는 이 대답이 분명히 옳고 충분하다. 그러나 거칠고 더욱 자연스러운 조건의 사람은 이 대답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궤변적이라고 물리칠 것이다.”(56)

물론 사적인 이익이나 평판 때문에 돈을 갚을 수도 있지만, 이는 사적인 이익이나 평판에 관심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이 관심이 중단되는 경우 돈을 갚을, 정의로운 행동을 할 동기는 사라져버린다.

어떤 이들은 정의로운 행동을 할 동기가 “공공의 이익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 “공공의 이익은 인간의 일반성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고 숭고한 동기이며, 정의와 통상적 정직을 갖춘 행동에서 빈번하듯이 사적 이익과 상반된 행동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작용한다.”(58)


흄은 이러한 반론을 통해 인간은 ‘인류애’ 같은 정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타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념은 매우 제한적이고 편파적이다. 같은 나라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내 가족과 친지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


공공의 이익이나 인류애가 정의로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없다면, 사적인 자비나 자기 집단의 이익에 대한 존중이 정의로운 행동의 동기가 될 리는 더욱 만무하다. 내가 사정이 급하면 사적인 자비는 금방 사라질 테고, 자기 집단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나에게 손해를 미치는 경우 그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사라질 것이다.


흄은 이러한 논증을 통해 정의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이나 정념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법률 준수의 공정성과 그 가치가 없다면, 우리가 정의의 법칙을 준수할 실질적으로 보편적인 동기를 자연적으로 갖지 않는다.”(61)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감각은 자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비록 필연적이라 하더라도 교육 및 사람들의 묵계 등에서 발생한다,”(61)


그런데 흄은 이 대목에서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덕과 정의가 자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덕의 감각보다 자연스러운 인간 정신의 원리는 결코 없으므로 정의보다 자연스러운 덕은 없다,”


어떻게 정의가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일 수 있을까? 첫 째, 인간의 ‘필요’에 의해 정의는 자연적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필요로 하며, 그리하여 사회를 ‘발명’한다. “발명이 명백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사유나 반성의 개입 없이 근원적 원리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된 것과 마찬가지로 발명도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할 것 같다.” 이성 간의 자연적 욕망에 의해 남녀는 결합하고, 가족과 혈족이 꾸려진다. 자기 집단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스러운 정념을 지닌 인간들은 서로 충돌한다, 이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안정적인 삶(예컨대 소유권)을 유지하려 한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집단에 대해 편파적인 사랑을 한다는 인간의 정념에서 기인하여 사회가 구성되고, 정의의 법칙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념이 방치되는 것보다 절제를 통해 더욱 만족되는 것이 명백하므로, (중략) 사회를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것은 명백하므로”(72) “정념 자체는 스스로를 억제”(72)한다. 즉 정의의 기원은 인간의 욕구에 비해 부족한 자연 자원,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편파적 사랑(한정된 관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자연적인’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인 정념과 욕망에서 ‘인위적인’ 정의가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가 자연스러운 정념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치인들은 사람들을 보다 쉽게 통치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존경과 불의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도록 애쓴다.” 공적인 비난과 칭찬이 정의로운 행동에 가해지면서 사람들은 정의를 내면화한다. 특히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될 어린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러한 정의를 내면화한다. “명예에 대한 소감은 어린이들의 여린 정신에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원리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확고부동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본성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우리 내부적 구조에 가장 깊이 붙박여 있다.”(83)


이 때 우리는 ‘자연적’이라는 말을 희귀하고 비일상적인 것에 반대되는, 일상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가 일상적인 의미로 자연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어디에나 있다면, 도덕성에 대한 소감도 어디에나 있을 것은 확실하다. 도덕성에 대한 소감이 전혀 없고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찬동이나 혐오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국가와 개인은 세상에 결코 없기 때문이다.”(49)


정리하자면, 흄은 정의의 속성을 인위적인 동시에 자연적인 것이라 말했다. 정의는 인간 본성에 그

동기를 내재하고 있지 않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인위적이다. 하지만 정의가 자연적 욕망과 정념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또한 한 사회가 그러한 정의감을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그리하여 ‘일상적인’ 도덕성에 대한 소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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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6

 


니코마코스 윤리학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출판사
| 2011-10-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서양 윤리학을 대표하는 고전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대표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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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우다이모니아) 폴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에 대해 대답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에 하나의 원리를 제시한다. 세계를 설명하는 그의 원리이다. 바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1094a|1|)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목적이란 기능을 의미한다. 의사의 기능은 병을 고치는 것이며. 의사의 행위는 병을 고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병을 고치는 ‘기능’을 잘 수행할수록 ‘탁월성’이 있는 의사라 불리며, ‘덕(아레테)이 있다’고 불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목적과 기능에 걸맞은 선택과 행위를 할 때 그는 ‘좋음’을 추구하고 따른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목적) 어떤 처방을(행위, 선택) 한다면, 그는 좋음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존재들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행위와 선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매우 다양한 좋음들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좋음들 중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것이 바로 에우다이모니아(잘 삶/행복)이다. 에우다이모니아가 최선의 좋음인 이유는 이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이 모든 좋음들이 좋음이게끔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다른 좋음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며,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다. 예컨대 명예를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명예를 얻으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했을 때 “왜 돈을 벌려고 하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에우다이모니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더 이상 ‘왜 그런 행동을 했냐?’고 질문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1097a|4|)


다른 말로 하면 에우다이모니아란 ‘자족적’인 것이다. 자족성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에우다이모니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 보자. 이미 앞에서 다 언급하긴 했다. 모든 행위는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한다. 또한 행위의 목적이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일반화해보자. 다양한 좋음들을 뛰어넘는 최상의 좋음이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기능‘들’을 뛰어넘는 어떤 기능도 있지 않을까? 바로 ‘인간의’ 기능이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없는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란 바로 ‘이성’이다.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이다. 그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사유한다는 의미가 첫째,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둘째이다.


즉 “인간 고유의 기능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 혹은 이성이 없지 않은 영혼의 활동”(1098a|14|)을 뜻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 기능을 잘 수행할 때 탁월성이 있다고 말한다. 기타를 치는 연주자는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지만, 기타를 잘 칠수록 그 기타 연주자는 탁월성이 있는 기타 연주자인 것이다. ‘훌륭한’ 인간이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이다. 즉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1098a|15|)


그런데 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적인 좋음을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정의하는가? 탁월성은 ‘품성상태’가 아니라 왜 ‘활동’에서 성립하는 것인가? 간단하다. 품성상태는 그저 ‘상태’일 뿐이지 실현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품성상태는 현존하면서도 아무런 좋음을 성취해내지 않을 수 있는 반면 활동은 그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098a|8|)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념을 빌리자면, 품성상태는 ‘가능태(잠재태)’일수는 있으나 ‘현실태’는 아니다. 오직 활동만이 ‘현실태’이기 때문에 탁월성은 활동에서 성립가능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이성을 가진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를 상기해보자. 인간은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뉜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공유하는 부분으로, 영양과 성장을 담당한다. 반면 이성적인 부분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인데, 이 역시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과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으로(욕구적인 부분) 나뉜다. 이렇게 두 부분이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성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탁월성 역시 이 두 가지 차이에 따라 나뉠 수 있다. 자체 안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지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지혜나 이해력, 실천적 지혜는 지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이성에 설복/저항하는 부분은 성격적 탁월성이 관계하는 영역이다. 자유인다움, 절제는 성격적 탁월성에 해당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임을 밝혔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관조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조적인 것이야말로 어떤 것을 행위 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에우다이모니아가 그 자체로 원인이 되는 것처럼, 관조적인 활동만이 그 자체 때문에 사랑 받는다. “관조적인 활동으로부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반면, 실천적 활동으로부터는 행위 자체 외의 무엇인가를 다소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1177b|5|) 따라서 이 관조적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에우다이모니아이다.


하지만 인간이 관조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생겨나고, 씨족이 생겨나고 국가가 생겨난다. ‘정치’가 생겨난다.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경제활동이나 인간의 외적 유복함을 채우는 행위는 자족 이상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더 유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족이나 행위는 지나침에 의존하지 않으며"(1197a|9|) "비록 땅과 바다를 다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귀한 것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1197a|10|) 유복한 삶은 자족 이상은 필요 없으며, 자족성을 갖추고 관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면, “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 것이니까.”(1197a|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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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속의 불만(프로이트 전집12)

저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4-02-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문명, 사회, 종교에 관한 논문들을 모은 이 책은 프로이트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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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은 본능의 욕구와 문명의 제약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관계를 다루고 있는 논문이다.

1.

종교적 감정의 진정한 원천은 어떤 독특한 느낌에 있다. 이 느낌은 영원에 대한 감각, 망망대해에 대한 느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느낌을 가진 이는 자신을 종교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느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우리는 ‘이 세상 밖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 외부 세계 전체와 결코 풀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느낌이다. 유일한 문제는 그 느낌이 정확하게 해석되느냐, 그 느낌을 종교적 욕구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간주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런 느낌을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자아는 자율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뚜렷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병리학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자아의 외부 세계의 경계가 불확실해지거나 실제로 경계선이 부정확하게 그려져 있는 상태를 많이 알게 되었다. 즉 우리 자신의 자아 감각도 얼마든지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자아의 경계도 변함없이 일정한 것은 아니다.

 

어른의 자아 감각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았을 리는 없다. 자아 감각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발달해 왔다. 유아는 외부 세계와 자아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차츰 외부 세계와 자아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고, 대상을 자아의 맞은편에 놓게 된다. 밖에 있는 외부 세계를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자극은 다양한 고통과 불쾌감이다. 무제한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쾌감 원칙은 이 불가피한 불쾌감을 제거하고 피하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그런 불쾌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아에서 분리하여 밖으로 던지고, 낯설고 위협적인 밖과 대결하는 순수한 쾌감-자아를 창조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분리에도 불구하고 원초적 자아 감각은 더 범위가 좁고 뚜렷한 경계선을 가진 성숙한 자아 감각과 한 쌍을 이루어 나란히 존재한다.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나중에 거기서 파생된 것과 나란히 살아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정신 속에서만 가능하다. 정신생활에서 과거의 것은 보존될 수도 있고, 어쨌든 반드시 파괴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망망대해 같은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어떤 느낌이 에너지의 원천이 되려면, 그 느낌 자체가 강한 욕구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유아기의 무력함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에서 종교적 욕구가 유래하는 것은 명백하다.

 

2.

 

인생은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을 견디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종교 뿐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적과 의도는 무엇인가? 인간은 인생에 무엇을 요구하고, 인생에서 무엇을 성취하기를 바라는가? 답은 행복이다. 인간은 고통과 불쾌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쾌감을 경험하려고 한다.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쾌락 원칙의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의 행복은 극도로 억제되어 있던 욕구가 충족되는 것에서 오고, 이런 일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오직 대조에서만 강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상태에서는 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우리 자신의 이러한 심리 구조로 인해 이미 제한되어 있으며,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체, 외부 세계, 타인들과의 관계로 인해 불행에 처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이겨내기만 해도 이를 다행이라 여기며, 고통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고 쾌락을 얻는 것은 뒷전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다. 자발적 고립, 과학기술을 통한 자연(외부세계)의 지배와 통제, 중독 등등. 또 다른 방법은 리비도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는 본능적 목표가 외부 세계의 방해를 받을 수 없는 쪽으로 이동한다. 본능의 승화가 그것이다. 예술가의 작품 창작이나 과학자의 진리 발견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극소수만 할 수 있는 방법이며, 이 극소수조차 이 방법을 통해 완전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또 다른 방법은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는 대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은 그가 도전하기엔 너무 강하다. 인류의 종교들은 이런 점에서 ‘집단 망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를 망상이라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외부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으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외부 세계에 속해 있는 대상에게 집착하고 그 대상과의 감정적 관계에서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고 있을 때 가장 고통에 무방비하며, 언제든 그 대상을 잃으면 불행에 휩싸일 수 있다.

 

이 모든 방법 중에 완벽한 방법은 없다. 쾌락 원칙은 행복해지기 위한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부과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결코 완수될 수 없다. 이는 당사자가 외부 세계에서 진정한 만족을 얼마나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외부 세계에서 자신을 얼마나 독립시킬 수 있는가, 자신의 원망에 맞추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얼마나 갖고 있다고 느끼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의 정신적 소질은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행복을 얻고 고통으로부터 보호받는 방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강요한다. 종교는 삶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현실 세계의 그림을 망상으로 왜곡시키는데, 이것은 지성에 대한 위협이다. 종교는 인간을 심리적 유아 상태로 묶어놓고 그들을 집단 망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신경증에서 구제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이상의 성공은 거두지 못한다.

 

3.

