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를 긍정하는 진보는 가능할까
<추월의 시대> 서평
대책없는 비관론에서 현명한 낙관론으로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80년대생들이 쓴 대한민국 성장사 <추월의 시대>는 그것이 ‘비관론’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선진국의 이상형과 한국사회의 모자람을 대비해 각성을 촉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보수는 미국과 일본을 롤모델로 삼아 비관론을 펼치고, 진보는 유럽을 롤모델로 삼아 비관론을 펼친다.
양극화된 정치 엘리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절망에 빠져 있다. 진보파는 ‘대한민국은 아직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다’고 절망하고, 보수파는 ‘대한민국은 빨갱이들이 장악했어’라고 절망한다. <추월의 시대>는 이런 비관론에서 벗어나 현명한 낙관론으로, 열등감의 정치에서 벗어나 자긍심의 정치를 구축하자고 말한다.
GDP 세계 10위에 군사력 6위, 거기다 촛불 혁명으로 민주주의 선도국가가 된 대한민국은 더 이상 선진국 따라잡기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이미 한국은 선진국이며, 우리 몸이 어떤 방식으로 자라났는지 성과를 먼저 진단하고 본인의 체형과 체질에 걸맞은 해법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를 예로 들어보자. ‘빨리빨리’ 문화는 그동안 고속성장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여겨졌다. 각종 안전사고의 원인이었고, 대한민국이 별로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 국민이 사회의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한 이후라면 이 ‘빨리빨리’는 빠른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은 안전의 문제를 뜸 들이지 말고 ‘빨리빨리’ 해결할 것을 원한다. 30년 만에 경제성장을 이뤄낸 대단한 나라라면, 1년에 2000명이 죽어가는 산업재해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긍심의 정치, 청년세대의 정치이자 K-포퓰리즘의 기반
<추월의 시대>가 말하는 ‘자긍심의 정치’는 대책 없는 낙관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낙관론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비관론에 빠져 있는 정치 엘리트들이 만들어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변화는 삶의 필요에 따라 직관적으로 실용적 선택을 해온 다수의 중도파 그룹이 만들어왔다.
군부독재세력은 경제성장과 안정, 그리고 민주화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반해 민주화세력은 경제성장의 성과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중도파 시민들은 그 둘 사이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경제성장, 민주화 둘 다 달라고 요구했다. 유신체제는 부정하지만 중화학공업정책은 잘한 일이다. 민주화운동은 지지하지만 주사파는 싫다. 군부독재세력이 보기에는 땡깡 부리는 놈들이고 민주화세력이 보기엔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것이었지만 이들이야말로 한국사회 당파의 세계관 바깥에서 균형추 역할을 했다.
오늘날 이 중도파 그룹의 역할을 맡고 있는 이들이 청년세대다. 청년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 어느 서사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시장경제와 복지국가를 동시에 지지한다. 경쟁으로 인한 격차를 인정하지만 재분배도 요구한다. 어떤 이들은 청년세대를 향해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모두를 ‘살해하라’ ‘부정하라’고 말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정치는 가장 센 두 세대(산업화‧민주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일궈낸 중도파 그룹은 두 세대를 부정하지 않았다. 두 세대의 성과를 모두 긍정하는 ‘자긍심의 정치’가 해법이다.
이 ‘자긍심의 정치’는 ‘K-포퓰리즘’의 단초이기도 하다. <추월의 시대>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책임 있는 포퓰리즘이 무책임한 엘리트의 정치를 바로잡아 온 역사라고 말한다. 자기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아닌 것 같으면 뒤집으며, 엘리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는 ‘책임있는 포퓰리즘’이야말로 우리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근거다.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19 국면에서 의사협회는 정치성향에 경도돼 정부 탓에 몰두했다. 백신 공포를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 국민은 이에 휘둘리지 않았다. 방역 수칙을 준수하며 K-방역을 만들어냈다. 탄핵 국면 때 박근혜를 지지했던 국민 절반이 자신의 지지를 철회했기에 80%에 달하는 탄핵 여론이 견고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의회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조기 퇴진’이니 ‘거국 대각’이니 하며 문제를 봉합할 대책을 내놓았지만 80%의 국민은 흔들림 이 없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한 걸음 성장할 수 있었다.
