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 과정인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노동의 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각 국의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높은 임금을 찾아 전 세계를 이동하고 있으며, 자본가들 (주로 선진국) 역시 더 싼 임금과 노동력 확보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추세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은 단순히 노동자의 유입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본국의 가족들을 불러오거나(가족 재결합), 국제결혼을 할 경우 노동력의 이동은 이민과 이주라는 사회, 문화적인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각 국들은 서로 다른 이민정책들을 내놓으며 외국인 인구의 증대와 이민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선진국들이 경제성장으로 인해 노동력 부족을 겪을 때는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치면 항상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들에게로 돌리는 주장이 등장하기 일쑤이다. 실업의 원인을 외국인 노동자에게로 돌리는 극우 정치세력들의 주장이 힘을 얻고, 이것이 외국인 혐오증과 맞물리면서 각 국에 퍼져 나간다. 최근 벌어진 노르웨이 테러 사건은 외국인 노동자, 이민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적대와 테러에 그치지 않고 국내 정치적인 갈등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국인 혐오 여론, 반 이민 여론이 이민정책에 진짜로 중요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자유 민주주의는 여론을 반영한다는 기본적인 명제에 따르면 반 이민 여론이 이민 통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왜 반 이민 여론이 이민정책에 반영되지 못하는 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영국, 미국, 호주의 사례를 통해 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반 이민 여론은 이민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일반적으로 이민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지만 각 국들에서 반이민적 정책들이 시행되는 경우도 많다. 반이민적 정책이란 이민자 쿼터를 축소하고, 시민권 획득을 어렵게 하는 직접적인 정책들은 물론 이민자들에 대한 권리를 축소하고, 외국인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며, 불법체류자에 대한 처벌과 추방을 강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포함한다. 이러한 반이민적 정책이 도입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로 반이민적인 여론과 반 이민 극우정당의 영향이 제시되어 왔다.
외국인 이민자를 적대하는 국민들의 여론과 이 여론을 보여주는 극우 정당의 지지율 증대는 국가가 이민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반이민적 정책으로 전환하는 가장 큰 이유로 제시된다. 특히 국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극우 정당들은 내국인 실업 문제가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우리의 복지비가 저들에게 낭비되고 있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이에 공감하면서 반이민적 정서가 확산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이민적 정서가 확산될 경우 그것을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된다. 영국에서는 60-70년대에 반 이민 정서가 심해지면서 당시 집권여당이던 보수당이 반이민적 정책들을 도입했다. 또한 미국을 이민 정책을 분석하는 연구에서도 반 이민 여론과 이에 따른 보수, 우파 정당에 대한 지지 증가가 이민 정책에 반영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호주 역시 다문화주의적 정책에서 동화주의로 정책 방향을 전환한 것이 반 이민 여론과 관계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것이 타당한 주장인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해보자.
2-1. 영국의 반 이민 여론과 반 이민 정책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노동력 부족과 인구 감소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1949년 인구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왕립 특별위원회는 출산율 감소와 노령화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140,000명에 달하는 이민을 유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예측한다. 그 결과 1940년 후반기 영국에 채용된 유럽인의 규모는 연간 8-9만 명에 달하게 된다.