우리가 언급한 고통의 원천 중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육체, 외부세계(자연)에 대한 지적에는 동의한다. 문제는 사회적 제도이다. 우리는 고통의 사회적 원천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회적 제도는 우리 모두에게 보호와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문명을 포기하고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명에 대한 이러한 적대적 태도는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프로이트는 당시의 문명 상태에 대한 깊고도 장기간에 걸친 불만이 이 적대적인 태도의 토대이며, 문명에 대한 비난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믿는다. 첫 번째 계기는 기독교 신앙이 이단 종교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기독교 교리가 택한 지상 생활에 대한 낮은 평가이다. 두 번째 계기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는 항해가 진행되면서 원시적 민족이나 종족과 접하게 되었을 때이다. 많은 이들은 원시적 민족들이 그처럼 태평스러운 까닭이 복잡한 문화적 요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로부터 사회의 요구를 폐지하거나 줄이면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제 행복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된 문명의 본질로 관심을 돌려보자. 문명은 동물적 상태에 있었던 우리 조상의 삶과 우리를 구별해주고, 인간을 자연에서 보호해주고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해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는 규제와 성취의 총량이다. 우선, 지구를 인간에게 쓸모 있게 만들고 자연의 폭력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과 자원은 문화적인 것이다. 도구, 불, 주거지, 배와 비행기, 현미경, 사진기 등등. 그러나 높은 문명 수준에 도달한 나라에서는 두 번째 요구가 생겨난다. 아름다움과 청결과 질서이다. 그러나 문명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은 문명이 고도의 정신 작용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하며 인간 생활에서 관념에 지도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종교 체계이다. 학문과 예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명의 마지막 특징은 바로 인간의 상호 관계를 규제하는 방식이다. 문명이 없다면 사회관계는 각자의 자의에 맡겨진다. 육체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자신의 이익과 본능에 따라 사회관계를 결정한다. 개인의 힘이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되는 순간, 문명은 결정적인 걸음을 내닫는다. 즉 문명의 필수 조건은 정의이며, 그 최종 결과는 법의 지배이다. 따라서 인간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자유에 대한 욕망은 이에 대한 저항이자, 문명에 대한 적개심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개인의 리비도가 발달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리비도의 승화는 전적으로 문명이 본능에 강요한 변화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욕구 단념이야말로 모든 문명이 맞서 싸워야 하는 적개심의 원인이다.

 

4.

그렇다면 문명은 어떻게 발달했고 그 발달 경로를 결정한 것은 무엇인가? 원시인은 노동의 효율성을 위해 가족을 형성했다. 가족 제도의 창설은 성욕이 지속적으로 함께 사는 하숙인처럼 인간에게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원시적 가족은 아직 문명의 요소를 갖추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자의가 전혀 제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족이 형제 무리로 발전하면서 법이 생겨난다. 노동에 대한 강요와 사랑의 힘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과 문명의 관계는 초기의 명백함을 잃어버리고, 사랑이 문명의 이익과 대립하고 문명이 상당한 제약으로 사랑을 위협하는 사태가 초래된다. 이 균열은 처음에는 개인이 속해 있는 가족과 그보다 더 큰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다가, 점차 문명이 성생활을 제한하는 양태로 나타난다. 문명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 사용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대부분 성욕에서 전용해야 하기에, 점점 더 엄격한 예방조치를 취한다. 오늘날의 문명은 단둘만의 확고한 유대를 바탕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성관계만을 허용하고, 성행위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며, 지금까지는 인류의 번식 수단으로 성행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행위를 용인하고 있다.

 

5.

그러나 문명이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단 성적 만족만이 아니다. 문명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리비도적으로 한데 묶으려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기독교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는?

 

많은 이들이 진실을 부인하지만, 인간은 공격 본능을 타고 났다.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 성향은 이웃과 우리의 관계를 저해하고 문명에 많은 에너지 소모를 강요하는 요인이다. 이 상호 적개심으로 문명사회는 붕괴 위기를 맞이한다. 따라서 문명은 이 본능을 억제하고자 한다. 그러나 문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인간은 이 공격본능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문명이 공격 본능에도 이렇게 많은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에, 인간은 문명 속에서 행복해지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은 이 문명에 불만을 품고 있다. 우리는 우리 문명이 우리의 요구를 더 잘 만족시키고 우리의 비판을 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차츰 변화하리라고 기대해도 좋다. 그러나 문명의 본질 속에는 문명을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굴복하지 않는 장애가 존재한다는 생각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6.

정신분석 이론 가운데서도 본능 이론은 가장 힘든 이론이다. 프로이트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식욕과 사랑이라는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식욕은 개체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본능을 대표하며, 사랑은 대상을 얻으려 애쓰며, 종족 보존을 주요 기능으로 한다. 리비도란 대상 본능의 에너지이며, 식욕과 사랑의 기반이 되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생물 개체를 보존하려는 본능과 그것을 점점 더 큰 단위로 결합시키려는 본능 이외에 그 단위를 해체하여 원래의 무기물로 돌려보내는 본능도 존재한다. 그 본능의 일부가 외부 세계로 되돌려져 공격과 파괴 본능으로 나타난다. 만일 외부에 대한 이 공격성을 제한하면, 이는 다시 내면으로 들어와 자기 파괴를 진행한다.

 

7.

문명은 자신에 적대하는 공격성을 억제하거나 해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거나 아예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의 공격 본능을 내면으로 돌려보낸다. 자신의 자아로 돌려지는 것이다. 양심과 죄책감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개인의 위험한 공격 욕구를 통제한다. 따라서 죄책감의 근원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죄책감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첫 번째 죄책감은 본능 만족을 단념하도록 강요하고, 두 번째 죄책감은 본능 만족을 단념하는 것만 아니라 징벌까지도 요구한다. 외부의 권위자를 계승하고 부분적으로 그 권위자의 대리인으로 등장한 초자아는 그 권위자의 엄격함을 연장한다. 욕망을 자제하면 권위자와 비긴 셈이고, 죄책감은 전혀 남지 않는다. 그러나 초자아에 대한 두려움은 사정이 다르다. 이처럼 외부에서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행은 끊임없는 내적 불행, 즉 죄책감의 긴장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기를 단념하면, 좌절된 공격본능을 초자아가 모두 떠맡아서 자아에 대한 초자아의 공격성이 높아진다. 어린이는 만족을 방해하는 권위자에게 상당한 공격 욕구를 품는다. 그러나 이는 곧 단념해야만 한다. 대신, 공격할 수 없는 권위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그 권위자를 자기 자신 속에 받아들인다. “내가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나라면, 나는 아버지를 호되게 다룰거야.” 결론적으로, 초자아의 형성과 양심의 발생에는 타고난 기질적 요소와 현실적 환경의 영향이 함께 작용하는 셈이다.

 

8.

프로이트는 죄책감이 문명 발달에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문명의 진보를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죄책감의 고조에 따른 행복의 상실임을 보여주었다. 결국 문명의 소산인 죄책감은 죄책감으로 인식되지 않고, 대부분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거나 일종의 불쾌감이나 다른 불만으로 나타난다.

 

몇 가지 모순에 대해 검토하고 넘어가자. 첫 번째, 죄책감은 어느 시점에서는 공격 본능이 억제된 결과였지만, 또 다른 시점에서는 공격 본능이 행위로 실현된 결과였다. 즉 사악한 행동에 대한 후회에서 생겨나는 죄책감은 항상 의식되는 반면, 사악한 충동을 지각한 결과로 생겨나는 죄책감은 무의식 상태로 남는 것이 아닌가? 강박 신경증이 이를 입증한다. 두 번째 모순은 공격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 에너지는 단지 외부 권위자의 징벌적 에너지를 계승하여 외부 권위자를 항상 마음속에 살려둘 뿐이라는 견해가 있는 가하면, 그 에너지는 사용되지 않은 자신의 공격 에너지이고 외부로 공격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사람은 이제 억압적인 권위자에게 그 공격 에너지를 돌리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첫 번째는 죄책감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편리하지만, 두 번째는 죄책감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이 모순은 거의 해결되었는데, 본질적이고 공통된 요소로 남은 것은 두 경우 모두 내면으로 방향을 돌린 공격 본능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인류에게 숙명적인 문제는 문명 발달이 인간의 공격 본능과 자기파괴 본능에 의한 공동생활의 방해를 억누르는 데 성공할 것이냐, 성공한다면 어느 정도나 성공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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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5

 


정신분석 입문

저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출판사
돋을새김 | 2009-11-0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간 본성과 지성의 고결함에 던지의 의문 핵심적인 내용으로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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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1) 정신분석과 정신의학

 

제3부는 신경증 현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이 담겨 있다. 신경증 환자의 증상에는 일정한 동기, 의미, 의도 그리고 특정한 심리적 연관성이 있으며, 이 증상은 심리적 과정을 알려준다. 이러한 증상을 보이는 개인은 이 과정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한 사례를 보자. 한 부인은 남편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 한 장을 읽고 질투심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질투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증상은 이처럼 환자 자신의 주관적 고통과 연관 되지만, 객관적으로는 그 가족의 생활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정신의학이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증상이다.

 

앞에서 설명한 부인이 남편을 의심하는 근거는 편지 한 장뿐인데,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편지 한 장으로 질투심을 표출하는 행위가 근거 없는 짓이라는 사실은 당사자인 부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질투를 정당화하면서 괴로워했다. 논리나 현실에 근거한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이런 유형의 관념을 일반적으로 ‘망상’이라 부른다. 이처럼 망상이 ‘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온 것이고, 이 망상은 왜 하필 ‘질투 망상’인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정신의학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 기질, 유전적 원인을 제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질투’ 망상인가? 그리고 기질 때문이라면, 환자의 정신적 체험과는 상관없이 언젠가는 망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말해줄 수 있다. 그녀는 하녀에게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도록 부추겼다. 그녀는 정신분석 과정에서 특별하게 해석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말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어떤 젊은이에게 무척 끌렸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위 메커니즘을 택했고 이로 인해 질투 망상이 불러일으켜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프로이트는 세 가지 결과를 끌어낸다. 첫째, 망상은 무의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의미와 충분한 동기를 가진 것이다. 둘째, 망상은 무의식적 정신 과정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 즉 환자 자신이 소망하던 것에 대한 일종의 위안이다. 셋째, 환자의 체험에 근거하여 분석하여 이 망상은 ‘질투’ 망상이 되었다.

 

2) 증상의 의미

 

신경증 증상은 실수 행위나 꿈과 같은 특성을 가지는 동시에, 환자 자신들이 겪어온 삶과 관련된다. 신경증 질환의 종류에는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있다. 강박 신경증 환자는 흥미가 없는 데도 어떤 생각에 몰두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중요한 문제로 착각한다. 강박증 환자는 강박관념을 제거할 수 없으며, 모든 증상들을 본래의 모습과는 다르게 바꾸고 미룰 수 있다. 정신의학은 강박증 환자들을 그저 퇴화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여,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특이한 강박 증상들도 다른 고통과 마찬가지로 제거될 수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강박증 환자의 증상은 환자의 체험과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정신 분석가는 의미 없거나 목적 없는 행위를 설명해 주는 과거의 상황을 발견해야 한다.

 

이처럼 개인적인 증상들은 체험과의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밝힐 수 있지만, 그보다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을 규명하기엔 정신분석의 기술이 부족하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꿈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꿈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며 개인적으로도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전형적이라고 부를 만한 꿈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아직 그 꿈이 왜 단조로우며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

 

3) 외상성 고착 - 무의식

 

신경증 환자는 병적 증상을 보이며 과거의 특정 시기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특정 시기에는 어린 시절, 심지어 유아기도 포함된다. 이러한 행태는 전쟁 때문에 발병하는 외상성 신경증과 유사하다. 전쟁이나 생명을 위협하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이들은 병적 증상을 보인다. 외상성 신경증은 외상을 가져온 사고 순간에 ‘고착’된다. 강박 신경증자 역시 과거의 어떠한 경험으로부터 기반하여 특정 행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중요한 것은 이 때 환자는 자신의 행위가 과거의 체험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르고 있는데도’ 행동한다는 이 지점에서 ‘무의식적 심리과정’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브로이어와 프로이트는 ‘환자의 마음속에는 증상의 의미를 숨기고 있는 명확한 무의식적 과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과정을 의식으로 끌어내면 증상은 사라진다. 이것을 통해 정확한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환자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정신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신경증에 걸린다.

