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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미디어스 칼럼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레미제라블 (2012)

Les Miserables 
8.3
감독
톰 후퍼
출연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아만다 사이프리드, 앤 해서웨이, 헬레나 본햄 카터
정보
드라마, 뮤지컬 | 영국 | 158 분 | 2012-12-18

 

‘레미제라블’ 열풍이 무섭다. 벌써 500만 관객을 넘겼다고 한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언론에서는 레미제라블 열풍을 해석하기 바쁘다. 대선이라는 정치적 국면과 영화 개봉이 맞물리면서 야권 지지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 대선 패배로 인한 상처를 치유 받았다는 분석이 대다수의 견해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함을 참을 수 없었다. 영화 속 거의 모든 대사는 노래인데, 몇 몇 배우들이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물론 이런 단점쯤이야 내가 뮤지컬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 치부할 수 있다. 현장 녹음이라는 도전정신에 더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을 참지 못했던 건 단지 배우들이 뮤지컬 영화를 소화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힐링 포인트’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예컨대 나는 다른 관객들이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지목한 부분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친구들은 영화 마지막에 배우들이 합창을 하는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합창 장면에서도 일말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내 감수성이 메말라 버린 것일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

나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예술이나 영화를 보는 ‘감수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천만 관객을 동원한 ‘국민 영화’였는데, 누가 보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주인공이 달랐다. 50-60대의 보수적인 남성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연산군(정진영 역)이라고 생각했다. 연산군이 ‘왕’이고, <왕의 남자>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로맨스와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10대 20대 여성들은 공길(이준기 역)이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왕의 남자라는 소재를 제공한 장본인이자 이야기와 사건의 중심에 공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눈에 연산군과 공길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왕의 남자의 주인공은 장생(감우성 역)이었다. 연산군과 공길이 벌려놓은 일들을 다 수습하고, 결국 책임을 진 사람이 장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떤 일이든 그 일을 묵묵히 처리하고 뒷수습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한다는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물론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은 당연히 장발장이다. 나도 어렸을 적 빵을 훔쳤다가 감옥에 갇힌 장발장 이야기는 알았어도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영화를 관람한 많은 이들도 장발장 캐릭터에서 매력을 느끼고, 장발장이 당연히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범죄자였지만 시장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오른 장발장에게서,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판틴과 코제트를 돕는 장발장에게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자베르 경감에게서 강한 매력을 느낀다. 자베르는 ‘법의 수호자’다. 그는 소란과 변화가 아니라 체제의 안정을 갈구하는 도시의 수호자다. 영화 속 자베르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신념을 노래한다. 마치 판옵티콘의 감시자 같은 모습이다.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자베르가 던지는 메시지를 매우 강렬하게 느낄 것이다. 장발장이 위기에 처한 자베르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나 자베르는 장발장을 돕거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힘없이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범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자, 신념을 위해 신념을 흔드는 자신을 버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주인공은 꼬마 가브로슈와 에포닌이다. (가브로슈와 에포닌은 원작 레미제라블에서 남매로 등장한다.) 가브로슈는 끝없이 흔들리는 ‘어른’들과 달리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혁명에 가담했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나는 가브로슈가 총에 맞는 순간 울컥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강남좌파(?) 마리우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혁명에 가담하고, 그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에포닌의 모습 역시 정말 감동적이었다.

 

용서와 구원의 드라마??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지루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장발장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망이었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상징하는 것은 용서를 통해 구원받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삶이다. 죄를 짓고 도망치던 장발장은 마리엘 주교의 용서와 관용 덕분에 마들렌이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쫓겨난 판틴과 마주하고, 이제 그녀의 삶을 구원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판틴은 금방 죽고, 장발장은 판틴의 삶 자체였던 코제트를 구원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코제트의 삶이 되어버린 마리우스를 구원하기 위해 혁명의 현장에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적수인 자베르를 만난다. 자베르는 자신을 죽이라 말하지만 장발장은 그를 용서한다. 그리고 죽음의 현장에서 마리우스를 구해낸다. 마침내 자신이 구원하려 했던 판틴이 장발장의 눈앞에 나타나 그에게 ‘토닥토닥’ 해주자 장발장은 만족한 듯 세상을 떠난다.

