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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호평 받는 이유는 ‘현실 정치’ 때문

‘정도전’이 호평 받는 이유는 ‘현실 정치’ 때문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작가의 재해석…“기득권 배 채우고 서민 굶주리는 상황 현재와 닮아”

KBS 사극 <정도전>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KBS 정통사극’의 부활을 이끌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4일 첫 방송된 <정도전>은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상승세는 시청률에도 반영된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정도전>은 첫 방송에서 시청률 11.6%를 기록했다. 10-11%대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하던 <정도전>은 지난 9일 13.6%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동시간대 방송해 각각 15.9%, 13.2%를 기록한 MBC <황금무지개>와 SBS <세 번 결혼하는 남자>를 위협하고 있다.

단순히 시청률만이 아니다. <정도전>이 방송된 이후에는 남성들이 많은 방문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항상 <정도전> 이야기가 올라온다. 중년 연기자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러브라인 없는 본격 정치 사극이 40-60대 남성 시청자들의 리모컨을 움직이고 있다는 평이다.

정도전이 ‘정통사극’의 붐을 다시 이끌 수 있을지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간 브라운관을 점령한 것은 소위 말하는 ‘픽션’ 혹은 ‘퓨전’ 사극이었다. 현대에 사는 여주인공이 고려의 최영장군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SBS <신의>), 천재의사가 조선시대로 ‘타임 슬립’해 흥선대원군을 따르기도 한다(MBC <닥터진>). 장옥정이 패션 디자니어로 변신해 하이힐을 시고 달리는가하면(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 역사엔 없었던 왕의 시대를 그려내기도 한다(MBC <해를 품은 달>).

   
▲ KBS 사극 ‘정도전’ 포스터
퓨전사극이 브라운관을 점령하는 동안 ‘정통사극’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KBS가 야심차게 준비한 <천추태후>, <거상 김만덕> <근초고왕> <광개토대왕> <대왕의 꿈> 등은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큰 관심을 일으키지 못했다. 정도전이 퓨전 사극의 홍수와 전통사극의 고전 속에서 주목을 받는 이유다.

윤석진 드라마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지금 왜 정도전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다”며 퓨전 사극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중요하다면 전통사극에서는 ‘재해석’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전통사극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교육’의 관점이 아니라 ‘재해석’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정치적인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사극을 통해 정치를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말한다. 더욱이 <정도전>은 백성들이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고려 말, ‘역성혁명’을 통해 민본사상을 실현하려는 혁명가이다. 기득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는 ‘새로운 정치철학’이 필수다.

이런 의미에서 <정도전>을 SBS 사극 <뿌리 깊은 나무>와 비교해볼 수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백성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려는 왕 이도와 엘리트주의자 정기준의 대립을 통해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큰 인기를 끌었다. <뿌리 깊은 나무>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이라면 <정도전>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며 당시 권력자들의 권력다툼을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정기준’은 정도전의 조카이기도 하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정도전은 현재의 정치와 상당히 유사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며 “권문세가들이 혼자 배를 채우고 서민들이 굶어죽는 상황들, 그런데도 ‘정치꾼’들은 민생을 돌보지 않는 상황이 현재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권문세가의 대표인 ‘이인임’은 노회하지만 무시 못 할 힘을 지닌 현실 ‘정치꾼’의 이미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며 “이에 맞서 정도전은 왕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며 왕이 아닌 ‘시스템’이 통치하는 재상 정치를 꿈꾼다. 진보적인 정도전의 정치를 통해 현재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는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이기도 하다.

   
▲ KBS ‘정도전’ 갈무리

정 도전의 ‘정치’를 단순히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 ‘내각제 개헌’ 움직임과 맞물려봐야 한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윤석진 교수는 “같은 시기를 다룬 사극 <용의 눈물>이 이성계 중심의 왕권 이야기라면 <정도전>은 관료 중심의 재상국가를 다룬 이야기”라며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권력을 분점 하는 내각제로의 개헌이라는 정치권력의 변화 구도와 맞물려있는 것 같다. KBS가 정도전을 통해 의제화 시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정도전이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과제들도 있다. 초반의 퀄리티를 보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생방 수준’의 촬영이 가장 큰 문제다. 정도전은 3-4회가 방영될 무렵 9회를 촬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문제는 시청자들이 심리전과 토론을 통한 ‘권력다툼’을 지루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도전이 11화 ‘황산대첩’편에서 큰 규모의 전투장면을 구현한 것은 이러한 고민의 일환으로 보인다. 정덕현 평론가는 “전투신에 굉장히 큰 공을 들인 것으로 보였다. 정치 사극으로서 지루해질 수 있는 면을 해소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