 

4) 저항과 억압

 

프로이트는 신경증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신경증을 연구하면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 언급한다. 의사가 환자를 고통스러운 증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려 할 때, 환자는 치료 과정 내내 강하고 집요하게 저항한다. 따라서 의사는 환자를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의사는 환자가 연상한 내용 중 일부만 선택하거나 빠뜨리지 않도록 분명히 말해두고, 치료의 성공 여부는 환자 자신이 기본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그럼에도 환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숨기려 한다. 환자가 어느 정도 의사에게 순응하고 나면, 환자의 저항은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적인 형태로 바뀐다.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난점들이나 불확실한 문제를 부각시켜 의사와 논쟁을 벌이거나, 자신의 논리를 의사가 반박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반드시 ‘나타나야만’ 한다. 만약 충분한 저항이 없거나 환자 자신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치료가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 분석의 본질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환자의 저항을 통해 나타난 병인적 과정을 억압이라 부른다. 먼저 충동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목표를 추구하는 심리적 과정을 충동이라 한다. 항상 충동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충동을 포기한다. 그리고 이 포기의 과정에서는 충동 때문에 발생했던 에너지가 빠져나감으로써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충동이 억압될 때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억압받은 충동은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충동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또 다른 개념은 무의식이다. 모든 정신과정은 무의식적 단계에서 의식적 단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모든 무의식적 과정이 의식적인 것으로 바뀔 필요는 없다. 무의식의 조직은 커다란 대기실 같아서, 그곳에는 각각의 심리적 충동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이 대기실 옆의 방이 의식이 머무는 곳이다. 이 두 방 사이의 문턱에는 문지기가 있어, 이 문지기가 개별적인 충동들을 걸러내고 검열하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이 충동들이 문턱까지 도달했지만 문지기에 의해 제지되었다면 그것들을 의식할 수는 없다. 이를 ‘억압되었다’고 한다. 문지기가 들여보낸 충동들도 반드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번째 방은 전의식이기 때문이다.

 

5) 인간의 성생활

 

학문의 영역에서의 성은 일상생활에서 받아들이는 개념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성생활에서 성별의 차이를 무시한다. 이들은 동성애자 이거나 성도착증자이다. 성도착자들은 대상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적만을 놓고 본다면 정상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 외에 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성행위는 정상적인 사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식과 많이 다르다.

 

첫 번째 집단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상대방 신체의 다른 기관이 성기의 역할을 한다. 예컨대 입과 항문이다. 두 번째 집단의 사람들은 성적 기능이 아닌 다른 기능 때문에 성 기관에 집착한다. 예컨대 배설 기능이다. 여성의 유방이나 발, 땋아 내린 머리 등에 성욕을 느끼기도 한다. 신체 기관으로 성욕을 채우지 못하는 페티시즘도 다른 예이다. 시간증도 대표적이다. 두 번째 집단의 극단은 정상인에게는 단지 성행위의 준비 단계에 해당하는 것들을 성욕의 목표로 삼는 도착증자이다. 이성을 바라보거나 만지고만 싶어 하는 이들, 관음증자나 노출증자가 그들이다. 혹은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도 있다. 결국 이들 각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성적 만족을 현실에서 찾으려는 사람들과, 어떤 현실적 대상도 필요치 않고 쾌락 자체를 공상으로 대체함으로써 단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이반 블로흐는 도착증을 퇴화의 징후로 보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성도착 행위들은 원시 종족이든 고도의 문화 민족이든 관계없이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나며, 그 사회에서 묵인되거나 널리 통용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앞에서 신경증 증상은 성적 만족의 대체물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만족에는 도착적인 성욕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모든 신경증 환자들은 동성애적 충동을 보이며, 많은 신경증자들은 잠재적 도착증의 형태로 표출된다. 예컨대 편집증은 강렬한 동성애적 충동들을 억압하려는 시도 때문에 발생한다. 히스테리 환자들에게는 성 기관을 신체의 다른 기관들로 대체하려는 도착적 충동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성생활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그 대상으로 어린이도 포함해야 한다. 증상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검토한 기억들과 연상들이 대체로 유아기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아의 성생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리비도’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리비도는 본능이 드러내는 힘이다. 리비도는 성적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배가 부른데도 계속 젖을 빠는 유아의 행동에 주목해보자. 유아는 빠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는다. 여기서 입과 입술은 성감대이다. 유아는 성감대를 혀나 엄지손가락으로 대체하고, 자위행위로 대체한다. 이처럼 유아기의 성은 자기 성애적 양상을 보인다. 즉 성적 대상을 자신의 몸에서 찾는 것이다. 배설 행위에서 성적 만족을 느끼는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사회적 품위와 관습에 의해 이러한 쾌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6) 리비도의 발달과 성적 조직

 

성생활, 리비도 기능은 어떠한 완성된 형태가 아니다. 여러 번 모습을 바꾸며 단계별로 발달해 나간다. 발달 과정의 전환점에서 모든 성적인 부분 충동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생식기가 최우선이 된다. 이리하여 성의 역할을 생식 기능에 종속된다.

 

부분적인 성 충동들과 그 대상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러한 발달 과정을 설명해보자. 성적 충동의 구순기에 관계하는 대상은 어머니의 젖이다. 그러나 점차 그 대상은 자기 신체의 한 부분으로 대체된다. 항문기에 들어서서, 자기 성애적 충동으로 바뀐다. 이후의 발달 과정은 두 가지 목표를 지닌다. 첫째, 자가 성애적인 단계를 벗어나는 것, 즉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대상을 다시 외부의 대상과 바꾸는 것이다. 둘째, 개별적인 충동의 서로 다른 대상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유일한 대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인간의 최초의 사랑의 대상, 성적 만족의 대상은 어머니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여기서 등장한다.

 

신경증에 걸린 성인들에 눈을 돌려보자. 정신분석학은 모든 신경증자들이 자신이 한 때 오이디푸스였거나, 콤플렉스에 의해 햄릿과 같은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개개의 인간은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며,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어머니를 향한 리비도적 욕망에서 벗어나 그 욕망을 현실적인 다른 대상을 선택하는 데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들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리비도를 다른 성적 대상에 쏟을 수가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신경증의 핵심적인 요인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7) 발달과 퇴행 이론 - 병인론

 

리비도의 발달 과정은 신경증 발생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리비도의 발달 과정은 두 가지 위험, 즉 억제와 퇴행을 불러 온다. 모든 개별적인 성충동은 충동의 다른 부분들이 최종 목표에 이르는 동안, 일부분이 성적 발달 과정의 초기 단계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를 고착이라 한다. 퇴행이란 지금까지 발전해왔던 요소를 초기 단계로 되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충동의 역할은 목표에 도달하여 만족을 얻는 것인데, 충동이 외부의 거센 장애물들에 부딪히면, 퇴행의 동기가 된다. 발달 과정에서 고착이 강해질수록 충동의 기능은 과거에 집착했던 지점까지 퇴행함으로써 외부의 난관을 피하려 한다.

 

퇴행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 가지는 근친상간적인 성격으로, 맨 처음 리비도가 지향했던 대상에게로 퇴행하는 경우이다. 다른 한 가지는 성의 모든 체계가 과거의 단계로 퇴행하는 경우이다. 퇴행과 억압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억압은 전의식 체계에 속해 있는, 의식할 수 있는 행위를 무의식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무의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억압은 성과는 관련이 없고, 순수한 심리적 과정이다.

 

사람들이 신경증에 걸리는 이유는 자신의 리비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를 좌절이라 부른다. 그리고 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이 바로 좌절된 만족감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경증은 외부적 요인 때문인가, 아니면 내부적 요인 때문인가? 혹은 특정한 기질 때문에 어차피 발병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특히 마음에 상처를 준 외상적인 체험 때문에 발병하는가? 특히 신경증들은 리비도 고착과 그 밖의 다른 성적 기질 때문에 발생하는가 아니면 좌절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인가?

 

신경증의 원인을 고려할 때 이처럼 성적 기질과 체험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이는 리비도 고착과 좌절로 표현해도 좋다. 신경증의 원인에는 이 두 가지 말고 또 한 가지가 있다. 이 세 번째는 자아의 발달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이다. 이 갈등 때문에 리비도적인 본능들이 거부된다.

 

8) 증상 발전

 

우리는 신경증 증상들이 리비도를 새로운 방법으로 충족시키려 할 때 생겨나는 심리적 갈등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대립하고 있는 두 힘은 증상 발전이라는 타협을 통해 화해한다. 현실에서 거부당한 불만족스러운 리비도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는다. 성도착인가, 신경증인가? 이 같은 퇴행이 자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신경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리비도는 현실적인 만족에 도달한다. 그러나 자아가 반발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자아는 리비도의 고착에 맞서 억압을 통해 자신을 보호한다. 그렇다면 리비도가 억압을 뚫고 나가기 위해 필요한 고착은 어디서 찾아내는가? 유아기의 성생활이나 그 당시의 성적 체험들이 그것이다. 도식으로 정리하자면, 신경증의 원인 = 리비도 고착에 의한 기질(성적 기질+유아기의 체험) + 우연한 체험(외상적 도식) 신경증 환자들은 자신의 과거에서 어느 특정한 시기에 고착되어 있는데, 이 시기는 리비도가 만족을 누렸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증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꼭 진실은 아니다. 거짓이자, 사실이다. 이러한 환상들은 심리적 실재이다. 신경증 환자들이 증언하는 유년기는 부모의 성교를 목격한 것, 성인들에게 받은 성적인 유혹, 거세의 위협 등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암시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상상에 의해 보완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환상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인간의 자아는 외부 세계의 영향으로 서서히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따르도록 교육받는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잠정적으로 혹은 영원히 포기해야만 한다. 따라서 보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쾌락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보호 구역을 남겨둔다. 이것이 환상이라는 심리의 영역이다. 프로이트가 여기서 언급한 신경증은 히스테리 환자의 증상 발전에만 해당한다.

 

9) 일반적인 신경 질환

 

자아의 거짓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자아는 신경증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증상은 억압하는 자아의 속성을 만족시키는데, 이는 증상에 의해 자아가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내적인 작업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신경증은 세 가지, 신경쇠약, 불안 신경증, 심기증으로 구분된다. 모든 증상들은 리비도 때문에 발생하며 결국 증상들은 리비도를 비정상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오는 대리 만족이다. 그러나 실제 신경증의 증상인 두통, 고통을 수반하는 감각, 특정 기관의 흥분 등은 그 어떤 심리적 의미도 없다. 그 증상들은 주로 신체에만 나타나며 이는 물리적 과정이다.

 

10) 공포와 불안

 

불안이라는 감정은 인생 초기에 겪는 특별한 체험과 관련이 있다. 출산 체험이 그것이다. 출생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고통, 분만 당시의 자극들이 통합되는데, 이는 불안의 원인이자 최초의 지독한 불안이다. 즉 인간은 엄마에게서 분리될 때 처음으로 불안을 느낀다.

 

이제 신경증적 불안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러한 불안은 ‘기대 불안’이다. 이를 느끼는 사람들은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항상 가장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모든 우연을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한다. 이를 불안 신경증이라 부를 수 있다. 불안의 두 번째 요소는 심리적인 요인과 관련 있으며, 특정한 대상 및 상황들과 관련된다. 공포증이다. 공포증의 대상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이 갖는 보편적인 공포심이다.(뱀 등) 두 번째는 위험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언제나 불안해하지는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상황 공포증이 이에 속한다.(배의 침몰, 다리 붕괴) 세 번째는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 세 번째 유형은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이 경우 불안과 위협적인 위험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경증적 불안은 왜 생기는 것일까? 첫째, 기대불안이나 일반적인 불안은 성생활의 특정 과정과 깊이 관련이 있다. 성적 자극이 충분히 배출되지 못하고 성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등 욕구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불안이 나타난다. 리비도적 자극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불안이 자리 잡는다. 두 번째, 불안은 종종 증상들과 함께 나타난다. 어떤 정상적인 정신 과정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가 불안에 의해서 대체된다. 셋째, 강박 행위로 힘들어하는 환자들은 불안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강박 행위로 불안을 감추고, 단지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 강박 행위를 한다. 나타났어야 할 불안이 어떤 증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아와 리비도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불안에 대해 정의할 수 있다. 불안은 자아가 위험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며, 도피를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11) 전이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은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해석해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억압과 함께 증상이 나타나는 조건들을 없앨 수 있으며, 병인이 되는 갈등 역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억압을 없애야 한다. 우선, 억압을 들추어내어 환자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억압과 이에 대한 리비도의 반격은 무의식이 아니라 자아에서 벌어지므로, 무의식이 아니라 자아에서 이 억압을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치료 과정에서 특이한 현상이 하나 발생한다. 히스테리 환자들과 강박증자들이 의사에게 아주 특이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 환자는 새로운 심리학적 사실들을 수용하며 만족해하고, 마침내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환자는 마치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행동한다. 이는 환자가 강렬하고 애정 어린 감정들을 의사에게 전이시킴으로써 장애가 발생한 것이다. 의사는 이 전이를 효과적인 치료 수단으로 활용하여, 정신 활동의 잠긴 부분을 여는데 기여하게 만들어야 한다.

 

12) 분석 요법

 

정신분석의 치료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모든 리비도가 증상에서 벗어나 전이를 향해 집중된다. 두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대상을 둘러싼 투쟁의 과정이며, 리비도는 이 대상에서 놓여난다. 우리는 전이 과정에서 리비도의 한 부분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자아를 벗어난 리비도 전체를 집결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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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5

 


통치론

저자
존 로크 지음
출판사
까치 | 2007-06-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로크의 통치론을 우리말로 옮긴 책. 통치론은 시기를 달리하여 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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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로 작성한 날림 글이지만 올려둡니다.


