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
인생은 아름다워 (1998)
Life Is Beautiful
- 감독
- 로베르토 베니니
- 출연
- 로베르토 베니니, 니콜레타 브라시, 조르조 칸타리니, 귀스티노 두라노, 세르지오 비니 부스트릭
- 정보
- 코미디, 전쟁 | 이탈리아 | 116 분 | 1998-03-06
1학년 2학기 수업시간에 썼던 것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삶은 풍요로울 수도, 정말 비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통제된 삶 속에서도 선택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예컨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라고 가정해보자.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바로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 1997)’이다.
1.
유대인 수용소에 갇히게 된 주인공 귀도는 아들 조슈아에게 이것이 모두 게임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귀도가 조슈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그들이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귀도는 이탈리아의 소도시 투스카니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며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 도라와 아들 조슈아, 숙부 엘리시오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슈아의 생일날이 다가왔다. 도라가 조슈아의 할머니를 집으로 데려오는 사이, 귀도와 조슈아, 엘리시오는 나치군에 의해 끌려가고 말았다. 귀도는 나치에게 강제로 끌려가면서도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생일 기념으로 한달 간 특별 여행을 가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또한 귀도는 수용소에 와서도 이것이 1,000점을 따면 끝나는 게임이고, 일등을 하면 탱크를 준다고 거짓말을 한다.
귀도 가족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던 1930~1940년대는 유럽에서 나치의 유태인 박해가 진행되고 있던 시대였다. 1933년 나치즘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1934년 독일 대통령 겸 수상이 된 아돌프 히틀러는 우생학의 영향을 받아 아리안족 우월주의에 빠져있었다. 영화 속 한 초등학교에서 교장이 귀도에게(그녀는 귀도가 장학사인 줄 알고 있었다.) 아리아인의 민족 우월성에 대해 애기해달라고 한다. 또한 초등학교 3학년 수학 시험에 정신병자, 절름발이, 간질병 환자를 모두 제거하면 부양비가 얼마나 아껴질까요 라는 문제가 나오기도 한다. 이는 그 당시 우생학을 바탕으로 한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가 팽배해져 있음을 보여준다. 히틀러는 아리아민족이 타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고등 인종인 아리아 민족의 피가 하등 민족의 피와 섞여서는 안된다고 주장 하며 하등 민족들을 청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히틀러가 언급한 하등 민족들 중 하나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유럽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태인이었다. 이 유태인 박해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다. 귀도와 그의 친구 페루시오가 엘리시오의 집에 찾아갔을 때 유태인인 엘리시오가 테러를 당한 것이나 엘리시오의 말 로빈훗의 몸에 누군가 ‘유태인 말’라고 써놓은 것, 상점 문에 ‘유태인과 개 출입금지’라고 쓰여져 있는 것 등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유태인에 대한 핍박과 박해는 유태인 대학살(Holocaust)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1940년 6월 14일 문을 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나치 점령 하에 있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 노르웨이, 그리스의 유태인들이 끌려와 죽어갔다. 이탈리아 소도시에 살고 있던 귀도 가족도 이 유태인 학살에 의하여 결국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2.
귀도가 아들 조슈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아직 어린 아이인 조슈아는 자신이 왜 이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조슈아는 군인들의 통제와 명령에 겁을 먹어 두려움에 떨 수도 있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 수도 있으며 배고프다고 간식을 달라고 떼를 쓸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빠질 경우 수용소에서 버티기 힘들어질 것이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거나 배고프다고 떼를 쓸 경우 유태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나치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누가 죽을지 모르는 이 수용소 생활에서 살아남으려면 우선 이 통제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도는 이 상황을 게임이라는 자발성의 공간으로 바꾸어버렸다. 탱크라는 미끼로 조슈아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수용소의 규율에 따르도록 유도한 것이다.
독일 군인이 수용소 생활의 규칙을 설명해주기 위해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귀도는 독일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앞으로 나선다. 그는 명령, 통제, 규율과 강압으로 가득찬 독일어를 게임과 자발성의 이태리어로 통역한다. “이곳에 오지 않은 사람은 게임에서 제명당하고, 매일 그 날의 일등을 스피커로 발표하고, 꼴찌는 등에 멍청이라고 써진 쪽지를 붙인다. 군인들은 소리치는 나쁜 사람 역할을 맡았으며 겁을 내는 사람은 점수를 깍는다. 울기 시작하거나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하거나 배고프다고 간식을 달라고 하면 빵점으로 처리한다.” 이제 조슈아는 탱크를 갖기 위해 이 규칙들을 ‘자발적으로’ 지키게 된다. 군인들의 명령과 통제로는 조슈아가 이 수용소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살아남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도는 조슈아에게 이 규칙을 지켜야 할 자발적 동기를 부여해줌으로써 조슈아를 살아남게 만든다.