1950년대 말부터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1958년 8월 노팅햄과 런던의 노팅힐에서는 식민지 출신의 이민자들과 영국인들 사이에서 대규모 충돌 사태가 발생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 정착한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은 값싼 주거 환경을 찾아 특정 지역에 정착하였다. 동시에 전후 복구에 따라 생활수준이 상승하면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백인 노동자들은 더 나은 주거환경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몇몇 지역들은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이 모여드는 만큼 생활환경이 악화되었고, 다른 지역으로 떠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백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생활환경의 악화를 식민지 출신의 이민자들에게 돌림으로써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폭동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1958년 백인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민자들 역시 폭력으로 맞서면서 대규모의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민 규제를 주장하던 정치세력이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1958년을 기점으로 영국은 식민지 이민자들을 직접적인 입법을 통해 규제해야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80%에 달하는 응답자가 더 이상의 이민을 규제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반이민적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백인 노동자들이 처음 이민자들에게 폭력을 가한 사건이라 그들에 대한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으며(실제로 여론조사에서 폭동의 원인이 백인 노동자에게 있다는 의견이 27%, 이민자들에게 있다는 의견이 9%였다.) 반이민적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59년 1월 내무부에서는 영국이 기존의 전통적인 이민정책을 변경할 의사가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본격적인 정책 변화는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영국 국내 경기가 침체됨에 따라 영국인들과 이민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고, 이민자들이 영국인의 복지에 위협이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62년 영연방 이민법이 입안된다. 62년의 영연방 이민법은 영국에서 태어났거나 영국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소지한 대영 제국 시민, 그리고 앞의 두 기준에 해당하는 이들이 부양하는 가족들을 제외한 이들을 이민 통제의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리고 통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경우 영국 정부로 고용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영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62년의 이민법은 또한 이민자들의 국외 추방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이민 통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17세 이상으로 금고형 이상의 범죄로 기소되면 국외로 추방될 수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이들은 국외 추방의 대상에서 면제된다. 그러나 사실상 이민 통제에서 면제되는 대상들은 기존에 영국에 정착해 있던 문화와 인종이 유사한 타국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었기 때문에, 이민 통제의 대상은 편법적으로 입국한 유색 인종 이민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노동당은 이 이민법에 반대하다가 반대를 철회하는데, 그 이유는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이던 백인 노동자들의 반감을 의식한 것이었다. 1961년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76%가 이민 규제 정책에 찬성했으며, 단지 12%만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이민정책에 대한 노동당의 입장 전환이 더 극적으로 드러난 건 1968년 영연방 이민법을 둘러싼 논쟁에서였다. 1968년 이민법 개정의 시발점은 ‘케냐 위기’였다. 19세기 이래로 영국 패권이 영향을 미치던 아프리카에 많은 수의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1948년 영국 국적법을 통해 대영 제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63년 케냐가 독립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케냐 정부는 아프리카 토착민들과 아프리카에 정착한 이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고, 그 외 사람들에게는 2년의 시간을 주고 케냐 시민권을 신청하도록 했다. 케냐의 국적법은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케냐에 있던 아시아와 유럽 이민자들은 케냐 시민권, 영국 시민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은 영국 시민권을 선택했고, 이들이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1967년 대 초반부터 매달 천 명씩 영국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이민에 우호적이었던 노동당 정부는 이민을 통제하는 방향의 이민법 개정을 시도했다.
1968년 영연방 이민법에 따르면 이민 통제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입증해야 했다. 이때의 특별한 관계란 부모나 조부모 중 한 명이 영국에서 태어났거나 귀화, 입양된 경우를 뜻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들은 연간 1,500명으로 한정된 쿼터 안에서만 입국이 가능했다. 68년 이민법 제정에서 놀라운 사실은 노동당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19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영국 입국 이민자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이전 보수당 정부의 이민 규제를 유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1965년 노동당에서 발간한 백서는 입국심사를 강화하고 고용 증명서에 규정된 조건들을 더욱 강력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 선회는 1960년 이래로 영국에서 더 이상의 이민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일정한 합의가 성립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야당 시절에 반대하던 것과는 달리 일단 집권여당이 된 입장에서 노동당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표1> 이민에 대한 의견, 1964-70(단위: %)
1964년 |
1966년 |
1970년 | |
호의적 |
13.8 |
14.6 |
13.3 |
약간 반대 |
11.5 |
10.5 |
9.8 |
상당히 반대 |
27.8 |
27.2 |
28.3 |
매우 반대 |
46.9 |
47.7 |
48.6 |
(N) |
100.0 (1468) |
100.0 (1541) |
100.0 (1016) |
출처 : Donley Studlar. "Poicy Voting in Britain: 1964. 1966. and 1970 General Election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72. No. 4. 1978, p. 54.
1971년에도 이민법 제정이 있었다. 그러나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1970년대 초에 특별히 영국에서 반 이민 여론이 증대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국인들이 이민 정책에 있어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보수당과 노동당은 이민정책에 있어 별 차이가 없었다. 당시 보수당 의원이던 파웰과 그가 이끄는 국민전선은 극우적인 반 이민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고,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파웰의 정책을 일정 부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웰은 최초로 선거에서 이민정책을 쟁점으로 다루면서 유색 인종의 이민을 완전히 금지하는 조치와 이미 정착한 이민자들을 강제 송환할 것을 주장했다.