같은 사회계약론자로 분류되지만, 홉스와 로크의 차이는 매우 명확하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주권/최고권을 어떻게 상정하고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홉스는 주권이 단일성/지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장 보댕의 주장을 계승한다. 보댕은 정치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종교내란과 같은 형태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힘을 모두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주권을 상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권이 단일성과 지속성을 가져야만 정치적 결정이 단일하게 그리고 권위를 가지고 작동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보댕은 군주 1인이 주권자가 되어야 주권의 단일성과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보댕의 생각은 당대의 절대군주정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영향을 주었다.


홉스는 보댕처럼 절대군주정의 정당화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을 통해 새롭게 수립된 정치공동체, 크롬웰의 공화정에 “어떻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서 시작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홉스는 자연 상태의 만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위적 인격이자 주권자인 ‘코멘웰스’에게 양도함으로써 사회 상태에 들어선다는 사회계약론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양도’된 주권이 단일하고, 지속성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은 보댕과 다르지 않았다.


로크는 이 지점에서 보댕과도. 그리고 홉스와도 단절한다. 로크와 홉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로크가 상정한 정치사회에서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국가에서 주권 개념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장 보댕은 주권이 절대왕정의 군주에게 있다고 말했다. 홉스는 자연 상태가 아닌 사회 상태에서 주권은 인위적 인격이자 주권자인 코멘웰스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댕과 홉스가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는데 반해, 로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사실상 최고권력/주권을 다수로 상정한다. 그는 홉스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던 ‘임기’나 ‘선출’과 같은 개념을 통해 주권의 지속성에 타격을 가하는데 이어, 다수의 최고권력/주권을 상정함으로써 주권의 단일성에도 (일정 부분) 타격을 가하는 셈이다.


로크는 제일 먼저, 정치사회의 최고 권력을 입법권에 부여한다. 몇 가지 제한이 있지만, “입법권은 모든 국가에서 최고의 권력이다.”(128) 로크가 국가 내에서 입법권이 최고 권력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정치사회의 수립에 관한 그의 논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을 자유로우며, 천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그들이 가진 권리는 “그 향유가 매우 불확실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침해할 위험에 놓여”(119) 있다. 향유가 불확실한 권리의 대표적인 사례는 재산이다. 따라서 인간은 “비록 자유롭지만 두려움과 지속적인 위험으로 가득 찬 이 상황을 기꺼이 떠나고자”(119)하며, “생명, 자유, 자산의 상호보존을 위해서 사회를 결성할 것을 추구하거나 기꺼이 사회에 가입하려고”(119) 한다.


이처럼 사회 상태에서 인간이 자연 상태와 달리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연 상태에서는 없는 것들이 사회 상태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법률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분쟁을 해결하는 공통된 척도로서 공통의 동의를 통해서 수용되고 인정된 법률 그리고 확립되고 안정된, 잘 알려진 법률이 없다.”(120) 즉 사람들이 사회에 들어가는 가장 커다란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사회에는 법률이 있기 때문이고, 이를 근거로 입법권은 한 정부의 최고 권력으로 기능한다.


로크는 입법권이 최고 권력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입법권이 행정권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이는 이론적으로 주권의 단일성을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로크 나름의 노력일 것이다. 집행권을 지닌 집행부는 입법권을 지닌 입법부의 승인과 허가 하에서만 자신의 권력을 발휘할 수 있다. 입법부가 법률로 지정한 내용에 따라서만 집행부의 집행권을 발동한다. 이는 입법부가 법률과 규칙이 위반된 경우 “집행권을 부여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44) 따라서, “행정권(집행권)은 입법권에 분명히 종속되고 책임을 져야하며, 또한 입법부의 뜻에 따라 변경되고 해임된다.”(145)
그러나 로크는 혼란스럽게도, 집행부가 최고 권력을 행사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이는 대권과 연합권의 존재 때문이다. 대권이란 법에 의해 사회의 모든 것이 규율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행정권을 가진 자의 재량(의 권력)이다. 이 대권은 두 가지를 근거로 정당화되는데, 첫 째는 입법자의 한계이고, 두 번째는 법의 경직성이다. 먼저 입법자는 미래에 사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법을 ‘불충분’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법의 불충분성을 채우기 위해 집행부의 대권이 인정된다. 또한 법이 모든 것을 세세하게 규정할 수 없고, 제정 의도와 달라질 수 있다는 ‘법의 경직성’ 때문에, 집행부의 대권이 인정된다.


대외적으로 존재하는 집행부의 재량은 연합권이다. 이는 하나의 정치사회가 그 정치사회 밖의 모든 단체, 사람과 마주할 때 발생한다. 전쟁 같은 이러한 상황은 언제 터질지 모르고 사안이 매우 급박하다.(정치공동체의 존폐와 관계되므로)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권한은 ‘상시적’ 권력인 집행권에 부여되며, 이 권리를 ‘연합권’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연합권은 어떻게 집행부로 하여금 최고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는가? “국가 내에서 구성원들은 사회의 법률에 의해서 지배된다. 그러나 여타 인류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의 단체를 구성하며. 그 단체는 이전에 구성원들이 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타 인류에 대해서는 자연 상태에 놓여 있다.”(140) 즉 국가 밖의 모든 사람 및 공동체와 마주하는 순간, 전쟁과 강화, 연맹과 동맹, 교섭을 하는 순간 그 공동체의 법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집행부는 입법부가 제정하는 법률에 일정 부분 자율성을 누리며 연합권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로크는 입법부가 집행부보다 우월하다고 말했지만, 실제적인 힘(집행력)을 지닌 집행부가 입법부를 무시한다면, 실질적으로 입법부가 집행부를 제어할 방법은 없다. 이런 점에서 로크는 대놓고 집행부에게 최고 권력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로크는 역시 최고 권력을 ‘인민’에게 부여하기도 했다. 통치론 곳곳에서는 입법권과 집행권에 제약을 가하는 조건들이 등장한다. 공공선이라든가, 인민의 복지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입법부는 자의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공포해서 안 되며, 인민의 복지를 위해서만 법률을 제정하고 공포해야한다. 또한 인민의 동의 없이 그들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해서는 안 되며, 법률을 제정할 권력을 그 밖의 다른 사람/기관에게 이전하거나 인민이 그 권력을 설정한 곳 이외의 다른 곳으로 설정해서도 안 된다. “입법부는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단지 신탁된 권력이므로 입법부가 그들에게 맡겨진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이 발견될 때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고 권력은 여전히 인민에게 있다.”(155)


또한 로크는 인민에게 집행부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경우 이들을 인민이 힘으로 제압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실제적인 집행력을 지닌 집행부가 입법부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로크는 인민의 힘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국가의 힘을 장악하고 있는 행정권이 입법부가 소집과 활동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148) “인민은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여 그들의 입법부를 본래대로 회복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148)


이렇게 최고 권력이 다수의 곳에 놓여 있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다수의 최고 권력이 존재하면, 정치공동체가 과연 안전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헤, 우리는 로크에게 ‘안전’과 ‘평화’란 무엇인지 상기해야 한다. 홉스와 비교해보자. 홉스가 설명한 대로라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생명을 위협받고 늘 전쟁 상태에 시달린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기 못하기 때문에,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하며 사회 상태로 들어선다. 반면에 로크에게 자연 상태란 불안정한 상태일 뿐이다. 자유와 권리가 있으나, 그것을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는 상태가 자연 상태이다. 이를 보장받기 위해 인간은 사회 상태에 들어선다. 즉 로크에게 ‘안전’이란 내 재산과 생명과 자유가 보장받는 상태이며, 평화 역시 그러한 상태이다. 정치공동체를 이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만일 사회 상태에서 그 ‘목적’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누군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자연 상태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처하게”(132) 된다. 자연 상태에서 인민들에겐 자신의 권리를 방어할 자유와 힘이라도 있다. 그러나 사회 상태에서는 강한 권력을 지닌 권력자들이 탄생해버렸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인민 개개인은 자신을 방어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로크는 권력을 분립하여 권력의 자의적이고 법률에 근거하지 않는 행사를 방지하고, 또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행정권과 입법권의 분리는 이 때문이다. 또한 이를 어길 경우 인민이 기존의 정치사회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내 재산과 자유와 생명이, 즉 안전과 평화가 보장받지 못한다면 굳이 왜 이 정치사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따라서 다수의 최고 권력으로 인해 정치공동체가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로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최고 권력을 한 곳에 두는(홉스 식처럼) 방식으로는 정치공동체가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지 못하는 정치공동체는 인민의 손에 해체되어 마땅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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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4

 


라깡의 재탄생

저자
김상환외 엮음 지음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02-05-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번역에 의존하던 기존의 라깡 정신분석학 연구의 흐름에서 벗어나 ...
가격비교

<라깡의 재탄생>에서 서동욱 교수가 쓴 "라깡과 들뢰즈 -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깡의 부분 충동 : 스피노자적 욕망이론의 라깡 해석"을 요약한 것임.

 

라캉과 들뢰즈

 

1. 그토록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라캉의 공식초상화와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라캉에게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법을 통한 근친상간 금지는 아이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결여된 욕망을 본성으로 하는 주체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들뢰즈는 근친상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열중한 것은 라캉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기표를 비판하는 일이었다. “기표는 문자의 시대에 거대한 전제군주의 기호이며, 그것이 물러나면 일정한 관계로 분해될 수 있는 넓은 해변만이 남는다. 이러한 가정은 기표의 압제적이고 폭력적이고 거세적인 성격을 해명해준다.” 더 나아가, 라캉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분열된 주체 -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 간의 분열 - 역시 들뢰즈에겐 비판대상이다. 언표의 주체와 언표행위의 주체의 분열 속에서 욕망을 파악하는 것은 욕망을 주체 개념의 여러 요소(인격성, 성별 등등)들을 통해 이해하려는 인격주의적 해석인 반면 들뢰즈는 인격주의적 해석의 체제 순응적 면모를 밝히고 이로부터 욕망을 해방시켜 그것의 비인격적 혹은 비인물성을 드러내려 했다.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라캉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들뢰즈가 상징계와 상상계를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실재계만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이 빚의 무게는 실재에 접근하기 위한 라캉의 장치들(대상 a, 부분 충동)과 들뢰즈의 핵심개념들을 대질시킴으로써 가늠할 수 있다. 들뢰즈가 제기한 실재계만으로 구성된 욕망이론이란 유기체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 분리된 다수의 부분적 욕망들, 인격성을 형성하지 않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다. 이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개념을 원용한 것으로, 한마디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개념틀을 통해 해석된 라캉의 실재계라 할 수 있다.

2. 라캉의 충동이론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는 라캉의 ‘부분 충동’에 관한 이론에 크게 힘입어 성립되었다. 우리는 들뢰즈와 라캉을 비교할 때 ‘욕망’이라는 단어에 속아 들뢰즈의 욕망과 라캉의 욕망을 비교해선 안된다. 들뢰즈의 욕망과 라캉의 충동을 비교해야 한다.

충동이란 무엇인가? 충동은 실재계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접근 방식 중 하나로, 라캉의 충동 개념은 어떤 항상적인 힘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라캉이 성적 충동들이 결코 통일적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여러 조각의 ‘부분’ 충동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그것과 다르다. 구순충동으로부터 항문충동으로 이행하는 어떤 자연적 변형이 없듯이 하나의 부분 충동과 다른 부분 충동 사이에는 어떤 생성 관계도 없다. 즉 충동들은 오로지 파편적인 부분일 뿐 전체로 통합되는 유기체가 아니다. 충동들이 실질적으로 구별되며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는 라캉의 생각은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본성과 일치한다.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동의 원천, 대상, 목적, 그것이 만족하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각각의 충동에는 원천으로서의 기관이 상응하는 데, 그것이 성감대이다. 네 가지 성감대와 이에 상응하는 네 가지 충동이 있다. ‘입(입술)-구순충동, 항문-항문충동, 눈-시각적 충동, 귀-청각적 충동.’ 그리고 이 충동들에 대응하는 대상이 바로 대상 a라 불리는 ‘젖가슴, 배설물, 시선, 목소리’이다. 이 대상 a는 부분 충동에 대응하는 파편적 조각이므로 부분 대상이라 불린다. 다음으로 충동의 목적이란 기관의 즐거움이며 타자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신체로부터 만족을 얻는 자기성애의 형식을 띤다. 음식을 섭취하며 욕구가 만족되는 배고픔과 달리(만족이 대상으로부터 온다.) 구순충동은 입 혹은 입술이라는 기관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왜 니코틴에 대한 욕구가 없어도 담배를 피는가? 즉 충동의 원천은 기관이므로 충동은 기관에서 출발해 우선 대상 a를 향해서 발사되지만, 대상 a는 충동이 진정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은 기관 자체이므로 충동은 대상 a의 주위를 돌아 다시 기관으로 되돌아간다. 하나의 기관은 충동이 등록되어 있는 원천이자 충동의 운동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왜 사람들은 연예인의 사진이나 종교적 아이콘에 키스를 하는가?