나는 주인공 장발장의 인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용서와 구원이라는 메시지에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는 과연 레미제라블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많은 이들이 레미제라블을 보고 난 뒤 “빵 훔친 거 가지고 19년이나 감옥에서 산 건 너무 하다.”라는 평을 남겼다. 배고픈 조카들을 먹이려고 빵 하나 훔친 건데, 그 정도는 ‘관용’으로 넘어가 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다. 장발장 역시 사회의 굶주린 자들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판틴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사정을 좀 봐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자베르는 이와는 반대로 딱한 사정을 하나 둘 씩 봐주다보면 법은 지켜질 수 없으며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원칙주의자다.

장발장 식의 온정주의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다. 굶주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온정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온정으로 인해 사회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가려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당대의 프랑스가 빵 하나 훔친 사람을 19년간이나 부당하게 가둬놓는 사회였다는 점에 분노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당대의 프랑스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 하나 구할 수 없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범죄의 근원인 빈곤을 없애려 하지 않고 범죄‘자’만 때려잡는 사회에 분노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장발장 식의 온정주의에 그친다면, 자베르 같은 우파들의 반론에 무방비 상태가 된다. 조선일보 문화부장 박은주는 장발장의 19년 옥살이가 부당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18/2013011802332.html)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불쌍하다고 봐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법에게 선처를 요구하고, 온정을 요구하지만 과연 누구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자베르나 조선일보 같은 우파들은 누구에게는 온정을 베풀고 누구에게는 가혹할 경우 법은 법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물론 조선일보의 논조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재벌과 가진 자들의 온갖 불법에는 입 다물거나 국익을 위해 선처하라고 말하면서 빵 하나 훔친 거 가지고는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작자들이니 말이다. 이것들에겐 우파라는 호칭도 아깝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왜 하필 구원의 대상이 판틴인가? 왜 하필 코제트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왜 장발장은 하필 판틴을 구원하고, 코제트를 구원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구원 받는 것일까?

혁명이란 모두를 구원할 새로운 ‘원칙’을 만드는 것

급진적인 청년들이 장발장 식의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혁명을 시도했다. 법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 법에 맞서 ‘모두’를 구원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민중은 그들을 돕지 않았다. 그것은 민중들이 개인의 구원, 온정을 더 욕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음을 동반해야 할지도 모르는 급진적 변화보다 개인적인 구원과 온정이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가브로슈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갈 상황에서도 원칙대로 행동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목숨을 버린 이유는 성공할 혁명의 ‘매개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자베르는 죽은 가브로슈의 가슴에 자신의 훈장을 달아준다. 가브로슈는 자베르가 첩자로 혁명군 안에 숨어들었을 때 그의 정체를 폭로해 그를 위기에 처하게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자베르는 가브로슈를 인정했다. 그 이유는 자베르와 가브로슈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신념을 위해 목숨도 던질 수 있는 인물들이다. 자베르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해서 가브로슈에게 기꺼이 자신의 훈장을 내어준 게 아닐까?

에포닌의 죽음 역시 온정주의자 장발장 가족의 구원과 대비되며 더욱 돋보인다. 마리우스는 사랑 때문에 혁명을 포기하려 했지만 에포닌은 사랑 때문에 혁명에 동참했다. 장발장은 딸을 위해 마리우스를 구출하고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결혼하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장발장도 둘의 행복한 모습을 뒤로 한 채 구원받으며 숨을 거둔다. 반면에 에포닌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구원이 아니라 총을 선택했고, 마리우스를 지키고 숨을 거둔다.

이 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7년 만에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민중 혁명이 발생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레미제라블 속의 혁명을 실패가 아닌 ‘미완’으로 여기고, 결국엔 혁명이 성공한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가브로슈와 에포닌이 동참한 혁명이 뒤이어 일어날 혁명의 매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온정주의나 개인적 구원보다는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에 목숨을 던졌기 때문이다. 내가 장발장이 아니라, 미완의 혁명을 주도한 혁명가들을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꼽는 이유다.

<미디어스>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