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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지사님, 밥 먹으러 학교 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조본좌 2015. 3. 15. 10:15

홍준표 지사님, 밥 먹으러 학교 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기자수첩] 밥 먹는 것도 교육의 일부… 이건희 손자에게 공짜 밥 주면 안 됩니까

경상남도에서 무상급식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경남도는 무상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이로 인해 21만 9천명이 급식비를 내야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결정입니다. 홍 지사는 11일 페이스북에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어디에 쓰는지는 그 사람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홍 지사는 무상급식 없애고 그 돈을 ‘서민자녀 교육복지 사업’에 쓰겠다고 합니다. 월 소득 250만원 이하 가정 자녀들이 EBS 교재, 보충학습 수강권, 온라인 수강권 등 학습 교재를 살 수 있게 도와주는 내용입니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는 홍 지사의 문제의식과 일치하는 행정으로 보입니다.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중학교 때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같은 반 친구 한 녀석이 한 달이 넘게 무단결근을 했습니다. 학교 공부도 흥미가 없고,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가정 내 불화도 있어 학교에 가라고 챙겨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설득이 먹히지 않자 ‘너희들이 말해보라’며 우리들을 그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생각보다 완강한 친구를 보자 뭐라고 설득해야할지 앞이 깜깜했는데, 같이 간 친구가 “빨리 와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했습니다. 결근했던 친구는 그 뒤로도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학교에 다시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왜 다시 왔냐고 묻자 ‘밥 먹으러 왔다’고 답했다는 군요.

홍 지사의 말을 한 교사에게 들려주니 그는 “밥 먹으러 학교 오는 애들 많다. 부모님이 맞벌이라 아침도 못 챙겨먹고 다니는 애들 많아”라고 합니다. 방학 때 학교 나와서 공부하는 친구들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 친구들 중 몇몇은 공부가 목적이었으나 또 몇몇 아이들은 목적이 ‘밥’이었습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때 되면 친구들이랑 같이 밥은 먹을 수 있으니까요.

군인들에게 “너 밥 먹으러 왔냐. 훈련 받으러 왔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군대에서 밥 먹는 것이 훈련의 일부인 것처럼, 밥 먹는 것도 교육의 일부입니다. 물론 군대와 학교는 다르지만 둘 다 똑같이 국가의 ‘의무’입니다.

점심시간 종이 치면 학생들은 미친 듯이 식당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 엉켜서 넘어지기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합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밥을 먹으며 서로의 삶을 공유합니다. 밥을 빨리 먹고 남은 점심시간에 운동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합니다.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학교는 수많은 개인들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교육시키고, 함께 생활하는 법을 가르치는 공동체입니다.  

홍 지사의 교육관은 논란을 일으킨 경남도의 ‘신분 상승’ 발언과 일맥상통합니다. 경남도는 지난 9일 서민자녀 교육지원 사업계획을 발표하며 “이 사업이 서민 자녀들이 꿈을 실현하고 신분 상승을 이뤄내는 희망의 사다리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신분상승’이라는 단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결국 교육이란 서민 자녀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신분상승’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고, 학교는 이를 위해 예산 배정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건희 손자한테도 공짜 밥 주는 정책’이라는 수사를 즐겨 씁니다. 맞습니다. 이건희 손자건 서민 가정 손자건, 내 돈이 아니라 공동체의 세금으로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무상급식의 취지입니다.

몇 해 전 화제가 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차별을 당연시하고, 오히려 이를 긍정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평등하다’가 아니라 ‘아니꼬우면 성공해라’는 식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 아닐까요. 네가 죽자 사자 공부해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네가 남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 억울하지 않아?

무상급식은 이러한 교육관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어떤 집에서 태어났던 같은 급식을 먹는 순간만큼은 평등합니다. 집안이 부유하건 가난하던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줄에 서야하며 급식비를 각자 가정의 돈이 아니라 공동체의 세금으로 부담하기 때문입니다. 땅콩리턴 사건을 비롯해 각종 갑질이 횡행하는 시대, 나는 남들과 다르고 차별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시대에 무상급식은 좋은 교육 프로그램 아닌가요?

홍준표 지사는 페이스북에 “가진 자의 것을 거둬 없는 사람들 도와주자는 게 진보좌파 정책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홍 지사는 로빈후드나 홍길동을 ‘진보좌파’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진보좌파’들은 로빈후드나 홍길동이 아니라 이건희 손자와 서민 자녀 손자가 평등하게 대접받는 사회를 원합니다. 그것이 ‘진보좌파’들이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