이 충동의 ‘목표’와 ‘목적’은 다르다. 충동의 목표는 자신의 원천인 기관 자체이지만 그 기관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 충동의 목적은 아니며, 목적은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환적 여정을 계속 생산해내는 것, 이를 통해 만족을 얻는 것이다. 활쏘기에서 당신이 명중시킨 새는 목표이지만, 목적은 아니다. 목적은 명중시킴으로써 점수를 얻은 것이다. 충동은 이 활쏘기에서의 화살과 같다. 그것이 겨냥하는 목표물과 점수를 얻기 위해 활쏘기라는 도정을 계속하는 것(목적)은 다르다.

이 충동의 메커니즘은 욕망의 메커니즘과 다르다. 그 둘 모두에게 대상 a는 결여이지만, 충동과 욕망에게 결여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 대상 a는 상징계 안에서 욕망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지만 상징계 안에서 (들뢰즈의 표현대로) 오직 빈집, 빈 선반, 빈 단어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욕망은 이 대상 a의 모방 밖에 얻을 수 없으며 이 모방, 기표를 다른 기표로 바꾸는 덧없는 여행을 계속할 뿐이다. 실재계는 고정되어 있고 이 실재계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방황에 의해 상징계의 대체물들이 자리바꿈을 되풀이한다. 이 쉼 없는 방황을 대상 a가 일으킨다는 점에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다. 그러나 충동은 이와 달리, 그 목적이 대상 a가 아니며 대상 a로부터 만족을 얻지도 않는다. 충동의 목적은 순환운동이며 이 운동으로부터 만족을 얻어지기에, 대상 a는 충동에게 거머쥘 수 없는 어떤 것이긴 하지만 그 원인은 될 수 없다.

3. 결여로서의 욕망과 생산으로서의 욕망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캉의 부분 충동 사이의 유사성은 충동과 욕망의 비교를 통해 드러난다. 들뢰즈는 욕망을 불만으로, 결핍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다. 결여로서의 욕망은 잃어버린 것의 획득이라는 플라톤의 상기론의 변주이며 목적론이라는 신화에 의존하는 욕망의 신학화라는 것이다. 절대자는 부정의 형태 속에서만 현상계에 나타나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자들의 욕망은 이 절대적 초월자를 향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다. 이 부정신학적인 초월의 운동은 라캉의 욕망 개념과도 매우 유사하다. 대상 a는 부재하는 빈집을 통해서만 부정적으로 출현하고, 부정적 매개만을 반복하는 욕망의 영원한 운동은 대상 a에 의해 궁극적으로 인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라캉의 충동 개념은 들뢰즈가 내세운 ‘생산으로서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생산으로의 욕망은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스피노자의 힘 개념이 그 원형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의 힘은 신의 본질 자체이며 이 본질이 만물을 생산하는데, 이 본질이 바로 속성들이다. 즉 신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의 진정한 원인이다. 스피노자의 속성이 생산하는 욕망 개념의 철학사적 원천이며 곧 ‘욕망하는 기계’와 동치이다. 스피노자 말고 라캉 역시 들뢰즈에게 영감을 주었다. 라캉의 충동은 끊임없는 순환운동을 목적으로 하여 그로부터 만족을 얻는다. 즉 충동의 유일한 목적은 그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의 속성, 라캉의 충동, 들뢰즈의 욕망기계는 모두 생산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며 그 생산은 자기 원인이 되는 것,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라캉의 충동 개념을 이해하면 들뢰즈가 왜 ‘기계’라는 단어를 사용해 욕망을 지칭했는지 알 수 있다. 기계는 목적론에 맞서기 위한 개념이다. 욕망과 달리 충동의 운동은 원인도 목적도 없이 기계적이다.

4. 욕망하는 기계와 기관들 없는 신체

들뢰즈는 라캉의 충동이 지닌 비유기체적인 부분적 성격, 파편성을 스피노자의 구별이론을 통해 이해한다. 부분 충동들,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환원 불가능성은 서로 간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으며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통합되지 않는 ‘속성’들 간의 구별에 대응한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은 어떻게 종합하는가? “관련성의 부재는 이들 전체의 정합적 결합의 특별한 힘을 구성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는 점은 그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신적 실체에 속한다는 것을 보증한다고 말한다. 무한한 속성들은 서로 의존하지 않으며 반대관계도 모순관계도 없기에 신에게만 귀속 가능하다. 부분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도 마찬가지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실체 자체요. 부분 대상들은 실체의 속성들, 즉 궁극적 요소들이다.” 그는 욕망하는 기계를 속성과, 기관 없는 신체를 실체와 동일시한다. 스피노자에게서 각각의 속성들 사이에는 ‘비관계’만이 있다. 이접적인 속성들이 유일실체에 귀속되는 것처럼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에 귀속된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관들 없는 신체란 욕망의 생산의 모든 과정이 등록되는 표면이다. 이는 칸트와 스피노자가 신이라 부른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신은 개별자들에 귀속할 수 있는 모든 술어들의 총체적 저장창고이며 스피노자에게도 모든 속성의 총체가 신이다. 들뢰즈는 칸트의 이론을 사용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설명하는 동시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기관들 없는 신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책이라 말한다. 즉 기관들 없는 신체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내재적 실체이자 칸트적 의미에서 실재의 총체이다.

이처럼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하는 기계에 대해 독립된 지위를 가지는 존재자도, 경험상에 현시될 수 있는 표상도 아니다. 오직 서로 이접적인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총체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그들 자체를 통하여 기관들 없는 신체를 생산한다.” 들뢰즈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힘을 리비도라고 부르고 이것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했을 때 그 힘을 신적인 힘, 누멘이라 부른다. 칸트에게서 만물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소재를 이 실재의 총체로부터 가져온다는 점에서 이 총체가 신이라 불릴 만하듯이 개별자가 잠재적으로 지닐 수 있는 모든 소재에 해당하는 욕망하는 기계들 전부가 귀속되어 있는 총체라는 점에서 기관들 없는 신적이며 그것의 에너지도 신적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와 라캉의 욕망이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들뢰즈와 라캉이 사용하는 ‘알의 메타포’를 비교해야한다. 들뢰즈는 기관들이 유기체화되기 이전의, 층들이 형성되기 이전인 알이 기관들 없는 신체라고 말한다. 라캉은 알의 메타포를 통해 부분 충동들의 발생을 설명한다. 자궁 속에서 빠져 나온 갓난아기는 껍질 밖으로 흘러나온 알(깨어진 알, 라멜르)과 같은데, 이 때 자궁에서 갈라져 나온 아기가 택한 생존방식은 분열이다. 아기의 신체는 유기체를 이루지 않은 채 여러 개로 분열된 아메바들이 제각기 기어 다니는 하나의 대지와도 같다. 이 분열된 각각의 아메바들이 기관을 중심으로 고착된 것이 부분충동이다. 순수한 생존본능에 지배되어 있는 라멜르가 성감대에 자신을 고착시키는 순간이 바로 부분 충동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충동이 그 주위를 맴도는 대상 a는 자궁 밖으로 빠져 나온 라멜르가 자신의 신체적 보완물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가질 때 이 보완물의 등가물로 자리잡는 것이다. 기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라멜르와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다. 라캉의 알 메타포에서 라멜르의 세상 첫 경험은 신체부분(자궁)의 상실이라는 ‘결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라캉의 메타포는 상실된 통일성에 대한 신화적 가설에 의존한다.

그러나 라멜르가 부분 충동의 형태로 기관들에 고착되면 그것의 운동방식은 더 이상 어떤 결여의 신화와도 관계가 없어진다. 대상 a는 그 기원이 무엇이든 충동들에 대해 결여로도, 원인으로도, 목적으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목적은 끊임없는 생산이다. 이 생산은 욕망하는 기계들의 경우와 똑같다. 또한 아기의 신체 안에서 부분충동들 서로 간의 이접성은 기관 없는 신체에서 욕망하는 기계들 간의 이접성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들뢰즈는 한 신체 안의 성감대의 분포를 기관들 없는 신체의 상태와 동일시한다. 제각기 쏘다니는 부분 충동들과 그들 각각의 전진기지인 기관들은 유목민의 캠프처럼 신체 위에 흩어져 있다.

5. 독신기계 - 부분적 주체이론

속성(욕망기계)과 실체(기관 없는 신체)에 이어, 양태에 해당하는 개별자들, ‘주체’의 발생해보자. 이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부분 충동들 각각이다. 부분 충동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반성적 구조, 자기동일성을 스스로 산출하는 구조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성 구조는 성감대에서 출발해 다시 그 성감대로 되돌아오는 순육체적 층위에만 머무른다는 점에서 ‘나’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는 완전한 주체화가 아니라 주체 개념 없는 주체화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욕망 자체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적 개별성을 지닌 존재자로서의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로부터 파생되는 개체로서의 주체이다.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 부분 충동들의 종합으로 생성된다. 들뢰즈는 이 종합을 ‘소비의 연접적 종합’이라고 표현했다. 욕망하는 기계들이 주체의 발생에 사용된다는 의미에서 소비이고,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이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현실적 존재자를 낳는다는 뜻에서 연접적 종합이다. 이는 스피노자적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이해 가능한데, 스피노자에게선 서로 이접적인 속성들의 종합 위에서 양태로서 인간 개체가 존립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라는 양태로 이루어진 인간 개체는 서로 이접적인 속성, 사유와 연장의 연접 속에서 생산된다. 속성들 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으며, 인과관계는 오직 실체와 양태 사이라는 종단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욕망하는 기계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주체는 이 상이한 속성들, 이접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을 횡단하는 과정이자 흐름이다. 즉 주체란 그 안에 욕망하는 기계들이 강림해서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떠나가곤 하는 투명한 껍데기에 불과하기에, 주체는 분열증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동일성을 가진 어떤 고정된 주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 분열증적 주채에 독신기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계의 에너지는 볼룹타스(즐거움)인데, 이는 욕망하는 기계의 힘인 리비도와 기관들 없는 신체의 힘인 누멘의 변형이다. 마치 스피노자가 인간의 힘을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힘의 일부분, 신 또는 자연의 본질의 일부분이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독신기계의 에너지가 즐거움이라는 것은 이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임상적 의미의 정신분열자(환자)와 과정으로서의 정신분열증을 구별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병원의 정신분열환자는 무엇인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인 반면, 혁명가는 탈기호화와 탈영토화 과정이라는 정신분열적 과정을 거친 사람이다. 정신병자는 자기 안에서 이질적인 다수의 부분충동을 제한없이 작동시키는 작업이 좌절된 사람이다. 이 좌절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기표라는 억압적 기제를 통해 다수의 비인격적 욕망하는 기계들의 흐름을 가족주의적 도식 속의 ‘한 인물’의 욕망으로 고정시켜버리는 데서 일어난다. 고로 주체의 자유란 수많은 상태들을 횡단하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계속 실현하고 이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기계의 종류


경제 형태


힘의 변용


종합의 형식


스피노자의 해당 개념


비고


욕망하는 기계


생산


리비도


연결

(connexion)


속성


라캉의

부분충동


기관들 없는

신체


등록


누멘


이접

(disjonction)


실체


칸트의

실재의 총체


독신기계


소비


볼룹타스


연접

(conjonction)


양태


분열증적 주체,

부분적 주체


이 들뢰즈의 주체 이론은 라캉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체에 대한 고정된 위치도 자기 동일성도 거부한 들뢰즈의 주체, 즉 부모도 배우자도 없는 ‘독신’기계와 상징계 속에서 오이디푸스화한 주체가 어떤 점에서 관련이 있는가? 들뢰즈는 라캉이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자, 즉 라캉을 오이디푸스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곳에서 분열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라캉에게 있어서 기표는 인간의 존재조건이다. 인간이 기표에, 즉 대타자의 질서에 순응할 때 한 사회체제 속에서 허락된 욕망이, 다시 말해 인간 주체가 탄생한다. 기표의 질서 속에서 어린아이의 자기 성애적 단계, 실재계에 속하는 대상 a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충동은 소외되어버린다. 상징계는 사물의 살해이며 이 살해는 주체 안에서 욕망의 영원성을 구성한다. 그리고 상징계 안에서 실재계의 대상들과 부분 충동들이 억압된 형태가 바로 욕망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라캉의 사상이다.

