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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한겨레 hook

한국의 20대는 왜 거리로 나서지 않나?

지난 몇 년간 이른바 20대에 관련된 이야기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 역시 20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이 세대론이 담고 있는 내용은 다양했으나 핵심은, 그리고 20대 세대론이 정치적으로 전유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간단했다: “20대는 그렇게 살기 힘든 세대이면서, 왜 사회를 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은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의 20대와 한국의 20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프랑스를 보라! 프랑스의 권력자들이 시도하는, 연금개혁법을 비롯한 보수적이고 친시장적인 개혁에 가장 앞장서서 맞서는 건 20대 대학생들이다. 영국을 보라! 집권당이 대학 등록금을 인상하려고 시도하자, 영국의 대학생들은 단결하여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들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회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행동을 하면 적극적으로 저지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생들, 20대들은 뭐하고 있나?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 번째, 대학생들이 시위하러 거리에 나오기엔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알바에 학점에 스펙 관리에 시위하러 나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대답을 한 사람은 “그러니까 그럴수록 사회 문제에 관심도 가지고 거리로 뛰어나와 시위도 하고 해야지!”라는 반론에 고개를 숙여 반성하는 수밖에 없다. 20대 담론을 처음 유행하게 만든 우석훈의 <88만원 세대> 역시 20대를 88만원 밖에 벌지 못할 운명에 처할 불쌍한 이들로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결국에는 ‘그러니까 토플 책을 덮고 짱돌을 던져라’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두 번째 대답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개X끼들이니까!” 눈앞의 제 이익 밖에 챙길 줄 모르는 이기적인 놈들! 이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시위 나오기 어렵다는 대답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지난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 진보, 개혁세력의 거둔 참패의 성적은 ‘국개론(국민개X끼론)’으로 이어졌는데, 이들 중 특히 20대가 더 개X끼들이었다. SBS-TNS 출구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42.5%, 이회창 후보는 15.7%였다. “나이 든 양반들이야 그렇다 치고, 젊은 것들이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도 ‘20대 보수화’에 대해 연일 입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선이었다. 예상대로 한나라당의 압승.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20대를 향한 공격이 시작됐다. “총선에서 20대 투표율이 19%에 불과하다”라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면서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어떤 언론은 ‘20대 투표율 19%는 대의정치의 심각한 위기’라는 제목으로 대담 기사를 싣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저도 20대지만 투표율 19%라니 정말 창피합니다.”라는 고해성사(?)가 이어졌다.1)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집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시위에 앞장서야 할 20대가, 대학생들이 시위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쏟아져 나왔다. 한 시사평론가는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20대를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이런 ‘20대 개X끼론’에는 두 가지 문제점, 즉 이 주장을 유포하는 이들이 대답해야 할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 번째는 “왜 20대가 진보. 개혁적인 세력을 지지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진보, 개혁적인 어른들은 흔히 20대 보수화를 20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아무렇지도 않게 동일시하는데,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20대가 지방선거 때 야권을 찍은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할 이유이고,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한 것은 왜 비난 받아야 하는 건가? 촛불집회 때 거리로 나오지 않고, 등록금 인상에도 싸우지 않는 것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정책을 모두 ‘지지하기’ 때문이라면 어쩔 셈인가? 결국 이들 논리대로라면 20대가 욕먹는 이유는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지지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진보개혁세력은 20대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 만일 20대가 진보개혁세력의 무능에 실망하고 냉소하며 차라리 ‘먹고 사는 문제나 해결’해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지지했다고 말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왜 20대가 이미 실망한 진보, 개혁세력을 또 다시 지지해야 하는 지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면, 이들의 20대 개X끼론은 그냥 자기네들 지지해달라고 생떼 부리는 것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두 번째 문제점은 매우 실증적인 문제, 20대가 실제로 정치와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느냐는 질문이다. 앞에서 총선에서의 20대 투표율이 19%였음을 가지고 많은 이들이 비난하고 반성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19%는 근거 없는 루머였음이 밝혀졌다. 18대 총선의 연령별 투표율은 당시까지 발표된 적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20대는 정치사회문제에 무관심하다”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기에 그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떤 것이다. 또한 20대가 보수후보에게 많은 표를 준 것도 사실이지만, 진보로 분류되는 문국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에 대한 20대의 지지율은 전 연령대 중 최고였다. 촛불집회에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적용된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스무 살이었던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촛불을 들고 그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나는 나 같은 20대를 많이 보았다. 물론 깃발을 들고 조직화된 세력으로 20대가 등장하지는 않았기에 겉으로 보아선 20대 대학생들의 참여가 저조했다고 판단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20대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0대 개X끼론을 유포하는 진보개혁세력이 대답해야 할 두 가지 의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의문에 모두 대답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말하는 대로 20대의 보수화는 20대의 정치적 무관심화와 동일하며, 20대가 ‘적어도’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지지하는 건 옳지 않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20대가 실제로 다른 세대에 비해 투표도 안 하고 촛불집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모두 인정하자. 즉 20대가 개x끼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그럼 왜 개x끼가 되었는지에 대해, 어떻게 이 현실을 타파해야 해야 하는지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20대 개X끼론이 ‘10대 찬양론’과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 때 많은 이들은 20대를 비난하고 대신 어린 나이에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10대를 칭찬했다. 한 언론은 이들을 ‘2.0세대’라고 부르기도 했고, 어떤 언론들은 10대들의 기획 좌담회를 열어 깨인 10대들에게 진보개혁적인 어른들이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다. 20대에게 ‘너희에게 희망이 없다’고 선언한 시사평론가는 이 희망을 ‘10대’에게 건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10대가 20대가 되면 여전히 10대 때의 진보성과 정치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역사학자 한홍구는 2002년 촛불집회 당시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러 나온 10대가 투표권을 가지는 2007년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홍구가 무엇을 기대했듯 그는 그 이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대다수가 바로 이명박을 찍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10대가 투표권을 갖게 되는 날이 오면 아마 또 보수 세력을 지지하고, 진보개혁적인 어른들은 이들의 보수화와 정치적 무관심을 탓하며 새로운 10대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2002년의 촛불세대가 2007년의 개X끼들로 등장한 것은 비극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진보 개혁적 어른들이 10대를 찬양하면 그 때 쯤 그건 정말 웃기는 희극이다.

