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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미디어스 칼럼

역사교육의 부재를 파고든 ‘팩트’

지난 9일 첫 방송된 KBS 2TV의 주말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아이유, 조정석 주연)이 소송에 휘말렸다. 문제는 ‘이순신’이었다.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 DN(Designed Nation)이 “드라마를 통한 이순신 이미지의 재창조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며 서울지방법원에 ‘드라마 제목, 주인공이름 사용금지 및 방영금지와 저작물처분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DN 활동가 고희정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아직까지 전범국가 일본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해 매주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요 집회를 하고 있다. 일본 우익은 프랑스 교과서까지 침투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KBS가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희화화할 경우 이순신은 젊은 세대에게 아이유로만 남을 것이고 한류열풍을 타고 드라마가 해외에서 방영될 경우엔 심각한 국가적 명예 훼손이 일어날 것이다.” “예전엔 초등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1·2위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었지만 지금은 김연아와 유재석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높아진 만큼 극중 인물의 이름에 신중해야 한다.”[각주:1]



역사교육의 부재를 파고든 ‘팩트’

다행히도 KBS와 제작진이 포스터를 교체하고,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조롱하는 대사들(‘이순신이면 가서 독도나 지켜라.’, ‘이 100원 짜리야.’)도 사라지면서 이 논란은 마무리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논란이 수습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일까?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드라마라는 창작물에 너무 엄숙하게 반응하는 게 아닐까? 또한 이런 식의 명예훼손이 남발되면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터넷사이트를 돌아다녀 보니 많은 네티즌들이 DN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우리 성웅 이순신 장군을 감히 희화화하다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더 많은 네티즌들이 이순신을 검색하면 아이유가 나오고, 그래서 청소년들이나 아이들이 이순신하면 성웅이 아니라 아이유를 떠올리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혀 다른 사안처럼 보이지만 ‘이순신’ 논란과 유사한 현상이 있다. 바로 몇몇 청소년들이 일베(일간베스트)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모습이다. 지난 12일 SBS <현장21>은 최근 보수우파들의 성지가 되어버린 인터넷유머사이트 일간베스트를 심층 취재했다. 방송에는 일베 회원을 자처하는 한 중학생이 등장했다. 그 중학생은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동이며 노무현과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극우파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기자가 약간 놀란 듯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느냐고 묻자 학생은 “고대까지 밖에 안 배운다.”며 “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안 배워도 일베에서 배운다. 일베에서 배워서 다 안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일베에 접속하면 ‘역사교육’이라는 제목을 단 글과 동영상이 많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광주가 폭동이므로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한 게 잘한 일이라는 점, 김대중과 노무현이 빨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글과 동영상을 올리며 ‘팩트’를 강조한다. “좌파는 감성팔이만 하는데, 우리는 팩트로 무장하고 있다.”는 식이다. 일베 유저들이 일베 사이트를 대상으로만 ‘역사교육’을 실시하는 게 아니다. 네이버나 다음에 김대중/노무현이나 5.18 관련 기사가 실리면 일베 유저로 추정되는 이들이 와서 “5.18은 폭동이고 김대중/노무현은 빨갱이다. 이건 팩트다.”라는 내용의 댓글을 올린다. 아마 이 글에도 그런 댓글이 달릴지 모르겠다.

‘이순신’ 논란과 ‘일베 역사교육’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역사교육의 부재’다. 초중고 학생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웠다면 이순신과 아이유를 헷갈릴 수 있을까? 드라마나 사극으로 역사를 배우다보니 진짜 역사와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말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시나리오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대답할 수 있다. 팩션이나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다며 드라마를 찍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역사교육을 강화해서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칠 생각을 해야 한다. 머리에 제대로 된 역사가 박혀 있으면, 아이유가 이순신이라는 생각이 파고 들 틈이 없다.

일베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중학생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근현대사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중학생의 머리에는 역사가 부재했고, 그 틈을 일베의 ‘팩트’가 파고들었다. 근현대사와 국사는 예전부터 필수과목이 아니라 수능의 ‘선택과목’이었다. 2009년 교육과정 개정으로 국사와 근현대사가 ‘한국사’로 통합되면서 학생들은 내용도 많고 어려운 한국사 과목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왜 역사문제에 둔감한가?

이러한 한국의 현실에 대해 최근 BBC 매거진에 실린 하나의 기사는 큰 시사점을 준다. BBC 도쿄 특파원 오이 마르코는 자신의 역사 교육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이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역사문제에 무관심한 이유를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찾는다.

오이 마르코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까지만 역사를 ‘필수’로 배운다. 또한 역사과목에 배정된 시간도 일본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 “호모 일렉투스부터 현대까지 무려 30만 년에 이르는 역사를 1년에 배우는데, 14살짜리가 어떻게 일본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일본 학생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거의 배우지 못하고 있다. 오이 마르코가 배웠던 중학교 2학년 역사교과서에서 태평양 전쟁 시기를 다룬 내용은 19쪽, 중일전쟁은 한쪽으로 끝나고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술은 한 줄 뿐이다. 한국인 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주석으로 한 줄 언급된다.

이렇게 역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인들이, 왜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 일본이 역사문제를 가지고 갈등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 극우단체들은 인터넷에 파고들고, 집회와 시위를 해댄다. 인터넷에는 국수주의적인 정보, 센카쿠나 독도문제 혹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극우의 견해들이 도배된다. 역사교육이 부재한 일본인들의 머리를 극우의 ‘팩트’가 파고드는 것이다.[각주:2]

역사전쟁을 준비해야할 시간

나는 이전에 박근혜 취임을 맞아 미디어스에 올린 글에서 박근혜 정부 집권 이후 가장 논란이 될 사안은 한국현대사, 즉 과거사 논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집권 이후 친일과 이승만, 박정희 등 한국 현대사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대선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박근혜 주변에 “한국사회가 좌빨로 가득 차 있다.”는 식의 외눈박이 문제의식을 지닌 인사들이 즐비하다는 점에서 교과서 수정 등을 둘러싼 현대사 논란이 정국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며 신난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어댈 것이다.[각주:3]



조선일보가 본격적으로 역사전쟁의 스타트를 끊었다. 조선일보는 15일자 5면에 <원로들이 우려한 좌파의 인터넷 다큐 '백년전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신동아 3월호도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백년전쟁이 이승만을 친일파로 낙인찍기 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보수인사로 저명한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며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며 ‘잘 살펴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역사전쟁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으로 시작될 모양이다.

이러한 역사전쟁이 위험한 이유는 역사교육의 부재 때문이다. 일베에서 현대사를 배우는 중학생처럼, 극우파들이 내세우는 편향된 역사관이 ‘팩트’로 무장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킬 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이순신과 아이유를 헷갈린다는 이유로 드라마를 욕하기보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이유다. 

  1. “이순신=아이유는 심각한 역사 훼손?”,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077 [본문으로]
  2. “아베 망언에 일본사회가 무심한 까닭”,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178 [본문으로]
  3. “박근혜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12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