자긍심의 정치라면 가장 급진적인 주장도 가능하다
<추월의 시대>가 말하는 ‘자긍심의 정치’의 위력은 무궁무진하다. 진보좌파 그룹은 자긍심의 정치를 통해 다수가 급진적인 주장에 공감하도록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미국의 사회주의자 정치인 버니 샌더스다.
버니 샌더스는 미국이라는 공동체가 다 함께 이뤄낸 성과들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지키기 위해 기득권과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다. 예컨대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방해하는 정치경제적 과두제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유럽의 귀족사회처럼 신분을 세습하지 않고 땀과 노력에 따라 평가받는 사회를 꿈꾸었던 미국 선조들의 탄생설화다. 버니 샌더스는 아메리칸 드림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대신, 정치경제를 장악한 소수의 기득권이 미국의 정신인 아메리칸 드림을 해치고 있다고 전선을 긋는다.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은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이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경제생활의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역시 버니 샌더스가 자주 쓰는 자긍심의 정치의 일환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을 만들어낸 바로 여러분들에게는 열심히 일하면 가난하지 않아도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버니 샌더스는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고 비관하는 대신 당신들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치켜 세운다. 미국인 다수의 보편적인 정서,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역사를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 대신, 그 자긍심이야말로 가장 진보적인 가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버니 샌더스와 같은 정치그룹에 속해 있는 미국의 좌파 정치인 오카시오 코르테스가 기후위기에 맞서는 ‘그린뉴딜’을 내세울 때도 똑같은 방법을 쓴다. 부자들의 세금을 대폭 늘려서 수백만 개 일자리를 만들어내자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기 위해, 그녀는 미국의 역사적 상징들을 거침없이 활용한다.
코르테스는 “우리의 목표는 더 안전하고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 단 한 명도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린 뉴딜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미국이 2차세계대전 중에 자주 사용하던 표현인 “No man left behind(병사 단 한 명도 두고 가지 않겠다)”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코르테스는 그린 뉴딜을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와 ‘문샷Moonshot’에 비유한다. ‘위대한 사회’는 존슨 대통령이 1960년에 추진한 불평등 해소 정책의 슬로건이고. 문샷은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한 달 탐사 프로젝트를 뜻하는 말이다. 애초에 ‘그린뉴딜’은 그 아이디어를 대공황에 맞서 싸웠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프로젝트에서 가져왔다.
코르테스는 오늘날 기후변화와 불평등이라는 적과 싸우기 위해 우리도 부자들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미국)는 2차세계대전에서 자유를 지켜냈고,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를 통해 빈곤과 싸웠으며 문샷으로 인류를 달에 보낸 위대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버니 샌더스와 코르테스의 과감한 해법들이 지지 받는 이유는 그들이 미국 국민 모두가 함께 이루어낸 대단함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역군 노인 세대를 대변하는 진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많은 진보파들은 우리가 아직 바꾸지 못한 것에 집착하곤 한다. 하지만 진보의 역할은 우리의 대단함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청년세대의 정치든 K-포퓰리즘이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동산과 토지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에는 토지 문제를 해결해낸 경험이 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조봉암이 주도한 농지개혁은 (여러 한계점은 있었지만) 지주권력을 해체하고 불평등을 해소해낸 역사적 진보였다. 해방 이후의 그 혼란한 상황에서도 가능했는데, 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불가능한가?
또 만약 진보가 산업화세대의 주역인 노인세대를 대변한다고 나서면 어떨까? 박정희를 긍정할 필요는 없지만 산업화를 일궈낸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평안한 노년을 누릴 권한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수파는 이들을 표밭으로 삼았으면서 정작 해준 것은 없고, 진보파는 이들이 지지기반이 아니라고 무관심했으니 말이다. 산업화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것과 산업화의 주역인 노인들의 성과를 인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마치 한국 군대의 병폐를 이야기하는 것과 군대에 끌려가는 청년 남성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다른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추월의 시대>가 말하는 자긍심의 정치는 세상을 바꾸자고 말하는 진보파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싸워왔는데 여전히 대한민국은 자본가의 나라이고, ‘진정한 성평등’은 아직도 멀었다는 비관론만 펼친다면 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에 나서려고 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