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의 삼성 사용설명서, 결국 답은 ‘정치’에 있다
대한민국 1등 기업 삼성. 삼성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어떤 이들은 삼성을 일류기업이라 칭송하면서 삼성을 욕망한다. “삼성이 망하면 한국도 망한다”며,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을 탐구한다. 또 다른 이들에게 삼성은 노조 탄압과 국내 고객 ‘호갱’ 만들기로 대표되는 나쁜 기업이다.
7인의 경제학자들이 쓰는 본격 삼성 사용설명서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삼성에 대한 칭송과 비난 속에서 잊혀진, 삼성에 관한 “조금 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삼성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가 쓴 이 책은 본격 ‘삼성 사용설명서’다. 저자는 장하준, 김상조, 이병천, 김성구, 김상봉, 장하성, 김정호 등 경제학자 7인의 주장을 망라하며 이들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삼성과 재벌을 바라본다.
‘삼성 사용설명서’지만 논의는 삼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하준은 삼성의 경영 승계를 인정해주고 삼성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자고 주장한다. 이른바 ‘대타협론’이다. 이러한 ‘대타협론’의 근간에는 재벌보다 주주자본주의가 한국경제에 더 위험하고, 국적자본이 주주 자본주의에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김상조는 장하준의 반대편에 서 있다. 주주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김상조의 오른편에는 ‘골수 자본주주의 신봉자’ 장하성이 있다. 더 오른쪽에는 재벌을 괴롭히지 말라는 김정호 등 자칭타칭 ‘신자유주의자’들이 있다.
장하준-김상조의 대립, 즉 ‘재벌이냐’, ‘주주자본주의냐’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경제학자들도 있다. 이병천은 장하준 교수의 주주 자본주의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재벌이 주주자본주의나 초국적 자본과 대립관계라는 견해에 반대한다. 이미 재벌이 신자유주의와 결탁해 있다는 것이다. 이병천은 대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상봉은 논의의 프레임을 넘어 ‘주식회사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해 주주에게는 배당금 등을 주고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주자고 말한다. 주주자본주의와는 상극에 있는 주장이다.
김성구 역시 이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한다. 자유방임의 신자유주의는 가능하지 않으며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독점자본은 항상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대타협은 불가능하고, 재벌을 통제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핵심은 재벌해체가 아니라 ‘재벌경제의 사회화’다.
저자는 7명의 경제학자를 이념에 따라 김성구-김상봉-장하준-이병천-김상조-장하성-김정호 순으로 나열한다. 주제에 따라 전선은 복잡해진다. 주주자본주의를 두고는 장하준-이병천이 비슷한 입장이며, 반대편에 김상조-장하성-김정호가 있다. 재벌 개혁이 주제라면? 장하준-김정호가 한 편이고 반대편에는 김상조-장하성-이병천이 합류한다. 국가의 개입을 두고는 김성구-장하준이 김상조-장하성-김정호와 대립한다. 저자는 이러한 복잡한 전선들을 넘나들며 각 전선이 지닌 강점과 약점을 분석한다.
이재용은 삼성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단지 7인의 경제학자들의 관점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건희와 이재용의 삼성 사용설명서에서 이 책은 보다 구체성을 띠며 우리 현실로 다가온다. 저자는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절대군주’ 이건희가 삼성을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지, 나아가 이재용은 삼성을 물려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분석한다.
설령 왕위를 물려받을 게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왕이 죽기 전까지는 왕이 아니다. 왕세자는 언제라도 축출될 수 있다. 그게 왕조의 운영 원리고, 왕의 권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맹희 씨는 왕의 눈 밖에 났고 평생을 세상의 바깥으로 떠돌았다. 이재용 부회장이 아버지 살아생전에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모든 권력은 왕에게 집중돼 있고 왕이 죽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권력 승계가 시작된다.
이 책의 백미는 이재용이 이건희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과 시나리오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삼성 일가는 십여 년간 이재용의 후계구도를 목표로 설정한 채 움직였다. 복잡한 지분구조 변화와 순환출자 등 비상식적인 일들은 이러한 목표 때문에 발생했다. 저자는 부록에서 이재용 후계 구도 시나리오의 8가지 변수에 대해 설명한다.
