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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글/논문 및 레포트

오리엔탈리즘

2학년 2학기 수업 리포트

 

 


오리엔탈리즘

저자
Edward W. Said 지음
출판사
교보문고 | 2007-03-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
가격비교

 

1.
1-1. 아랍의 식민지화는 19세기 중엽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학문과 동양을 구제하고 해방하는 ‘사업’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중엽의 다양한 동양학술단체들은 동양문명을 발굴하고 지리적으로 조사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과거의 찬란한 동양문명과 지금의 ‘나쁜 동양’(주로 이슬람, 즉 아랍지역)을 대비하고 동양을 과거의 영화로운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유럽에 의한 ‘사업’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지리적 발전으로 급속도로 늘어난 동양에 관한 기행문학들은 실제로 신비로움이 상실된 동양에 관해 알리고 이를 통해 상실된 동양을 회복하기 위한 유럽의 사업들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업들은 유럽이 19세기 말이 되면서 아랍권 전체를(1918년 이후 유럽에 병합되는 오토만 제국령 제외) 식민화하면서 확고하게 진행되었다. 식민화란 상업, 교통, 통신, 종교, 군사, 문화가 포함된 다양한 이해관계가 확고해지는 것으로, 대표적으로 영국은 아랍을 식민지화하면서 기독교의 강대국으로서 옹호해야할 정당한 (종교적, 혹은 종교 차이로 인해 전쟁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이해관계를 느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보장을 위해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만들어졌고 선교단체들은 유럽의 확장과 결합되고 이러한 결합에 무역회사, 학술단체, 지리탐험 기금, 번역 기금, 동양에 건립되는 학교, 영사관, 공장 등이 더해져서 이해관계의 개념이 더욱 폭넓어졌다. 이렇게 확고하고 폭넓어진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유럽은 사업을 확대하였고 이로 인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학문과 동양에 대한 사업이 결합하게 된다.

1-2. 오리엔탈리즘의 역할은 19세기 이후 동양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학문적 기능에서 식민지 동양을 지배하는 통치의 기능으로 변화한다. 이는 아프리카와 동양이 유럽을 위한 지적인 구경거리에서 유럽의 특권적인 ‘무대’로 돌변하는, 유럽에 의한 동양과 아프리카(비서양)의 지배가 시작되는 식민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장기간에 걸친 서양의 완만한 식민지화의 과정 아래에서 유럽의 동양에 관한 인식은 텍스트 의존적이고 관조적인 것에서 행정적, 경제적, 심지어 군사적인 것으로 변모했다. 즉 동양이 관찰의 대상, 연구의 대상에서 실제적으로 통치의 대상으로 변모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단순히 동양에 관해 연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무대’가 되어버린 동양의 효율적인 경영을 위하여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동양을 다스리는 ‘제도’와 결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리즘이 적용되는 공간적 범위는 제국의 영역과 정확하게 일치되었으며 유럽이 동양을 침략하면 할수록 오리엔탈리즘은 더욱더 대중적인 신용(지배자 유럽인들의 신용 뿐 아니라 피지배자 동양인들에게마저 오리엔탈리즘이 내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을 얻었다.

1-3. 1차 대전은 총력전 양상으로 펼쳐진 최초의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했고, 그 동원 자원에는 자신들의 지배 대상이던 식민 국가들의 국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 더 이상 단순히 동양을 이해하고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통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쟁 승리를 위한 자원 동원을 위하여, 이제 동양은 행위의 담당자가 되어야하고 동양의 힘은 ‘우리’의 가치, 문명, 이익, 목적에 동원되어야한다. 즉 식민국가인 동양에게 더 이상 너희가 지배받는 대상이 아니라 서양과 함께 지배의 주체이며, 주체와 행위의 담당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라는 요구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이 인도에게 독립시켜 줄 테니 전쟁에서 영국의 군대로 싸우라고 요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쟁 승리를 위한 총동원으로 인해 동양이 ‘그들(유럽)’의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되자 오리엔탈리즘은 ‘위기’를 맞게 된다. 역사의 주체가 된 동양이 유럽의 지배를 부정하고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 시작되어 제3세계(식민지 국가들) 전체를 뒤덮은 독립운동의 결과로 1955년의 반둥회의(아시아아프리카회의) 무렵에는 이미 동양 전역이 서양의 제국, 유럽 열강들의 지배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획득했다. 하지만 사이드에 의하면 동양은 새로운 제국, 미국과 소련의 포진에 직면했고 이 새로운 제국은 오리엔탈리즘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컸다. 한편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 이후 오리엔탈리즘은 이 독립한 제3세계 앞에서는 더 이상 수동적이고 숙명적인 종속민족, 동양을 인식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으로 무장한 동양과 직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오리엔탈리즘은 현실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동양을 인식하느냐, 아니면 종래의 동양에 관한 재구성 방법을 통하여 새로운 사태를 해석하느냐라는 선택에 직면했다. 제3의 대안적 선택인 오리엔탈리즘의 전면적 폐지는 지극히 소수에 의해서만 고려의 대상이 되었다.

