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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과 국회가 다르다고? 여론 파도를 봤나?

광장과 국회가 다르다고? 여론 파도를 봤나?

[기자수첩] 국민 79%가 대통령 퇴진 원하는데… 총리지명권의 덫에 걸린 국회, 새누리당은 색깔론 공세도

“야당이 덫에 빠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방문해 ‘국회가 추천한 총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 이후 야당에서 나온 반응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9일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총리 수용을 ‘덫’이라고 표현했고, 박영선 민주당 의원 역시 8일 TBS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불분명한 총리지명권의 발언으로 인해서 함정이라든가 또 덫이 놓여졌다”고 밝혔다. 

야당이 박 대통령의 총리 추천을 ‘덫’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박 대통령이 국회가 추천한 총리를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최순실 게이트 국면을 총리 국면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야권과 언론에는 바로 손학규, 김종인, 박지원 등 총리 후보자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국면 전환의 또 다른 효과는 박 대통령이 국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박 대통령은 총리의 권한과 2선 후퇴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야당이 요구한 조건들은 남아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한 발 자국 물러서는 모양새가 됐다. 박 대통령은 두 번에 걸친 사과 기자회견, 야권 인사였던 김병준 교수의 총리 지명, 총리 추천권 수용 등을 통해 야권의 요구를 잘게 쪼개 하나씩 받아들이는 모습을 취했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야당의 뭉뚱그려진 여러 가지 요구조건들을 잘게 쪼개서 수용하면 야당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걸로는 부족하다”가 되어버린다. 자연스럽게 ‘한 걸음 양보하는 대통령과 여당 vs 계속 요구하는 야당’의 구도가 그려진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야당을 향해 “최순실 국정개입 파문 개별특검, 거국중립내각 구성, 거국내각 총리의 국회추천권 등 야당이 요구한 모든 것을 다 받았다”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다. 민주당은 ‘사실왜곡’이라고 반박했지만, 사실관계와 별개로 ‘양보하는 대통령‧여당 vs 계속 요구하는 야당’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사실이다. 

대통령의 양보하는 듯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야당 내부의 혼선도 부를 수 있다. 우상호 원내대표가 8일 JTBC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여러 가지 위기관리나 정상회담 정도는 하셔야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다음날인 추미애 대표는 “대통령은 이제 더 이상 외치든 내치든 자격이 없다”고 수습했다. 대통령이 던진 제안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는 야당 입장에서 불필요한 논란이 벌어진 셈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당내에서 더 강경하게 하자는 이야기도 있지만, 하야나 탄핵, 퇴진을 이야기했을 때 돌아올 역풍을 우려하는 의원들도 많다. 저쪽(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바닥까지 떨어져 반등할 기회만 엿보고 있기 때문”이라며 “추미애 대표가 ‘최순실 부역자’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표현에 대해서도 당 대표가 쓰기엔 적절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만큼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이 민주당 관계자의 말처럼 새누리당은 이제 그만 양보하라고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 친박 계 조원진 최고위원은 1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개별 특검도 받고, 총리 추천도 받고, 인사개편도 받았는데 야당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정말 헌정중단사태를 원하는 것인지 솔직한 말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급기야 색깔론까지 다시 꺼내들었다. 문재인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의 2선 후퇴를 하라며 군 통수권도 내려놓으라는 말을 문제 삼은 것이다. 강영환 새누리당 수석대변인은 10일 브리핑에서 “이런 시국에 헌법의 명시로 군통수권을 갖고 있는 대통령에게 이를 내려놓으라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문재인 전대표가 원하는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라며 “군통수권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UN북한인권선언 기권을 왜 했는지 분명히 밝혀라”라고 말했다. 

야당이 탄핵 및 하야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아는 새누리당은 점차 야당을 압박해 오고 있다. 절대 하야하지 않거나 2선 후퇴를 하지 않을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하야 및 탄핵은 못 하면서 조건부 퇴진론을 내거는 야당은 이제 최순실 게이트 정국의 ‘상수’가 됐다.

이 상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변수는 국민 여론 뿐이다. 11월12일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와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벌일 예정이다. 지역에서 서울로의 집회 ‘원정’을 위한 버스 대절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온라인에서는 청와대로 가야한다는 요구와, 어차피 진짜 대통령(?)은 검찰에 있으니 검찰로 가야한다는 갑론을박이 거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사과 기자회견을 했음에도 여론에는 큰 변화가 없다. 리얼미터가 11월7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11.1%로 지난주에 비해 하락했다.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19.9%로 떨어져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민주당에게 밀렸다. 

같은 조사에서 박 대통령을 탄핵하거나 하야해야 한다는 의견이 60.4%였다.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고 여야 합의 국무총리에 국정을 이양해야 한다(18.4%)는 의견을 포함하면 응답자의 78.8%가 박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탄핵 혹은 하야를 요구하는 여론은 42.3%에서 55.3%, 60.4%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 리얼미터 여론조사. 자료=CBS 노컷뉴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정치권은 12일 촛불집회 여론을 살피고 있다. 야3당은 9일 회동에서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하고 집회에 결합하기로 했다. 12일 이후 다시 회동을 갖기로 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저쪽(청와대)에서 강경하게 버티는 한 야당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12일의 여론에 따라 ‘민심이 이렇다’며 퇴진 또는 하야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10일 기자들과 티타임 자리에서 “야당은 12일에 있을 촛불집회 준비를 잘 하시되 비상한 국정 상황에 대한 대비는 또 해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린다”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야당이 장외투쟁 한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이처럼 정치권의 눈은 모두 12일 촛불집회를 향하고 있다. 

또 다른 변수는 언론이다.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세상에 알린 JTBC 뉴스룸은 박근혜 대통령의 총리 추천 제안이 있었던 8일 최순실의 단골 성형외과 원장이 박 대통령 순방에 동행했고, 이 병원의 해외진출이 무산되자 조원동 전 경제수석 등이 경질됐다고 보도했다. 뉴스룸은 또한 9일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의 약과 주사제를 대신 처방해 가는 등 대통령의 건강 문제도 직접 관리했다고 보도했다.
▲ JTBC 뉴스룸 8일자 보도.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SBS ‘그것이 알고싶다’도 오는 19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방송할 예정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4일 공식 트위터 계정을 통해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알고 계시거나 이와 관련된 사람을 알고 계신 분의 연락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뉴스룸’ 아니면 ‘그것이 알고 싶다’가 베일에 쌓여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해 밝힐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7시간을 비롯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추가 보도가 이어질 경우 하야 및 탄핵을 요구하는 여론은 더 높아질 것이다.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는 8일 JTBC와 인터뷰에서 “광장은 광장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또 국회는 국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제도권 정치가 ‘후퇴 하지 않으려는 대통령’과 ‘탄핵은 못 하는 야당’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동안, 광장이 직접 제도권 정치에 개입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