들뢰즈는 반면에 라캉이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바는 오이디푸스와 기표를 비판하고 그 이면에 은폐된 “욕망의 실재계적인 비유기체성”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아버지 기표를 욕망을 규정짓는 보편적 조건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단계에서만 출현하는 정치적, 경제적 지배도구로 이해할 때만 가능하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에서 기표의 기원을 전제군주제에서 발견한다. 아카드 문자의 고전적 유래에 따르면 문자 혹은 기표는 주인민족과 노예민족의 만남이라는 전제군주제의 산물로, 노예민족 쪽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주인의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 노예들이 자신의 새로운 알파벳을 만드는 조건이다. 문자는 사회적 합의 같은 게 아니라 권력의 산물, 전제군주적 경제체제와 제도의 산물이다. 어린 아이는 본성상 아카드인 같은 문맹자이다. 무의식을 결정하는 기표는 무의식이 이미 전제 군주적으로 지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의 작업은 인간 개념의 구성 요소, 즉 기표의 전제 군주적 성격 일반을 비판하는 작업인 동시에 이 무의식의 기표적 구조화가 언어학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구조주의 언어학 자체가 전제 군주적 체제의 도구임을 밝혀내는 계보학적 작업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이다. 인간의 욕망은 ‘욕망의 욕망’ 혹은 ‘대타자(기표)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정식은 이렇게 변형된다. “욕망은 욕망의 욕망, 전제군주의 욕망[에 대한]의 욕망이 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가 전제 군주적 지배의 산물이라면, 라캉에게서 진정한 주체는 무엇인가? 들뢰즈에 의하면 바로 독신기계이다. 중심은 기계가 차지하고,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주체는 자기가 지나가는 상태들로부터 끌어내진다. 우연히 나타나는 서로 이접적 상태들의 결합으로 그때그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의 끊임없는 운동의 부산물이다. 기계들이 주체의 부분들로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기계에 의해 생산된 결과이다. 들뢰즈는 라캉의 텍스트를 통해 이런 사실을 발견하지만, 이 해석은 자의적 측면이 강하다. 이 인용은 프로이트의 자아분열과 관련하여 결여로부터 탄생한 주체라는 들뢰즈의 주체 개념과 정반대되는 주체 개념에 대한 논의의 일부로 씌여졌기 때문이다.

6. 결론 : 욕망과 혁명 - 결국 들뢰즈와 라캉의 차이는......

그러나 들뢰즈에 의해 해석된 라캉과 라캉 정신분석학 그 자체엔 아무런 차이도 없는가? 라캉은 상징계, 아버지의 이름, 기표를 고작 패배하기 위해 만든 것인가? 라캉과 들뢰즈의 차이점은 우선 결연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근친상간의 금지가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다른 부족에게서 여자를 구하는 것이 욕망들 간의, 부족들 간의 결연을 가능케 한다고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결연을 다른 의미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욕망을 인물들의 욕망으로 이해하는 이상, 혼인을 욕망들 사이의 결연의 불가결한 형태로 이해하는 이상 결연을 비오이디푸스적으로 설명할 방도는 없다. 욕망을 비인물적인 부분 충동의 층위에서 이해할 때만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개체는 서로 통합되지 않은 이접적인 여러 개의 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부분 충동들, 부분 대상들,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이 개체 안에서 다수의 충동은 성의 횡단이란 방식으로 공존하는데, 개체 안의 다수의 성끼리는 서로 소통하지 못하며 이들은 다른 개체의 부분 충동들과만 소통할 수 있다. 한 남자의 수컷 부분은 한 여자의 암컷 부분과도, 한 여자의 수컷 부분과도, 다른 남자의 암컷 부분과도, 다른 남자의 수컷 부분과도 소통할 수 있다.

이런 소통이 바로 욕망하는 기계들의 종합의 형식인 연결이며, 이 연결엔 결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욕망은 어머니의 결여를 메우기 위한 대용품으로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일을 겪지 않는다. 욕망이 한 인물의 성욕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는 일, 욕망이 남자와 여자라는 인물의 형태로 움직이는 일은 오이디푸스적 조작 이후에나 일어난다. 오이디푸스로부터 생겨난 인물 차원에서 성들 간의 연결은 어머니를 배제하고 그 결여를 메우기 위해 다른 여자와 혼인한다는, 배제와 결여의 논리를 따를 수 밖에 없다. 들뢰즈는 상징계적 인물을 매게로 한 이러한 연결에 반대하여 실재계 차원의 비인격적 부분 충동들의 연결을 내세운다. 실재계 안에는 어떤 인물 형태의 성욕이나 성별은 없다. 결국 들뢰즈 욕망이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각자에게 욕망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을 돌려주는 것, 그의 여러 성을 돌려주는 것이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개념을 이용해 혼인관계의 질서를 규명하고자 했던 라캉은 인물과 인물을 지배하는 상징계적 법칙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들뢰즈와 라캉의 또 다른 차이점은 대상 a가 나타나는 방식, 실재와 만나는 방식에 있다. 들뢰즈는 한 개체의 부분 충동이 연결되고자 하는 대상이 다른 개체의 부분 충동이기에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그가 실재계의 부분 대상을 부분 충동이 정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라캉에게 충동의 운동은 대상 a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자기 성애적 형태를 띤다. 즉 대상 a와 맞닥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부분 충동과 부분 대상이 ‘실재로’ 연결될 수 있다고 이해하는 데, 이는 실재계와의 직접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지젝은 실재의 응답이라는 표현을 통해 실재계가 환영의 형태로 등장한다고 주장하는데, 들뢰즈는 이런 식으로 환영을 통해 실재계와 만나는 것을 비판한다. 부분 대상과의 연결, 실재와의 만남은 실재로 일어나는 사건이지 환영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실재계 안에서 정말로 이루어지는 대상 a와의 만남을 ‘주관적인’ 환상의 영역으로 변질시켜버렸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이러한 차이로, 들뢰즈와 라캉은 혁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인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혁명적이다.”(들뢰즈) 들뢰즈는 1) 의도적으로 혁명을 추구하는 것, 즉 새로운 사회적 개체를 추진하는 원인들과 목적들의 질서 속에서 자기들의 활동을 하는 혁명과 2) 갑자기 돌출해 원인들 및 목적들과 관계를 끊고 사회적 개체를 다른 국면으로 되돌리는 욕망에 의한 혁명을 구별한다. 원인과 목적들의 질서에 기반한 표상으로서의 혁명에는 늘 자본주의화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 자본주의는 혁명조차 자신의 공리계에 추가하여 스스로의 경계를 넓혀간다. 파시스트 연대장이 마오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더불어, 혁명세력의 오이디푸스화 역시 매우 위험하다. 혁명집단은 자본주의적 지배체제와 동일하게 부성적 주체집단과 그 밑의 예속집단으로 변질된다. 동구권 혁명세력의 관료화처럼 말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혁명의 가능성을 혁명의 표상을 추구하는 집단에서가 아니라 욕망(부분 충동)의 본성에서 발견한다. 부분 충동으로서의 욕망은 무목적적이지만, 자본주의가 “자본씨, 대지부인, 이 둘의 아이 노동자”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통해 지배하려는 데 반해 욕망은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 욕망이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이상 욕망의 본성에 대립적인 체제인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욕망의 본성은 어떠하기에 그 자체로 혁명적인가? 욕망은 실재계의 부분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상징계에 대해서 혁명적이다. 억압적인 모든 상징계적 장치를 넘어 실재계의 대상과 연결되고자 하기에 혁명적이다. 여기서 욕망은 상징계적 매개를 거치지 않은, 실재와 직접 연결되려 하는, 어떤 목적론적, 신학적, 변증법적 함의도 지니지 않는다. 이 기계의 본성에 어긋나는 모든 상부구조, 상징계, 이데올로기 등은 결국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스피노자의 힘 개념을 빌려온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힘은 권력에 대립한다. 네그리에 의하면 스피노자 철학은 매개라는 비열한 게임에 굴복하지 않는데, 여기서 매개란 힘으로서의 생산력을 자기 아래 종속시키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말한다. 이 매개는 들뢰즈에게 오이디푸스라는 복종의 장치이기도 하다.

라캉 역시 대상 a로부터 기존의 구조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의 힘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그는 들뢰즈처럼 욕망이 승화 같은 매개나 변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실재계와 조우함으로써 혁명이 달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5월에 대해 “구조는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고 쓰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일 5월 사건이 증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구조가 거리로 나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구조를 옹호하는 라캉에 반대하며 들뢰즈에 가타리는 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968년의 사건은 상상계적이지도 상징계적이지도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실재계의 침입이었다.” 부분 충동이 실재와 조우하면서 생긴 사건이었다. 인간이라는 단위에 선행하는 분자적 차원, 비인물적 욕망들의 해방에서부터 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들뢰즈의 욕망이론은 어떤 형태가 됐건 이욕망들을 가두는 ‘구조’를 변호하려는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

이처럼 라캉과 들뢰즈의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수많은 모순된 차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양립 불가능한 주장들의 싸움터가 있는 반면에 들뢰즈에겐 자신들의 개념을 경작하는 터전인 라캉의 밭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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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3

 


공산당 선언

저자
칼 마르크스 지음
출판사
이론과실천 | 2008-11-2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출판사서평 제공]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남긴 위대한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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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후마니타스에서 ‘정치철학 세미나’를 진행하는 최장집을 인터뷰한 중앙일보 기사를 읽었다. (인터뷰 전문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335025) 중앙일보라는 타이틀을 보고, 또 늘 그렇듯이 ‘참된, 진정한 진보정치학자’ 최장집을 나쁜 보수신문이 이용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인터뷰 내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그는 중앙일보의 의도된 질문, ‘왜 정치철학 강의 목록’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가 없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맑스 이론의 치명적 결함은 정치의 역할이 없다는 점이지요. 마르크시즘이 현실 속에서 작동을 못하고 실패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정치는 없이, 이상과 규범만 강요됐기 때문에 권력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없었지요. 그런 이상과 당위의 논리는 우리에게 넘쳐요. 오늘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런 규범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라고 봐요.”

이어 그는 정치철학 세미나를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 덧붙인다.

“ (중략...._) 지금 한국 정치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맑스가 아니라 마키아벨리라고 보는 겁니다. 오해는 마세요, 바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길이라고 보는 겁니다.”

‘좋아, 넌 낚였어.’라는 보이지 않는 미소와 함께 이어진 중앙일보 기자의 질문,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그 문제의식을 마키아벨리의 입을 통해 심화시키느냐는 질문에 최장집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독재와 민주가 대립하던 시절, 윤리적 도덕성이 최고 덕목이었던 시절에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상의 정치’와 ‘운동의 정치’는 함께 갑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의 정치’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 오늘에도 여전히 운동과 이상의 정치가 지속되어도 좋은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의 정치가 아니라 ‘현실의 정치’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마키아벨리를 재평가하자는 것은 일종의 대증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며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나는 워싱턴을 바꾸러 온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되는 순간 정치를 안 하지요. 정치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정치인이 결국 중요합니다. 다른 의견, 다른 세력과 대화하고 타협하고, 정치적 목적을 정치를 통해 설득하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이 짧은 기사에서 최장집을 예의상으로라도 ‘좌파’라고 불러선 안 되는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민주화 이전과 민주화 이후를 구분하며 민주화를 이뤄낸 운동의 정치가 민주화 이후에서 더 이상 활발해져서는 안 되며, 이 운동은 제도 안으로 포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중에서 시민으로의 발전이, 잘 ‘대표되지’ 않은 정당체제에서 ‘더 잘 대표된’ 정당체제로의 발전이 ‘더 많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그의 입장에서 보면 맑스에게 정치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대의제’를 잘 해보자는 이야기대신, 즉 촛불집회에 참여한 민중들에게 ‘이제 정당으로!’라고 외치는 대신 모든 제도는 부르주아의 것이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으로 이것들을 때려 부수는 ‘혁명’을 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맑스와 대비해(이상의 정치) 현실에서 정치하는 방법을 알려준 마키아벨리(현실의 정치)를 높게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저항의 정치학’이 아닌 ‘정치와 통치의 기술’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결국 ‘어떻게 더 잘’ 통치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맑스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결국 그는 개인의 권리를 ‘제도’와 ‘시민권’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장할 것인가, 라는 자유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맑스에게서 이런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에게 정치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외적 권력이나 통제술이 아니다. 인간들 사이의 교류의 힘이 바로 맑스에게는 정치다. 이런 이유로 맑스는 politics나 state가 아닌 kommune, Gemeinwesen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것이다.

최장집과 같은 관점에서 맑스에게 정치가 없다, 라고 비판했던 이들은 굉장히 많다. 맑스의 분석은 인간의 생산 활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그 분석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하나의 정치이론으로서 보다는 주로 정치경제학 이론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맑스에게 정치철학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맑스는 비판자들이 맑스에게 ‘정치의 영역이 없다.’고 말하는 데 요구되는 그 시각 자체를 비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사상사에서 자유주의는 정치를 종교나 철학, 윤리의 영역에서 분리시켜왔는데, 맑스의 입장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치관은 19세기에 들어서 인간에게 외적인 통제 권력으로 자립화되었다. 그렇기에 맑스는 이를 비판하고 정치를 인간들 스스로의 정당한 질서나 공동체로 재정의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맑스가 얼마나 ‘정치’적인 인간인지는 그리고 그 정치가 얼마나 자유주의자들과 다른지는 그의 가장 쉬운 저서 공산당 선언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1. 맑스야말로 현실적이다.

