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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의 방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본좌 2014. 3. 31. 20:46

‘기업가의 방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평] 기업가의 방문 / 노영수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기업가의 방문>은 어느 날 중앙대학교에 나타난 기업, 그리고 그 기업에 맞서 싸운 학생 노영수의 이야기다. 1987년 중앙대를 인수한 김희수 재단은 ‘천원 재단’이라 불릴 정도로 무능력했고 중앙대는 쇠락해가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중앙대의 활력과 발전을 바라고 있을 때 두산 회장 박용성이 등장했다.

<기업가의 방문>은 스위스 극작가 뒤렌마트의 희곡 <노부인의 방문>의 패러디다. <노부인의 방문>의 배경은 부유하고 활기 넘쳤지만 어느 새 쇠락해버린 도시 귈렌이다. 이곳에 이 도시 출신의 세계적 부호 차하나시안 부인이 나타난다. 주민들은 그녀가 귈렌의 옛 영광을 되찾아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차하나시안 부인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폭탄선언을 한다. 과거에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며 자신을 배신했던 ‘알프레드 일’을 살해하면 도시민들에게 1000억 프랑을 나눠주겠다는 것. 시장은 이 제안을 거부하지만, 시장을 비롯한 시민 모두는 어느새 돈의 유혹에 빠져든다. 차하나시안 부인은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기다린다.

노영수는 두산의 회장 박용성이 처음 등장했을 때 중앙대 교수나 교직원, 학생, 청소노동자 등 모든 구성원들이 귈렌 시 시민들처럼 기대에 부풀었다고 말한다. 쇠락해가는 중앙대를 자본의 힘으로 되살려줄 것이라고 말이다. 두산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2008년 중앙대를 인수한다.

하지만 박용성 이사장은 취임과 동시에 폭탄선언을 한다. 취업률 낮은 학과, 돈이 되지 않는 학과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진다. 18개 단과대학 77개 학과가 10개 단과대학 40개 학과로 통폐합된다. 80년대 대학민주화 운동의 산물인 총장직선제는 사라지고 총장임명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등급별 교수 평가와 차등 연봉제, D학점 5% 의무부과제 등 기업식 경쟁체계가 대학에 도입됐다.

학생자치에 대한 탄압도 이어졌다. 2009년 11월 중앙대의 일방적 학과 구조조정을 비판하는 만평과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는 글이 실린 중앙대 자치언론 <중앙문화>가 학교 직원들에 의해 전량 회수됐다. 이후 중앙문화는 예산도 삭감 당한다.

박용성 이사장은 2008년 월간조선과 인터뷰에서 중앙대를 두고 “자본주의 논리가 어디가나 통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말한다.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며 자신만만해하는 노부인을 닮았다.



기업가의 방문

저자
노영수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학과의 교수와 학생들, 무한 경쟁을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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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학번 독어독문학과 학생 노영수는 노신사 두산과 가장 정면에서 마주했던 인물이다. 독문과의 진중권 교수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하면서 그는 두산과 맞서기 시작한다. 그의 손엔 펜 대신 매직과 붓이 들려졌다. 레포트 대신 대자보와 플랜카드를 쓰는 게 일상이 됐다. 이사장의 눈에 띠기 위해 학교 교정을 성황당처럼 꾸미고, 본관 앞에 시멘트 블록으로 ‘불통의 벽’을 쌓았다.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하기 위해 크레인 위까지 올랐다가 퇴학까지 당한다. 그는 징계 철회를 위해 55km 삼보 일배 대장정에 나서고, 지리한 법정 투쟁에서 승리해 결국 학교로 돌아온다. 평범했던 학생은 두산과 싸우는 동안 어느새 손해배상액이 2500만원에 이르는 전과4범이 됐다.

노영수는 2014년 11년간의 대학생활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몇 년 뒤 ‘기업가의 방문 에피소드2’나 ‘자본가의 방문’이라는 책이 나올 것 같다. 대학의 기업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어느새 중앙대만의 문제가 아닌 대학 전체의 문제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됐다.

우리는 ‘기업가의 방문’이라는 제목을 보며 굳이 박용성 두산 회장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2007년 ‘747’을 내세웠던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개발 광풍에 집권여당에 표를 몰아줬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늘릴 수만 있다면 강을 파헤치는 짓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협동과 연대 대신 경쟁을 강요받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노부인과 노신사에게 기대를 품은 인물들은 아직 많다. 아직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노부인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이 있다. “자본주의 논리가 어디가나 통하는” 사회라면, 언제 어디서 노부인과 노신사가 나타나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모른다. 노영수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