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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자정노력 안 하면, 법이 언론 옥죈다

조본좌 2014. 4. 11. 21:35

언론이 자정노력 안 하면, 법이 언론 옥죈다

고종석 사건 관련 ‘언론 2차 피해’ 토론회 열려…“당시 기자들 사이에서 광풍이 불었다”

“가해자가 국가의 공권력으로 인해 처벌받는다고 하여 피해 어린이 및 그 가족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들은 더 잔인한 가해자들에 의해 처참히 무너졌다.”
 
1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언론보도 2차 피해 이제는 끝내야 한다’ 토론회에 참여한 김종호 변호사(법률사무소 국민생각)는 지난 2012년 발생한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에서 몇몇 언론이 2차 가해자 노릇을 했다며 “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 범죄 예방 등 공익 차원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로 무장하고 피해자의 신상을 보도하고 그들의 명예를 거침없이 훼손한다”고 밝혔다. 이번 토론회는 언론인권센터, 언론개혁시민연대 주최로 열렸다.
 
지난 2012년 여름 한 어린이가 성폭행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주 어린이 성폭행사건’, 혹은 ‘고종석 사건’이다. 가해자는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법의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상처는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로 인해 더욱 가중됐다. 몇몇 언론은 피해자 가족을 알콜중독자나 게임중독자 등으로 묘사했고, 피해자 가족의 집 내부까지 공개했다. 피해자와 가족들과 언론인권센터는 경향신문, SBS, 채널A 등 몇몇 언론이 피해자와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생활을 침해했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지난 3월 1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판사 배호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경향신문, SBS, 채널A는 각각 2500만원, 3000만원, 2300만원을 배상하고, 관련 기사들을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법원은 피해자의 아버지를 알콜중독자인 것처럼, 피해자 어머니를 게임광인 것처럼 묘사한 경향신문 보도 등이 피해자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피해자의 집 위치와 집 내부를 공개하고, 피해자와 가족의 동의 없이 일기장을 공개한 데 이어 피해자 아버지의 월수입까지 공개한 경향신문, SBS, 채널A의 보도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이번 판결이 언론의 2차 피해에 경종을 울린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소송을 담당한 김종호 변호사는 “언론의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라며 “언론이 피해자 가족에게 가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한 바 금전으로나마 위자할 것과 관련 기사를 모두 삭제할 것을 판시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김종호 변호사는 법원 판결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피해자 어머니와 가해자가 친밀한 관계가 있는 듯한 암시를 주는 언론보도 등에 대해 명예훼손에는 해당하나 ‘공익성’이 있다며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김종호 변호사는 “이 사건 범죄는 언론에 의한 2차 피해가 우려되는 아동 성폭력 사건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며 “그 특수성을 고려하여 공익성을 좀 더 엄격하게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10일 오후 국회의원회관 제8간담회실에서 언론인권센터, 언론개혁시민연대 주최로 ‘언론보도 2차 피해 이제는 끝내야 한다’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조윤호 기자

이런 식의 자극적인 언론보도가 경쟁적인 뉴스 생산·소비 시스템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박수진 해럴드경제 기자는 “오기 전에 당시 사건을 취재한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후배 기자가 ‘기자들 사이에서 광풍이 불었고 누구도 객관적으로 마음을 잡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며 “성범죄 보도와 관련해서는 신중하게 이야기해야할 상황이지만 성범죄가 소비가 빠르고 많은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는 사안인 데다 매체도 많아지고 매체를 소비하는 통로로 다양해졌기에 구심점을 잡고 보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 기자는 “기사를 생산해서 클릭 수 높여야하는 것이 언론의 현실이기도 하고. 이러한 현실 아래서 문제의식이 희미해지는 건 사실”이라며 “온라인을 바탕으로 한 미디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언론윤리에 대한 의식을 우선순위에 두기가 어려울 것이다. 2차 피해 폐해가 가장 큰 성범죄 관련 보도에 한해서라도 보도기준 준수를 좀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언론 윤리’에 대한 고민과 교육이 해결책이다. 박 기자는 “성범죄 보도기준 준칙을 현업에 적용하는 언론사는 많지 않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보도 범위를 논의하고, 피해자의 신상이 노출될 수 있는 정보를 언급하지 않는 정도”라며 “평기자 뿐만 아니라 보도 결정 권한을 쥐고 있는 데스크, 편집·보도국장들을 대상으로 한 언론윤리 및 2차 피해 예방 교육 등을 실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종호 변호사 역시 “2차 피해와 관련한 언론보도의 근본적인 원인은 대중의 욕망과 언론의 욕심이 빚어낸 관음증”이라며 “언론은 피해자의 신상이나 개인 사생활의 영역 등 범죄의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굳이 필요치 않는 부분들이 첨가될수록 대중들은 열광하고 기사의 클릭 수는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언론이 대중의 욕망에 휘둘려 본인의 본분을 잊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이러한 이유에서 언론사의 기자들에 대한 언론보도와 관련한 범죄의 교육 또는 학습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이 스스로 자정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법이 언론을 옥죌 수도 있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20년 전 이런 문제는 ‘명예훼손 하지 말자’는 윤리적 문제였으나 이후 20년 동안 윤리적인 영역의 규범들이 민사 손해배상 책임으로 넘어왔다”며 “가족에 대한 윤리적 지침들이 준수되지 않았을 경우 법에 의한 언론 책임 처벌이 불가피해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언론 보도가 2차 피해로 이어진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될 경우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를 넘어 사생활의 비밀침해죄 등 형사처벌 여론까지 조성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교수는 “저널리즘 스스로 자초한 위험”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경향신문과 SBS는 항소를 하지 않았으나 채널A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