이 지점에서 경제학자들이 다시 소환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제학자의 해법이 삼성을 ‘통제’할 수 있을까? 저자는 장하준식 ‘대타협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한다. “이건희가 뭐가 아쉬워서 협상 테이블에 나오겠느나”는 것이다. 삼성은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하청 업체들을 쥐어짜면서 주가를 끌어올렸고 주주들은 이건희의 경영에 크게 불만이 없다. 삼성은 주주자본주의로부터 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이건희 일가는 그간 대타협보다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을 포섭하는 식으로 버텨왔고,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은 채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삼성을 압박해서 끌어낼 수단이 없다면 대타협론은 탁상공론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 왕국의 왕위는 결국, 국가권력에 의해 승계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김상조의 주주자본주의일까? 저자는 “소액주주 운동 정도로 이건희 이재용 부자를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한다.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평가도 비판적이다. “참여연대가 주도했던 소액주주 운동에서 소액주주들은 주체로 나서지 못하고 배당을 늘리라는 등의 요구로 주식시장의 큰손들, 기관 투자자들과 외국계 펀드들이 훨씬 더 큰 혜택을 봤다”는 것. 저자는 “경제민주화라고 포장은 했지만 1원 1표의 시장원리와 주주자본주의를 한국경제에 뿌리내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돈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권리를 갖는 걸 경제민주화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고 지적한다.
저자의 결론은 장하준도 김상조도 아닌, “자본 권력이 국가권력과 결탁했거나 오히려 국가권력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재벌과 타협을 하든 약점을 공격하든 재벌이 국민경제에 복무하도록 하려면 재벌과 국가권력의 결탁을 차단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삼성과의 싸움은 삼성이 이미 장악한 국가 권력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에, 저자는 “국가권력과 결탁한 자본권력, 또는 자본권력에 지배당한 국가권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결론은 식상하지만 가장 원론적인 접근”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저자는 순환출자를 규제하고 금융산업 분리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산산조각이 날 수 있고, 이 경우 이재용이 이건희 왕국을 그대로 물려받기는 불가능하리라 전망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결국 이건희가 바라는 대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유는 삼성과 결탁한, 혹은 삼성이 이미 장악한 국가권력 때문이다. 정치권은 금산분리 완화는 물론 순환출자를 추가 허용하거나 상속제를 파격적으로 완화하는 특혜를 쏟아낼 수도 있다. 삼성은 법이 문제라면 법을 바꿀 것이고, 국회의원 300명을 매수해서라도 이재용 후계구도를 완성하고야 말 것이다.
원칙을 지킬 것인가 다시 권력을 인정할 것인가
책 117페이지에 다소 뜬금없지만 중요한 챕터가 등장한다. 한국 언론의 취재원을 분석한 결과 진보 성향 신문들과 보수 성향의 신문들이 주로 코멘트를 받고 인용하는 취재원이 눈에 띄게 달랐다는 내용이다. 한겨레와 경향에는 김상조와 전성인이 자주 등장하고 조중동과 경제지들에는 김정호와 윤창현, 자유기업원 등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 대한 맹신은 놀라울 정도”다. 1년 가까운 기간 18개 신문이 삼성경제연구소를 인용해 쓴 기사는 모두 3,197건이나 됐다. 삼성은 국가권력은 물론 언론권력까지 장악한 걸까?
저자의 결론은 이미 서문에 담겨있다.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금융산업 분리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고 부당 내부거래를 철저히 규제하면 이재용 부회장이 이건희 왕국을 그대로 물려받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부터라도 과도한 비과세‧감면을 정리하고 부당 노동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면 삼성전자의 이익도 매우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의 의지 문제고 한국 사회의 컨센서스의 문제다”. 이재용 시대의 삼성을 맞이할 우리는 어떻게 정부의 의지를 끌어내고 컨센서스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백가쟁명의 논쟁을 뛰어넘는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