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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classic

맑스에게 정치의 역할이 없다고?

 


공산당 선언

저자
칼 마르크스 지음
출판사
이론과실천 | 2008-11-2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출판사서평 제공] 청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남긴 위대한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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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후마니타스에서 ‘정치철학 세미나’를 진행하는 최장집을 인터뷰한 중앙일보 기사를 읽었다. (인터뷰 전문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335025) 중앙일보라는 타이틀을 보고, 또 늘 그렇듯이 ‘참된, 진정한 진보정치학자’ 최장집을 나쁜 보수신문이 이용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인터뷰 내용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그는 중앙일보의 의도된 질문, ‘왜 정치철학 강의 목록’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인 맑스가 없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맑스 이론의 치명적 결함은 정치의 역할이 없다는 점이지요. 마르크시즘이 현실 속에서 작동을 못하고 실패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정치는 없이, 이상과 규범만 강요됐기 때문에 권력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없었지요. 그런 이상과 당위의 논리는 우리에게 넘쳐요. 오늘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런 규범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라고 봐요.”

이어 그는 정치철학 세미나를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 덧붙인다.

“ (중략...._) 지금 한국 정치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맑스가 아니라 마키아벨리라고 보는 겁니다. 오해는 마세요, 바로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길이라고 보는 겁니다.”

‘좋아, 넌 낚였어.’라는 보이지 않는 미소와 함께 이어진 중앙일보 기자의 질문,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그 문제의식을 마키아벨리의 입을 통해 심화시키느냐는 질문에 최장집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독재와 민주가 대립하던 시절, 윤리적 도덕성이 최고 덕목이었던 시절에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상의 정치’와 ‘운동의 정치’는 함께 갑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운동의 정치’는 그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할 오늘에도 여전히 운동과 이상의 정치가 지속되어도 좋은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의 정치가 아니라 ‘현실의 정치’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현실주의 정치철학자로서 마키아벨리를 재평가하자는 것은 일종의 대증요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하며 했던 말을 기억하나요. ‘나는 워싱턴을 바꾸러 온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되는 순간 정치를 안 하지요. 정치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정치인이 결국 중요합니다. 다른 의견, 다른 세력과 대화하고 타협하고, 정치적 목적을 정치를 통해 설득하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이 짧은 기사에서 최장집을 예의상으로라도 ‘좌파’라고 불러선 안 되는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민주화 이전과 민주화 이후를 구분하며 민주화를 이뤄낸 운동의 정치가 민주화 이후에서 더 이상 활발해져서는 안 되며, 이 운동은 제도 안으로 포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중에서 시민으로의 발전이, 잘 ‘대표되지’ 않은 정당체제에서 ‘더 잘 대표된’ 정당체제로의 발전이 ‘더 많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그의 입장에서 보면 맑스에게 정치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대의제’를 잘 해보자는 이야기대신, 즉 촛불집회에 참여한 민중들에게 ‘이제 정당으로!’라고 외치는 대신 모든 제도는 부르주아의 것이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으로 이것들을 때려 부수는 ‘혁명’을 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맑스와 대비해(이상의 정치) 현실에서 정치하는 방법을 알려준 마키아벨리(현실의 정치)를 높게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저항의 정치학’이 아닌 ‘정치와 통치의 기술’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최장집은 결국 ‘어떻게 더 잘’ 통치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맑스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결국 그는 개인의 권리를 ‘제도’와 ‘시민권’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장할 것인가, 라는 자유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맑스에게서 이런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에게 정치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고안된 외적 권력이나 통제술이 아니다. 인간들 사이의 교류의 힘이 바로 맑스에게는 정치다. 이런 이유로 맑스는 politics나 state가 아닌 kommune, Gemeinwesen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것이다.

최장집과 같은 관점에서 맑스에게 정치가 없다, 라고 비판했던 이들은 굉장히 많다. 맑스의 분석은 인간의 생산 활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그 분석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이론은 하나의 정치이론으로서 보다는 주로 정치경제학 이론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맑스에게 정치철학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맑스는 비판자들이 맑스에게 ‘정치의 영역이 없다.’고 말하는 데 요구되는 그 시각 자체를 비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사상사에서 자유주의는 정치를 종교나 철학, 윤리의 영역에서 분리시켜왔는데, 맑스의 입장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치관은 19세기에 들어서 인간에게 외적인 통제 권력으로 자립화되었다. 그렇기에 맑스는 이를 비판하고 정치를 인간들 스스로의 정당한 질서나 공동체로 재정의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맑스가 얼마나 ‘정치’적인 인간인지는 그리고 그 정치가 얼마나 자유주의자들과 다른지는 그의 가장 쉬운 저서 공산당 선언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1. 맑스야말로 현실적이다.