보수당은 1969년 총선에서 이민법의 개정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실제로 집권 후 이 공약을 실천했다. 1971년의 이민법은 ‘본국인’이라는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71년 이민법이 규정하는 본국인의 조건은 1) 영국 영토에서 태어났거나 영국으로 입양된, 혹은 정식으로 귀화한 대영 제국 시민, 2) 부모가 조부모가 1)의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 3) 적법한 절차를 거쳐 영국에서 5년 이상 거주하고 그 기간 동안 이민법을 위반하지 않은 경우, 4) 부모 중 한 명이 태어날 때부터 대영 제국의 시민인 영연바 시민, 5) 본국인과 결혼한 여성이다. 본국인의 지위를 가진 이는 영국에서 거주할 권리를 지니지만, 비본국인은 이제 고용 증명서가 아닌 취업허가증을 발급받아 영국에 입국하고, 영국에서 거주할 수 없다. 또한 내무부 장관은 이민 통제의 구체적 절차와 규칙을 정하여 의회에 상정할 권한을 지닌다.
이처럼 영국 이민법 개정의 역사는 몇 가지 계기들을 통해 반 이민 여론이 증대하고, 이 여론을 의식한 정당들이 반이민적 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1971년 이후 노동당이 다시 입장을 선회하여 이민 통제를 완화하는 방식의 개혁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역시 노동당이 유색 인종 유권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여론과 지지를 의식한 결과였다. 엄격한 이민 정책으로 보수당의 표를 끌어오기 어려운 현실에서 새로운 유권자에게 어필하자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민 규제가 완화되는 과정도 역시 여론의 영향을 받아 진행된 것이다.
2-2. 미국의 반 이민 여론과 반 이민 정책
미국의 경우 2006년에 이민법 개정이 화두였다. 그 중 2005년 12월 6일 센센브레너 하원의원에 의해 상정되어 공화당 주도로 하원을 통과한 새 이민법은 반이민적 정책을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의 명칭은 “이민법의 적용을 강화하고 국경의 경비를 증진시키며, 그 외 다른 목적들에 부합하기 위한 이민 및 국적 관계 법령의 개정안”으로, 미국 내 불법 거주 이민자, 불법으로 입국하려는 이민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미국 내 불법으로 거주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부적절한 방법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 (2) 조직범죄에 연루되어 추방되었거나 그러한 범죄에 연루되었거나 되었음을 의심할 만한 합당한 근거가 있는 외국인의 입국을 불허한다. (3) 고용적격성 심사 제도를 시행한다. 이 제도 실시 후 2년 후까지 기존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자발적으로 고용적격성 심사를 실시하도록 하고, 3년 후부터는 연방 및 지방 정부와 군에 고용된 인원들 중 이미 심사를 마친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들에 대해 의무적으로 실시한다. 이 제도 실시 후 6년 후부터는 모든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 이미 심사를 받은 인원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사실시를 의무화한다. 위반 시 2500 달러의 벌금형 등 형사처벌을 가한다. (4)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3분의 1인 320km에 걸쳐 장벽을 설치하고, 미국-캐나다 국경에도 이를 검토하며, 지역경찰이 이민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한다. (5) 불법체류자는 경범죄가 아닌 중죄로 취급해 체포할 경우 최고 1년간 실형을 선고 받아 수감된 뒤 형기를 마치면 추방되고 이후 영원히 미국 입국이 금지된다.
이러한 미국 내의 이민법 개정 시도는 미국 사회의 반 이민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2006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타임지가 실시한 이민에 관한 여론조사를 참조해보자.
