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아메리카에게 배우는 진보의 원칙
얼마 전에 정의당 청년본부에서 <마블 히어로즈에서 발견한 더 나은 세상>이란 주제의 강연을 했다. 그 때 강연 피피티에서 ‘캡틴 샌더스’라는 그림을 공유했다. 2016년 미국 대선경선 때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를 지지한 LA의 한 쌍둥이 화가가 그린 그림인데, 캡틴아메리카 복장을 한 샌더스가 나치 복장을 한 트럼프를 때려눕히는 내용이다. 아이오와주립대학교 유세 때 샌더스의 팬들이 캡틴아메리카 복장을 하고 유세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얼핏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성조기를 두르고, 히어로 이름에 ‘아메리카’까지 버젓이 포함된 애국의 상징 캡틴아메리카와 ‘사회주의’까지 이야기하는 좌파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캡틴 샌더스라는 별칭은 매우 어울린다. 캡틴과 샌더스의 언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미국적 이상주의에 기반해, 즉 대중의 보편적 감성에 근거해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캡틴아메리카는 미국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사상, 가치, 이념을 수호한다. 그가 수호하는 것은 미국의 이상주의, 즉 자유다. 캡틴이 생각하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애초에 시민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탄생한 나라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려 든다면, 캡틴은 성조기를 두른 채 미국 국가 전체와도 맞서 싸우고, 범죄자가 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윈터솔져>에서 캡틴은 자신이 속한 국가기관 ‘쉴드’가 추진 중인 ‘인사이트 프로젝트’에 반대했다. 헬리케리어를 띄워 세계 전역을 감시하고 위협이 되는 인물을 미리 제거하는 계획. 캡틴은 이 계획이 빌런 집단 ‘하이드라’가 장악한 쉴드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캡틴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하이드라와 싸웠다. 하이드라의 신조는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에겐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그래서 하이드라는 나치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 했지만 캡틴의 활약으로 저지당하고 만다.
그래서 하이드라는 계획을 바꾸었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으려 하면, 격렬히 저항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다. 바로 ‘국가안보’라는 명목이 주어지면 인간들이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게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맞선다는 이유로 시민을 감시하는 ‘인사이트 프로젝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캡틴이 묻는다. “미래의 위협을 제거한다고? 미래에 대해 어떻게 알지?” 하이드라의 스파이가 답한다. “21세기는 디지털 시대야.” 이메일, 통화기록, 시험 점수, 투표 성향, 은행계좌 등등. 이 모든 것을 읽어내 하이드라는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사람을 선별하고, 미리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계획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국가기관인 ‘쉴드’가 수립했다.
캡틴은 쉴드 요원들과 함께 이 음모를 막아낸다. 놀라운 점은 캡틴이 이 사건을 ‘나쁜 하이드라 놈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쉴드 국장 닉 퓨리가 “문제는 하이드라야”라고 말하지만, 캡틴은 이에 반박하며 “쉴드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쉴드가 수집한 정보들을 인터넷에 모두 공개해버린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국정원 해체’를 주장하는 꼴이다. 웬만한 좌파도 이런 주장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캡틴이 ‘성조기를 두른 가장 진보적 히어로’인 이유다. 캡틴은 이처럼 매우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국가의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가 쓰는 언어는 미국의 이상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네들 2차 세계대전 때 끔찍한 짓 많이 하지 않았나”라는 닉 퓨리의 말에 캡틴은 이렇게 답한다. "매일 그랬죠.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타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건(인사이트 프로젝트) 자유가 아니라 공포에요.”
미국인들이 2차 세계대전 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일과 맞서 싸웠던 것처럼, 나 역시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 정부 전체와도 맞서 싸우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캡틴은 미국인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역사적 자부심을 고양시키며, 매우 급진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고 펼친다.
캡틴은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70년 전에는 하이드라가 자유를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기에 캡틴은 방패를 들고 나치와의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현대에는 하이드라가 쉴드를 이용해 ‘안보를 명분으로 한 감시체제’ 확립에 나섰기에, 하이드라 쉴드 모두를 박살내버린 것이다.
버니 샌더스는 어떨까? 최근에 미국에 유학을 간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샌더스의 연설을 들으면...음.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애국심이 솟아오르는 느낌이야.” 그 이유는 샌더스가 캡틴처럼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고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방해하는 정치경제적 과두제에 반대합니다.” 샌더스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미국의 이상주의를 끄집어내며 소수 기득권세력에 대한 전선을 만들어낸다. 이런 주장도 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은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이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경제생활의 기본으로 삼아야한다” 샌더스는 우리들의 나라가 세계1위 경제대국이라는 자부심을 건드리며 우리들이 그에 걸맞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외친다.
샌더스는 우리가 흔히 보수의 가치로 알고 있는 ‘가족의 가치’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엄마가 갓 태어난 아기와 처음 몇 주간을, 그리고 이 아기의 인생에서 처음 몇 달 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가족의 가치에 위배된다. 또 고용주가 유급 유아휴직을 제공하지 않고, 그래서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직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면 이것은 가족의 가치가 아니다. 남편이 암 투병 중인 아내나 중병에 걸린 아이를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낼 수 없다면 이것은 가족의 가치가 아니다. 이것은 가족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공격이다.”
샌더스는 미국인들 다수의 머리에 남아있는 보수적인 가치, 가족의 가치를 공격하거나 싸워야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진보적인 가치로 전환시킨다. 그것이 샌더스가 사회주의를 말하는 정치인임에도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이유며, 급진적인 주장을 하면서도 애국심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이유다.
최근 미국 엔터테인먼트 매체 Ggeek Tyrant가 미국 각주의 마블 히어로 선호도를 조사했다. 캡틴아메리카는 콜로라도, 네브레스카, 텍사스 등 미국 중부와 남부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재밌게도 이 지역은 공화당 표밭으로 불리는 지역들이다.
가장 진보적인 히어로이면서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거기다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샌더스의 지지자들까지 좋아하는 히어로 캡틴아메리카. 과장해서 말하면 캡틴은 진보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