최장집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치의 문제가 서민대중, 소외계층이 정당에 의해 ‘대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꾸준히 보수양당 체제가 깨지고 진보정당과 보수 정당 양당이 돌아가면서 집권하는 양당제를 지지해왔다. 즉 정당정치라는 제도를, 대의제라는 제도를 잘 살려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서민들에게 자기 몫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미 왜곡된 보수 양당 체제를 어떻게 ‘선거’로 깨부술 것인가? 선거제도를 바꾸자, 보수 양당들이 제도 개편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데도? 그리고 만약에 진보정당이 집권한다 해도, 그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그래서 그에겐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이 필요하다. 제도를 잘 운영하고 다른 정치집단들과 타협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국가 제도 권력으로 더 잘 보장해줄 수 있는 그 자유주의적 통치술 말이다. 그는 맑스가 규범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규범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다. 그에게 있어 정치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윤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반면에 맑스는 철저하게 ‘현실’에서 정치를 말한다. 그는 먼저 좌파세력을 1) 규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당대에 ‘공산당’이라는 규정은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맑스는 이 비난이야말로 모두가 ‘공산당’을 세력으로 인정하다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그래, 우리가 공산주의자다.’라며 공산당의 규합을 시도한다. 유령에 불과한 공산주의가 맑스의 ‘선언’에 의해 실체화된다. 그는 자신의 적들에 의해 ‘규정당하’지 않고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공산당이 살아남을 수 없는 무대를 공산당이 이미 세력화한 무대로 바꾸어버린다. 이것이 선언의 위력이다. “반MB 말고 X를!”

그리고 그는 이어 부르주아의 적이라는 이유로 하나처럼 보이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정치세력들을 공산당과 구별한다. 봉건적 사회주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독일 사회주의, 보수적 또는 부르주아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는 앞에서 제기한 공산주의 세력 규합의 측면의 연장선이자 혁명의지가 없는 자들, 궁극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같이 가선 안 될 자들을 분류하는 작업이다. “반MB에 낀 온갖 잡탕들과는 연합할 수 없음!”

이런 세력 규합과 더불어 그는 혁명이야말로 피지배계층을 해방시킬 진정한 대안임을 역설한다. 부르주아는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인간관계와 삶의 양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산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옥죄어 오는 억압이란 구조의 문제이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인 착취이다. 고로 그 구조를 뒤엎지 않으면 해방은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근대국가 체제 역시 부르주아가 생산 수단을 집중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중앙집권화 체제이기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것마저도 철폐해야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낸 역사적 상황을 고찰하고 그 안에서 방법은 혁명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고 외친다. 근본적으로 지도자의 선의에 의존해야 하는 대의제를 수정하여 잘 해보자는, 이미 왜곡된 형태에서 표층만 털어내어 개혁을 하자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정치적 현실감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상황을 비교하여 독일에 걸맞은 혁명을 도출해 내는 것 역시 미국의 양당제 체제를 그대로 가져와 한국에 적용하려는 ‘규범’을 지닌 최장집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2. Politics가 아닌 kommune으로

결국 맑스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노력했던 시민권의 범위를 늘리기 위한 정치 개념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정치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맑스가 ‘정치’를 자본주의 사회 극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정치를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행복과 복지를 위한 도구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나라당이 서민정당을 표방하고 박근혜가 ‘복지국가’를 제안하고 있다. 정말 복지국가가 되어, 또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국가로부터 법적으로 보장받는다면 피지배계층에 대한 억압은 끝이 나는가? 자유주의가 이처럼 정치를 ‘통치술’로 판단할 경우 그것은 억압적 제도의 유지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뿐이다. 맑스에게 정치란 이런 통제가 아니라 지배 자체를 폐기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인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힘을 공동적인 것으로 발전시키고 육성하는 실질적 공동체의 수립, 그것을 위한 인간들 사이의 교류와 연대이다. 이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을 일으켜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인간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게 만드는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전반을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가 정의 내리듯이, 이런 사회야말로 바로 공산주의 사회요, ‘계급과 계급 대립으로 얼룩진 낡은 부르주아 사회가 아니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전체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이다. 자유주의가 이야기하는 재배치의 기술인 Politics가 아닌 이러한 연합체인 kommune이야말로 맑스에게는 정치이다.

맑스에게 정치의 역할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희망하는 ‘정치’를 극복하고자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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