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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급기밀’이라더니 “대통령이 아파요” 떠드는 이유

‘2급기밀’이라더니 “대통령이 아파요” 떠드는 이유

"링거 맞으며 순방 일정 소화", 정치적 위기 때마다 와병… 그때그때 달라요, 박근혜 ‘건강 악화’의 정치학


“대통령 건강 등은 2급 비밀에 준하여 관리되는 것이 맞다.”

지난 2014년 11월6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박종준 대통령경호실 차장이 한 말이다. 박 차장은 “어느 나라나 국가원수의 건강상태는 그 나라의 국가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비밀로 전부 관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2급 비밀’이라던 대통령의 건강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고 있다. 지난 5일 10박12일의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이 링거를 맞으며 순방 일정을 소화했다고 알려진 것이다.

안 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4일 브리핑에서 “박근혜 대통령님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길고 빡빡한 일정을 링거로 버티시면서 고군분투하셨다. 사실은 휴식할 수 없는 일정이었고, 그래서 (주치의가) 귀국 후에 반드시 휴식을 권고하는 소견을 냈다고도 들었다”고 밝혔다.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들도 언론에 “주치의가 휴식을 권했으나 일정 상 불가능해 귀국 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강행군으로 체력이 바닥 나 사실상 탈진 상태다”라고 전했다. 언론은 ‘링거투혼’ ‘순방과로’ ‘정상외교 투혼’ 등의 표현을 써가며 박근혜 대통령의 탈진을 알렸다.

청와대가 나서서 ‘2급 기밀’인 대통령의 건강을 언론에 알린 사례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4월 말 박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이후 박 대통령의 건강 악화 사실이 알려졌다.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의 전체적인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하루나 이틀 정도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며 “검진 결과 과로에 의한 만성 피로 때문에 생긴 위경련으로 인한 복통이 주 증상이고 인두염에 의한 지속적인 미열도 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병명까지 공개한 것이다.

2014년 3월 박 대통령이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도 대통령이 피로로 인해 감기몸살에 걸렸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청와대는 2014년 9월 박 대통령이 캐나다에 국민 방문했을 때도 박 대통령이 링거를 맞았다고 공개했다. 연합뉴스는 지난 5일 기사에서 “박 대통령이 순방 중 링거를 맞은 것은 지난 2014년 9월 캐나다 국빈 방문과 유엔총회 참석, 지난해 4월 중남미 4개국 순방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라고 보도했다.

박 근혜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지난해 11월14일부터 23일까지 7박10일 간 해외순방을 다녀오고 난 직후에도 청와대는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언론에 박 대통령이 피로 누적에 따른 면역력 저하로 고열과 인후염을 동반한 감기 몸살 증세를 앓고 있다고 공개했다.

이렇게 공개되는 대통령의 건강 관련 정보가 어떤 경우에는 기밀 사항이 된다. 지난 2014년 국정감사에서 헬스 트레니어 출신으로 청와대 행정관이 된 윤전추 행정관이 도마 위에 올랐다.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014년 10월28일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윤전추 행정관의 채용 과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윤전추 행정관의 신상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이재만 비서관은 윤 행정관의 나이를 묻는 질문에 “국정 최고 책임자를 보좌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국가기밀 사항들을 다룰 수 있다”고 답변을 피했다.
▲ 2014년 10월29일 SBS 생생영상 갈무리
최민희 의원은 또한 2014년 11월 6일 국회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청와대의 헬스기구 구입에 대해 질의했다. 하지만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가안보와 직결되기에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 건강은 2급 비밀”이라는 박종준 대통령경호실 차장의 말도 청와대 헬스기구에 관해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처럼 청와대는 국가기밀이라던 박근혜 대통령의 건강 정보를 어떤 경우에는 스스럼없이 공개한다. 정치적인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주목할 점은 유독 해외순방 직후 박 대통령의 와병이 공개된다는 것이다.

일 반적으로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하면 지지율이 상승한다. 리얼미터의 6월 1주차 주간집계(5월30일~6월3일)에 따르면 아프리카‧프랑스 순방 효과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36.2%까지 상승했다. 지지도 상승세에 쐐기를 박기 위해 청와대가 순방 직후 대통령의 건강을 자꾸 공개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하다. 박 대통령의 건강 악화에는 ‘과로’ ‘투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박 대통령의 건강 악화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는 것.

정치적인 판단도 기준이다. 청와대가 2015년 11월 G20 회의 참석 직후 박 대통령의 감기 증상을 공개한 이유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 불참’이 꼽혔다. 박 대통령이 11월27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불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 전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참석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자 청와대가 정치적 해석을 차단하기 위해 ‘대통령이 아파서 못 간다’고 공개한 것.

2015 년 4월 ‘인두염’ ‘위경련’ 등 박 대통령의 구체적인 병명이 공개된 시기는 4.29 재보선을 앞두고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때였다. 이완구 당시 총리까지 리스트에 연루돼 야당을 중심으로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던 시기 박 대통령의 건강 악화가 공개된 것.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은 2015년 5월1일 국회 운영위 회의에 출석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대통령 건강문제를 반복 브리핑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런 문제로 2차례 사면, '성완종 리스트'를 물타기하는 것 아니냐는 국민의 오해를 사는 것은 여당으로서는 상당히 불편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아프리카 순방 후 박 대통령의 탈진이 공개된 상황은 2015년 4월과 유사하다. 박 대통령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 시기에 건강 악화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순방 중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에 따라 여야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나아가 새누리당이 원 구성 협상을 두고 국회의장직을 여당이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야당에서는 ‘청와대 개입설’을 제시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의 탈진을 알리며 언론에 “숨쉴 틈 없는 외교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원구성 협상 등 국내 정치에 신경쓸 겨를조차 없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청와대를 끌어들이는 일은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건강 정보 공개를 신호탄 삼아 여야 정치권의 갈등과 거리두기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게는 대통령의 건강 정보를 공개하는 것도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