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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인문, 사회과학

17명의 밀양 할매·할배, 밀양을 ‘직접’ 말하다

17명의 밀양 할매·할배, 밀양을 ‘직접’ 말하다

[서평] 밀양을 살다 /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펴냄

예전에 포탈 검색어에 ‘밀양’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밀양 성폭행 사건’과 관련 키워드들이 연관검색어 창을 가득 채웠다. 이제 포털 검색어창에 ‘밀양’을 검색하면 ‘송전탑’이라는 단어가 연관검색어로 나온다. 밀양 할매·할배들이 10년에 걸쳐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한 결과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밀양 송전탑’ 문제를 알게 됐다.

경상남도 밀양에 76만 5000볼트의 송전탑을 건설할 계획이 처음 수립된 것은 2000년이다. 2003년 송전선이 지나갈 경과지가 확정됐고, 2005년 한국전력공사가 주민 설명회를 처음 열어 송전탑 건설 계획을 알렸다. 2007년 사업 승인을 받은 이래 무려 7년 동안 송전탑 공사는 주민들의 저항에 막혀 중단되거나 한전과 정부에 의해 강행되길 반복했다. 밀양 주민들은 2005년부터 대책위를 꾸려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이 밀양 송전탑 반대를 보도하는 방식은 자극적인 ‘밀양 성폭행 사건’ 보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많은 언론은 왜 주민들이 송전탑을 반대하는지에 대해 심층 보도하기보다 주민들과 한전 직원들, 경찰이 충돌하는 순간만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런 보도를 보면 ‘밀양 송전탑’이 뭔가 이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왜’ 송전탑을 두고 갈등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몇몇 언론은 밀양 주민들이 거세게 저항하는 모습을 ‘외부세력’과 연관시켜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어떤 언론은 밀양 주민들의 투쟁에 ‘지역이기주의’ ‘불법’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을 덧씌웠다. 밀양 주민들은 9년 간 싸우며 언론사의 성향까지 다 파악해버린 것이다. 어떤 농성장 길목에는 ‘출입금지 언론사 목록’이 적혀 있을 정도다.

<밀양을 살다>는 주류 언론과 정부, 한전이 대변해주지 않은 밀양 주민들이 스스로 ‘말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17명의 르포작가와 활동가들이 밀양 주민 17명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8개 마을의 할매·할배들은 자신이 왜 밀양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송전탑에 반대하게 되었는지 상세히 서술한다.

밀양 할매·할배들은 무려 9년 간 송전탑 건설을 고집한 정부와 싸웠다. 주민들과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기보다 ‘765kv 송전탑 건설’이라는 지상명제에서 한발도 물러나지 않으려는 한전과도 싸웠다. 갈등과 충돌 장면 외에는 관심이 없는 언론과 여론의 무관심과도 싸웠다. 



밀양을 살다

저자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출판사
오월의봄 | 2014-04-2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뺏고 짓밟는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요?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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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힘없는 할매·할배들이 거대한 국가권력과 싸운 이 사건에 숭고한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양을 살다> 속 할매·할배들의 꿈은 매우 소박하다. 많은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계속 이 땅에서, 원래 살던 대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 밀양 할매·할배들의 유일한 요구다.

평밭마을의 이사라 할매는 남편이 죽고 밀양 화악산 평밭에서 30년을 살았다. 사라 할매는 “아무 쓸데도 없는 그 나무 이파리가 나를 그렇게 품어주었다”며 “이 산을 아끼는 것 말고 갚을 길이 없다”고 말한다. 사라 할매가 송전탑에 반대하는 이유도 매우 간단하다. “순리를 어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치에 맞게 살아야해. 순리를 어기면 안 돼. 할 줄 모르는 호미로 풀 뽑고 할 줄 모르는 짐승들 기르고 살아왔는데. 보상? 보상을 1억 원 준다 쳐도 우리 농사하는 사람들 못 산다. 살 수가 없어. 사람들 보면 반갑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사랑을 하는데, 그러고 내만 살고 끝나? 2세들도 여기 와서 살게 하고, 손자 손녀가 있잖아. 내 손녀들한테만 물러주나? 이 나라 이 땅에 젊은이들, 후손들한테 썩은 땅을 줄 수가 없구나. 네놈들 오면 내 몸을 고스란히 던지더라도 이 땅은 못 뺏어간다.”

결국 송전탑은 건설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밭마을 김사례 할매는 “싸웠기에 후회가 없다”고 말하고, 위양마을의 권영길, 박순연 부부는 “40일 동안 (공사가) 중단됐지, 그 정도 일 못하게 했으면 우리가 이긴 거 아닙니꺼?”라고 반문한다. 밀양 주민들이 10년 동안 싸우면서 송전탑 문제와 탈핵, 그리고 국가폭력의 문제를 사회 이슈화시켰다. 밀양 할매·할배들이 던진 질문은 이제 우리의 과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