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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웨이민치다!

조본좌 2013. 1. 18. 23:05

 


책상서랍 속의 동화 (1999)

Not One Less 
9.7
감독
장예모
출연
웨이 민치, 장혜과, 전정달, 고은만, 손지매
정보
드라마 | 중국 | 100 분 | 1999-10-30

 

어떤 사회가 발전된 사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교육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정치발전도 경제발전도 사회발전도 문화 육성도 결국 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이란 바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처럼 개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교육은 어느 정도 공공성을 띠며, 국가는 교육과 인재 육성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라는 이상을 지닌 사회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도 사회주의를 표방한 만큼 국가가 교육에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교육제도와 교육환경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사회주의’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교육 불평등이 심각하다. 도시에는 등록금이 1만 달러가 넘는 사립학교와 귀족학교들이 즐비한 데 반해, 농촌의 교육현실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영화 <책상 서랍 속의 동화>는 중국 농촌의 이러한 교육현실을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슈쿠안 초등학교의 교육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분필도 하루에 한 개만 사용하고, 돈이 없어 망가진 교탁을 계속 사용해야 할 정도이다. 또한 중국 농촌의 학교에서는 교사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이 대리교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 영화 속의 웨이민치 역시 원래 교사였던 가오 선생님의 대리로 한 달 간 수업을 진행한다. 그는 겨우 13살에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가르칠 노래의 가사와 율동도 잘 알지 못한다.


다행히 슈쿠안 초등학교는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웨이민치가 장휘거를 찾으러 도시로 갔다가 방송에 출연하고, 슈쿠안 초등학교의 열악한 환경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지원 물품과 지원금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국 인민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중국의 모든 농촌학교들이 방송을 타고 알려질 리도 없고, 슈쿠안 초등학교에 온 지원 물품과 지원금 역시 일시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중국 농촌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의 교육제도의 개혁과 교육환경의 개선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교육제도와 교육환경은 어떻게 바뀌어야할까? 영화 <책상 서랍 속의 동화>는 웨이민치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웨이민치는 무자격 대리교사에 불과하다. 그가 대리교사를 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는 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이해하건 말건 글자를 칠판에 잔뜩 적어두고 밖에 나가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이렇게 대충 수업하는 웨이민치에게도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오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기 전, 웨이민치에게 “원래 40명이던 학교의 학생이 벌써 28명으로 줄었다”면서 “더 이상 학생이 줄면 안 된다.”며 웨이민치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가오 선생님은 웨이민치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학생이 그대로 있으면 돈을 더 주겠다는 말도 한다. 웨이민치는 이 원칙만은 정말 답답할 정도로(?) 고수한다. 도시의 체육학교에서 스카웃 한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고 숨겨놓는다. 장휘거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자 장휘거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웨이민치도 도시로 떠난다.


처음에 웨이민치를 움직이던 동력은 ‘돈 몇 푼’이었으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새 웨이민치는 자신의 동력을 넘어선다. 웨이민치는 장휘거를 다시 데려오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들을 잔뜩 데려가 벽돌공장에서 일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학습’이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장휘거를 다시 데려오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가 돈을 얼마나 더 벌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계산을 하며 공부를 한다. 마을촌장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고, “대리교사가 제법이군. 수학도 가르치네.”라고 말한다. 웨이민치는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이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웨이민치가 이 원칙을 답답할 정도로 고수하는 과정에서 그는 ‘돈 몇 푼’이라는 자신의 동력을 넘어서서 진정한 ‘선생님’으로 거듭난다. 웨이민치가 고작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그 생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벽돌공장에서 번 돈이 모자라 걸어서 도시까지 갔다가, 벽보를 부치고 방송을 하고 방송국장을 만나려고 며칠을 방송국 앞에서 기다린다. 가져간 돈도 다 써버린다. 웨이민치는 방송에 출연해 울면서 ‘장휘거 어디 있니’라고 말한다. 이미 ‘돈 몇 푼’이라는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장휘거를 찾아 데려가는 것 그 자체,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안 된다’는 원칙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웨이민치는 대리교사에서 선생님으로 변모한다. 자신을 애타게 찾는 방송을 보던 장휘거는 웨이민치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말썽꾸러기 장휘거가 웨이민치를,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선생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칠판에 분필로 한 글자씩 써보라는 웨이민치의 말에 장휘거는 칠판에 ‘웨이민치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전까지 웨이민치는 늘 ‘대리교사’로 불렸다. 도시에 가서 장휘거를 찾을 때 늘 자신을 대리교사라고 소개했다. 그러던 웨이민치가 마침내 자신이 애타게 찾던 ‘학생’ 장휘거에 의해 ‘선생님’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중국의 교육개혁은 웨이민치를 롤모델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웨이민치는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 사람이라도 없어선 안 된다’는 원칙에만 집중했다. 보통의 교육개혁은 ‘무엇을 가르치느냐’에 집중되기 쉽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영수사를 중심으로 가르치느냐 ,필수과목에 미적분을 넣느냐 마느냐 등등이 교육개혁의 중심이다. 대학입시에 수능이 중요한 가 내신이 중요한 가 입학사정관제가 중요한 가 등등이 교육개혁의 중심이다.


중국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인민들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마오 사상을 학습했다. 개혁개방시기 중국 인민들은 기초과학이나 외국어, 음악, 미술, 지리 등의 실용학문을 학습했다. 하지만 웨이민치는 그런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 교육의 대상에는 ‘한 사람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데올로기를 가르치느냐 실용학문을 가르치느냐가 아니라 불평등이다. 대도시의 사립학교와 귀족학교의 학생들은 높은 등록금을 부담하고, 국가의 엄청난 지원을 받으며 엘리트로 자라난다. 반면 농촌의 학생들과 사회적 약자, 사회 취약계층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도시에서 농촌으로 건너 온 농민공은 심각한 교육 박탈의 상황에 처해 있다. 100만 명이 넘는 농민공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는 수많은 ‘장휘거’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장휘거’들을 다시 데려올 웨이민치는 존재할까? 이는 웨이민치와 같은 교사 개인의 헌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웨이민치 역시 지원금과 지원 물품을 가지고 장휘거와 함께 돌아왔다. 중국의 교육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중국 정부이며, 중국 사회 전체이다. 중국이 곧 웨이민치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