<표2> 불법 거주자 및 관련 대책에 대한 미국인들의 의견
방안 |
찬성 |
반대 |
불법 거주자에 대한 인식 | ||
불법 거주자 문제가 심각하다 |
89% |
8% |
불법 거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 |
35% |
55% |
불법 거주자들에 대한 대책 | ||
불법 거주자들에 대한 대책이 강화될 경우 미국의 경제 사정이 나아질 것이다 |
51% |
38% |
외국인들에게 임시 비자를 발급하여 임시로 일을 한 후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 |
72% |
26% |
임시 비자를 발급한 후 일정 기간 동안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영주권 부여 |
72% |
25% |
불법 거주자를 고용한 사람 강제 처벌 |
71% |
26% |
국경 경비를 강화하여 불법 입국을 어떻게든 차단 |
62% |
35% |
불법 거주자들에게 운전면허증 발급 |
27% |
69% |
불법 거주자들에게 주립학교 입학 허용 |
46% |
51% |
불법 거주자들에게 건강관리나 식량카드 등의 혜택을 부여 |
21% |
75% |
불법 거주자들을 그들 나라로 추방 |
47% |
49% |
출처 : Time Poll, 2006년 3월 29일~30일.
일단 미국인의 89%가 불법이민자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으며, 절대다수가 불법이민자에 대한 운전면허 발급과 건강보조, 식량카드제도 등의 복지제도가 적합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불법거주자를 고용한 미국인을 처벌하는 조치에도 많은 이들이 찬성했다. 비록 과반수는 아니지만 불법거주자들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있다는 대답을 한 의견도 35%나 되었다. 이 35% 중 많은 수가 일자리를 잃은 저소득층일 것이고. 이들의 정치기반이 민주당이라는 점에서 민주당도 이민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데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미국 내에서 반 이민 여론이 형성된 주된 이유는 역시 경제 침체로 인해 잉여 노동력이 많아지면서 그 책임을 불법 이민자를 비롯한 이민자들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9.11 테러인데, 9.11 테러에 미국 내 불법 이민자들이 연루되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불법 이민자에 대한, 더 나아가 외국인(특히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확산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9.11 테러가 벌어지기 한 달 전만 해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멕시코의 폭스 대통령을 만나 미국 내 멕시코 불법 체류자들이 합법적으로 거주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으나, 테러가 발생한 이유 미국 내 불법 체류자와 이민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미국 국경의 수비 강화와 학생 비자의 대폭적인 제한, 외국인 추적 기능 강화 등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었고 부시 정부는 불법 이민자 사면 입법을 6년 후에나 실시하겠다고 정책을 변화시켰다.
2-3. 호주의 반 이민 여론과 반 이민 정책
호주는 190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이른바 ‘백호주의’로 불리는 강력한 차별, 배제, 동화주의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러다가 1973년 노동당 휘틀램 총리의 취임 이후 다문화주의적 모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이 다문화주의 모형이 동화주의적 이민정책으로 변하는 시기는 1996년 하워드 정부의 출범 이후이다.
하워드 정부는 다문화부를 폐지하고 이민 프로그램을 대폭 축소하는데, 이는 2000년대에 들어서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국민들이 반 이민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다. 2001년의 탐파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1년 호주령 크리스마스섬 인근에 표류하던 433명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노르웨이 화물선 탐파 호가 구조한 뒤 유엔 난민협약에 따라 크리스마스섬으로 향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탐파선의 호주 영해 접근을 금지하고, 결국 난민들은 파푸아 뉴기니와 나우루 등에 분산 수용되었다. 하워드 총리는 이들을 국경 침입자로 간주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국경보호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호주 정부가 입법부, 사법부의 결정을 초월하여 난민 문제에 관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 실시 직후 30%의 지지율을 유지하던 하워드 총리의 지지도가 70%까지 치솟았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자 호주인들은 더욱 더 하워드 총리의 반이민적 정책을 지지했다. 선거 막바지에 지지율이 하락하자 하워드 총리는 호주로 유입된 난민 중 오사마 빈 라덴의 부하가 있다며 더욱 더 이민을 통제해야한다고 주장했고 호주인들이 이를 지지하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또한 2005년에 크로눌라 해변에서 벌어진 레바논계 청년들의 인명구조대원 폭행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앵글로 캘틱계 청년들과 중동계 이민자 간의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하워드 총리는 이를 계기로 더욱 더 동화주의적 이민정책을 추진했다. 2007년 개각에서는 이민.다문화국을 이민.시민권국으로 변경하여 다문화라는 명칭을 없애버렸으며, 시민권 취득 절차를 강화하고 시민권 취득 대기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렸다. 이러한 하워드 정부의 이민제도 개정은 몇 가지 사태를 통해 반 이민 여론을 형성한 호주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3. 반 이민 여론의 '변수로써의 한계'
앞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반 이민 여론은 분명 국가가 반이민적 정책을 택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한계점들이 있을까?