 

2.


청연 (2005)

Blue Swallow 
7.7
감독
윤종찬
출연
장진영, 김주혁, 유민, 나카무라 토오루, 한지민
정보
드라마 | 한국 | 133 분 | 2005-12-29

 

 


화이트 마사이 (2006)

The White Massai 
9.1
감독
헤르민 훈트게르부르스
출연
니나 호스, 재키 이도, 카차 플린트, 안토니오 프레스터, 자넷 리에케
정보
드라마, 로맨스/멜로 | 독일 | 131 분 | 2006-06-15

2-1. 청연에서는 당시 일본인들이 가졌던 오리엔탈리즘이 잘 드러나 있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은 아시아 국가이지만 스스로 자신들을 타자화 하여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조선 식민지배의 도구로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영화 속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 박경원이 조선 적색단 사건에 휘말려 경찰의 조사를 받는 것에 대해 스키하라 외무대신이 말하는 부분이다. 스키하라는 “조국 어쩌구 할 때부터 알아봤지. 그 때 박경원을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올려놓길 잘했어.”라고 말한다. 박경원이 외무성 초청 여류비행사 만찬회에서 장거리비행에 관한 포부를 밝힐 때 한 조국인 조선부터 방문하겠다는 말 때문에 불순사상 의심자로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동양인을 감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이다. 동양은 스스로 통치할 수 없기 때문에 서양이 그들을 해방시키고 보호해주고 대신 다스려 주어야하며 이러한 서양의 지배를 통해 동양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변화할 수 있다. 사이드에 의하면 영국은 식민지 지배 시절 앞에서 언급한 동양 지배 철학으로 무장한 법률, 형법과 일관된 사회 원칙의 확립, 그리고 감독기관의 설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지배대상인 동양에 관한 강한 통제와 감시로 지배를 용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경원이라는 개인이 일본 정부에 의해 감시목록에 오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감시와 통제는 ‘능력을 결여한’ 동양인들이 스스로 통치한다고 나서서 결국 다시 야만으로 회귀하는 비극을 막기 위함이다. 조선을 조국이라 말하고, 조선으로 장거리비행을 한다는 말을 한 박경원을 불순사상 의심자로 규정한 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식민 지배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화이트마사이에는 유럽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이 드러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 유럽인 카롤라의 ‘할례’에 대한 시각이다. 할례의식은 15세 이상의 소녀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마사이족의 전통 풍습이다. 카롤라는 마사이족이 어린 소녀를 할례하려는 모습을 목격하고 리말리안에게 이를 말리라고 말하지만 리말리안은 전통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카롤라는 “이건 말도 안돼”라며 낙담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또한 베르나르도 신부에게 가서 할례를 한다는 데 애를 잡겠다며 말려야한다고 말한다. 베르나르도 신부 역시 할례가 몇 세기가 된 전통이라고 말하자 카롤라는 그래도 누군가를 바로잡아야한다고 말한다.