최장집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치의 문제가 서민대중, 소외계층이 정당에 의해 ‘대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꾸준히 보수양당 체제가 깨지고 진보정당과 보수 정당 양당이 돌아가면서 집권하는 양당제를 지지해왔다. 즉 정당정치라는 제도를, 대의제라는 제도를 잘 살려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서민들에게 자기 몫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미 왜곡된 보수 양당 체제를 어떻게 ‘선거’로 깨부술 것인가? 선거제도를 바꾸자, 보수 양당들이 제도 개편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데도? 그리고 만약에 진보정당이 집권한다 해도, 그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그래서 그에겐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이 필요하다. 제도를 잘 운영하고 다른 정치집단들과 타협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국가 제도 권력으로 더 잘 보장해줄 수 있는 그 자유주의적 통치술 말이다. 그는 맑스가 규범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규범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다. 그에게 있어 정치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윤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반면에 맑스는 철저하게 ‘현실’에서 정치를 말한다. 그는 먼저 좌파세력을 1) 규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당대에 ‘공산당’이라는 규정은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맑스는 이 비난이야말로 모두가 ‘공산당’을 세력으로 인정하다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그래, 우리가 공산주의자다.’라며 공산당의 규합을 시도한다. 유령에 불과한 공산주의가 맑스의 ‘선언’에 의해 실체화된다. 그는 자신의 적들에 의해 ‘규정당하’지 않고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공산당이 살아남을 수 없는 무대를 공산당이 이미 세력화한 무대로 바꾸어버린다. 이것이 선언의 위력이다. “반MB 말고 X를!”

그리고 그는 이어 부르주아의 적이라는 이유로 하나처럼 보이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정치세력들을 공산당과 구별한다. 봉건적 사회주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독일 사회주의, 보수적 또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는 앞에서 제기한 공산주의 세력 규합의 측면의 연장선이자 혁명의지가 없는 자들, 궁극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같이 가선 안 될 자들을 분류하는 작업이다. “반MB에 낀 온갖 잡탕들과는 연합할 수 없음!”

이런 세력 규합과 더불어 그는 혁명이야말로 피지배계층을 해방시킬 진정한 대안임을 역설한다. 부르주아는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인간관계와 삶의 양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옥죄어 오는 억압이란 구조의 문제이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인 착취이다. 고로 그 구조를 뒤엎지 않으면 해방은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근대국가 체제 역시 부르주아가 생산 수단을 집중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중앙집권화 체제이기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것마저도 철폐해야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낸 역사적 상황을 고찰하고 그 안에서 방법은 혁명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친다. 근본적으로 지도자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는 대의제를 수정하여 잘 해보자는, 이미 왜곡된 형태에서 표층만 털어내어 개혁을 하자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정치적 현실감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상황을 비교하여 독일에 걸맞은 혁명을 도출해 내는 것 역시 미국의 양당제 체제를 그대로 가져와 한국에 적용하려는 ‘규범’을 지닌 최장집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2. Politics가 아닌 kommune으로

결국 맑스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노력했던 시민권의 범위를 늘리기 위한 정치 개념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정치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맑스가 ‘정치’를 자본주의 사회 극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정치를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행복과 복지를 위한 도구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나라당이 서민정당을 표방하고 박근혜가 ‘복지국가’를 제안하고 있다. 정말 복지국가가 되어, 또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국가로부터 법적으로 보장받는다면 피지배계층에 대한 억압은 끝이 나는가? 자유주의가 이처럼 정치를 ‘통치술’로 판단할 경우 그것은 억압적 제도의 유지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뿐이다. 맑스에게 정치란 이런 통제가 아니라 지배 자체를 폐기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인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공동적인 것으로 발전시키고 육성하는 실질적 공동체의 수립, 그것을 위한 인간들 사이의 교류와 연대이다. 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을 일으켜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인간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게 만드는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전반을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가 정의 내리듯이, 이런 사회야말로 바로 공산주의 사회요, ‘계급과 계급 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가 아니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이다.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재배치의 기술인 Politics가 아닌 이러한 연합체인 kommune이야말로 맑스에게는 정치이다.

맑스에게 정치의 역할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희망하는 ‘정치’를 극복하고자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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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본좌 조본좌 2013.01.18 23:12

 


정언명령 (02 쉽게 읽는 칸트)

저자
랄프 루드비히 지음
출판사
이학사 | 1999-02-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등 의 저작으로비판 철학의 체계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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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정언명령으로 나아감

순수이성비판에서 실천이성비판으로 나아가는 길을 소개한다.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적 변증론으로 마무리되는데, 여기서 칸트는 이성이 자신을 전개한 결과 모순과 불착, 추락에 직면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성이 증명하진 못했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념들이 있는데, 그 중 윤리학을 위해 중요한 것이 바로 자유이다. 칸트는 현상세계를 지배하는 자연 인과율 말고, 자연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윤리적 당위이며, 명령이 이 당위를 표현한다. 자연의 인과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동시에 그것과 다른 무엇이 있는데, 이것은 행위가 자율적으로 시작되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며 자유이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것은 자연 인과율이 아니지만, 그 일은 일어났다!) 그 실재성과 가능성이 증명될 순 없으나 사유가능하며, 자유와 자연은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2부 도덕의 최상원리로 나아감

1. 실천이성의 연구 계획

순수이성비판이 순수한 인식능력에만 관계하는 데 반해 실천이성비판의 관심사는 이성에 의거하여 의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의지는 대상(행위)을 산출하는, 즉 우리의 행위를 원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의지는 경험과 무관하게 이성에 의거하여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도덕형이상학이다.(<->실천적 인간학) 인간의 의지는 그 본성대로 경험에 의해 규정되는 것 외에 자유의 이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 구속성을 지닌 도덕 법칙은 절대적 타당성을 갖기 위해서 순수한 이성에 의해 근거 지워져야 하지 경험이나 본성, 여건에 의해 근거 지워져서는 안된다. 실천규칙이 아니라 도덕성의 최상 원리. 이 최상 원리에 대한 연구는 정언 명령으로 귀착되었고 이렇게 나아가는 길 위에 선의지와 의무라는 두 가지 정거장이 있다.

2. 첫 번째 정거장: 선의지

이 세계는 물론 세계 밖 어디에서도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선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다.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선의지 외에 아무것도 없다. (농담, 용기, 결단력, 끈기, 권력, 재산, 명예 모두 경우에 따라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선의지는 오직 의욕 자체에 근거해서만 선하다. 그것이 무엇을 성취하고 실현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며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 쓸모가 있기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의욕 자체만으로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3. 두 번째 정거장: 의무

선의지는 오직 의무에 의거해서만 규정될 때 진실로 선하다. 칸트는 명백하게 의무에 위반되는 행위, 다른 성향에 이끌려 하게 된 행위에 관심이 없다. 그는 의무에 의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합의무적, 그리고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를 구별한다. 한 상인이 상품 가격을 정직하게 정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것은 합의무적이지만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는 아닐 수 있다. 그 상인은 자식의 이익을 위해 정직한 가격을 정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의지는 그가 초래한 결과에 근거하여 선한 것이 아니다.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실현되어야하는 의도가 아니라 행위를 규정하는 준칙에 근거하며 고로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는 행위 대상의 현실성이 아니라 행위의 원천인 의지의 원리에만 의존되어 있다. 즉 행위의 준칙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 칸트는 준칙을 ‘의지의 원리’, ‘행위의 주관적 원리’ 등으로 정의하지만 칸트 연구자들의 정의를 종합해 볼 때 준칙은 계획된 행위 방식이며 개별적 실현보다 더 많은 것의 요구를 수반한다. 그러나 준칙에 의거하여 하나의 행위를 했다고 할 때 나의 행위는 아직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가 아니다. 행위의 토대에 있는 나의 준칙이 정언 명령의 심사를 받은 경우에만 나의 행위는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이다.

이러한 정언 명령에 이르기에 앞서 칸트는 의무에 관한 또 하나의 개념, 법칙에 대한 외경심에 대해 규정한다. 의무는 법칙에 대한 외경심에서 유래하는 행위의 필연성이다. 여기서 법칙이란 도덕/ 실천/ 윤리 법칙이며 가상적 세계, 감각 세계의 피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이런 법칙에 대해 외경심을 가져야하며 이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의무에서 유래한 행위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외경심은 감정의 영역이 아닌가?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도덕 법칙에 대한 외경심은 행위의 결과로 받아들여진 좋은 감정과 달리 행위에 선행하며 이성 자체에 의해 산출되는 감정이다.

칸트는 도덕의 최상 원리를 찾는 데 있어 경험을 계속 거부하려 한다. 선천적 이성 개념만이 윤리학의 근거 지움을 위해 허용되어야한다. 그리고 하나의 인식이 선천적 인식이라 불리기 위한 필요조건인 보편적 타당성과 필연적 타당성은 행위의 선천성 역시 결정한다. 칸트는 정언 명령이 인간 행위의 선천성을 규정하는 이 두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4. 이성의 강요: 정언 명령과의 첫 만남

자연 세계와 가상 세계는 모두 인간의 고향이다. 그리고 가상 세계에서만 자유와 도덕성이 가능하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만 이성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스스로 하나의 법칙을, 하나의 원리를 정립할 수 있다. (인간은 다이어트 가능) 자연 법칙에 복종하려면 이성이 필요 없지만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 이처럼 이성에 의해 필연적 행위로 인정된 행위가 선택되는 경우 이것을 의지, 실천 이성이라 한다.

그러나 이성이 행위를 전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로운 자의에 빠져 쾌락을 선택한다. 이런 이유로 의지는 이성의 근거들에 의하여 강제되어야만 한다. 의지를 강제하는 것은 하나의 지시이며, 지시를 정식화시킨 것이 명령이다. 칸트는 이 명령을 가언, 정언으로 구별한다,

가언적이란 앞서 전제함을 의미한다. 가언 명령은 하나의 행위가 다른 어떤 가능적 내지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타당한 명령이 아니다. 정언 명령은 그 행위에 의해 달성 되어야 하는 다른 어떤 의도를 명령의 전제로 가지지 않는다. 이런 명령을 도덕성의 명령이라 부른다. 두 명령을 구별하고 있는 것은 의지의 강제 개념이다. 칸트의 실천 법칙에서, 정언 명령은 행위의 질료가 아니라 행위의 형식에 관여한다. 그래서 칸트의 윤리학은 형식(주의)윤리학이라 불린다. 그는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정언 명령을 다섯 개의 공식으로 제시한다. 그 중 제 1공식이 바로 다음과 같다. “네가 그에 따라서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마치 보편적 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정언 명령에 대해 논하는 중간 부분에 칸트는 다시 도덕법칙이 사례나 경험을 통해 밝혀질 수 없음을 반복한다. 왜냐면 우리는 원인을 경험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녹고 있는 버터를 보고 그 원인인 태양의 빛을 알 수 없다.

5. 쉬어 가는 곳 : 보편화 방법에 관하여

싱어의 보편화에 대해 살펴본다. 싱어에 의하면 보편화 방식은 아무런 제한 없이 타당성을 가진다. 이 방식은 윤리학의 유일한 원리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모든 사람이 A를 할 때 끔찍하다면 누구도 A를 해선 안된다. 싱어는 더 나아가 보편화의 조건을 발견하려 한다. 즉 모든 썩은 치아는 “신경이 제거되어 있지 않는 조건 하에서” 통증을 야기한다. 이 보편화 원리는 인과 명제에만 적용되며 서술적 명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날개가 부러지면 비행기는 언제나 추락한다.”는 가능하지만, “한 책상이 1.3M이다”는 보편화가 되지 않는다. 도덕적 명제 역시 인과 명제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다. 그럼 어떤 행위들에 보편화 원리가 적용될 수 있을까? 즉 도덕적 행위의 징표는, 도덕 기준은 무엇인가?

1) 보편화 진행 절차는 행위 방식과 관련하여 치환 가능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건축가가 되고자 한다.”, “어느 누구도 건축가가 되려 하지 않는다.” 모두 그 귀결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도둑질해선 안된다.”와 “모든 사람이 도둑질한다.”의 귀결은 일치하지 않기에 “너는 도둑질해서는 안된다.”는 참된 도덕적 명제이다. 2) 보편화 방식은 반복될 수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17시에 밥을 먹으러 가면 끔찍하다. 그러나 이는 16시에도, 15시에도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어느 누구도 어느 시간에도 식사하러 가서는 안된다. 보편화 진행 절차의 구체적 적용이 각각 반복될 수 있다면 그러한 적용은 동시에 치환 가능하다.

칸트는 싱어와 달리 행위나 행위의 귀결이 아니라 준칙, 의도된 행위 방식을 해부한다. 또한 보편화 가능한 행위의 조건들을 찾지도 않는다. 그는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철회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정언적으로 타당한 도덕 법칙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제3부 정언명령

1. 제1공식

앞에서 말한 정언명령의 제1공식을 적용해보자. 예컨대 내가 은행에서 돈을 훔친다고 해보자. 이 행위가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십계명 때문이 아니다. 나는 도둑질 금지의 근거를 타율적 규정이 아니라 나의 이성 안에서 찾아내야한다. 첫 번째로 준칙을 정식화한다. 삶을 쾌락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경우 나는 언제나 은행에서 돈을 훔친다. 두 번째로 이 준칙을 보편법칙으로 생각해보자. 이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은행에 있는 내 돈을 훔쳐 가도 좋다는 사실 또한 원해야 한다. 다른 예로 무임승차를 생각해보자. 다만 주의할 것은 이 준칙을 일반화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무임승차하는 것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방식의 일반화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차비를 지불할 수도 있다.”는 결과에 도달해야한다.