그래서 진보 개혁적 어른들이 청년세대의 지지를 받고 싶다면 특정 세대가 혁명적이고 진보적이라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할 것이 아니라, 20대의 보수성과 정치적 무관심화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 경제적 조건’을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20대는 과연 정치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조건에 처해 있는가? 그것은 진짜 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문제인가? 비싼 등록금은 오늘날 20대가 처한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부모가 처한 현실이다. 20대 대부분은 자립하지 않고 취직 전까지 부모 밑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88만원’ 세대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아직은’ 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는 친구들과 ‘공동생활전선’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공동생활전선은 20대가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집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공간을 마련하고, 자신이 노동해서 번 돈으로 생활을 영위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공동생활전선이 마주하고 있는 20대의 현실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20대가 자신이 노동해서 번 돈으로 생활을 영위하기 매우 어렵다는 현실, 노동권의 문제. 두 번째는 20대가 자신의 힘만으로는 거주하기 힘든 현실, 거주권의 문제. 세 번째는 20대에게는 너무나 비싼 등록금, 교육권의 문제. 이 세 가지를 진정한 ‘나의 문제’로 만들어야만, 20대는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오늘날 20대가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그것이 아직 충분히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비싼 등록금, 비싼 거주비용, 박한 노동임금 때문에 자립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점진적으로라도 자립의 단계를 밟아야 이 악순환의 고리(힘든 경제적 조건 때문에 자립 못함 -> 자립 안 하니 내 문제가 아니라 힘든 경제적 조건도 안 바뀜)를 끊어낼 수 있다.

20대가 사회, 정치문제에 제 목소리를 내려면, 자립을 이루어내 그 사회, 정치 문제들이 진정 ‘내 문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영국, 프랑스 20대와 한국 20대의 객관적인 차이들 중 하나는 누군가는 자립했고 누군가는 자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각주

1) 박권일, “20대 왕따시켜 10대 찬양하는 ‘돌림병’이 돈다,”, 시사인, 제37호, 2008.05.26.


<한겨레 훅>에 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