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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제안한 노무현에게 “참 나쁜 대통령”이라더니

개헌 제안한 노무현에게 “참 나쁜 대통령”이라더니

물타기용, 정쟁유발용, 정권 재창출용 개헌 카드… "개헌은 블랙홀"이라더니 최순실 정국에 블랙홀 투척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에 부정적인 입장을 180도 뒤집고 개헌의 실무적인 준비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2007년 임기 말 개헌을 추진하던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개헌은 블랙홀”이라며 반대의사를 밝혔다는 점을 고려하면 스스로 모든 이슈를 빨아들일 ‘블랙홀’을 형성한 셈이다.

박 대통령은 24일 오전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고심 끝에, 이제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한계를 어떻게든 큰 틀에서 풀어야 하고 저의 공약사항이기도 한 개헌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또한 “저는 오늘부터 개헌을 주장하는 국민과 국회의 요구를 국정 과제로 받아들이고 개헌을 위한 실무적인 준비를 해 나가겠다. 임기 내에 헌법 개정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 내에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을 설치해서 국민의 여망을 담은 개헌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는 그간 경제, 안보 문제가 중요하다며 개헌에 반대하던 입장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4일 의원총회에서 “저도 깜짝 놀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아가 2007년 야당 의원 시절의 입장과도 다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07년 1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하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박근혜 의원은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라며 “민생경제를 포함해 국정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다.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의원은 또한 “4년 연임제가 필요하다는 확고한 소신이 있지만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점이 아니다”라며 “각 정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되면 개헌안을 만들어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은 뒤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10년 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내에 헌법 개정을 완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0년 전 박 대통령의 발언에 비추어보면 박 대통령 스스로 ‘블랙홀’을 만든 셈이다. 블랙홀을 만든 의도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점점 커지는 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한 ‘물타기용’ 블랙홀이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추가 해명을 하지 않은 채 개헌이라는 새로운 이슈를 던졌다.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24일 브리핑에서 “최순실, 우병우 등 측근 비리를 덮으려는 정략적인 개헌, 국면전환용 개헌 제안이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며 “최순실 게이트와 측근비리 등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없고 검찰의 엄정한 수사에 대한 약속조차 없었다. 개헌논의를 제안해 모든 것을 덮고 가겠다는 것으로, 또 다시 국회시정연설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정면으로 거부한 처사로 매우 유감스럽다”고 비판했다.

손금주 국민의당 대변인 역시 브리핑에서 “개헌론을 던진 현 시점도 문제다. 누가 봐도 최순실, 우병우 등 대통령 측근의 국정농단을 덮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라며 “더군다나 그동안 새누리당에서 제기해왔던 개헌론에 제동을 걸어왔던 박근혜 대통령이기에 개헌론을 던진 의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는 ‘정쟁유발’용 블랙홀이다. 박 대통령은 국회에 “빠른 시간 안에 헌법개정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개헌의 범위와 내용을 논의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청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 생각하는 방향이 다 다르다. 개헌론은 따라서 각 정당 간, 정치세력 간 공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런 여야 간 공방 끝에 국회 내 개헌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를 심판하는 위치에 또 설 수 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24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가지 위험한 것은 대통령은 늘 국회에다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특징을 가지신 분”이라며 “대통령께서 ‘봐라, 개헌해달라고 요구해서 내가 (개헌)하라고 했더니 못 하지 않느냐’ 그럴 확률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는 ‘정권 재창출용’ 블랙홀이다. 현재 새누리당 친박계는 반기문 UN사무총장을 염두에 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지지도가 점점 낮아지는 상황에서 친박의 정권 재창출은 불가능하기에, 개헌을 통한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 카드로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시나리오다. 박 대통령이 개헌을 제시해 이런 시나리오에 힘을 실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박 대통령이 개헌을 고리로 여야 정치권의 정쟁을 유발하고 향후 미래권력에도 개입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윤관석 민주당 대변인은 “대통령이 개헌론 주도하려고해서 안 되고, 개헌을 고리로 정치에 개입하려 해서도 안 된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박 대통령의 말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나쁜 대통령은 자기를 위해 개헌하는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