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근무요원으로 구청 주민생활지원과에 복무한 적이 있다. 주민생활지원과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신청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부서이다. 공익들은 공무원들과 함께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한 사람들을 방문한다.
현장방문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불쌍한 지 하소연한다. 하지만 부양 가능한 가족이 있으면 수급대상이 될 수 없다. 가족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못 받는 처지라 설명해도 소용없다. 이럴 때마다 공무원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안타깝다, 미안하다” 아니면 “법이 그런데 왜 나한테 따지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는 올해 초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을 통해 기초생활수급제도의 문제점을 짚어내는 책이다. 빈곤문제 전문가인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과 세모녀 사건을 취재했던 정환봉 한겨레 기자가 썼다.
세 모녀 사건은 지난 2월 26일 생활고를 비관한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자살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70만 원이 담긴 흰색봉투에는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왜 마지막까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을까.
김윤영 사무국장은 한국의 복지가 ‘수치심을 대가로 움직인다’고 지적한다. 한국에서 복지 수급권은 신청을 해야만 생긴다. 신청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권리다. 사실 권리라고도 볼 수 없다. 복지제도의 절차와 요건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수급권자들은 쉽게 ‘포기’하고 만다. ‘집 있고 자식 있으면 못 받는 급여’이다 보니 기초생활수급자는 ‘집도 없고 부양할 자식도 없어 나라한테 도움 받는’ 사람이 된다. 세 모녀가 죽음 앞에서도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이런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난이 ‘죄송’한 사회.
수급자의 수는 많은데 일선 공무원이 너무 적은 것도 복지를 권리가 아닌 수혜로 만든다. 공익 근무할 때 옆에서 지켜 본 사회복지 공무원들은 늘 업무에 시달렸다. 수급 신청자들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는 공무원은 하루에 1-2건 밖에 처리하지 못하고, ‘착하지만 능력 없는’ 사람이 된다. 반면 이들의 하소연을 무시하고 하루에 15건씩 처리하는 공무원은 ‘능력자’다. 수급 신청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하소연해야 한다. 그래야 공무원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기울이고 신경을 써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를 권리로 인식할 수 있을까
세 모녀의 죽음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있는 복지 제도도 활용하지 못하면 사실상 없는 제도나 마찬가지”라며 홍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김윤영 국장은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더라도 탈락했을 것”이라 말한다. 세 모녀의 어머니는 최근까지 식당에서 일해 번 소득 150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팔을 다쳐서 일을 못한다 해도 일시적인 것이므로 공무원은 150만 원을 ‘소득인정액’으로 책정한다. 이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보다 높으면 수급을 받을 수가 없다.
김 국장은 지난달 소득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세 모녀가 수급대상자가 되긴 어렵다고 말한다. 세 모녀는 근로능력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팔을 다쳤지만 만성질환이 아니기에 ‘근로능력 없음’ 판정을 받지 않는다. 큰 딸은 고혈압과 당뇨가 있었지만 병원에 지속적으로 다닌 진료 기록이 없으므로 ‘근로능력 없음’ 대상이 아니다. 작은 딸도 몸이 건강하므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아무런 소득이 없다 해도 ‘추정소득’을 부과할 수 있고, 이 경우 수급권은 제한된다.
김 국장은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볼 때 만약 세 모녀가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했더라면 더 절망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 말대로 있는 제도가 홍보가 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로능력’ ‘부양의무자’ 등 까다로운 기준으로 복지를 권리가 아닌 수혜로 만들어놓은 현재의 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지만 여전히 가난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고, 비현실적인 기초생활수급제도는 복지를 권리가 아니라 수혜로 만들고 있다. 가난을 방치하는 이 순환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세 모녀의 비극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