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 /기사

‘깜둥이’ ‘야만족’ “독재라도 상관없다” 누가 한 말일까요

‘깜둥이’ ‘야만족’ “독재라도 상관없다” 누가 한 말일까요

“인권위에 대해 아는 것 없다”던 현병철이 파괴한 인권위 6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 안 다뤄”

“인권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던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오는 8월 임기를 마친다. 임기 내내 이어진 안팎의 사퇴 요구에도 그는 꿋꿋이 살아남았고, 연임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가 임기를 맡았던 6년 간 인권위는 ‘인권 없는 인권위’라는 비아냥을 들으며 죽어갔다. 

그는 어쩌면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선 안 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2009년 그가 임명되자 인권단체들 사이에서는 ‘누구?’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인권 경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인권위원장 이전에 그는 한양대학교 법학과 교수, 학생처장, 행정대학원 원장을 맡았을 뿐 인권 관련 활동 경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권단체들은 반대했다.

현병철 위원장도 스스로 이를 인정했다. 그는 임명 이후인 2009년 7월 16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인권위와 인권현장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며 “모르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현병철 위원장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막말 논란’을 낳았다. 현 위원장은 취임 직후인 2009년 7월 20일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우리나라에 아직도 여성차별이 존재하느냐”고 물어 여성 인권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다. 

사용하는 단어도 남달랐다. 인권위에서 ‘시정 조치’를 내릴만한 단어들을 썼다. 현병철 위원장은 2010년 4월 재한몽골학교에 방문해 몽골 학생들을 앞에 두고 “야만족이 유럽을 200년 간 지배한 건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고, 같은 해 7월 사법연수생들과 한 간담회 자리에서는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깜둥이’도 같이 살고”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정권에 불리한 이슈는 적극 개입해 막았다. 인권위는 2009년 12월 28일 제24차 전원위원회를 열어 용산참사 관련된 의견을 법원에 표명할지 논의했다. 그러자 현 위원장은 담당조사관에게 “어떻게든 상정을 막아야한다”며 다급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 안건에 10명 중 7명이 찬성 의견을 냈으나 현병철 위원장은 “다음에 논의하자”라며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했다. 이에 인권위원들은 항의했고, 이 중 정재근 위원이 “왜 위원장 마음대로 독재, 독단하려고(하나)”라고 묻자 현 위원장은 “독재했다고 해도 좋다”고 응수했다. 

현 위원장은 이 발언을 부인했다. 2012년 연임을 앞둔 청문회에서 송호창 민주통합당 의원이 관련 사실에 대해 묻자 현 위원장은 “회의록에 없을 것”이라며 발언 사실을 부인했다. 현 위원장은 “용산참사는 오히려 제가 지시해서 (의견표명)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후 언론보도를 통해 전원위원회 녹취파일이 공개되면서 현 위원장이 ‘독재했다고 해도 좋다’고 실제 발언한 것이 드러났다.

같은 해 열린 제22차 전원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회의에 <MBC PD수첩> 관련 안건이 올라왔다.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보도가 존중돼야 한다는 내용. 인권위원 5명이 찬성, 4명이 반대했다. 현 위원장 손에 안건의 채택 여부가 달린 상황이었다. 현 위원장은 “이 안건은 부결된 것으로 하겠다”며 부결 처리해버렸다. 

올해 3월 1일 인권위가 유엔 자유권규약 제4차 국가보고서 심의를 위해 작성한 보고서에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는 죄다 빠져 있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의 주요 인권 쟁점 65개를 작성해 초안으로 올렸으나 인권위원들의 회람 등을 거치며 세월호 참사와 통합진보당 해산, 기업 강제노동, 경찰 채증 등 민감한 이슈들은 빠졌다. 

정권 보호에 힘쓰는 모습은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예견된 일이었다. 현 위원장은 취임 직후 대정부질문에서 “인권위는 행정부 소속”이라며 인권위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했다.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인 2010년 9월 인권위 인권정책과장직을 사퇴한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은 26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당시 현병철 위원장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 만한 인권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생활밀착형 인권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했다”며 “기가 막혔다.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지 않는 인권문제가 어디 있나”라고 말했다. 

   
▲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상담·진정·민원 부분에 '북한인권침해'가 눈에 띤다.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인권위가 가장 주력한 분야가 북한인권 분야다.
 

이처럼 인권위는 지난 6년간 인권의 최후 보루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인권위는 용산참사와 세월호 집회 등 경찰의 과잉진압, PD수첩 사태와 야간집회 금지 위헌성 등 표현의 자유 이슈, 일제고사, 진주의료원 폐쇄, 밀양송전탑, 한진중공업 고공농성 등 사회적 논란이 된 각종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인권위가 이라크 파병 철회, 국가보안법과 사형제 폐지 권고,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대체복무 입법 권고 등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비판적 협력’ 관계에 가까웠던 인권·시민단체들과 인권위의 관계는 현병철 위원장 들어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인권단체들은 인권위 앞에서 현 위원장을 규탄하는 성명과 기자회견을 벌였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시민사회가 인권위를 신뢰할 수 없으니 인권위의 정책개발이나 간담회에 참여하는 등 협력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협력해봤자 제대로 반영될 리 없고 시민사회도 협의·지지했다는 알리바이로 이용될 가능성만 크다”고 설명했다. 