카롤라의 생각대로라면 마사이족 전통풍습인 할례는 잔인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인간적인 행위이며 이러한 전통은 사라져야한다. 당시 유럽은 이미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가치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할례는 개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였으며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집단, 혹은 전통의 폭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는 “누군가는 바로잡아야하는 것”이며 “누군가”는 바로 백인인 카롤라 자신이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서양, 유럽의 가치를 기준으로 동양(더 크게는 비유럽)의 풍습이나 전통을 유럽에 비해 미개하고 비합리적이며 비정상적인 것들로 규정함으로서 동양을 해방시키고 구제해야할, 근대화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카롤라 역시 자신의 기준대로 할례를 미개하고 끔찍한 전통으로 규정하고 이를 백인이며 전통 마사이족이 아닌 자신이 바로잡아야한다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2-2. 박경원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식민지 일본을 뛰어넘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방식을 택한다. 대표적인 예가 전일본비행선수권대회에 참가하고 결국 우승하는 모습이다. 그녀는 비행대회에서 다치가와 비행학교의 랠리 대표 자리를 기베에게 빼앗기자 엄청나게 괴로워한다. ‘만주, 유럽, 태평양, 세상 끝까지 가는, 세계최고의 여류비행사’가 되는 게 꿈인 그녀가 진짜로 우승할 자신도 있으며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대회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렇게 좋냐는 한지혁의 물음에 “하늘에 올라가면 조선인 일본인 남자 여자 이런 게 없잖아. 그래서 나는 하늘이 좋아.”라고 말한다. 즉 박경원은 식민지 지배국의 국민, 즉 능력을 결여한 조선인에서 벗어나 일본인들마저 뛰어넘는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자신이 직면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차별과 분류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박경원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일본인들이 당시 조선인들을 바라보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전일본비행선수권대회 마지막 랠리 경기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자 수많은 일본인들이 환호하고 함성을 질렀으며, 모든 관심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비행 실력만으로 조선인-일본인의 구분을 뛰어넘은 것이다. 또한 이 비행대회 이후 세계적인 여류 비행사 빅터 브루스의 마중비행 담당자로 선정된 것은 그녀가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비행사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전일본비행선수권대회 마지막 랠리 경기 당시 박경원이 역전을 위해 구름 속에 뛰어들고, 위험을 무릎 쓴 결과 결국 우승하게 되는 모습이 박경원이 추구한 오리엔탈리즘 극복 방식을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구분이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결국 남들보다 더 위험을 무릎 쓴 대가로(더 노력한 대가로) 우승이라는, 일본인들로부터 인정받는 대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한 방식이기도 하다.

화이트마사이에서 오리엔탈리즘 극복을 보여주는 사람은 20년 간 마사이족 마을 바살로이에서 생활한 베르나르도 신부이다. 베르나르도 신부가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는 방식은 ‘이해’가 아니라 ‘방관’에 가깝다. 그는 할례를 말려야한다는 카롤라의 말에 “나는 다른 사람을 돕소, 믿음을 주고 존중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요”, “내가 온지는 20년이지만 할례는 몇 세기가 된거요.”라고 말한다. 또한 이에 카롤라가 누군가는 바로잡아야한다고 주장하자 “원하는 건 확실히 해요. 그것만 하거나 아니면 아예 상관 않거나.”라며 말하며 마사이족과 생활하면서 지켜야할 첫 번째 원칙으로 ‘이곳에 설득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주장한다. 베르나르도에 의하면 그가 마사이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여기 있지도” 못했다. 즉 그는 마사이족, 마사이족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기준대로 동양을 규정하고 재구성하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이해’하고자 한 시도에서 발전된 서구우월주의 점에서 ‘이해’에서 벗어나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베르나르도 신부의 태도는 오리엔탈리즘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2-3. 박경원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대해 조선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박경원은 세계최고의 비행사가 되기 위해 (기베가 강조한 바와 같이) ‘여성으로서는 아시아 최초’로 장거리비행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후원회를 준비한다. 그녀는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오사카나 동경 등지에서 후원회를 개최하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비행기를 탄다고 매국노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다. 박경원은 후원회의 미비한 실적에 “조선인들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라며 상심해한다. 박경원이 생각하기에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을 뛰어넘어 일본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조선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조선인들이 보기에 그러한 노력은 민족독립이나 해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일본 식민지 체제 하의 성공이었으며 매국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카롤라로 하여금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충고를 하지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할례를 전통이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카롤라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베르나르도 신부는 장사를 시작한 카롤라에게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눈을 보면 안돼요. 여기선 그러면 안돼요. 오해할 거요.”라고 충고한다. 즉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롤라는 “쳐다봐야 물건을 팔죠.”라고 말하며 이 충고를 무시하고 계속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고 결국 리말리안의 오해를 사서 갈등을 겪게 된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자 카롤라에게 그들의 문화대로 행동하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이러한 문화를 이해할 수 없는 카롤라는 철저히 그의 이러한 노력을 무시한다.

2-4. 청연의 초, 중반부에서 일본은 어쩌면 기회의 땅으로 보인다. 오리엔탈리즘의 시각대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 짓는 당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자’는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박경원 역시 일본인들을 뛰어넘는 비행사가 됨으로써 세계 최고의 여류비행사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 극복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다. ‘무능력하고 열등한 조선인’에서 벗어나 ‘뛰어나고 우수한 조선인’에게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1904년 러일 전쟁을 통해 major power로 등극한 일본 역시 이러한 전처를 밟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했다.

