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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의 ABC도 모르나” 새누리당의 언론학 강의

조본좌 2015. 2. 15. 10:06

“취재의 ABC도 모르나” 새누리당의 언론학 강의

[기자수첩] 사석에서 나눈 사담은 모두 오프더레코드? 이완구 청문회, 기자 앞날 걱정해주는 오지랖이라니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는 사실상 ‘언론’ 청문회였습니다. 이완구 후보자가 기자들과 김치찌개를 먹으며 나눈 대화가 담긴 녹음파일 때문입니다. 일찍이 공개된 ‘언론 외압’ 발언도 모자라 언론인들을 대학 총장과 교수를 만들어줬다거나 김영란법을 통과시켜버릴테니 기자들도 당해보라는 겁박 수준의 발언이 공개돼 충격을 줬습니다.

이완구 후보자의 청문회가 ‘언론’ 청문회가 된 이유는 비단 이 후보자의 녹취록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사청문 특별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은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취재윤리’ ‘취재의 ABC’를 운운하며 이완구 후보자의 부적절한 언론관에 대한 물타기를 시도했습니다. 새누리당 판 ‘언론학 강의’였습니다.

관련 기사 : <이완구 청문회, ‘언론외압’ 안 묻고 "취재윤리 위반" 물타기>

청문회 현장에 있던 기자들, 정론관에서 청문회 생중계를 보던 기자들도 하나같이 이 ‘언론학 강의’를 흥미롭게 지켜봤을 겁니다. 여당 의원들의 언론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자들이 ‘빵 터진’ 대목이 딱 두 곳 있습니다.

첫 번째 대목은 한국일보 기자의 앞날까지 걱정해주는 새누리당 김도읍 의원의 발언입니다. 야당이 국회 정론관에서 2차 녹음파일을 추가로 공개하고 난 뒤 속개한 청문회에서 김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해당 언론사(한국일보)의 젊은 기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녹음파일이 실수로 야당 의원에게 넘어갔고 KBS에 넘어가서 방영까지 됐습니다. 취재원 보호는 언론의 생명입니다. 목숨과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실수로 취재원 보호를 다하지 못한 일을 야당이 정치공세를 위해서, 이 기자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야당 의원들의 행태에 대해 국회의원이 아닌 인간적으로 자괴감을 느낍니다. 그 기자는 우리 국민이 아닙니까”

기자 앞날까지 생각해주는 김도읍 의원의 배려심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자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습니다. 이유는 김 의원이 ‘취재원 보호’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원 보호란 일반적으로 취재원이 제보한 내용이 보도돼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권력의 탄압을 받게 됐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볼까요. 이완구 후보자 측 내부 관계자가 기자에게 이 후보자의 문제적 발언을 알려주고, 기자가 그 관계자의 발언을 녹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녹취록이 공개돼 내부 관계자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칩시다. 이 때 기자는 취재원을 보호하지 못한 겁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경우가 다릅니다. 이 후보자는 매우 중요한 공직 출마자이고, 이 후보자는 기자가 보호해야할 취재원이 아니라 비판하고 검증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한국일보 기자의 의도가 어떻든 그의 녹음파일은 총리 후보자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취재원 보호라는 말은 적절치 않습니다. 

물론 한국일보 기자가 녹음파일을 야당 의원실로 넘기고, 이것이 KBS에 의해 보도된 것은 비판받을 지점이 있습니다. 야당에 파일을 넘기지 않고도 ‘고발’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일보가 직접 보도하거나, 내부 사정상 직접 보도할 수 없었다면 다른 언론사 기자와 의논하고 다른 언론사에 직접 자료를 제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과 ‘취재원 보호’는 전혀 다른 맥락입니다.

기자들의 웃음을 자아낸 두 번째 대목은 이장우 새누리당 의원의 ‘언론학 강의’입니다. 이 의원은 10일 오전부터 “언론도 취재 윤리가 있다. 비밀리에 녹취하고 음원을 야당 의원실 넘기고, 공영방송이 메인뉴스 시간에 보도한 것은 취재윤리 위반” “중립 의무를 명백히 훼손한 정치개입”이라며 언론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 의원의 ‘언론학 강의’는 오후 들어서 절정에 이릅니다.

“언론사가 책임을 다할 때 알 권리도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일부 기자들과 사석에서 나눈 사담은 ‘오프더레코드(off the record)’라는 것이 취재의 ABC입니다. 어떤 취재원이 취재에 응하겠습니까”


기자들의 실소를 자아낸 발언입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사석에서 나눈 대화는 오프더레코드라는 것이 취재의 ABC’라는 말은 듣도 보도 못한 말입니다. 이장우 의원의 발언으로 많은 기자들이 이 날 ‘취재의 ABC’도 모르는 기자로 전락해버렸네요.

일단 이완구 후보자와 기자들이 만난 자리가 사석이라는 것 자체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곧 총리가 될지도 모르는, 전직 여당 원내대표와 정치부 기자들이 만난 자리가 어떻게 사석입니까? 총리 후보자랑 기자들이 만나는 게 동네 친구들이 집 근처에서 술 한 잔 하는 거랑 같습니까? 만약 사석이라면, 왜 기자들은 하나같이 사석에서 나운 사담을 데스크에 보고하고, 데스크가 이를 보도할지 말지 논의합니까? 

정치인이나 공직 후보자가 사석에서 한 말은 곧 ‘오프더레코드’이며 따라서 녹음도, 보도도 할 수 없다는 말은 기자들은 대변인의 공식브리핑이나 받아쓰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언론의 기능과 취재 역할을 무시한 매우 심각한 언론관입니다. 기자들이 사석에서 들은 이야기가 특종 보도로 이어진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설사 백 번 양보해 그 자리가 사석이었고 이완구 후보자가 미리 ‘오프더레코드’를 요청했다고 해도, 그걸 깰지 말지는 기자들이 결정합니다. 이완구 후보자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이 후보자의 ‘오프더레코드’를 지켜줄 것이고, 관계가 깨지더라도 보도로 인한 공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오프더레코드를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결정은 기자가 합니다.

많은 언론이 이완구 후보자의 언론관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은 이 후보자의 문제적 언론관뿐이 아니라, 여당 의원들의 뒤틀린 언론관입니다. ‘취재의 ABC’도 모르는 건 기자들이 아니라 여당 의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