2010년 12월 장애인단체들의 인권위 점거는 참혹한 인권위의 현실을 보여줬다. 2010년 12월 2일 밤 장애인활동지원공동투쟁단과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장애인단체 활동가 160여명은 국가인권위가 있는 건물을 점거했다. 이들은 인권위가 장애인 차별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하며 인권위 임무를 방기한 현병철 위원장의 퇴진을 촉구했다.

인권위는 장애인단체들의 점거농성에 엘리베이터 운행 및 난방·전기 중단으로 대응했다. 장애인단체들에 따르면 12월 2일부터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됐는데, 휠체어에 의지하는 장애인들은 엘리베이터 없이 이동할 수 없으니 사실상 갇히게 된 셈이다. 3일 밤부터는 전기와 난방이 끊겼다.

전기와 난방을 끊은 것이 활동가 한 명의 사망으로 이어졌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당시 현장에는 1급 장애인활동가 우동민씨도 있었는데, 우씨가 난방이 되지 않는 차가운 바닥에서 밤을 새우다 감기에 걸렸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다. 그러나 우씨는 급성 폐렴으로 악화돼 12월 말 다시 병원으로 이송됐고 2011년 1월 2일 숨졌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중증장애인들이 권리의 문제를 두고 항의했는데 인권위가 경찰보다도 못한 짓을 해서 한 활동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며 “인권위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현 위원장은 청문회에서 인권위가 난방과 전기를 중단하지 않았다며 그 근거로 임대건물이기에 건물주가 난방 및 전기를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청문회 과정에서 각 층 별로 전기와 난방이 통제가능하다는 점과 인권위의 점거농성 매뉴얼에 ‘편의 제공과 식수 제한, 컴퓨터·인터넷·열기·전화기 제한 등이 적혀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인권의 보루라는 인권위에서는 1인시위도 하면 안 된다. 인권위는 2011년 초 계약직이던 강인영 조사관과 계약 연장을 거부했다. 강씨는 노조 간부였기에 계약이 연장되지 못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인권위에서 벌어진 일로 인권위에 진정한 웃지 못할 상황.

직원 13명도 항의의 뜻으로 1인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담당했던 김모 조사관 등 2명이 사퇴했다. 인권위는 11명의 직원들을 상대로 감사를 벌인 뒤 징계위원회에 징계를 요청했고 4명이 정직, 7명이 감봉 조치를 당했다. 국가인권위는 1인 시위를 ‘표현의 자유’의 한 형태라며 보호받아야 한다는 권고를 여러 차례 내려왔는데, 정작 내부에서 1인 시위가 벌어지자 징계를 내린 것이다. 

인권위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징후는 내·외부에서 계속 나타났다. 2010년 11월 1일 유남영, 문경란 두 명의 상임위원이 사퇴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추천한 문경란 위원마저 “인권위가 파행과 왜곡의 길을 거쳐 고사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전문, 자문, 상담위원 60여명이 줄사퇴했다.

2010년 인권위가 주최한 청소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김은총씨는 “현병철 위원장의 인권위는 상을 줄 자격이 없다”고 수상을 거부했다. 지난 5월 7일 현병철 위원장이 모교인 원광대에서 특강을 했으나 원광대 학생들은 “선배가 부끄럽다”며 특강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벌였다.

인권위의 국제적 지위는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계속 하락했다. 지난해 8월과 11월에 이어 올해 3월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의 등급 심사에서 연속 세 차례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2007년 국제조정위원회 부의장국 지위에 오르고, 유력한 ‘의장국’ 후보로 거론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참 추락한 셈이다.

현병철 위원장은 이러한 책임을 시민단체들에게 돌렸다. 두 차례 등급보류를 받은 이후 올해 1월 열린 인권위 전원위원회에서 현 위원장은 “우리나라 NGO는 국론 분열이 될 정도로 이의제기를 한다”고 말했다. 인권·시민단체들이 국제조정위원회에 등급을 낮춰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을 겨냥해 한 말이다. 

현병철 위원장은 오는 8월 12일 임기를 마친다. 현 위원장이 물러나면 인권위 상황은 개선될 수 있을까. 지난 5월 11일 인권위 전원위원회에 ‘정부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대해 인권위가 의견을 표명하자는 내용의 안건이 올라왔다. 그러나 몇몇 인권위원들은 “노동이 인권위와 무슨 관계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현병철 위원장이 “인권위가 전문성이 없어 논의를 못한다면 인권위는 아무것도 못한다. 노동의 역사가 인권위의 역사”라고 응수했다. 인권위의 추락을 이끈 현병철 위원장이 한순간에 ‘인권 옹호론자’가 됐다. 

또한 현 위원장이 최근 세월호 집회에 대한 경찰력 남용 관련 성명을 발표하려다 다른 인권위원들의 반대로 무산된 일도 있었다. 현병철 위원장이 물러나도 인권위의 미래가 밝지 않은 이유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은 “6년을 거치면서 인권위가 존재감 없는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위원장과 인권위원 모두의 책임이다. 인권위는 재생불가의 상황에 이르렀다”며 “사회가 정상화된다면 인권위를 근본부터 다시 세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