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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이유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었다. 미국 일군의 좌파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비판’에 주력하는 기조가 있는데 어떤 맥락인지 샌델의 글을 보고 이해가 갔다. 샌델은 불평등이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기회의 평등, 계층 상승 등을 운운하는 엘리트들의 말이 하층 계급에게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한가한 소리로 느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근간의 이념으로 ‘능력주의’를 지목한다.

샌델은 능력주의 비판을 통해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기한다. ‘불평등 해소’만 주구장창 이야기한다고 해서 트럼프와 브렉시트로 드러난 - 하층 계급의 우파 포퓰리즘 쏠림 현상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들은 단지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엘리트와 테크노크라시 정치의 오만에 뿔이 났기 때문이다.

하층 계급을 도덕‧문화적 차원에서 계도하면서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는 정치를 타파하고 이들을 사회의 주체로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정치를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불평등 해소를 이야기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진보진영 일각에서 능력주의를 비판하며 능력주의에 찌든 청년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곤 하는데, 샌델은 그런 오만한 태도야말로 우파 포퓰리즘의 태동에 기여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일부는 포퓰리즘적 민족주의의 준동을 단지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맞선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의 반발로 치부한다. 다른 일부는 이를 주로 경제 문제의 일환으로 본다. 글로벌 무역과 신기술이 빚어낸 일자리 감소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적 저항을 편협한 시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이를 다만 경제적 불만의 표출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 데에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문화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

“괴로운 진실은 트럼프가 각종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의 결과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주류 정당들은 그런 불평불만들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럽 민주주의에서도 비슷한 난국을 볼 수 있다.

유럽 주류 정당들은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 고민하기 전, 자신들의 사명과 목적을 되새겨 봐야만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럽 민주주의를 대신해 버린 포퓰리즘적 저항에서 배워야 한다. 그들의 외국인 혐오증과 극단적 민족주의를 복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추한 감정과 얽혀 있는 정당한 불만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그러한 불만이 단순히 경제적인 불만일 뿐 아니라 도덕적,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불만은 단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때, 엘리트의 오만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이런 점에서 굴욕의 정치는 부정의의 정치와 다르다. 그것은 포퓰리즘의 반격에 기름을 붓는 분노와 울분을 언제든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억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분노를 잘 이해했으며 잘 써먹었다. 입만 열면 ‘기회’ 운운하는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과 달리 트럼프는 그 말을 거의 안 썼다. 대신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거친 표현을 퍼부었다.(흥미롭게도 사회민주주의 포퓰리스트인 버니 샌더스 역시 ‘기회’나 ‘사회적 이동성’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와 권력의 불평등만 이야기한다)”

“차별에 반대하고 기회를 확대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대선에서 이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그 당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한껏 심화시키고 있었고 경제는 금융에 지배받고 있었으며 정치는 시민보다 돈의 힘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또한 분노한 민족주의가 밀물처럼 일어나고, 기회 평등을 개선하려는 프로젝트는 당시 유명무실한, 대선 과정에서의 값싼 말잔치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게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가도록 권하는 일은 좋다. 못사는 집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욱 좋다. 그러나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2016년 이후 시사평론가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불만에 대해 논쟁해왔다. 그것은 일자리 감소와 임금 정체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적 변동 때문인가. 그러나 그것들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분배적 정의를 더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에 대해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권자들이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