그러나 청연의 후반부로 갈수록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스키하라 외무대신은 박경원에게 장거리 비행을 허가해주는 대신 만주 일본군 위문비행과 일장기를 달고 비행하는 것 등 황국신민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말한다. 즉 박경원은 더 이상 ‘우수한 조선인’이 아니라 ‘우수한 일본인’이다. 즉 조선인으로서 노력하여 우수한 비행사가 된 것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수한 비행사가 된 것이다. 이는 유럽 열강들의 오리엔탈리즘이 인종우월주의로 발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럽이 동양보다 우월한 이유는 유럽이 그들보다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동양 역시 합리적으로 변화한다면 유럽에 뒤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유럽이 동양보다 우월한 이유가 유럽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면 동양인은 유럽인보다 태어날 때부터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에 결코 유럽을 뛰어넘을 수 없다.

화이트마사이의 초반부에서 백인 카롤라는 마사이족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한다. 그녀는 물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시도하며 리말리안이 가져다 준 염소고기도 먹는 등 마사이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오리엔탈리즘을 가진 카롤라는 마사이족에 대한 이유 모를 끌림으로 인해 마사이족과의 생활을 결심하고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즉 오리엔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 극복이 공존하고 있었다. 스위스로 떠났던 카롤라가 돌아오면서 “여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그녀가 여전히 마사이족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다. 동양을 처음으로 대면했던 유럽인들이 동양의 신비감에 젖어 그들의 문화나 풍습을 문학이나 기행문으로 표현하고, 학술단체를 만들어 동양을 연구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카롤라가 마사이족을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순간 공존관계는 깨지고 오리엔탈리즘이 적극적으로 발현된다. 유럽인들이 동양을 ‘이해’하려고 한 순간 오리엔탈리즘과 오리엔탈리즘 극복 간의 공존관계는 깨지고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우월주의로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카롤라는 남편 리말리안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리말리안을 이해해야만 했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 자본주의 개념이 없는 마사이족을 이해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애인이 있다고 의심하고 이웃이라는 이유로 물건을 퍼주는 리말리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그녀는 오리엔탈리즘을 발현했다. 유럽의 기준에 따르면 눈을 마주치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며,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방식대로(외상이나 퍼주기를 허용하지 않는) 행동해야했다. 베르나르도 신부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했지만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자꾸 자신의 기준대로 그들을 바꾸려고 했고 결국 그녀는 마사이족 마을을 떠나게 된다.

3.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체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인 교환학생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잘 드러나 있다. 친구가 중국인 교환학생이 버디로 되었다는 말에 나는 별로 좋은 생각을 갖지 않았다. 부럽지도 않았을 뿐더러 친구가 교환학생 때문에 힘들거나 시달릴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더러움’, ‘민주주의나 인권의 가치가 자리 잡지 않은 나라’와 같은 중국에 대한 나의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친구의 버디인 중국 교환학생이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 중국 유학생 시위에 나갔을 때도 나는 그를 자기네 민족 밖에 모르고 민주주의 가치를 억압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는 중국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며 중국인을 만나본 적조차 없다. 나는 중국인들을 철저히 텍스트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왜 그들이 티베트 독립을 반대하는 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가치를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다. 반면에 친구가 프랑스인 교환학생의 버디로 선정되자 나는 왠지 모르게 부러웠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나는 인종적인 차원에서도 철저하게 오리엔탈리즘을 체화하고 있었다.

내가 한 학기동안 영화 속의 국제관계 수업을 들으면서 또 사이드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일반화’의 위험성이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광범위한 의미는 각 개인의 특성을 배제한 채 “이 민족은 이렇다. 이 문화는 이렇다.”고 규정하고 그것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나 역시 이러한 행위에 의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나를 비교해왔다. “일본은 칼의 문화이며 우리는 붓의 문화이다.”라는 식의 대부분의 지역 연구가들이 가진 비교는 일본인 개개인, 한국인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한 채 그들을 일본인, 한국인이라는 틀 안에 환원시켜 일반화하고 이는 결국 무엇이 좋고 나쁘냐는 가치 판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식민지 지배가 끝났음에도 오리엔탈리즘이 현존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나와 너’의 비교, 그리고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이 흔히 일반 사람들이 자신과는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수업을 마치면서 “일반화하지 말자. 이는 위험하다.”라는 굳은 결심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