2. 제2공식

정언명령의 제2공식은 다음과 같다. “마치 너의 행위 준칙이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하듯이 그렇게 행위 하라.” 칸트는 이 제2공식의 묘사를 위하여 네 가지 예를 사용한다. 이 네 가지 예는 아래와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


완전한 의무


자살


약속


불완전 의무


자기 계발


타인을 도움


여기서 완전 의무란 내가 한 준칙의 일반화를 모순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또 의욕할 수 없는 경우이며 불완전 의무는 내가 한 준칙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는 없지만 모순 없이 의욕할 수 없는 경우이다.

3. 칸트가 제시한 예들

자살의 예를 보자. 자살을 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배반되는 것인가? 그의 준칙은 “만일 내 생명의 연장이 쾌적함을 약속하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가져올 위험이 더 많다면, 나는 차라리 생명을 단축해 버리겠다. 그것이 나의 자기애의 원리에 적합하다.”이다. 이 자기애의 원리가 자연의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감정에 의해 생명이 파괴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그러한 자연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며 자연으로서 존립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행위나 행위의 귀결이 아니다. 즉 “만일 모든 사람이 자살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가 아니다. 정언 명령에서 수행되어야 할 사유 실험은 준칙에만 관계한다. 즉 문제는 “어떤 하나의 준칙이 과연 자연 질서의 법칙과 유사한 그와 같은 법칙이 될 수 있는가?”이다. 자기애의 준칙을 자연 법칙으로 간주하고 보편화시킬 경우 이 준칙은 좋은 시절에는 삶의 유지로 나쁜 시절에는 삶의 파괴로 귀착된다. 하나의 동일한 자기애의 근거에서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온다. 그리하여 이것은 자기모순이다.

약속의 예를 보자. 나는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 약속을 하고자 한다. 이 때 나의 행위 준칙은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빌리는 경우, 내가 돈을 갚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갚겠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돈을 빌리겠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옳은가? 이 법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면 약속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약속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 자체도 불가능해진다. 고로 이 준칙은 아무런 타당성도 갖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위 준칙이 실제 보편화되는 경우 초래될 귀결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지속적 거짓말의 논리적 귀결은 아무런 의사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 공동체의 출현이다. 그러나 두 번째 부류는 이것이 오류라 말한다. 거짓 약속의 귀결에 관한 인식은 경험에서 유래한다. 즉 경험이 거짓 약속의 도덕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데, 칸트는 명백히 경험을 거부했다. 고로 거짓 약속의 예가 가지는 도덕적 중요성은 거짓 약속의 토대에 놓여 있는 의지의 보편화 가능성에서 찾아야 한다. 빚을 갚지 않음이라는 행위가 자연 법칙의 필연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가 중요하다. 약속은 자기 자신에게 하나의 의무를 지우는 행위인데, 거짓 약속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우지 않는 행위로, 이것이 자연 법칙이 되면 “자기 자신에게 의무를 지우는 행위 중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에게 의무를 지우는 행위와 결합될 수 없다.”라는 명제가 도출되며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세 번째, 네 번째 예에서 문제되는 것은 의욕 될 수 없는 것이란 개념이다. 즉 준칙이 보편화되어 자연 법칙으로 간주되는 경우 그와 함께 등장하는 사유 및 의욕의 모순이다. 자기 계발의 예의 경우를 보자. 나는 교육을 받으면 유용한 사람이 될 재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인생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이 때 준칙은 “타고난 소질을 계발하는 데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겠다.”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렇게 될 경우를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 자신 안에 있는 능력이 모두 발현되기를 원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필연적이다. 왜냐면 능력이란 어떤 것이든 가능한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한 능력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생활을 생각할 수는 있으나 욕구할 수는 없다. 이런 칸트의 언급에 대해 한 연구가는 “자기 계발 등한시의 원칙”이라 말했다. 나는 나의 의지의 충분한 실현을 기꺼이 단념한다. 즉 의욕 하지 않는 의지인데, 이는 자기모순이다. 또 한 연구가는 “자기 계발 포기의 준칙”이라 부른다. 의욕 하는 존재는 이성에 의거해서만 의욕 할 수 있고, 내가 내 능력의 계발 포기를 이성에 의거하여 의욕 한다면 나는 이성 존재자로서의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나의 소질은 계발되지 않을 경우 그것이 내 소질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다. 소질을 계발함으로써 도달하는 최종 상태와 계발하지 않기를 원하는 준칙이 보편화됨으로써 초래될 최종 상태는 정확히 모순된다. 즉 나의 자연 소질을 계발함, 그리고 계발하지 않음을 동시에 의욕함, 이러한 내용을 갖는 자연 법칙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다.

타인을 도움의 예를 보자. 나는 풍족하지만 다른 빈곤한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 법칙이 보편화되었을 경우, 나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동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스스로 박탈하므로 그것을 원하는 의지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때 나의 준칙은 “나는 곤경에 처한 어느 누구도 돕지 않겠다.”인데, 나는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 어느 누구도 돕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를 돕는 것을 의욕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의 해석은 돕고자 하는 행위가 도움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수도 있다. 이는 피아노 연주를 위해 연습해야한다는 가언 명령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이것과 칸트의 예가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자.

첫 번째는 목적 개념에 관계한다. 행위 할 수 있음이란 목적을 추구할 수 있음이므로 행위 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은 목적 정립의 가능성을 갖는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목적과 원칙적으로 목적을 정할 수 있음의 가능성은 서로 다른 특성이다. 두 번째는 목적의 필연성, 보편성 즉 선천성이다. 인간이라면 피아노를 잘 칠 필요는 없으나 인간이라면 행위 할 수 있고 목적을 정할 수 있어야한다. 세 번째는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연관된다. “내가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한다.”는 명제에 어디에도 피아노 연주의 필연성을 선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으로부터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개념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이 네 가지 예에서, 준칙들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실만이 드러난다. 어떤 행위가 올바른 혹은 도덕적 행위인지는 어느 예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도덕 법칙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도덕 법칙에 의한 심성의 변화들은 결코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전제에 기인한다. 도덕적으로 참된 것은 법칙에 대한 외경심과 연관되지만, 이것은 인식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증명할 수 없다.

4. 제3공식

의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가 밝혀졌다. 의무는 행위의 실천적-무제약적 필연성이다. 의무는 이성적 인간에게 반드시 타당해야한다. 칸트는 그 다음으로 정언 명령의 또 다른 정식화를 위해 목적과 수단 개념을 동원한다.

피아노 연주를 위해 연습한다, 라는 가언 명령에서 피아노 연주는 질료적(어떤 동기에 근거하고 있는 실천적 원리들. 반대는 형식적) 목적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관적 목적이며 행위자의 특정한 종류의 욕구 능력과의 관련 속에서만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상대적 목적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목적 그 자체라 할 수 없으며 인간만이 목적 자체이다. 다른 목적들 일반을 자신의 목적으로 정립할 수 있음, 즉 행위 할 수 있음의 이유로인간만이 목적 자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제3공식이 등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목적 그 자체.”이다.

이 공식을 앞의 네 가지 사례에 적용해보자. 자살의 경우 견딜 만한 상태를 삶의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수단으로 인격을 이용하는 것이다. 거짓 약속의 경우 돈을 빌리기 위해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자기 계발의 경우 인간의 소질들의 계발은 인간의 자기완성을 비로소 가능케 한다. 자기 소질을 계발하지 않는 것은 인류의 자기 보존이라는 목적 그 자체의 발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타인을 돕지 않는 경우 타인이 스스로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행동 할 수 있기 위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베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내가 목적 자체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4. 제4공식과 제5공식

제4, 5공식에서는 자기 입법과 의지의 자율 개념이 등장한다. 이성적 의지는 이익, 혹은 매력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되며 도덕적 행위는 이성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 보편적 입법 의지의 이념에 이해서만 규정되어야한다. 그리하여 의지는 자기 입법자의 모습을 띤다. 결론적으로 도덕성은 모든 행위의 입법에 대한 관계에서 성립한다. 이를 표현하는 제4공식은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해야 한다.”이다. 제1공식 중에 강요와 강제는 자신의 의지에서 유래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입법은 5공식에도 표현된다. 제5공식은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준칙들에 의거하여 자신이 언제나 목적들을 보편적 왕국의 한 입법자일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해야한다.”이다. 여기서 목적의 왕국 개념이 등장한다. 칸트에게서 왕국이란 상이한 이성적 존재자들이 공통된 법칙들에 의해서 서로 체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적의 왕국이란 이성적 존재자들의 공동체, 어느 누구도 타인을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자기 목적이라는 존엄성을 가지는 공동체이다. 이것이 칸트의 도덕적 이상이다.

5. 자율과 자유 : 정언 명령의 궁극적 근거

칸트의 도덕철학을 3층 건물에 비유해보면, 1층은 단적으로 선한 것, 2층은 정언 명령, 3층은 의지의 자율이다. 자율은 고대 희랍어 autos(자기 자신)와 nomos(법칙, 법칙성)에서 유래한다. 즉 내가 나 자신의 행위를 규정하는 경우 나는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자율이란 자기 입법, 자기규정이다. 의지의 자율은 칸트 철학의 거대한 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관련되어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란 대상이 우리의 인식 주위를 회전한다는 생각이다. 오성은 감각적 인상들에게 법칙을 부여하며 우리는 감각적 인상들 속에서 오성의 법칙들을 발견한다. 실천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성은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며 입법자로서 이성 존재자를 규제하는 도덕 규칙들을 제정한다. 자신이 정한 법칙에 스스로 복종할 수 있다! 도덕의 최상 원리는 정언 명령에 부합하는 것이며, 정언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은 바로 나는 자유롭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도덕적 행위의 전제는 내가 나의 의지를 스스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구조의 의지를 살펴보기 위해 질료와 형식 개념을 살펴야 한다. 욕구 능력의 질료란 우리가 실현하기를 욕구하는 대상이다. 욕구의 질료로 돈을 택함은, 내가 부를 욕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돈을 가능한 한 증대시키길 의욕 한다.”는 이 준칙은 이성에 의해 선천적으로 규정된 법칙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실천적 법칙을 제공할 수 없다.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며, 필연적으로 규정할 수도(사랑에 빠지면 돈이 안 중요할 수도) 보편적으로 규정할 수도(돈 안 받고 시술하는 의사)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결론에 따르면 의지의 모든 질료는 경험적이며 질료에 의한 규정은 타율성의 원리이다. 돈 말고 행복 추구 역시 모든 성향과 욕망의 충족을 의미하기에 내용적-질료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다.

질료가 아닌 형식이 비로소 법칙 수립을 가능하게 만든다. 위탁품의 횡령이라는 칸트의 예를 보자. 여기서 위탁증서, 위탁인의 죽음, 내 재산의 증식 등은 모두 경험적 사건들이며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반면에 형식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이성의 활동이다. 이 준칙이 일반화될 경우 위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편적 법칙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은 이성 활동의 성과이며 하나의 반성이다. 반성의 형식적 구조는 결코 자연의 인과 관계로부터 유래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자유 의지로부터만 유래하며.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인간만이 자신의 법칙을 위한 형식을 창출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인과적 자연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도덕성과 윤리성의 원천은 자유이다. 여기서 자유란 두 가지인데, 1) 소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는 질료적 의지 규정에 대한 거부이다. “거짓 약속을 안한다.”라고 했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음은 내가 자유롭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2)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란 하나의 형식적 법칙을 창출하는 가능성이다. 이 형식적 법칙을 기준으로 나의 준칙을 평가한다.

제4부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장에서는 더 발전된 칸트의 도덕 철학에 대해 논의한다. 순수 이성의 영역과 직관 세계 영역 사이의 하나의 관계인 “전형”을 이야기한다. 감각 세계의 자연 법칙성을 기준으로 삼아 행위 준칙의 형식적 구조를 측정한다. 그러나 측정의 결과와 실천 법칙 자체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또 칸트에게서 행복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덕 법칙의 명령을 윤리적 심성의 너머까지 확장하는 법철학의 과제에 대해 다루며 <윤리학>에 등장하는 정언 명령 개념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제5부 되돌아보기 : 칸트 윤리학의 요점(4가지 단계)

1) 사유에만 존재하는 비가시적 세계의 증명될 수 없는 자유의 이념. 여기서도 법칙이 있다. 2) 가시적 세계를 초월하는 이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며 경험은 개입해선 안된다. 3)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선의지 자체이며 행위는 그것이 의무라는 이유만으로 행해졌을 때만 선하다. 그 행위가 도덕 법칙에 대한 외경심에서 유래할 때만 도덕적으로 선하다. 4) 내 행위의 준칙을 특정한 합법칙성에 복종시킨다면 나는 도덕 법칙을 준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합법칙성의 공식은 정언 명령이다. 내가 이런 법칙을 제정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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