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기록’하되 더 이상 추억하지 말자
노무현, ‘기록’하되 더 이상 추억하지 말자
[서평] 기록 / 노무현재단, 윤태영 지음 / 책담 펴냄
나는 노무현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노무현 정부가 성공한 정부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노무현 을 지지했던 이들의 새누리당(구
한나라당)에 대한 비토가 잘 이해가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일었던 추모 열기에도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7년을 거치면서 노무현은 ‘추억’이 됐고, 나조차도 왜 사람들이 노무현을 추억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윤태영 전 청와대 비서관이 쓴 <기록>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다. 윤 전 비서관은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첫 진출한 정치인 노무현을 처음 만나 의원보좌관을 맡았고, 노무현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의
집필에도 참여했다. 노무현 캠프에서 방송원고와 홍보물 제작을 맡았고 참여정부에서는 청와대 대변인과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냈다. 즉
그는 노무현의 ‘입’과 같은 존재였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겪으며 노무현을 다시 추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입’이다. <기록>에서 묘사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참모들이 연설문을 써 가면 ‘이건 내 글이 아니다’라며 거절하는 사람이다. 작은 연설문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생각이 담기도록 지시하고 수정하도록 했던 인물이다. 퇴임 이후에도 ‘민주주의 2.0’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윤태영 비서관이 기록한 노무현은 자신의 입으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의 말에는 비유가 많고, 당연한 말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직접적인 어법이 사용된다. 윤 비서관은 외교회담에서도 의례적인 말보다는 실무적인 회담, 무언가 오고가는 대화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후보 시절 장인이 좌익 활동을 했다는 논란이 일자 “그러면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고 되물었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국방부 장관들에게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호통을 쳤다.
이런 그의 말은 보수언론의 먹잇감이 됐다. 노무현의 말은 설화를 낳기도 했고 역풍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대통령으로서 품격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2006년 5월 아랍 에미리트를 방문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비행기에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보며 이
땅이 신이 버린 땅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한다. 윤태영 비서관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지만, 노 대통령은 “하지만 내려와 몇
시간이 안 돼 짐작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신은 이 나라에 석유를 주고 이를 활용할 지도자를 주고, 지도자에게 지혜와 용기를
줬다”고 말한다.
뒤의 말을 빼고 앞의 말만 인용하면 아마 ‘노 대통령, 아랍 가서 ’신이 버린 땅‘ 막말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쓸 수 있을지
모른다. 보수언론은 이런 식으로 노 전 대통령의 말을 왜곡했다. 보수적인 어르신들은 말이 너무 많은 대통령을 싫어했을 지도
모른다. 노무현은 이런 이유 때문에 ‘생중계 기자회견’을 선호했고 기자회견을 자주 열어 ‘직접’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러한 모습은 취임 1년 동안 단 한 차례의 기자회견 밖에 열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과 대비될 수밖에 없다. 간첩조작사건이
밝혀졌을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박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 선 기자회견이 아니라 장관들을 앞에 둔 국무회의 자리에서 사과했다.
명박산성을 쌓으며 ‘불통’ 논란을 빚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는 ‘소통 왕’처럼 보일 정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상대 이야기를 듣지 않고 말을 한다면 박 대통령은 말을 아예 안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이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싫어하는 이유, 그리고 두 보수정부를 겪으며 노무현을 그리워하게 된 이유도 이러한
‘소통’의 문제는 아닐까. 물론 노무현이 소통을 잘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기록>에 나오듯이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며 자신의 소신을 번복했고, 이를 ‘실리’를 위한 것이라 합리화했다. 한미 FTA를 밀어붙이며 시민사회단체와 노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언급해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계속 입을 열었다. 최장집 교수가 자신을 비판하자 반론 글을 써서 투고하기도 하고, 한겨레신문이 한미 FTA를
비판하자 한겨레신문에 반론을 보내기도 했다. 불리한 사안에는 침묵하고 홍보전만 벌이는 정권, 그리고 이를 그대로 받아쓰는 지금의
언론환경을 보면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이 과거의 노무현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사회가 퇴보했다는 근거가 아닐까. 지금의 한국사회가 최소한의 소통과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윤태영 비서관처럼 우리는 역사의 한 순간으로 노무현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노무현은 더 이상 추억의 대상이 되선 안 된다. 그가 추억이 되는 순간 그것은 우리사회가 진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