자발적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수용소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조슈아는 갑자기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만일 여기서 귀도가 그에게 집에 갈 수 없다고 하거나 우리는 갇혀있는 것이라고 사실대로 말했다면 조슈아는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영화 속에 몇 번 나오듯이 조슈아는 매우 고집이 강한 아이다.) 하지만 귀도는 “왜, 억지로 잡아두기라도 할까봐? 그런 법이 어딨냐!”라고 말하며 이 게임이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지금 우리 팀이 일등이며, 다른 팀들을 이기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여 조슈아에게 이 수용소 생활을 참고 견딜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러자 조슈아는 다시 수용소 생활을 하겠다고 말한다. 귀도가 집에 가자고 재촉하는 데도 가지 않겠다는 조슈아의 모습, 그는 이제 완벽히 자신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수용소 생활을 견디게 된 것이다.
사실 귀도가 조슈아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귀도는 조슈아에게 우리는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으로 비누와 단추를 만들고 사람을 땔감으로 태울 것이며 우리도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운명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귀도가 이런 선택을 했을 경우 귀도와 조슈아가 살아남느냐 죽느냐를 떠나서 그들은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귀도와 조슈아가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살아남는다면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역사는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끝내 나치에게 살해된다 할지라도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나치가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의 가장 큰 증명이다. 즉 귀도가 조슈아에게 사실을 말하고 수용소 생활을 함께 수용소 생활을 겪는 것은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알린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영화 속 귀도의 선택을 옹호하고 있다. 이를 암시하는 것이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쇼펜하우어다. 귀도가 대화를 나누다 잠들어버리는 친구 페루시오의 능력에 놀라자 페루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가 의지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댔어. 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지. 난 잠이 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잠이 들었을 뿐이야.” 귀도는 베니스의 극장에서도, 조슈아가 숨어있는 곳을 개가 어슬렁거릴 때도 이 쇼펜하우어의 격언에 따라 행동한다. 그가 조슈아에게 수용소 생활을 하나의 게임이라고 거짓말한 것 역시 이 쇼펜하우어의 격언에 따른 행동이다.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 말은 삶에 있어서 선택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택이라는 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는 주변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자신의 자유 의지대로 무엇인가 할 수 없을 때 하는 말이다. 하지만 감독은 쇼펜하우어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주변의 환경을 뛰어넘는 것이다. 아무리 비극적인 환경과 상황이 주어질 지라도, 의지만 있다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귀도는 영화 속에서 이를 보여주었다. 명령과 통제로 가득찬 수용소 생활, 즉 전체주의 속의 인간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선택이라는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귀도는 수용소 생활을 자신이 강제로 끌려온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선택한 게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를 통해 조슈아에게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할 자발적 동기를 부여했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슈아를 끝까지 살아남게 했다.
3.
개인의 일상생활이 모두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의 모습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Animal farm, 1945)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인 존즈 씨가 운영하고 있던 매너농장의 동물들은 “인간들을 몰아내고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늙은 돼지 메이저의 연설에 영향을 받아 봉기를 일으킨다. 인간들을 물리친 동물들은 돼지 스노볼과 나폴레온을 중심으로 동물주의 사회를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나폴레온이 스노볼을 내쫓으면서 동물농장은 서서히 나폴레온과 일부 돼지무리들이 지배하는 체제로 변화하게 된다. 나폴레온과 지배자 돼지들은 나머지 동물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착취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나폴레온에게 대항하는 동물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동물들은 ‘동물농장’(혹은 지도자 나폴레온 동무)을 위하여 쉴새 없이 일해야만 했다. 동물들은 모두 나폴레온의 명령 아래 통제 당하고, 이 속에서 개인의 자유란 존재할 수 없었다.
동물농장이라는 전체주의식 통제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동물은 충실한 일꾼 복서(말)였다. 존즈 시대에도 엄청난 작업 능력으로 동물들 사이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는 동물주의 사회에서도 충실한 일꾼으로 일했다. 나폴레온에 의해 동물농장 전체가 통제 당할 때에도 복서는 그 통제를 받아들이고 더욱 열심히 일하는 길을 택했다. 매일 다른 동물들보다 일찍 일어나 더 많은 일을 했고, 풍차건설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 역시 그였다. 동료 클로버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히 일하라고 자주 충고했지만, 그는 ‘내가 좀더 일하지’와 ‘나폴레온은 항상 옳다’는 두 가지 슬로건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바쳐 일했다. 복서는 자신의 일상 생활이 통제된 전체주의 사회에 철저히 충성하고 복종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복서의 이러한 선택이 결국 비극적 결말을 가져올 뿐이라고 평가했다. 가장 헌신적으로 일하던 복서는 결국 돌짐을 운반하다 쓰러졌고, 말 백정에게 팔려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돼지들은 그를 팔아버린 대가로 위스키를 샀고, 결국 끝까지 그는 돼지들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일한 복서의 비극적 최후를 통해 복서의 선택이 결코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복서가 지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통해 추정해본다면 복서는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열심히 전체를 위해 일하는(일한다고 착각하는) 무지한 인민의 표상이다. 즉 조지 오웰은 이 무지한 인민들이 결국 전체주의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착각 속에 죽어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귀도와 복서, 둘 다 전체주의의 통제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에 따라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복서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가장 열심히 살다가 자신이 바라던 은퇴 후의 삶 대신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귀도는 자유를 박탈당하면서도 그 박탈을 자발성으로 바꾸어 아들 조슈아를 살렸다.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 자유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선택은 존재하고, 그 선택은 삶과 죽음을 결정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