3-1. agenda setting에서 정책 결정자의 자율성
민주주의 국가라 해도 정부 정책결정자들은 여론을 반영하지 않을 힘이 있다. 어떤 의제를 쟁점화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능력 자체가 정부 정책결정자들과 정당에 있기 때문이다. 반 이민 여론이 심화된다 해도 이것이 반드시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정부나 정당은 선택적으로 이 여론을 반영한다. 앞에서 소개하기도 했던 영국의 사례를 보자. 1958년 영국에서 벌어진 폭동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반 이민 여론을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집권여당이던 보수당은 이민 관련 이슈를 부각시키지 않았다. 당시 보수당의 승리가 확실시 되던 입장에서 이민 문제라는 새로운 변수를 끌어들이는 위험한 짓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캐나다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9.11 직후 반 이민 여론이 캐나다에서도 급증했지만, 대부분의 캐나다 정치인들은 이를 정치적 이슈로 부각시키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이민이라는 의제를 굳이 쟁점화 하는 것 역시 정책 결정자의 자율성이다. 앞에서 살펴본 호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워드 총리는 선거에서 자신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이민 의제를 자신의 지지율을 상승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이처럼 정책 결정자들은 여론에 종속되지 않으며, 여론으로부터 자율성을 지닌다.
3-2. 고객정치 모델
반 이민 여론이 반이민적 정책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고객정치 모델을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가장 강력하게 제기될 것이다. 게리 프리만이 제기한 고객정치 모델은 애초에 '왜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은 이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민정책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주목했다. 이들은 이민 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개인 유권자의 역할을 배제하고 정치 엘리트와 잘 조직화된 이익집단에 주목한다. 이민정책의 경우 정책의 이익은 집중되지만 비용은 분산되기 때문에 조직화된 이익집단이 정치 엘리트에 로비를 하여 이민정책은 결국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반 이민 여론이 증대함에도 이것이 반이민적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는 효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앞에서 소개한 2006년의 미국 새 이민법이다. 앞에서 소개한 하원의 새 이민법은 불법 이민자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지만, 상원 법사위를 통과한 상원의 새 이민법은 하원의 이민법보다 훨씬 완화된 내용이다. 불법 이민자들을 처벌하기보다 공개 등록하여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게 해주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 이유는 이 이민법으로 인해 이익을 보지 못하는 이들의 반대 때문이다. 불법 거주자들,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조직은 통제를 강화하는 새 이민법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집회, 시위를 벌이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라틴계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당선되지 못하는 지역구의 경우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리지 않고 좀 더 완화된 이민법을 내놓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3-3. ‘여론’은 매개변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또 다른 한계는 반 이민 여론이라는 변수는 반이민적 정책의 직접적인 독립변수라기보다 다른 독립변수와 반이민적 정책이라는 종속변수를 매개하는 매개변수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컨대 반 이민 여론은 경제상황이 좋을 때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국가의 경제 상황이야말로 반이민적 정책을 결정하는 변수가 아닐까? 그리고 9.11 테러와 같은 사건 직후 반 이민 여론이 급증한다는 점에서 보면, 반 이민 여론보다는 안보 관련 사건이 터지느냐 마느냐가 반이민적 정책의 변수가 아닐까?
4. 결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민 수용국 대부분이 자유민주주의국가라는 점에서 여론은 이민 정책의 변화에 영향력을 주는 변수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우선 과연 여론이 정책에 영향을 별로 미치지 못한다는 가설에 기반 하는 두 가지 반박(정책 결정자의 자율성, 고객정치 모델)이 있으며, 여론이 아니라 진짜 다른 변수가 있다는 반박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반이민적 여론이 반이민적 정책에 어느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에 대해 연구하려면, 과연 여론이 정책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주는 지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경제 위기와 안보 사건이라는 변수와 여론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민정,「한국과 호주의 이민정책 변화요인 분석」,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1.
신유섭,「미국의 새 이민법」,『亞太 쟁점과 연구』, 2006년 봄호.
장승진,「이민 통제와 국가 시민권의 형성 : 1962-1981의 영국 이민 정책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석사학위논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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